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현실입니다.
춘장 팩이 들어간 짜장라면이 건(乾) 스프 짜장라면보다 고급으로 보인다는 것은 건호도 동의했다.
“하지만, 판매율 1위인 용심의 짜장게티는 건 스프 가루지 않습니까? 가격도 다른 제품에 비해 저렴한 것도 아닙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소비자는 고급화된 춘장 팩의 유무를 선택의 지표로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건호는 시중에 나와 있는 짜장도 다 먹어봤기에 고급화의 상징인 춘장 팩이 없어도 잘 팔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임 이사님의 말이 맞지만, 후발주자들은 업계 1위인 짜장게티와의 차별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춘장 팩을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흠. 그게 맞긴 한데. 그렇다고, 춘장 팩을 넣는 짜장라면 중에서 눈에 확 띄는 2등도 없는 게 지금의 짜장라면 시장이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런 후발주자들처럼 고급 짜장이라고 춘장 팩을 넣는다면 거기서 거기일 것 같지 않습니까?”
다른 업체들도 다 춘장 팩을 넣어서 고급화 전략으로 팔고 있으니 차별성이 없는 것이었다.
“임 이사님의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우리가 단가를 올려 춘장 팩을 쓴다고 해도 뭔가 독보적이라거나 특별한 장점으로 내세우긴 힘들 것 같습니다. 이미 상향 평준화로 고급화 전략이 시장 전체에 깔려 있다면 그걸 따른다고 해도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지요.”
문성철 대표도 춘장 팩으로 꼭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춘장 팩으로 해도 다른 제품과 비슷하다면 단가를 줄이기 위해 건 스프로 가야 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이사와 대표가 건 스프로 방향을 잡아 버리자 연구소의 사람들이나 쉐프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좋은 맛을 위해 가장 짜장면에 가까운 춘장 팩을 넣는 게 좋다고 생각을 했지만, 춘장 팩을 넣어 출시한 다른 회사의 짜장라면들이 어중간하게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극상의 맛이 있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단가를 줄여서 건 스프를 넣는 것으로 결정합시다. 솔직히 우리가 짜장라면 시장을 다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들으면 대충 만들어서 팔아치우자는 말이기도 했다.
건호의 이런 말에 제품과 요리에 진심인 연구원이나 쉐프들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지만, 무조건 맛만 앞세울 수 없었다.
사업이었기에 단가 마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다른 제품들과 엇비슷할 바에는 그냥 단가를 줄여 마진을 늘리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 생각했다.
“대신에 무작정 저렴한 지역기반 제품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파기름이나 고추기름을 별첨 스프로 넣는다면 그 향미를 높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별첨 기름 스프를 어떤 것으로 넣을지를 결정해서 짜장은 최종 맛을 결정했으면 합니다.”
최도협과 쉐프들도 별첨 스프로 향미를 높이는 쪽으로 결론이 나자, 파기름과 고추기름을 어떻게 넣을 것인지를 고민했고, 그렇게 첫 번째 짜장라면인 인천 짜장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공장설비의 시범 가동으로 해운대 라면을 샘플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공정의 문제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 그 옆에서 인천 짜장면도 1만 개가량 소량 생산되었다.
“거산에 납품 가능한 퀼리티가 나왔고, 짜장면 라인도 정상적으로 생산이 됩니다.”
공장장의 보고에 문성철 대표는 개장식 날짜를 잡았다.
산청군에서 나름 지대도 깎아줬고, 혜택을 많이 줬기에 군수를 초대하고 여러 지역 유지들을 초대해 잔치를 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거산에서도 김독수 전무가 리본 커팅식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나였다.
거산에게는 인천 짜장면 같은 지역 라면을 들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냥 방수 호루 천으로 덮어 두면 안 될까?”
문성철 대표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그냥 파란 호루 천을 덮어 두자고 했는데, 김독수 전무는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김독수 전무가 눈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괜히 창고에 호루 방수천으로 라면 상자를 덮어두었다면 이상하게 보고 살펴볼 겁니다.”
