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대장금의 한방!
갑갑한 옷이라는 말과 광장시장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만으로 정은채 실장은 한복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네. 한방 라면이다 보니 행사장에서 입을 옷을 한복으로 하려고요. 그래서 배우 프로필 들고 오라고 한 겁니다.”
“보름 정도이면 한복을 대여하는 게 더 저렴하지 않나요? 한복을 맞추게 되면 의외로 비쌉니다.”
“그게, 일반 한복이 아니라 대장금에서 궁녀들이 입는 그 청색 한복 있잖습니까? 그건 대여 해주는 곳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대충 계산해보니 보름 동안 대여 할 돈이면 그냥 맞추는 게 더 이득일 것 같았구요.”
광장시장에 줄지어 있는 한복 맞춤 집들 중에서 가장 커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대장금에 나오는 한복을 맞추려고 왔습니다. 집안 경조사 있는 게 아니라 행사장에서 입는 거라 원단이 고급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장금요? 그럼, 여기 사진집 보시고 정해 주세요.”
한복집에서는 대장금 한복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드라마 장면들을 사진으로 뽑아서 번호를 매겨두고 있었다.
무수리들이 입는 파란색 치마에 흰색 저고리와 수라간에서 입는 앞치마가 달린 한복까지 진짜 대장금에서 나온 모든 한복이 다 있었다.
“대장금이 확실히 히트하긴 했네요. 이 짙은 파랑 치마에 옥색 저고리 이걸로 하죠. 그리고 이 앞치마 같은 건 따로 구매도 되는 거죠?”
“네. 됩니다. 그런데 입을 분은 안 오셨나요?”
“맞춤옷에 필요한 신체 사이즈는 가지고 왔습니다.”
정은채 실장이 최지인과 김은혜 두 사람의 프로필 파일을 꺼내어 직원에게 주었는데, 양장을 입을 때 쓰는 사이즈라 정은채 실장과 일일이 확인을 하며 프로필을 체크했다.
“한 벌에 50만 원씩 100만 원입니다.”
행사용으로 입는 한복이라 그런지 의외로 싸게 만든 것 같았다.
그래서 갈아입을 수 있게 한 벌씩 더 만들게 했고, 같이 산청에 와 있을 정은채 실장에게도 한 벌 맞추게 했다.
“정 실장님은 상궁마마가 입는 옷으로 하나 하시지요. 그런데, 대장금에 나오는 이런 머리 장식도 다 여기서 구매할 수 있습니까?”
“네. 가채나 의관, 갓까지 다 해드립니다.”
“좋네요. 그럼. 가채와 의녀 머리에 올리는 이 의관 장식도 다 주십시오.”
“그쪽 남자분도 한 벌 하시죠. 남자 한복은 저쪽에 기성복처럼 나온 게 많습니다.”
점원 말에 기성복처럼 나와 있는 두루마기랑 살펴보니 꽤 괜찮아 보여 하나 입어봤다.
“드라마에 지진환씨가 입었던 군청색 한복이 잘 어울리시네요. 갓도 한번 써보실래요?”
“갓을 쓰려면 상투를 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옛날에는 그랬죠. 요즘은 그냥 상투 없이 이렇게 써도 되는 걸로 머리 부분이 넓게 나온답니다. 아니면 상투처럼 보이는 머리띠도 있습니다.”
이마로 해서 머릴 모아주는 상투 머리띠를 하고 갓을 쓰니, 대충 상투를 튼 것 처럼도 보였다.
“요즘 잘나오네요.”
군청색의 두루마기에 초록 줄의 노리개까지 앞섶에 달자 꽤 그럴듯한 조선 선비처럼 보였다.
“좋네요. 이거까지 다 결재 해주십시오. 그런데 신발은 어떻게 신어야 합니까?”
“요즘은 남자 바지 밑단을 아예 고무 시보리로 넣기 때문에 끈으로 묶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그냥 보통 양말을 신고, 고무신처럼 보이는 꽃구두를 많이 신는답니다.”
점원이 꽃구두 라는 걸을 가지고 왔는데, 흰색에 검은색의 구름 문양이 들어 가 있어서 대충 보면 고무신이나 가죽신으로 보였다.
발을 넣는 부분은 지퍼도 달려있고, 깔창까지 깔 수 있게 현대화 된 수제 구두였는데, 한복 쪽도 나름 발전을 계속 하고 있었다.
“신발까지 다 구매하지요. 배우분들 신발 사이즈도 있지요? 다 한 켤레씩 주십시오.”
“어유 사장님이 물건 사는데 시원시원하시네. 저희가 먼저 할인해 주겠다고 말을 꺼내 보기는 또 처음이네. 호호호.”
물건 값을 하나도 안 깎았다고 깎아준다고 하니 다들 웃겼다.
그렇게 옷이 준비가 되고, 행사 하루 전에 정은채 실장이 두 사람을 데리고 내려왔는데, 김이서가 사는 빌라가 방이 3칸 짜리 였기에 보름 동안 같이 살기로 했다.
