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특산 라면을 제안하다. (2)
“AM요?”
“네 FM말고 AM요.”
흔히들 FM, AM이라고 하는데, 이게 라디오 주파수를 말하는 게 아니란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FM은 필드 매뉴얼(Field Manual) 즉 야전 교범 수칙이라는 뜻으로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다들 군에서 ‘명령대로’, ‘규칙대로’, ‘FM’대로 해라고 말을 들었고, 라디오 주파수가 FM/AM으로 나누어지니 다들 수칙에 따라 해라는 FM의 반대말로 AM을 쓰기 시작했다.
AM이란 말은 단어도 없는 근본 없는 말이라는 뜻이었다.
지금 이정모 과장이 이야기하는 AM 또한 근본 없이 대충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이었다.
AM대로 하라는 말도 사실 회사 내부에서 눈치껏 편법을 쓰라는 말인데, 그걸 발주처에서 대 놓고 AM대로 해도 된다고 하니 과연 어디까지 바닥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네. 그럼, 감자 전분과 밀가루 함량을 섞어서 최대한 50%로 맞춰 보고 도저히 안 될 거 같으면 꼼수도 한번 계산해 보겠습니다.”
“네. 대신에 그렇게 AM대로 할 때는 꼭 통보를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카바를 쳐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업비는 30억을 넘으면 안 되는데, 그 안에서 제안서를 넣어 주시면 됩니다.”
“아, 그러면 29억 5천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얼굴 표정을 관리한다고 힘들었다.
아예 대 놓고, 사업비도 알려주고 하니 그냥 땅 짚고 헤엄을 쳐도 된다고 편의를 다 봐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희 군수님이 이번 선거에도 나오시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네. 3선에 도전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잘 아시네. 헌데, 이 선거라는 게 말입니다. 돈이 참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땅 짚고 헤엄을 칠 수 있게 해주는지 알았는데, 먹은 걸 토해내라고 오더까지 주는 듯했다.
“네. 공보물에 현수막에 운동원 옷에 일당에 엄청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당 지원금으로는 턱도 없지요.”
“네. 그래서 저희 군수님은 군정을 하시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엮은 에세이 책을 한 권 출간을 하실 예정이십니다.”
“아, 그럼, 출판 기념회를 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바로 아시네요. 그때 후원회도 구성을 하기로 했는데, 아시다시피 정치 후원금이라는 게, 한 명이 많이 낼 수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군수님은 정치 후원금도 좋지만, 책 인세로 어떻게든 선거를 치르려고 하십니다.”
“재선을 하시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엮은 책이라면 기업경영이나 자기 계발 관련으로 도움이 되는 책이겠네요. 저희 전 직원들에게 다 한 권씩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군수님이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이정모 부장은 말을 하면서도 손바닥을 활짝 폈는데, 마치 숫자 5를 나타내기 위한 제스처 같았다.
“아, 직원당 5권...이 아니라, 5천...아니 5어억...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책을 5억 원어치를 사라는 거였다.
‘니미, 전국 베스트 셀러가 되겠네.’
아마도, 저 에세이집을 출간하는 출판사도 군수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곳일 터였고, 우리가 책 구매를 5억 치를 하면 자연스레 그 돈이 군수에게 갈 터였다.
제안서를 넣어서 29억 5천짜리 사업을 따내면 5억을 토해내라는 거였다.
“네. 이번 주중으로 제안서를 접수하고, 스프 조성이 나오면 시식 테스트를 하러 군청에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젊으신 분하고 일을 진행하니깐 말이 빠르고 일정이 타이트해서 좋네요. 어르신들이랑 일을 하게 되면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게 있다 보니 속이 터졌는데.”
“하하하.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겠습니다.”
***
문성철 대표는 29억 5천에 예산을 끼워 맞추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는데, 어쩔 수 없이 단가를 높여 강제로 프리미엄 라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사님. 그러면 상표권은 저희가 등록을 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 우리가 머리를 굴려서 산청 쌀라면, 산청 인삼라면, 산청 한방라면으로 상표를 만들어 가도 군수가 싫다고 하면 바로 끝이야.”
“브레인스토밍을 거치고, 여러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보았자, 군수의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거네요.”
“그 사람이 최종 결정권자니깐, 어쩔 수 없는 거지. 김민욱 대리, 디자인 샘플은 나왔고?”
