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다시 시작.
“소장님. 저 사람 퇴사하고 그냥 확 차 지른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후회할지도 모르고. 혹시 모르니깐 오늘 받은 서류 빨리 처리해. 내일 와서 취소해 달라고 할지도 몰라.”
영업소장 임병찬은 충동적으로 외제차를 지른 다음 날 계약을 취소해 달라고 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늘은 명의이전 일까지 일어나는 범칙금이나 그런 부분까지 다 책임지겠다고 각서를 쓰고 간 만큼 취소해 달라고 땡깡 부려도 안 해 줄 거라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영업소장과 직원의 걱정처럼 차를 끌고 나온 건호도 사알짝! 후회를 하고 있었다.
3천 킬로나 시승을 돌린 차였기에 사실상 중고차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당장 달릴 차가 필요했다. 그저 이 상황에선 최선의 차라고 마음을 다지며 강변북로를 달려 나갔다.
강변북로를 지나 서울문산고속도로로 차가 올라가자 묵직한 무게감에 속도를 올려도 차가 흔들리지 않았고 매끄럽게 임진각까지 냅다 올라갔다.
음악을 틀고 드라이브를 하니 뭔가 답답했던 속이 좀 풀렸고, 임진각에서 바라본 황량하게 탁 트인 북한 땅을 보니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전에는 드라이브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고급 차를 타고 한번 달려보니 왜 드라이브로 스트레스를 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힘들어 이혼했을 뿐, 전처를 미워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보루가 없어졌으니, 생각을 달리해도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단순한 반발심리일지도 몰랐지만, 이젠 걸릴 게 없었다.
***
금요일이 되어 정은애 실장과 동생이 찾아왔는데, 뿔테에 뱅헤어의 정 실장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다.
나도 계약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갔는데, 박정민 차장이 나를 막았다.
“임 차장님은 양쪽 모두와 관계자라서 빠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관계자면 더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의견이 기울 수 있어서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럼.”
박정민 차장은 정은애 실장을 엄청 챙겼는데, 척 보기에도 방송국 물을 먹은 거 같은 정은애 실장이 내 방송국 인맥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헛물만 켜는 거겠지만, 그런 착각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웃으며 물러났다.
그리고 2시간 후 회의실에서 다들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나왔는데, 서로 윈윈하는 계약을 협의한 것 같았다.
물론, 변호사가 계약서를 검토해야겠지만, 거의 확정된 것 같았다.
“그럼 식사하러 가시죠. 이번에는 임 차장님도 같이 가셔도 됩니다. 하하하.”
한정식 집에서 식사가 끝이 나고 차를 마시게 되자 박 차장이 화장실을 가며 자리를 비웠다.
그때 동생이 계약 내용을 알려주었다.
전속 2년으로 해서 1년에 6천만 원씩 총 1억 2천을 받는 계약이었다.
뭐, 더 받으려고 하면 더 받을 수도 있겠지만, 첫 광고 전속 계약이니 이거면 충분했다.
“그리고, 전화로 이야기했던 그 친구예요.”
정은애 실장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깔끔하게 정돈된 증명사진과 프로필 사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눈에 봐도 연예인이구나 하는 느낌이 바로 났다.
“류지인이라는 친구인데, 삼청동 이발사라고 아세요? 그 영화에 조연으로 나왔었고, 라디오DJ 스타라는 영화에도 나왔었어요.”
“어, 라디오 DJ 스타는 국민배우 진성기 씨 나오는 거라 저도 본 건데. 거기에 나왔었나요?”
명절날 티비에서도 해 준 영화였기에 분명 보았는데, 류지인이란 배우가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연예인답게 예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진짜 단역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동생 회사에 소속시킨다고 했는데, 그럼 지금은 소속사가 없는 건가요?”