***
[...약령시가 있었던 산청군의 유구한 역사가 약초축제에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모쪼록 몸에 좋은 음식 많이 드시고, 축제를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재선에 이어 삼선에 성공한 허일도 군수의 축사가 끝이 나자 축포가 발사되며 약초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본래 오일장이 들어서던 도심지 장터에 별도의 부스 40개를 추가해서 만들다 보니 오가는 사람도 많았고, 시끌벅적해 졌다.
군수와 초대 인사, 지역 유지들이 먼저 한 바퀴를 돌면서 모든 부스에서 물건들을 하나씩 구매를 했다.
첫 개시를 해주는 것이었다.
“어이쿠! 나는 대장금의 이영인씨가 온줄 알았네. 텔레비전에서 바로 나온 거라고 해도 믿겠네. 근데, 여긴 무슨 부스야? 한방 라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두 명 모두 배우였기에 진짜 드라마 대장금에서 막 뛰쳐나가온 것처럼 보였다.
“한방 라면의 홍보 부스입니다. 오직 산청에서만 판매하고 있는 라면입니다! 타지에서 오셨다면 기념품으로 추천드립니다!”
한복을 입고 머리에는 의녀를 상징하는 의관까지 쓰고 있으니 진짜 대장금의 배우들이 한방 라면을 파는 것 같아 어르신들은 줘 여주는 대로 라면을 살 수밖에 없었다.
“캬하! 진짜 텔레비전에서 막 나온 거 같네. 곱다 고와!”
“당연히 이 약초가 들어간 한방 라면을 먹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어르신 한 봉지 더 사가시지요.”
“어허허. 그럼 세 봉지, 아니다 네 봉지 주시게나. 이거 사면 대장금처럼 침도 놔주는 건가?”
“제가 주먹으로 한방 때려는 드릴 수 있습니다.”
“어이쿠, 상궁마마도 계셨구만!”
시골 어르신들이 특유의 되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부스를 쉽게 떠나지 않자 상궁마마의 옷을 입은 정은채 실장이 나타나 깔끔하게 정리를 했다.
그런 노인들이 사라지자 군청에서 활기차게 보이기 위해 동원한 중고등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몇몇 있던 외국인들도 대장금 한복을 입은 최지인과 김은혜와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섰다.
결국, 라면은 정은채 실장과 내가 팔 수밖에 없었다.
“오붓하게 시간을 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는데요. 한복을 괜히 맞췄네요.”
“오늘이 첫날이니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며칠 지나면 사람도 빠지고 한가 해질 겁니다. 아니면 라면을 사면 사진을 찍어주는 거로 바꿀까요.”
“그러면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어요. 그냥 사진 찍을 때 애들에게 이 한방 라면을 들고 찍게 하죠. 그게 더 나을 겁니다.”
“그렇네요. 자연스레 광고 사진이 되도록 하죠.”
정은채 실장의 아이디어로 일일이 한방 라면을 소품처럼 들고 사진을 찍게 했다.
중고등학생 남자애들은 그래도 좋다고, 예쁜 누나들이랑 사진 찍는다고 헬레레하며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과 커뮤니티에 올려댔다.
***
“한방 누나? 이게 뭐지?”
국내 고급 카메라 커뮤니티에 ‘한방 누나’라는 신규 게시물을 본 정환은 한방 누나가 어떤 누나인지 궁금해서 게시물을 클릭했다.
“오! 예쁜데. 누구지?”
푸른색 치마와 옥색의 저고리 한복을 입고 의녀들이 쓰는 의관을 쓴 의녀의 사진이 나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대장금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았던 정환은 드라마에 이런 배우가 없었는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의녀 두 명의 사진이 각각 3장씩 올라와 있었는데, 둘 다 정갈하게 선 모습이라 왠지 모르게 청순해 보였다.
특히나 흰 피부가 옥색의 저고리 색과 대비되어 대장금 컨셉에 잘 맞는 것 같았다.
“어디서 무슨 행사를 한 건가? 나도 한번 찍어보고 싶은데.”
[...경남 산청에 약초축제 행사 부스에서 보았는데, 진짜 대장금인줄 알고 결혼하자고 할 뻔했습니다.]
⌞근데, 왜 한방 누나임?
⌞한방 라면을 파는 누나라서 그럼. 두 분이 계셔서 2봉지 10개 샀음. 같이 사진 찍으려면 라면 들고 사진찍어야 함. ㅎㅎㅎ
모델 출사를 좋아하는 정환은 아름다운 여자를 찍는 것을 좋아했다.
라면을 산다면 합법적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에 행사 정보를 확인했고, 다음날 바로 카메라를 챙겨 산청으로 출발했다.
***
“아 거기 뒤로 좀 빠져요!”
“반사판 뭐야! 매너 없게!”
“질서 좀 지키면서 찍읍시다!”