“네. 패키지, 컵라면 포장 디자인과 샘플이 나왔습니다.”
회사 내 연구소에서 스프와 면 조성이 되어 나오면 샘플로 만든 디자인 포장을 씌어 군청으로 들어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일자가 계속 딜레이 되었는데, 바로 쌀라면의 면 때문이었다.
인삼이나 여러 약초가 들어간 인삼, 한방 라면은 국물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 기존에 나와 있는 면을 쓰면 되는데, 이 쌀라면은 새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쌀라면이라고 해도 쌀 100%는 사실 불가능했는데, 감자전분과 밀 전분을 일정 부분 섞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속칭 ‘근기’라 불리는 밀가루의 탄력이 없어서 맛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먹는 라면의 탱탱한 탄력감은 밀가루가 가지고 있는 글루텐(gluten)성분 때문인데, 쌀라면의 경우 밀가루를 줄이고 감자전분과 쌀가루를 넣기에 면의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쌀라면의 맛은 일반 라면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손해 보는 탄력감을 최대한 줄이고자 연구소에서 몇 번이고 만들다 보니 일정이 늦어지는 것이었다.
건호가 찾아가 살짝 조성이 달라도 넘어가 준다고 이야길 했음에도 최적의 쌀가루 비율을 찾는다고 늦어지는 것이었다.
“쌀라면 면발이 나왔습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햇살 식품에서부터 10년 가까이 문성철 대표와 함께해온 김정임 실장이 쌀라면을 끓여 왔는데, 면빨이 얇았다.
“보통 쌀라면 하면 길쭉한 인디카(indica) 계통의 쌀가루로 만드는데, 50% 비율을 맞춰서는 면빨의 맛을 보장 못했습니다. 그래서 산청군에서 수매한 쌀로 했는데, 자포니카(japonica) 종 특유의 근기가 있어서 그런지 면빨에 탄력성이 좀 늘어났습니다.”
“하긴 동남아 쌀이 근기 없이 좀 날아다니죠. 음. 이건 그냥 쌀 라면인 줄 모르고 먹으면 잘 모르겠는데요.”
“5:3:2 비율입니다. 쌀, 밀, 감자전분으로 해서 만들었습니다. 이걸로 한다면 산청군에서 요구하는 50% 이상 사용하는 조건을 만족시킬 겁니다.”
***
군청의 대회의실에는 군수와 부군수를 비롯한 군의회 의장, 부의장이 있었고, 지역 유지인 농협 이사장, 새마을 금고 이사장, 새마을 운동협의회 회장이 참여했다.
나름 한끗빨씩 날리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을 회의실에 불러들여 라면을 끓여 준다고 하니, 다들 표정이 별로였다.
하지만, 버너를 들고 와 물을 올리고 끓여주는 사람이 김이서와 문성철 대표의 여자 비서, 그리고 군청 여직원이다 보니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이 좋아졌다.
“이사장님들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전에 산행 갔을 때 제가 끓인 라면은 아예 맛도 안 보셨지 않습니까?”
“아니, 이 부장. 우리 딸내미한테도 라면 좀 끓여 달라고 하면 짜증을 내고 안 끓여주지, 음식점에 가도 다 아줌마가 끓여주잖아. 이런 어여쁜 처자들이 끓여주는 라면인데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안 그래?”
“그렇취.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꼬 하잖아.”
“하믄. 하믄.”
시골 어르신들의 짓궂은 이야길 여직원들이 들어가며 회의실에서 라면을 끓여 어르신들의 앞에 두었다.
“먼저, 쌀라면입니다. 산청에서 생산되어 수매된 신토불이 라면으로 면을 제조했습니다. 이 뒤로 2종류의 라면이 있으니 다 드시지 않는걸 추천 해 드립니다.”
후루륵~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르신들은 젓가락을 들고 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음. 난 용심의 심라면을 제일 좋아하는데, 그 라면에 비하면 심심한 맛이네.”
“면빨이 뭔가 툭툭 끊기는 것이 오랫동안 불리면 면이 이상하겠는걸.”
“공짜로 나눠 준다면 먹겠는데, 사 먹지는 않을 맛이야.”
“다음 라면이 있다고 다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 하지 않았어도 다 안 먹었을 것 같아.”
