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정부 사업화.
“아, 안녕하세요. 전에 김승재 씨에게 듣기로는 퇴사하셨다고 하던데.”
“네. 맞습니다. 어쩌다 보니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책상 청소하시는 건가요?”
김선희는 서류 상자에 책들을 넣고 있었는데, 허리를 굽혀가며 움직이는 그런 모습이 뭔가 색다르게 다가왔다.
“아, 그게, 순환근무로 인해서 이번에 부산진구청으로 가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짐 정리하고 있어요.”
“이런, 일 때문에 해운대 구청 자주 오게 될 것 같은데, 김선희 주사님이 안 계시면 어쩝니까. 큰일이네.”
“호호호. 더 좋으신 분이 올 거예요. 그런데, 라면 때문에 오신 거면 승재 씨 후임으로 오신 분하고 겹치는 거 아닌가요?”
“아, 라면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지역경제과에 따로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지역경제과요? 저도 부산진구청 지역경제과로 가요.”
“어, 그러면 진구청에서 자주 뵐 수도 있겠네요. 해운대 일이 끝나면 바로 진 구청으로 가겠습니다. 하하하.”
이왕이면 다홍치마고, 일을 해야 한다면 보기 좋은 예쁜 이성과 같이 일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여기 지역경제과도 순환근무로 몇 명이 바뀔 거예요. 추진하시는 일이 힘드실 수도 있으실 거예요.”
“아, 그렇겠네요. 일단 지역경제과로 가보겠습니다. 그럼, 진 구청에서 뵙겠습니다.”
5층 지역경제과로 오니 여기도 과장 포함해서 3명이 순환근무제로 바뀐다고 했다.
내 업무를 볼 수가 없었다.
새로운 담당자가 오고 업무 관련으로 인수·인계받고 하다 보면 한두 달은 훌쩍 지나갈 것이고, 새로운 일을 제안하더라도 그 진행은 더딜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인허가 결정권자인 공무원이 한 자리에 오래 있게 되면 자연스레 부정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을 방지하고자 다른 지역이나 다른 보직으로 순환 근무시키겠다는 것은 꽤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2~3년마다 담당자가 바뀌고 제대로 된 인수인계가 되지 않으면 자연스레 전문성이 떨어져 업무는 딜레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2~3년 후 어느 정도 일에 전문가가 되면 다시 또 다른 보직으로 가야 하는 것이라 공무원들은 일을 열심히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고, 맡은 업무에 대한 전문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업무의 공백이 생긴다는 것이 순환근무제가 가진 문제였다.
결국 나흘 후 다시 지역경제과에 들렀는데, 새로운 과장이 앉아 있었다.
“실례합니다.”
“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해운대구 내 요식업체의 IT 산업화 지원 사업을 위해 왔습니다.”
“네? 해운대구에 그런 사업이 있습니까?”
새로 발령받아 온 과장 김길원은 이게 무슨 사업인지 알아본다고 서류를 뒤적거렸다.
“아, 그런 사업을 저희가 지원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저희가 포스기 관련 업체인데, 포스기 1,000대를 해운대 구청에 기부채납(寄附採納)하고 싶습니다.”
“기부채납을요?”
김길원 과장은 도로교통 관련 부서에서 왔는데, 기부채납을 하겠다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 포스기면, 식당에서 계산할 때 쓰는 기계 아닙니까? 돈통 달린 거요.”
“네. 맞습니다. 저희 스타 코퍼레이션은 종합적인 관리가 되지 않는 지역 자영업자들의 IT 산업화를 위해 포스기를 1,000대 기부하고 싶습니다.”
“잠시만요. 포스기도 그렇게 기부가 되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저는 부동산이나 지어진 구조물 같은 것만 된다고 알고 있거든요.”
김길원이 법령을 이리저리 살폈다.
“거깁니다. 제4조 공유재산범위 3항에 보시면 ‘공영사업 또는 공영시설에 사용하는 중요한 기계와 기구.’ 라고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데, 포스기는 공영사업에 쓰이는 기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공영사업을 하실 수 있게 제가 제안하러 온 것입니다.”
