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생각을 바꿔먹다.
“청첩장 예쁘게 잘 나왔네. 3월이고. 결국 서울에서 하기로 했어?”
“응. 전에는 돈도 아끼고 호텔에서 근무하니깐 해운대 뉴클라우드 호텔에서 하는 게 당연했는데, 이젠 그게 아니니깐. 지금은 일과 관련된 사람도 서울에 더 많다 보니 어쩔 수가 없어.”
“그래 어쩔 수 없지.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건 버스로?”
“응. 우등 4대로 했어. 부산에서 2대, 도협씨 고향인 경주에서 2대 출발하기로.”
“준비한다고 정신 없겠네.”
“그래서 정 실장님이 도와주시기로 했고, 계약직 직원 한 명 더 뽑아서 회사 일도 하기로 했어.”
“근데, 결혼식 때 연예인들 많이 오냐?”
“응. 도협씨 방송 관련해서 한 2~30명 올걸. 기자들도 10여 명 올 거야. 아, 그리고 최지인씨도 그때 신부 들러리 해주기로 해서 올 거야. 우리 회사랑 매니지먼트 계약했거든.”
“응? 매니지먼트 계약을 했는데, 왜 신부 들러리를 하냐? 그거 그냥 막 동원한 거잖아? 그런 업무 외 지시는 갑질이거든!”
“소속사 사장이긴 해도 그냥 언니 동생 하면서 지내기로 했거든. 정은애 실장이 고등학생일 때 캐스팅해서 벌써 9년 넘게 아는 사이이고 하다 보니깐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
“그러니깐 연예계 쪽에서 계속 계약 관련해서 문제가 터지는 거지. 그러면 안 되는거야.”
“아, 몰라! 하여튼 그날 정신 없겠지만, 오빠도 지인씨 한번 제대로 보고 해봐. 소개해 주기 위해 따로 보는 거보다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게 자연스럽겠지?”
“흠흠. 그건 그렇긴 하지.”
결혼식 준비하라고 1억을 보내줬더니 어떻게든 여자를 만나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역시 형제간에도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 우애가 깊어지는 것이었다.
동생이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인천 짜장면이 생산되어 납품되었고, 먼저 연락을 해 왔던 전라도 담양군은 죽순라면, 강원도 고성군은 명태라면으로 생산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라도 여수의 해물라면, 울산의 미역 라면, 해남 땅끝마을의 녹차 라면도 MOU를 체결하고 레시피와 최종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민욱이 밑으로 이제 붙여주면 될 거 같습니다. 영업도 따로 뛰려면 직함도 과장으로 올리면 될 것 같구요.”
이종민 실장은 이제 김민욱이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이야길 해줬다.
인천 짜장부터 6개 지자체와 일을 진행해 보며 프로세스를 제대로 익힌 것 같았다.
“1년 만에 대리 찍고 과장이라니. 우리 같은 작은 회사에서나 가능한 거네요.”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재미이기도 하구요.”
“그렇죠. 그럼 신입 2명을 뽑아서 실장님과 민욱이 밑으로 넣어드리지요.”
영업 쪽의 나쁜 버릇이 있을지 모르는 경력직보다는 신입을 뽑아서 가르치는 걸 나는 더 선호했다.
“헌데, 공장의 생산 여력은 됩니까?”
인천 짜장과 죽순 라면, 명태 라면까지 1200만 개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3곳과 더 계약을 하게 되어있으니 나도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서, 문 대표님과 새로 공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2공장은 기존의 대량 자동화 생산 대신 소량 다품종으로 생산 라인을 꾸리게 될 겁니다.”
소량 다품종이다 보니 생산장비에 돈이 더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문 대표와 반반씩 투자해서 1공장 옆에 2공장을 만들기로 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굴러갔고, 동생의 결혼식 날짜가 되었다.
사흘 전에 미리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와서 적응을 시켰고, 아버지가 안 계시다 보니 당연히 내가 손을 잡고 입장을 하려고 했다.
한번 예행 연습을 하고 쉬고 있는데, 웨딩플래너가 와선 따로 불러내어 말을 건네었다.
