121. 이룬 것과 잃은 것. (1)
모바일 사업부 사장 김정학은 차후 연계되는 중요한 프로젝트인 만큼 그룹 총회장인 이재홍에게 직접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사흘 만에 검토가 끝이 났는지 호출을 받았다.
“제안 서류를 검토했는데, 동남아시아로의 신성 페이 확장은 괜찮긴 합니다. 한데, 합작회사의 지분을 더 변경하는 것은 어렵겠습니까?”
“우리 측에서 더 지분을 요구하게 되면 일방적으로 신성전자에게 끌려가게 된다고 스타 코퍼레이션이나 은행들이 강하게 거부를 했습니다.”
“재협상의 여지는 아예 없는 겁니까?”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흠...”
이재홍 회장은 김정학 사장의 직접 보고인 만큼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보았고, 처음에는 중국계 화교 자본과의 협업이라는 말에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해 보자, 신성에게는 이득이 되는 내용만이 있었기에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서류를 검토한 전략실이나 법무팀에서도 지역제한 조건이 그대로 수용된다면 손해 없이 이득만이 있다고 보고를 올렸다.
잡은 고기인 한국 국내 시장은 그대로 놔두고 동남아 시장에 낚싯대를 공짜로 드리울 수 있는 것이니 이재홍 회장도 추진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분 비율이 화교 은행 측이 33%, 신성이 30%, 스타 코퍼레이션이 30%를 가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합종연횡(合縱連橫)하게 된다면 언제든 두 곳이 한 곳을 쳐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힘의 균형을 잡아 주도권을 가지는 게 스타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였으니 만족스럽지 않았다.
“한국과 인도에 대한 지역 제한 지분조건은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립시다. 아직 뚜렷한 성과가 없지만, 일본까지 지분 제한을 넣도록 합시다.”
“네. 그럼, 아예 일본과 호주까지 제안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주도 그렇게 넣으면 좋지요. 그리고, 오픈 투자 지분인 7%를 증권사를 통해 가져오도록 작업을 쳐두세요.”
“그렇다면 차후 기업공개 후 액면분할까지도 준비를 해둬야 하겠습니까?”
“뭐, 그쪽의 포부처럼 중국의 알리나 위챗을 막아내고 동남아 전자결제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기업공개를 하게 될 겁니다. 그때 최대한 지분을 챙기도록 하죠.”
이재홍은 나름의 복안을 두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전자결제 시장을 신성페이가 어느 정도 장악하게 된다면 금산법 관련으로 법이 느슨한 동남아시아에 신성의 은행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동남아 화교 재벌들은 대부분 금융사를 소유하여 그 부를 관리하고 불리고 있었으니, 신성페이란 기반이 생긴다면 그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페이의 이름은 ‘신성스타페이’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스타라는 말이 뭔가 특징적인 회사를 연상하는 것이 아니니 이름은 그렇게 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럼, 매월 진행 상황을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김정학 사장은 신성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하여 계약에 대해 분석했고, 동남아시아의 인맥을 동원해 그랩과 4대 은행의 행보에 대해서 확인을 했다.
그런 확인 작업이 끝이 나자 임건호를 불러들였다.
***
“정식 명칭은 ‘신성스타페이’라고 하고, 국내 시장은 우리 신성이 맡는 것으로 하지. 물론, 스타 코퍼레이션의 계열사에서 쓰이는 페이의 수수료는 면제를 해주도록 하지.”
마치 선심 쓰듯이 사용 수수료를 면제해 주겠다는 김정학 사장의 말을 들으니 회장 이재홍의 재가(裁可)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회장이 허락했으니 최대한 이익을 뜯어내는 대기업식 계약을 하려 한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그들에게는 약점이었다.
이미 회장 이재홍의 재가가 떨어졌으니 어떻게든 이 일은 진행이 될 터였다.
그런데, 핸들을 잡고 있는 내가 역주행을 해버려서 계약을 파토 내 버린다면?