나름 연구소에서 배합에 신경을 써서 만들었음에도 밀가루 면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어르신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럼 물로 입안을 한번 헹구어 주십시오. 두 번째 라면이 나갑니다.”
그사이 끓인 인삼 라면이 돌려졌는데, 코가 예민한 몇몇은 코를 벌렁거리더니 단번에 알아봤다.
“인삼? 설마 라면에 삼이 들어가 있는 거야”
“킁킁 음. 진짜 인삼 냄새가 나네. 몸에는 좋겠는데.”
“이건 갈비탕 국물 같은데. 맞지?”
“그렇네. 갈비탕에 수삼이 들어가 있는 그런 라면이네.”
“난 엄청 좋은데, 내가 이빨을 새로 해 넣은 후로는 갈비탕을 못 먹었다고, 그런데 이렇게 갈비탕 맛이 나는 라면이라면 매일 사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기가 없잖아 고기가! 맛은 그럭저럭한 거 같은데, 갈비탕 맛인데, 갈비가 없으니 뭔가 아쉬워.”
아쉽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라면을 절반 이상 먹었다.
다음 라면이 있다고 말리지 않았다면 인삼 라면을 다 먹었을 터였다.
“그리고, 마지막 라면입니다.”
“응? 이번에도 흰 국물 라면이야? 라면은 얼큰해야 하는데, 말이지.”
“엇? 이건 국물이 갈비탕이 아니라 삼계탕 맛인데. 닭고기 우린 국물맛이야.”
“오! 진짜 삼계탕 맛이 나는데. 국물이 진국이야. 제대로 약초를 넣어서 끓인 삼계탕 맛인데.”
“음. 닭 잡냄새도 거의 없고, 약선요리 느낌이 나는 것이 난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이 뒤에 다른 라면이 없으면 이걸 다 먹어도 되는 거지?”
“네. 이 뒤에는 없습니다. 다 드셔도 됩니다.”
다 먹어도 된다고 하자 라면을 후루룩 다 먹었는데, 어떻게 보면 인삼 라면의 갈비탕 국물에는 국수사리나 당면이 들어가지 라면 사리를 넣는 곳이 없다 보니 갈비탕과 라면은 잘 안 맞는 것 같았다.
반대로 삼계탕 라면은 몇 곳에서 파는 곳이 있으니 삼계탕이 라면 면발과 상성이 좋은 것 같았다.
“오늘 드셔보신 세 종류의 라면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하려고 했는데,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세 번째 라면인 걸 알겠습니다.”
“그런데, 젊은이. 왜 오늘 우리들을 다 모아서 이렇게 라면을 끓여준 건가? 허 군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부르기만 해서 말이야.”
“바로 이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리 샘플로 만들어온 라면 패키지를 앞에 내놓았고, PT를 회의실 스크린에 띄었다.
“허일도 군수님이 산청군에 태양 식품 제조 회사를 유치하신 것을 아실 겁니다. 저는 태양 식품 제조의 이사 임건호입니다. 그리고, 군수님은 산청군을 살리기 위해 신 생산 사업으로 라면 사업을 추진하고 계십니다.”
“라면? 라면을 만들어 팔자고?”
“잘 될까? 우리 집은 다 용심라면 먹는데.”
“우린, 공두기것만 먹어.”
삼계탕 라면을 먹고 입으로만 에너지가 쏠린 것인지 지방 방송이 많았다.
“먼저 저희 태양 식품 제조 회사는 바로 이 해운대 라면을 만들어 전국에 5천만 개 이상을 판매했던 실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5천만 개? 그럼, 라면 하나에 500원 잡으면 250억?”
“네. 맞습니다. 농협 이사장님이시라 계산이 빠르십니다.”
“하하하. 내가 아직도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깐.”
“저희가 산청군에 제안 드리는 지역 향토 라면 사업은 이렇게 해운대 라면처럼 지역에 매출을 안겨 줄 것이며, 그에 따라 지역 내 생산력 자체가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저희 태양 식품 제조 회사도 해운대 라면으로 500억 이상의 흑자를 보았습니다.”
거짓말을 좀 쳐서 500억의 흑자를 보았다고 했더니, 그제야 반 재미 삼아 라면을 판다는 이야기를 듣던 어르신들이 눈에 총기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