“흠. 라면상자 350개 넣을 만큼 큰 창고를 바로 구할 수가 있으려나. 아, 내가 군수에게 전화해서 저 앞에 실내 체육관 창고를 빌려 달라고 해볼게. 창고가 좁으면 뭐 체육관에 잠시 쌓아두면 되겠지. 일정이 없더라고.”
문성철 대표는 산청군 군수와 친해졌는지 전화 몇 통으로 실내 체육관에 라면 상자를 쌓아둘 수 있게 허락을 얻어냈다.
급하게 인부를 투입해 짜장면을 실내 체육관에 옮기고, 관련된 서류도 무조건 다 금고에 넣어서 잠가 버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를 해서 그런지 리본 커팅식은 잘 넘어갔고, 김독수 전무도 아무런 눈치도 못 채고 잘 돌아갔다.
동네 지역 유지들에게 수육과 잔치 음식을 내주었고, 해운대 라면도 한 상자씩 안겨서 개장식을 잘 치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다른 문제가 다음날 생겨 버렸다.
“문성철 대표가 갑자기 체육관에 물건을 쌓아둘 수 있게 빌려 달라고 해서 무슨 일이지 했는데, 가보니깐 인천 짜장라면이 있더라고. 이거 도대체 뭐야?”
“아, 군수님 그게, 리본 커팅식에는 외부 업체분들도 오시다 보니 저희 경쟁업체도 같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신제품은 노출이 되면 안 되어서 그쪽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아아, 그런 거였군. 그런데, 신제품? 그럼 저게 해운대 라면처럼 인천에 들어가는 거야?”
“그게 아직 정식으로 계약은 되지 않았는데, 일단 샘플을 생산해서 영업을 하려고 생산을 했습니다. 임건호 이사를 어제 보셨지요?”
“아, 그 젊은 양반?”
산청군수 허일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을 해내었다.
“네. 임건호 이사가 그 일을 맡고 있습니다.”
“흠. 그래서 말인데, 우리 산청군도 해운대나 인천처럼 지역 라면을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이건 문 대표한테 이야기하면 되는 건가?”
문성철은 허일도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산청군의 지역 라면도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었다.
다만, 그 이후 생산과 판매가 문제였다.
해운대가 있는 부산 인구는 300만 명을 넘었고, 인천 또한 290만 명으로 라면이든 짜장이든 소비할 수 있는 인구 여력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산청군의 인구는 35,000명이었다.
더구나, 인구의 대부분은 나이가 많은 노인 세대였기에 라면을 만든다고 해도 판매가 어려울 터였고, 군청에서 긴급구호용으로 매입하는 라면의 수량도 1만 개가 전부 일터였다.
인천 짜장의 경우에는 공장 생산설비 테스트를 위해 1만 개 정도로 소량 생산을 했지만, 실제 라인이 돌아가는 중에 1만 개 단위의 생산은 무조건 손해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 손해가 뻔히 보이는데, 산청군수는 산청지역 라면을 만들자고 하니 군수와의 관계 때문에 매운 눈물을 흘리며 생산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회사의 대표이지만, 이 지역 라면 프로젝트는 임건호 이사의 일이라서 임 이사에게 찾아뵈라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석 달 후에 지방선거가 있다 보니깐, 두 달 전에는 산청군 라면이 나왔으면 하는데, 문 대표가 좀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구만.”
“네. 최대한 신경을 쓰겠습니다.”
문성철은 군수가 공장을 나서자 바로 전화를 넣어 임건호를 호출했다.
***
“이거 골치 아프네요. 그냥 제 창고를 만들어 뒀어야 하는데. 산청군수는 몇 개 만들어야 하는지는 이야기 안 했지요?”
“4만 개 정도면 되지 않을까?”
“산청군의 인구가 35,000명이니 그 정도면 될 거 같긴 하네요. 생산은 하루 만에 되어도 그 세팅 잡고 하는 데 나흘이 걸리니 일주일을 그냥 날리게 되는 거네요.”