“정말 제가 고민 끝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오빠분하고 신부님의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안 될 거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버진로드에 신부가 손을 잡고 들어갈 때 사진이 많이 남겨지게 되는데, 두 분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다 보니 괜히 잘못 아시는 분들이 생길 것 같고 사고가 날 것 같아서요.”
“사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버럭 하려고 했으나, 오늘 연예부 기자들이 10여 명 온다고 한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예전에 프리선언을 했던 김범일 아나운서 결혼식에서 잘못 송출된 기사 사진으로 가족들이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기자들이 다 연예인들을 아는 게 아니라 신부의 오빠가 신랑인지 알고 그대로 사진을 올려 버렸었습니다.”
일을 대충하는 한국 연예계 기자들 특성상 제대로 얼굴 확인도 안 하고 송출을 해버렸던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하다 보니 신랑 쪽의 친인척들은 나를 모르기에 젊은 남자가 손을 잡아 주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싫어할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 오빠가 이혼을 했다고 하면 동생이 괜한 입방아에 시달릴 수도 있었다.
연예인들 결혼을 전문으로 하는 웨딩플래너라고 했는데, 이런 것까지 다 고려해서 일하는 것이 대단했다.
“플래너님 말대로 제가 빠져야겠네요. 신랑·신부 동시 입장으로 진행을 해 주십시오.”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그렇게 식순을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씁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가 장남으로 집안을 유지하며 동생의 학비도 내주고 했는데, 내가 배제되었다는 느낌에 속이 쓰렸다.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섭섭한 마음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으로 속을 달랬다.
동생과 매제가 동시 입장 연습을 위해 다시 나왔는데, 정은채 실장이 와서 귓속말을 했다.
“임 대표님. 저기 들러리 중에서 왼쪽에 있는 친구가 최지인이에요. 어때요? 예쁘죠?”
정은채 실장이 이야기해 주기 전에도 들러리 두 명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이름 없는 배우라고 하지만, 화관을 쓰고 핑크색의 롱 드레스를 입혀 놓아서 그런지 일반인과는 확실히 달랐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도 신부인 여동생보다 더 예쁜 거 같았다.
“여자에 관심이 없으신 건 아니시죠?”
“예쁘고 아름다운 이성에게 안 끌리는 남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돌싱이라는 게 사회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저쪽은 초혼이다 보니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뭔가 쉽게 나서기가 힘이 듭니다. 괜히 속물 같은 느낌도 있구요.”
“이해가 가네요. 근데, 임 대표님. 그런 마인드면 이제 여자 다시는 못 만나실 겁니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후회해도 늦는 겁니다. 인생 손해 보시는 거예요.”
정은채 실장이 억하심정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괜히 마음이 상했다.
웨딩플래너에 이어 정은채 실장에게 원투 펀치를 두들겨 맞고 보니 내 자신에 대해 좀 더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는 돈이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이 된 것 같은데, 과연 그런 행복을 내가 누려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쉽게 다가가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기 시작한 연예인들을 보니 그런 행복을 누리지 않는 것이 정 실장의 말처럼 손해인 것 같았다.
연예인들 중에는 바람피워서 이혼했던 사람도 있었고, 음주운전과 폭행 사건으로 자숙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도 환하게 웃고 떠들고 있으니 돌싱이라는 이유로 처녀에게 들이대지 못하는 내가 미련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여의도에서 보았던 전처를 생각했고, 행복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행복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하객들을 보며 나이가 들면 배우자와 자식이 있어야 노년이 우울하지 않다는 말도 떠올렸다.
벌어둔 걸 다 짊어지고 갈 거도 아니고, 재산을 물려줄 애는 있어야 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돈이 있으니 플레이보이 잡지의 휴 헤프너처럼 늙어서도 매일 여자들을 불러 파티를 즐길 수도 있겠지만, 본래 성격 자체가 그런 파티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내 행복을 위해 새로운 반쪽을 찾아야 했다.
축하해주고 모두가 행복해야 하는 동생의 결혼식에서 괜히 생각만 많아졌다.
동생 부부는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아침 비행기로 일본에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고, 나는 외삼촌과 이모, 고모부 내외를 모시고 서울 관광을 시켜줬다.
동생의 결혼식이라고 미국에서 온 고모 내외는 일등석으로 비행기 표를 끊어줬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다 해주었다.
