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조직.
“김민욱 대리 때문이라고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실장님과 사수, 부사수로 같이 다녀야 할 건데, 김 대리는 실제로 영업다운 영업을 하는 것이 처음일 겁니다. 거산에 있을 때는 주로 관리, 지원업무를 했거든요. 제대로 영업을 알려줬으면 해서 그렇습니다.”
“아, 실적을 바로 낼 수 있는 꼼수나 뒷작업부터 배우게 될까 봐 6개월간 하지 말라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제대로 영업의 기본을 배우게 하고 싶어서 이렇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첫술에 바로 배부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실패해도 됩니다. 개척 영업이란 이런 거라고 제대로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뒤로 이권 주고받고, 하는 쉬운 영업 대신 쌓아가는 영업을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키워야 하는 것이라면 영업 쪽이 계속 커지는 것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네. 보여드린 자료를 보시면 알겠지만, 컨텍해서 우리가 먹어야 할 곳이 80곳이 넘습니다. 영업팀을 만들어서 키워야지요. 우선은 첫 단계로 김 대리와 함께 이 인천 짜장에 부딪혀 주십시오. 인천도 산청과 마찬가지로 선거 때문에 실적 챙기기를 할 겁니다.”
“선거 시기를 잘 노려야 하겠군요.”
“네. 다만, 대도시 관공서이다 보니 담당자를 만나는 것도 힘들긴 할 건데, 새마을운동 협의회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인천 시장이나 부시장과 컨텍 포인트를 잡으면 될 겁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개척 영업이 영업의 꽃이지요.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이종민 실장과 김민욱 대리가 인천으로 올라갔고, 이서는 각 군청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의실에서 알게 된 새마을운동 지도자 협의회 회장을 통해 각 지역의 회장들 연락처를 받았다.
사실, 이 라면 사업에 대한 영업도 맨땅에 헤딩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인맥이 필요한 일이었다.
라면이 나왔다고 바로 시장이나 군수를 만나서 사업제안 브리핑을 하는 것은 진짜 소설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대기업도 아니고, 처음 들어보는 회사에서 찾아와 시장이나 군수에게 사업제안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냥 무시를 할 터였다.
아니면 서류만 받고 그냥 만나보지도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일일이 하부 조직의 승인을 거쳐서 올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지역사회 과나 부서의 담당자를 만나서 사업을 설명하고, 그 위로 서류를 하나씩 올리는 데만 해도 2~3개월은 그냥 까먹을 터였다.
그리고, 1, 2억도 아니고 몇십억 단위의 사업이라면 하부 조직의 6, 7급 공무원들은 제안서를 받고 그냥 던져 버릴 터였다.
규모가 큰 사업을 자기 부서에서 하게 되면 자기에게 일이 쏠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책임감도 같이 커져 담당하는 자신만 피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설득해 올라간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그걸 뒤집어쓸 수도 있다 보니 공무원들은 당장 1억짜리 사업도 자신이 맡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럴 때 인맥과 사회적 연줄이 필요한 것이었다.
건축 관련이라면 기본이 국제 라이온스 클럽이나 로타리 클럽을 통해 국장 이상급의 사람을 소개받아 접점을 만드는 것이 기본이었고, 건축이 아닌 사회적 사업의 경우에는 새마을 지도자 협의회나 바르게살기 운동회 같은 지역의 봉사 단체를 통하는 게 기본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시민단체도 아니고, 노인네들만 잔뜩 있는 그런 모임이 힘이 있다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런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다들 돈 좀 있는 지역 유지들이었고, 대부분이 지역 내 정당 활동까지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조직이 있으면 표도 있다는 말처럼 이런 지역 단체에서 주도하는 행사도 많았고, 선거 유세에도 자리를 채워주고 호응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속칭 박수부대라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국회의원이든 시장이든 무슨 행사가 있으면 와서 회장단들과 사진도 찍고 민원도 받고 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속된 말로 일 똑똑히 하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도 이런 조직의 회장단들이었다.
김이서가 그런 협의회나 조직에서 열리는 행사를 파악해서 정리를 하고, 우리 영업 일정과 맞으면 해운대 라면의 패키지만 그 지역 라면으로 변경해서 접촉해 보는 것이 영업의 시작점이었다.
그 지역의 시장이나 군수를 직접적으로 만나기 위한 영업통로가 바로 이런 모임이었다.