“네. 보통 신인배우의 경우 5~7년 정도를 기다려 줘요. 그 사이에 오디션을 통과하고 느낌 있는 단골 단역이라도 하게 되면 계속 계약을 이어가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보통 20대 후반에 계약이 끝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동생 회사 뉴비치...진짜 이름 바꾸자. 여튼 이제 만들어진 작은 신생 회사인데, 왜 동생 회사로 오려고 하는 건가요? 직원도 없어서 제대로 서포터도 해 줄 수가 없는데.”
제대로 된 소속 연예인 지원 정책도 없고, 사무실도 10평짜리 작은 오피스텔이라 뭔가 지원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소속사로 들어오고 싶다는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오디션 때문이에요.”
“오디션요? 그 영화 배역을 따내는 오디션요?”
“네. 소속사가 없으면 그런 영화사의 배역 오디션에 참가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무런 지원이 없더라도 소속사에 들어오려는 거구요.”
“아, 소속사가 없으면 아예 배역 오디션 자체를 못 보는 건가요?”
“네. 보통 제작사에서 여러 매니지 사에 배역 오디션 공고를 보내면 거기에 몇 명 보내겠다고 회신을 해요. 그게 오디션의 서류접수나 마찬가지예요.”
“아예 무소속의 개인은 뭔가 뛰어들 수가 없으니 서포터를 제대로 못 해줘도 소속사에 들어오려고 하는 거군요.”
“네. 이 친구도 지금 계속 극단에서 연기력을 쌓고 있고, 방과 후 학습으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연기에 대한 수업을 하면서 배역 오디션이 생기면 계속 참여를 하고 있어요. 이런 케이스의 신인들을 몇 명 받아들일 예정이에요.”
“제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전, 제대로 된 거도 없는 동생 회사에 배우들을 들인다고 해서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지 알았습니다. 하하하. 연예계가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나쁜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리.”
“근데, 나도 지인 씨를 같이 만났는데,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어. 난 한번 만나보는 거 찬성이야.”
“뭐가 찬성인데, 그쪽 사람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거지. 돌싱을 만나려고 하는 싱글은 잘 없거든.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지금 많이 바빠. 새 회사 차릴 준비를 하고 있으니깐.”
“새 회사? 그게 뭔데?”
“그게, 그러니깐. 아, 박 실장 오네. 집에서 이야기해 줄게.”
건희는 새로운 회사가 뭐 하는 회사인지 궁금했지만,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좋은 계약하고, 덕분에 맛있는 식사도 한 거 같습니다. 정식 계약일에는 최도협 쉐프도 직접 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동생과 정 실장과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이 주일간의 인수인계가 끝나자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왔고, 정식으로 사직서를 인사과에 제출했다.
퇴직금까지 알뜰하게 다 받아 챙길 예정이었다.
내가 부자인 걸 아는 인사과 권영두 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산으로 가기 전에 김한철 차장과 김승재 대리를 데리고 신라 호텔 뷔페에서 밥 한 끼를 샀다.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서 웨이팅을 하거나 혼자라고 해서 찝찝하게 먹고 오기보다는 서울의 다양한 호텔 뷔페를 도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도 호텔 뷔페에 대만족했다.
“그럼, 이제 여기 뷔페는 못 오겠네요.”
내일 부산으로 간다는 말에 김승재는 공짜 뷔페에 못 온다고 아쉬워했다.
“다음에 서울 왔을 때 또 오면 되지.”
“네? 퇴사하시고 나서 또 오시는 거예요?”
“이 사람아, 내가 다시 또 같이 일할 수도 있잖아. 그때 또 뷔페에 오자고.”
새로운 라면으로 다시 만나서 거래를 해야 했기에 서울에는 자주 와야 했다.
그걸 두 사람에게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기에 혼자서 재미있었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보겠죠.”
***
차를 끌고, 경남 산청의 농공단지로 향했는데, 문성철 대표가 여기에 공장 터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산청시에서 땅값을 싸게 줬거든. 우리가 또 식품제조이다 보니 다른 공장과 최대한 떨어진 논밭 근처로 알아봐 주더라고.”