***
“이사님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산청 약초축제를 한다는데, 거기에 판매 부스 하나를 우리에게 준다고 하는데요.”
“군청에서?”
“네. 그 부스에서 라면 판매를 해달라고 합니다. 일정이 보름이나 되네요. 현장 부스에 두세 명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따로 사람을 구할까요?”
“홍보 판매 부스니깐. 아! 내가 구할게.”
공적인 업무로 동생 회사의 정은채 실장에게 연락할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정 실장님 행사장의 나레이터 모델도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합니까?”
“컴패니언 걸 말씀하시는 거지요?”
“네. 행사장 부스에서 일하시는 분요. 보름 동안 부스를 맡아주실 분 2분이 필요한데 그쪽에서도 됩니까?”
“되긴 되는데, 노출이 필요한 행사 부스인가요?”
“아닙니다. 라면을 파는 행사 부스라서 노출은 없습니다.”
“아. 그럼 좋네요. 행사장이 어디인가요?”
“산청입니다. 산청 약초축제 행사입니다.”
“약초축제요? 호호호호. 저도 이 바닥에 오래 있었는데, 지역 향토 축제에서 컴패니언 걸을 구한다는 건 처음 들어 보네요.”
“그런가요? 두 명이 필요한데, 산청이다 보니 정 실장님도 같이 오셨으면 합니다. 숙소 제공하구요.”
“아아, 지방이라는 게 문제겠네요. 제대로 된 숙박 시설도 없을 테고.”
“저희 직원이 묵고 있는 빌라가 있는데, 방이 3개라 거기서 숙박은 될 겁니다.”
“흠. 알겠습니다. 그럼 날짜하고 일정 상세 정보를 좀 보내주세요.”
“네 그렇게 하죠. 저...그리고. 최지인씨는 이런 행사에 안 뛰는 거죠?”
“지인이요? 아아아! 호호호. 그렇구나. 호호호. 그래서 약초 행사에 컴패니언 걸이 필요하신 거였어요? 알겠어요. 알겠어. 호호호. 제가 지인이 꼭 데리고 갈게요. 뭔가 업무상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시겠다는 거죠? 아이노 아이노(I know. I know.) 이해했어요.”
마구 웃어대는 정은채 실장의 말에 괜히 부끄러웠지만, 제대로 만나보고 싶었기에 행사 일정을 보냈고, 숙소를 미리 준비했다.
***
“2000년 초만 해도 핸드폰 가게나 술집의 오픈식 때는 컴패니언 걸을 엄청 많이 불렀었어요. 일단 눈에 확 띄고, 오픈했다는 것을 알리기에는 최고였으니깐요.”
행사장에서 입을 옷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 정은채 실장을 만났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안 하더라고요.”
“네. 일단 돈이 안 돼서 그래요. 업체는 매니지먼트나 이벤트 회사에 하루 50에서 100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는데, 실제 컴패니언 걸들에게 가는 돈은 1인당 10만 원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중간에 떼가는 게 많았나 보네요.”
“네. 그래도 하루 8~9만 원을 행사장에서 웃어주고 버는 것이라 괜찮은 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헌데, 이게 매일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여성가족부에서 성 상품화니 뭐니 하면서 핸드폰 가게에서 입는 통신사 행사 복을 짧게 입지 못하게 하면서 점점 없어졌죠.”
“옷 때문에 없어졌어요?”
“네. 노출이 없는 옷을 입고 그냥 있으면 홍보가 안 되니깐 자연스레 핸드폰 가게에서 행사를 줄여 버린 거죠. 옛날처럼 그런 미니스커트를 입고 홍보를 하면 난리가 나요. 레이싱걸도 매번 욕을 듣고 있을 거예요.”
“뭔가 아이러니하네요. 여성의 성 상품화를 막기 위해 짧은 옷을 입지 못하게 막으니, 그걸로 돈을 벌던 여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다니.”
“뭐, 그게 시대의 흐름이라고 하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우리 애들이 입을 옷은 어떤 건가요?”
“노출 없고 오히려 꽁꽁숨기는 옷입니다.”
“꽁꽁 숨기는 옷요? 엇? 한복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