이 외에도 교회도 있고, 운동모임도 있고 하지만 이런 조직의 행사에서 만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특히나, 협의회 회장단 어르신들의 말을 잘 들어 주고, 라면을 드리고, 찬조금을 조금 내놓기만 하면, 말하지 않아도 건실한 청년 기업가라며 치켜세워주었다.
학연이나 지연이 또 있으면 시장이나 군수에게 연락해서 밀어주겠다고 앞장서서 움직여 주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옆에서 지원 사격해주는 용병 조직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사님. 내일은 허 군수님의 출판 기념회에 가셔야 합니다.”
물론, 용병 조직을 얻는 대신에 이런 외부 이벤트에는 얼굴을 들이밀어야 했고, 알랑방귀도 좀 꿔줘야 하는 건 귀찮긴 했다.
***
회의실에서 다 같이 한번 살려 보자고 했던, 열의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다시 군수의 출판 기념회에 모였고, 다들 출판사에서 나온 사람에게 몇 권을 사겠다고 구매예약서를 쓰고 있었다.
나도 줄을 서서 5만 권을 구매하겠다는 예약서를 썼다.
아마도, 책값을 보내면 한 천 권 정도를 보내주고 다 보내준 것으로 처리를 할 터였다.
패거리 문화처럼 지역 사람들이 뭉쳐서 서로의 이권을 위해주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니 다른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했다.
“산청군 에세이 출판 기념으로 산청 한방 라면을 드리고 있습니다. 정식 출시 전에 드리는 것이라 한정판입니다!”
군청에서 동원되었는지 공무원들이 사람들에게 라면을 챙겨주고 있었는데, 다들 산청군에서 나온 라면이라는 것에 신기해 했다.
퍼펑! 퍼퍼펑!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에 보니 기자들도 왔는지 허일도 군수가 책을 든 모습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산청 한방 라면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에세이 출판 관련으로 인터뷰한 것이 기사로 나갈 거고 곁가지지만 라면 출시도 후속 기사로 나갈 예정입니다.”
이정모 부장은 아는 기자들을 최대한 불러온 거라며 전국으로 뿌려지는 중앙지에도 문화/책 섹션에 들어갈 거라고 했다.
당연히 여기에도 기자들에게 거마비 쪼로 얼마가 들어갔을 터였다.
그리고, 이 기사가 나가게 되면 거산랜드의 사람들도 지역 특산 라면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거산에 먼저 연락을 해도 되었을 테지만,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
“이사님. 이 한방 라면도 해운대 라면처럼 티비에 운 좋게 나오면 대박이 날까요? 해운대 라면은 진짜 어떻게 ‘넌 혼자 사니?’에 나온 거에요? 최경민 배우랑 아는 사이였어요?”
뜬금없이 물어보는 이서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다들 내가 무슨 수를 부려서 그 예능에 라면을 나오게 한 줄 아는 거였다.
“진짜 운이었어. 아마, 그렇게 운 좋게 나오는 것도 어려울 거야.”
“와! 진짜 우연히 나온 거면 평생 쓸 운을 다 쓴 거 아니에요?”
“진짜 운이 좋았던 거지. 그러고 보니 최경민 배우는 잘 하고 있으려나. 내게는 은인인데 말이지.”
배우 최경민이 이후로 어찌 되었는지 보니 대박은 못 쳤지만, 소소한 영화나 드라마에 계속 나오고 있었기에 안심을 했다.
언젠가 CF를 찍을 정도가 되면 최경민 배우를 써서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
“네? 네 알겠습니다. 저기 이사님...”
“응?”
“방송이 잡혔다고 방송에 나가셔야 한다는 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왜 방송에 나가?”
“그 KBC1 방송에서 하는 ‘6시 우리 고향’이 산청군에 오는데, 거기에 이사님이 출연해야 한다는 데요.”
“6시 우리 고향?”
주로 리포터나 방송인들이 시골에 가서 체험을 하고, 특산품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는데, KBC1 방송 특성상 재미보다는 공익적이고 교양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방송이었다.
한마디로 젊은이들은 거의 보지 않는 어르신들을 위한 방송이라는 뜻이었다.
“이정모 부장 말로는 정장을 입지 말고, 진짜 산청에 사는 사람처럼 해서 출연해야 한다는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라면 홍보가 아니라 다른 거야?”
“메일로 내용 보내준다고 하니깐 아, 왔네요. 바로 전달해 드릴게요.”