회장에게 재가받은 사업이 켄슬 된다면 담당자들의 인사고과는 물론이고 책임권자인 김정학 사장도 체면에 상처를 입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계약을 그대로 진행하기 위해 신성이 먼저 계약 조건을 올려주게 될 터였다.
물론, 그 수위 조절을 눈치껏 잘해야 했지만, 천하의 신성에게 대놓고 개길 수 있는 턴(turn)이 내게 왔다는 것은 맞았다.
“신성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아예 모르는 겁니까? 국내사용 페이 수수료를 배분받지 못한다면 동남아에서도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 화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동남아에서 일어나는 거래 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수수료를 신성에게 배분하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이제까지 한 적 없던 공격적인 어법으로 김정학 사장에게 대들었다.
“이미 계약에 지분 지역 제한까지 들어가 있는데, 수수료 배분도 없다면 그쪽도 마찬가지로 하자고 할 겁니다. 아무리 신성이 갑 중 갑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일방적입니다. 이대로는 계약 파토 납니다.”
“임 대표의 말도 맞지만, 환율과 각국의 사정을 봐야지. 한국에서 결제되는 결제 금액의 1%만 해도 아마 동남아시아 전체 수수료보다 더 많을 수도 있어.”
환율과 물가가 다르다 보니 김정학 사장의 말처럼 한국에서 발생하는 수수료 수익이 동남아시아 전체보다 많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예 수익 배분이 배제된 계약이라면 회사로 묶을 이유 자체가 없었다.
공동의 이익을 보고 함께 해야 제대로 된 의미가 있는 사업인 것이었다.
“그 수수료를 단순한 수익 배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시장 개척을 위한 투자로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남아시아 인구 4억 명 이상의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니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갑자기 없던 일본과 호주까지 지분 제한 조건으로 넣으셨지 않습니까?”
신성이 지금 제안하는 것은 신성스타페이를 앞세워 한국, 인도, 일본, 호주에 화교은행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신성이라도 이건 못 받아들입니다. 수수료 배분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약이 깨질 겁니다.”
회장이 재가한 계약이 깨질 수 있다는 마지막 구라를 치자 그제야 옆에 앉아 있던 실무진들이 슬슬 다음 계약 건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플래 B를 넘어 플랜 F까지도 있을지 몰랐다.
결국, 환율과 각 국가의 물가를 고려하여 각 국가별로 신성스타페이의 수수료를 정하기로 했고, 변동 사항에 따른 재설정은 2년마다 하기로 결정했다.
즉, 사용되는 국가의 환율과 물가에 따라 수수료를 나눠 가지기로 한 것이었다.
“서로의 제안은 이것으로 결정이 났으니 이제 삼자가 모여 최종 합의를 하고 언론에 발표를 해야 합니다. 김정학 사장님도 같이 말레이시아로 가시는 것이 조율문제를 바로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그쪽에 본사를 두어야 하니 지사 인력이나 파견 인력 관련된 것도 빨리 정리해야 하겠어.”
최종 계약 조율과 발표를 위해 신성은 신경을 썼지만, 사실, 나와 신성이 합의한 조건이 거의 결론과 마찬가지였다.
이는 신성과 화교은행들이 ‘Pay’라는 전자결제를 보고 있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신성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준비한 신성 페이의 확장성에 염두를 둔 전략과 대응조건을 내밀고 있었고, 화교은행들은 그런 확장성을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화교 은행들을 모으고 페이를 만들자고 했던 목적은 중국 본토의 자본이 동남아시아로 내려오는 것을 막아낼 전자결제 연합체를 만들자는 목적이었다.
그렇기에 신성페이가 요구하는 확장성은 화교들에게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본토에서 내려오는 중국 자본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화교은행들은 만족할 터였다.
서로의 목적이 다르지만,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니 그 안의 세부 계약이나 수수료 건은 큰 문제 없이 합의될 터였다.