김길원은 바로 인상을 썼다.
결국, 순수한 의도의 기부채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중국집, 치킨집 사장님들을 보시면 매달 8~15만 원이나 내면서 포스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담을 구청에서 줄여줄 수 있는 사업을 입안하시면 저희 스타 코퍼레이션이 기부채납으로 10억 원 상당의 포스기 1,000대를 기부하겠습니다. 물론, 저희 포스기는 월정액이 없습니다.”
“월정액 말고 다른 수익을 내려는 거 아닙니까?”
“저희는 카드 VAN 사로 실질 거래에 따른 카드 수수료가 저희 수익입니다. 기존 포스기 업체들은 카드 VAN 사 수수료에 월 임대료까지 받았으나, 저희는 카드 수수료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상세한 설명이 들어간 지원 사업 제안서입니다.”
김길원 과장은 제안서를 받아서 천천히 읽어 봤다.
확실히 다른 포스기 업체에 비해 월정액이 없다는 게 장점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좋다고 해도 무조건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사업 초기에는 월정액이 없다가 어느 순간 월정액을 받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에 구청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라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김길원 과장은 10년이 넘는 공직생활 중에 가지게 된 고정 관념이 하나 있었다.
민원인이든 누구든 다들 정부의 돈을 뜯어먹으려고 하지 정부와 나라를 위해 순수하게 뭘 해주려는 사람은 없다는 고정 관념이었다.
그래서 기부채납을 하겠다고 온 이 임건호라는 사람도 왠지 사기꾼처럼 보였다.
“그럼 일단 제가 확인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이건 퀵 서비스 명함입니다.”
“포스기 업체가 퀵 서비스도 함께 하는 겁니까?”
“네. 포스기와 퀵 서비스가 뭔가 연관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게 해운대구에서 추진하는 정보화 도시 ‘ICT시티’의 기반이 되는 사업이라고 확신합니다.”
김길원 과장은 오늘 구청장이 주체하는 회의에서 ‘ICT시티’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게 뭔가 싶어서 검색해서 찾아봤다.
ICT는 정보통신기술의 약자로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사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ICT를 명확하게 설명해 놓은 게 없었다.
다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밖에 없었다.
구청장은 부산 경남에서 가장 많은 IT업체가 해운대구에 있다고, 해운대구도 ICT CITY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하면 ICT 시티가 되는지 김길원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국장이나 과장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냥 다들 ICT, ICT라 하니 좋은 거라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부채납을 하겠다고 온 사람이 ICT 시티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사업이라고 하니 사기 같더라도 왠지 한 번은 들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이 포스기 기부채납이 해운대구의 ICT 시티로 가는 기반사업일 수 있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이야길 들어보겠다는 소리에 건호는 해운대구에 사는 사람들이 핸드폰 어플로 음식을 주문하기만 하면 바로 음식점에서 그 정보를 확인해서 음식을 보내주는 시스템을 설명했다.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우리는 IT 기술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핸드폰으로 음식과 생필품, 서류 전달 같은 것을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아날로그로 다 있는 서비스 기술을 디지털화 하겠다는 거네요.”
“네. 맞습니다. 그게 해운대구에서 추진하는 ICT 시티의 시작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럴듯했다. 분명 아날로그의 전화 방식이 핸드폰 어플이란 디지털로 변화가 된 것이었다.
더구나, 업체에서 1,000대의 포스기를 기부채납하는 것이라 구청에서 부담해야 하는 비용도 없었다.
말 그대로 해운대 구청은 기부하는 물건을 받아서 필요한 자영업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나눠주면서 생색을 부릴 수 있었고, 자영업자의 지원 사업이니 구청장도 물론 좋아할 터였다.
“임건호 대표님 궁금한 게 있는데, 카드 VAN 사의 수수료가 그렇게 돈이 되는 겁니까? 100만 원짜리 1,000대면 10억의 금액인데요.”