정환은 나름 오전에 왔기에 여유 있게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9시가 갓 넘었는데, 이미 8명의 찍사들이 들러 붙어 있었다.
얼른 차에 뛰어가 삼각 사다리를 들고 왔고, 거기에 올라가자 그제야 컴퓨터 화면으로 보았던 대장금이 있었다.
정갈하게 서서는 살짝 웃어주는 모습에 정환은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런 찍사들 10여 명으로 인해 부스 앞은 사람들이 다니지도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대포라 불리는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온 걸 보고 괜히 찝찝했었다.
그러다 사람들이 오기 시작하는 시간에 10여 명이 그렇게 부스 앞을 막아버리자 관광객들의 동선이 꼬여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린다는 것을 알기에 행사에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지금 당장 길을 막고 이러니 민폐였다.
어떻게든 기분 상하지 않게 치워야 했다.
“자자. 2시간에 1번씩 10분 동안 촬영하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릴 테니깐. 지금은 좀 다들 빠져 주십시오!”
“오! 지진환씨 한복이네.”
“남자분도 사진 좀 받겠는데. 갓도 쓰고 좋네.”
갑자기 내게 카메라 렌즈가 쏠리자 나도 모르게 웃으며 브이자를 한번 해줬다.
“세 분 같이 서봐요. 그림이 좀 나오는데.”
10여 명의 사진사들이 그렇게 이야길 하니 나도 모르게 최지인의 옆에 설 뻔했다.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최지인과 김은혜의 손을 잡고 행사장을 벗어났다.
“사진 찍고 싶으시면 따라오세요.”
장터를 벗어나 넓은 공터로 오니 그제야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자 10분 드립니다! 이후로는 2시간 후에 또 포토타임 드립니다!”
이것도 행사 홍보라는 생각에 나름 포즈를 잡아줬다.
“대장금 드라마에 나오는 그 구도처럼 해주세요. 서로 마주 보고. 오케이! 네 좋아요!”
촤라라락! 찰칵 찰칵!
뭔가 기관총 발사소리처럼 연사로 찍어대는 카메라 소리에 긴장을 했는데, 두 사람은 그래도 카메라 앞에 선 경험이 있다고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오히려 어리바리한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라며 포즈를 알려줬다.
“좋네. 뭔가 대장금의 남녀상열지사가 생각나는구만.”
“한복 행사 사진은 진짜 오랜만이네.”
한참을 신나게 찍자 사진사들은 만족을 했는지 다들 물러났고, 그제야 행사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같이 사진을 찍자는 사람들이 라면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전 갓 쓰신 남자분하고 찍고 싶어요!”
나도 행사장 모델로 아는지, 같이 서서 사진을 찍어주었고, 외국인들은 갓을 쓴 모습이 더 흥미로운지 나와 더 많이 사진을 찍었다.
“모델 분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사이트에 올려도 되죠?”
최지인과 김은혜는 정은채 실장의 눈치를 봤는데, 라면을 팔면서도 정은채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김은혜 이고, 이쪽은 최지인, 저분은 임건호입니다. 더 비치엔터에 소속된 배우입니다!”
“아! 배우? 어쩐지. 느낌이 다르더라.”
“배우 느낌이 있다고 했는데, 역시네.”
***
[한방 걸! 한방에 반했다. 이 두 명 누구냐?]
⌞더 비치 엔터 소속의 배우래.
⌞남자는 좀 아닌거 같은데 이름처럼 여자는 좀 잘 뽑는 듯.
⌞회사 이름 개 웃기네. 기억에는 남을 듯.
[한방 걸 보고 한방 라면 땡겨서 사려는데 어디서 파냐? 파는 데가 없는데.]
⌞지역 특산이라고 산청군 홈페이지에서만 팜. 근데 사이트 개 불편. 가입 안하면 라면도 못삼.
⌞미친.
[저 누나에게 직접 사고 싶다. 산청 가야 하나.]
⌞나 내일 내려 갈 거임.
⌞나도 내일 가야지 가서 사진 다 찍어야지. 헤헤.
다음날엔 토요일이다 보니 직접 사러 온 사람들이 더 늘었고, 대포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마치 모터쇼의 레이싱걸을 찍는 것처럼 양 사방을 둘러싸고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
“네. 대표님. 이렇게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극에 잘 맞는 이미지 일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네네. 오디션 대본 보내신 거 확인했습니다. 네네. 서울 올라가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은애 실장은 약초축제 동안 라면을 팔며 힘들었던 것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세 편의 지정 오디션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오디션이 아니라 배역을 지정해서 보는 오디션이었기에 지인이나 은혜가 통과할 가능성이 있는 오디션이었다.
전 회사부터 10년 가까이 일을 했지만, 최지인이나 김은혜에게 사극에 맞는 매력이 있다고 느끼지를 못했는데, 이걸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배우 본인도 몰랐던 매력을 사진을 찍는 동호인들이 알아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계기가 만들어 진 것도 운명 같았다.
“이거 둘이 합이 잘 맞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