최종 계약 조건에서 스타 코퍼레이션이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
“오늘 비행 특이사항 있습니다. 신성전자 사장단과 임직원들 14명이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에 탑승하게 됩니다. 트레이와 식음료 여유 있게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승무원분들은 확인 바랍니다.”
비행 출발 전 브리핑을 들은 사무장과 스튜어디스들은 신성전자의 사장단이 탄다는 말에 피곤하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서비스에 실수가 없도록 VVIP급인 대기업 회장이나 사장들의 얼굴 사진도 비행 전 회의에서 공유가 되었다.
“선배님.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사장들 얼굴까지 외워야 하는 거예요?”
“외워야 돼. 사장이 아니라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전무에게 더 신경 써주면 안 되거든. 그 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해야 해.”
“흠. 하긴 그렇겠네요.”
“그리고, 대부분의 대기업 임직원들은 점잖았지만, 뭔가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그 실수를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이라서 최대한 조심해.”
“네.”
그렇게 선행탑승하는 VIP들을 기다리는데, 사진으로 봤던 김정학 사장이 게이트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엇? 서...선배님. 저기 저 사람 전에 그 사람 맞죠? 연락처 줬던...”
후배 스튜어디스는 눈에 익은 사람이 있자 선배인 이나린을 쳐다봤다.
“그, 그래 맞어.”
이나린도 놀라고 있었다.
단순히 성공한 사업가로만 알고 있었던 임건호가 신성전자의 김정학 사장 다음으로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또 같은 비행기네요. 이쪽이죠?”
“아, 네네 맞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임건호의 인사말에 정신 차린 이나린이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의 안내를 했다.
사무장이 나왔고, 기장까지 조종석에서 나와서 탑승을 환영해 주었다.
“와! 선배. 저분 젊어 보이던데, 신성전자 사장단이었어요? 와 대박!”
식음료 준비실로 들어서니 후배가 대박이라며 소릴 죽여가며 이야길 했다.
“서버하면서 들어보니 신성전자는 아닌 것 같던데, 거래처 같아.”
“그래요? 그래도 두 번째로 타는 거 보니깐 신성전자 사장들이랑 비슷한 급 아니에요? 그때 연락 늦게라도 왔었다고 했죠? 와 대박! 선배 잘해봐요!”
“이혼남이었어. 그거 듣곤 연락 안 했어.”
“아아, 그럼 아마도 일하느라 바빠서 이혼한 거겠죠? 흠. 애매하다.”
이혼남이라는 소리에 후배는 이나린에게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
“임 대표. 탑승할 때 보니깐 스튜어디스랑 아는 사이 같던데, 동남아로 자주 다니면서 눈 맞은 거야? 스튜어디스가 어떻게 보면 마누라 감으로 최고라니까. 몸매도 좋고, 서비스 정신도 좋잖아.”
“직업이니깐 서비스 해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로 버릇 든 거는 안 변한다니깐. 그리고, 일 때문에 알아서 비행 간다고 일주일씩 집에 안 들어오잖아. 자동 주말부부가 되는데 얼마나 좋아. 일주일씩 떨어져 있고 해야 더 애틋하고 그런 거야. 그러고 보니 임 대표 결혼은 했어?”
“네. 결혼은 했는데, 이혼했습니다.”
“오! 더 좋은 걸 했네.”
“하하하. 더 좋은 겁니까? 그게?”
“그럼. 더 좋은 거지. 책임감 없이 놀기 좋은 게 돌싱이야. 개차반으로 놀아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 내 친구가 말이야 이혼을 했는데 말이지...”
말레이시아로 가는 비행시간 동안 김정학 사장에게 이혼남의 장점에 대해 강제로 들어야 했는데, 막상 본인은 애 때문에 이혼을 못 하고 산다고 했다.
“내가 진짜 우리 막둥이만 아니었으면 진짜 이혼하고 자유인으로 살았다.”
4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김정학 사장은 의외로 떠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