공장이 들어설 부지가 2천 평이었는데, 축구장 크기만 했다.
창고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해도 엄청 큰 공장이었다.
“계획으로는 하루에 60만 개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넣을 겁니다.”
“그럼 1년에 2억 개 생산이 가능한 거 아닙니까?”
“네. 그렇죠. 저는 임 차장님. 아니. 임 이사님의 그 지역 라면이 성공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크. 부담이 엄청나게 되는데요. 근데, 회사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태양 식품제조로 지었습니다.”
“햇살에서 태양이 된 거네요.”
“밝은 태양처럼 빛나라는 거죠. 하하하. 그리고, 임 이사님 방은 제 옆으로 했습니다. 공장은 아파트와는 달리 금방 짓기에 3개월이면 시험 생산이 가능할 겁니다.”
“그럼 일정을 뽑아보고 저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투자금을 보내는 것과 회사를 판 세금 문제를 같이 처리해야 하니 이지람 변호사 님이 연락을 드릴 겁니다.”
“그럼 투자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하.”
공장용지를 보고 내려오는데, 우리 회사 이름을 뭐로 할지 고민했다.
문성철 대표가 태양을 했으니, 우리는 달로 할까 하다, 매제처럼 스타가 되라는 의미로 스타 코퍼레이션으로 그냥 두리뭉실한 이름으로 하기로 했다.
뭔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느낌도 났지만, 수많은 별들처럼 많은 히트 작품을 만들어 내자는 그런 의미를 담았다.
부산에서 사업자 등록을 하고 김민욱과 김이서에게 퇴사하고 합류하라고 이야길 했다.
퇴사하고 온 두 사람과 부산에서 일할 사무실을 해운대에 구했는데, 바로 더 스타 빌딩이었다.
처음 구내식당을 만들었던 비즈니스 빌딩에 입주를 한다는 게 뭔가 재미가 있었고, 매일 구내식당을 잘 이용했다.
“해운대라서 다행이에요. 저는 공장이 경남 산청에 세워진다고 해서 걱정 엄청나게 했어요.”
“해운대가 특수 지구나 마찬가지이다 보니 일을 하기가 좋지. 그럼, 이제 둘에게 브리핑을 해야겠네. 우리 회사가 뭘 할지 제대로 알려주마.”
내 나름대로 준비한 ppt를 보여주며 둘에게 설명을 했다.
해운대 라면이 성공한 만큼 향토지역을 대표하는 라면 시장을 열어보자는 브리핑이었다.
둘 다 인천 하면 차이나타운이 있어서 짜장면과 짬뽕이 특산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고, 강원도 하면 감자라는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알았기에 설명을 하기가 편했다.
“대전 같은 경우에는 성신당 같은 유명한 지역 빵집과 콜라보로 라면을 출시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거기 부추빵이 제일 유명하니깐 부추라면 같은 걸로요.”
“그래. 민욱이! 내가 그런 걸 원했다고. 지역민들이 좋아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그런 지역 특산물, 명소, 랜드마크 같은 게 있을 거란 말이야. 그런 것을 먼저 조사해. 지자체의 대표 생산물도 좋고. 그런 것과 엮인 라면을 그 지역의 이름을 걸고 출시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사가 끝이 나면 그런 향토식품을 넣은 라면을 우리가 만들어 먹어보면서 맛을 정하고, 민욱이가 지자체에 영업을 하러 가게 될 거야. 둘 다 뭘 해야 할지 알겠지?”
“네. 맡겨주십시오!”
민욱이와 이서는 자신들이 바닥부터 조사를 하고 제품을 기획해서 출시를 하게 된다면, 뭔가를 만들어 내었다는 성취감으로 인해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될 터였다.
내가 바로 그랬으니깐.
그리고, 젊은 친구들이 활력 있게 일을 할 때 앞에서 끌어줄 중견을 데리고 와야 했다.
“그래. 동규야 일요일 양산 CC에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