포스기 가격을 대당 100만 원으로 후려쳐서 상징적인 금액인 10억으로 만든 것이 김길원 과장에게 제대로 어필한 것 같았다.
“과장님. 사실 제가 해운대에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해운대 라면이라고 아십니까?”
“그럼요. 잘 압니다. 사상구에서 해운대구로 오면서 기념으로 해운대 라면도 사서 먹었는걸요.”
“그 해운대 라면이 제 작품입니다.”
“네?”
건호는 미리 준비되어 있는 자랑 서류철을 꺼내어 김길원 과장에게 보여주었다.
신문에서 스크랩한 파일들이었는데, 매제와 내가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고, 라면이 히트한 이후 사진과 인터뷰 기사까지 보여주었다.
“이야 대단하시네요. 산청 한방 라면에 인천 짜장에 다 알고 있습니다. 지자체에서 추진했던 사업들 중에서 실패하지 않고 들인 금액에 비해 지역 인지도를 올린 성공사업사례로 교육에서 나올 정도입니다.”
“네. 그래서 해운대에서 돈을 벌었기에 해운대 구의 자영업자들에게 포스기를 보급하고 싶은 것입니다.”
김길원은 자신이 지역경제과로 오자마자 사업을 제안한다고 온 이가 사기꾼이 아니라 진짜 사업가라는 사실에 임건호란 사람에게 호감이 생겼다.
“좋네요. 지역에서 돈을 벌고 성공을 했으니. 지역에 다시 도움을 준다니. 저는 좋게 보입니다. 이 인터뷰 서류철도 두고 가시면 이 ‘요식업체 IT산업화’ 사업을 위에 분에게 설명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럼 이틀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점심 전에 오겠습니다. 같이 식사라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해운대라서 해운대 라면 끓여 주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계란에 김밥까지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금요일 날 뵙겠습니다.”
***
금요일 11시에 해운대 구청을 찾아가니 김길원 과장의 얼굴만 봐도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김길원 과장과 2명의 공무원을 데리고 해운대 거대 갈비 룸에 들어앉으니 바로 이야기를 쏟아 냈다.
“어제 구청장님께 보고를 드렸는데, 구청장님이 이 사업 제안을 보고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어제 바로 전화를 드리려고 하다 오늘 그냥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구청장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입니다.”
“다만, 걱정하는 부분도 계신 데, 이미 포스기를 2년 혹은 3년으로 장기 계약한 가게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냐고 하시더군요. 이 스타 코퍼레이션의 포스기가 없으니 어플이나 그런 부분을 사용 못 하게 되는지 확인을 꼭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거래하고 있는 포스기 업체에 양해를 구해서 어플을 이용할 수 있게 저희 IT 직원들이 지원을 하겠습니다.”
“대표님과 직접 이야길 하니 시원시원하게 진행이 되네요. ICT 시티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영업자의 IT 산업화가 금방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김길원과 다 같이 웃으며 고기를 먹었는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는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사실, 포스기 1,000대를 기부채납 한다고 해도 1,000대가 한 번에 다 깔리는 게 아니었다.
물론, 해운대 구청에 쌓아둘 수도 없었다.
구청장이 걱정했던 것처럼 이미 계약에 묶여있는 업체가 대다수이기 때문이었다.
신규 포스기는 천천히 깔리게 될 터였다.
하지만, 사업이 진행되기만 하면 우리 영업 사원들은 해운대 구청이라는 완장을 차게 되는 것이었다.
그 완장으로 ICT시티의 IT 산업화를 위해 다른 포스기 업체에도 어플을 당당하게 설치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영업맨이 방문하기 일주일 전에 IT화를 위해 구청 직원이 방문한다고만 해도 상인들은 포스기에 뭘 설치하고 하는 것을 그냥 지켜볼 터였다.
그렇게 설치한 어플로 주문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며 영업맨이 교육해주고, 한다면 해운대구 한정으로 가맹점을 쉽게 모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관공서를 공략해서 가장 번화한 해운대구와 부산 진구, 대학교가 밀집해 있는 남구만 잡으면 나머지 구역은 알아서 깔리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