손해가 나는 일이라 문성철 대표의 고민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 마이너스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없을지 고민을 했다.
우선, 라면 관련 자료들을 가지고 허일도 군수를 만나러 가니 부군수와 지역생활부 부장이 미팅에 같이 참여했다.
“제가 군수님께 이야길 듣고 알아보니 해운대 라면이 1년에 5천만 개가 팔렸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우리 산청군의 라면도 몇천만 개를 팔 수 있는 겁니까?”
“아, 그게...”
뭔가 된똥을 제대로 밟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군민들에게 나눠주고 군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닌, 상업적인 판매까지도 해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 군이 사실 참 어렵습니다. 이촌향도(離村向都)가 끝이 났다고는 하지만, 사실 군에서 인구 유출은 계속되고 있다 보니, 이게 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산청군 라면으로 산청군을 홍보도 하고, 수익사업으로 했으면 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부장은 물론이고 부군수와 군수도 이게 산청군의 좋은 산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안 된다고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헌데, 군수와 부군수의 눈빛이 부장의 간절한 눈빛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아 혹시, 그건가.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이게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6개월이나 1년 동안 시원하게 한탕 해 먹을 수 있는 일이 될 것도 같았다.
“가능합니다. 산청 라면도 해운대 라면처럼 몇천만 개를 팔 수 있습니다.”
“오!”
“하하하. 사람이 시원시원하게 답을 해주니 좋네!”
허일도 군수는 환하게 웃으며 되었다 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해운대 라면처럼 가능은 한데, 이게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애로사항이 있는 거야?”
“네. 군수님. 이게 해운대 라면은 거산랜드에서 저희 쪽에 발주를 해서 만들게 되었던 라면이었습니다. 이후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거산에서 인수를 했구요.”
“그래. 그건 문 대표에게 들었어.”
“네. 대기업에서 예산을 먼저 넣어서 생산을 할 수 있는 투자를 해주셨었습니다.”
“그렇지. 그래. 돈이 들어가야지. 이 부장. 지금 우리 군 예산이 얼마 정도 있지?”
“그게...”
지역생활부의 이정모 부장은 내 눈치를 봤는데, 카드 패를 다 꺼내놓는 것에 대해서 조심하는 눈치였다.
귓속말로 이야기를 했는데, 안 듣는 척하며 귀를 세워 들으니 00십억 정도라는 말이 살짝 들렸다.
“음. 그래. 그런데, 이 부장 이번 사업은 말이지 그냥 쏟아붓는 게 아니야. 라면이 팔리면 그 돈이 들어오게 되잖아. 군에서 하는 수익사업이라고. 그러니 예비비를 더 당겨써도 되는 일이란 말이야.”
“네. 군수님. 그러면 예비비하고 해서 좀 더 정확하게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래. 임 이사가 시원하게 해운대 라면처럼 된다고 이야길 했으니 한번 사업 제안서를 만들어서 와봐. 그리고 군의회에서 사업 적합 통과를 하면 바로 집행을 할 거니깐 미리 산청군 라면을 만들어봐.”
“네. 군수님. 전국으로 팔려나가는 라면을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미팅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오니 최신식으로 지어진 5층짜리 군청 건물이 오늘따라 더 새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허일도 군수는 벌써 연임을 한 군수였기에 자신이 군수로 있는 동안 군청 건물을 지었고, 우리 공장 근처의 실내 체육관도 지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산청군을 알리고, 산청군에 새로운 산업이 될 수 있는 산청 라면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눈먼 돈을 어떻게든 쓰고 싶어 하는 거였다.
문성철 대표는 순수하게 군수가 군민들을 위한 것이나 지방선거전에 산청군을 알리는 성과로 보고하기 위한 용도로 라면을 만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속을 보니 아주 시커멨다.
그리고, 그 시커먼 돈을 우리가 좀 먹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그 돈의 일부는 뒤로 다시 돌아갈지도 몰랐지만...
그리고, 이게 제약 영업을 피해온 이종민이 해야 할 관공서 영업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