얼른 메일을 열어서 방송 내용과 촬영지에 대한 설명 시트를 봤는데, 이정모 부장이 왜 산청 사는 사람처럼 해서 출연해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산청 한방 라면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무청 시래기를 납품하는 작업장의 청년 농사꾼으로 나를 쓰고 싶다는 거였다.
산청군에서 직접 만든 식재료를 라면에 쓰고 있다는걸 강조하고자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였다.
문제는 거기에 왜 내가 들어가야 하는지 몰랐는데, 젊은 사람이 귀향해서 시골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다는 의도였다.
어떻게 보면 조작 방송이지만, 이게 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카메라 앞에 설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미리 읍내에 가서 작업복으로 쓸 셔츠와 바지를 샀고 장화도 구매를 해서 신어보니 뭔가가 어설펐다.
“이사님 그거 아니에요. 일단 머리에 뭐 바르면 안되구요. 얼굴도 너무 하얗고...음. 옷은 제가 손으로 한번 빨아서 드려야겠네요. 너무 새것 느낌이에요. 장화도 그렇고요. 벗어 보세요.”
이서는 내가 벗은 장화를 들고는 공장 근처 흙길에서 이리저리 굴려 흙먼지를 잔뜩 입혀서 돌아왔는데, 손에는 붉은색의 야구 모자도 있었다.
“농촌 힙스터는 색 바랜 농약 모자가 있어야 해요. 모자 각도도 무너진 듯이 우겨져 있어야 하구요.”
“마그마? 모자에 쓰인 그건 뭐냐?”
“제초 농약 이름이래요.”
색 바랜 붉은색 모자에 흰색으로 마그마라고 쓰인 야구 모자였는데, 더러워진 장화를 신고, 모자까지 쓰자 진짜 시골 아재가 거울 속에 있었다.
“이게 찐이죠. 면도도 한 이틀 안 해야 진짜 시골 아재 느낌이 날 것 같은데요.”
“야, 리얼리티 너무 따지는 거 아니냐?”
“그래야 믿죠. 이왕 주작 방송을 하기로 했다면 리얼리티 제대로 해야죠. 셔츠 호주머니에 담배도 한 갑 넣으시고, 목에는 땀 닦는 수건도 하나 걸쳐주셔야 하고요. 메소드연기도 해야죠.”
“메소드까지 필요한 거냐?”
“넌 혼자 사니? 의 최경민 배우만큼은 안되어도 6시 우리 고향 방송에 라면이 나오면 떡상 할수도 있잖아요. 최선을 다해야죠.”
“그렇네. 그럼 일단 방송 촬영 오기 전에 며칠 가서 제대로 일도 한번 해봐야겠다.”
“좋은 자세입니다!”
라면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기로 했다.
비닐하우스에서 무청을 매달아 말리는 작업을 했고, 어디에 뭐가 있고 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외웠다.
**
“여러분 산청군에서는요. 아주 특이한 특산품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궁금하시다구요?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건지 왼쪽 귀에 꽃을 달고 있는 여자 리포터가 오버스런 몸짓으로 비닐하우스에 들어왔는데, 그 뒤로 금발의 외국인 여자도 같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멜리사씨. 이게 우리가 방금 전 먹은 무청을 말리는 작업장이에요. 다른 이름은 시래기에요.”
“쓰레기? 우리가 먹은 게 쓰레기였어? 오! 마이갓 한국 사람들 이상해 쓰레기도 먹어!”
“멜리사씨 그 쓰레기가 아니라 먹는 시래기라고 있어요.”
“먹는 쓰레기라니 문화 충격이에요. 캐나다는 먹는 쓰레기 없어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티키타카를 두 사람이 하자 주위에 있던 어르신들이 시래기를 쓰레기라고 한다고 아주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산청군에는 젊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마침 저기에 젊으신 분이 계시네요. 뭘 좀 물어볼게요.”
일하는 척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으로 붙어서는 인터뷰를 하자며 마이크를 들이대었다.
리포터의 말에 고개를 들었는데, 20대 중후반 정도 된 리포터에게서 꽃향기가 났다.
나름의 메소드 연기를 위해 며칠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며 흙냄새만 맡았는데, 향수 냄새만으로도 여자 리포터가 엄청 예뻐 보였다.
‘이..이것은 군대 병?’
오지에 있는 군대에서만 발병하는 병이 며칠 비닐 하우스에 있었다고 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