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인수인계. (2)
가족 모임에서 정은애 실장의 명함을 받았기에 바로 연락을 했다.
“실장님. 거산에서 라면 초상권 관련으로 계약을 하자고 해서 금요일로 시간을 잡았습니다.”
“아, 그렇지 않아도 거산의 누구와 컨텍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행이네요.”
정 실장과 일정 이야길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정 실장이 말을 끌었다.
“그런데,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임 대표님이 돌싱이라고 사장님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아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아, 그게, 제가 있던 윙스터 엔터가 배우들 전문 회사였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뚜쟁이 같은 일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무하고나 연결해 드리지는 않고, 검증되신 분들과 연결을 해드리고 있고요.”
정은애 실장과 통화를 하면서도 뭔가 꺼림칙했다.
“사실 배우라고는 하지만은 소위 말하는 뜨기 전까지는 일반인과 다 똑같거든요. 집이 잘살아서 서포터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다들 배우자로 금전적인 여유가 있으신 분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네. 부유한 배우자를 원하는 건 다 같겠지요.”
말은 부드럽게 받아 줬지만, 속으로는 이게 말로만 듣던 스폰서 연결해 주는 그런 건가 싶었다.
엔터 쪽에 이런 일이 있다고 뉴스에서나 봤는데, 이제 도협이가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다녀오셨다고 하지만은 아직 젊으시고 해서 제가 아는 여배우와의 만남을 주선해 드리고 싶어서요.”
“흠. 일단 그렇게 좋은 배우자라고 생각해주시니 좋긴 하지만, 사실 걱정도 됩니다. 이게 세간에 이야기하는 그런 거 있잖습니까. 그런 거일까 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호호호. 어떤 생각하시는지 다 알겠어요. 헌데, 그런 나쁜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착한 여배우가 있는데, 무명으로 오래 있고 해서 정말 좋은 배우자를 소개해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나쁜 거 아니니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하시면 임 사장님께도 이야기를 하셔도 됩니다.”
“아 건희도 아는 여배우인가요?”
“네. 이왕 엔터 회사를 차렸으니깐 최도협 쉐프 말고도 소속 인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아는 인맥들을 영입할까 해서 임 사장님도 같이 만나보고 했습니다.”
“흠. 일단 요즘 제가 너무 바빠서 안 될 거 같고, 다음에 제가 연락을 한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금요일에 거산 본사에서 뵙겠습니다.”
정은애 실장과 전화를 끊고는 건희에게 전화를 하려다 톡으로 보냈다.
정은애 실장과 같이 있는데 바로 연락하기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짜 정 실장의 말처럼 뉴비치엔터에 몇 명의 배우를 받아들이려고 몇 명과 만나봤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뉴비치 엔터란 이름이 더 그쪽을 생각나게 하는 것 같았다.
“아 이 문디 가시나 이름을 이딴 걸로 지어서는...”
***
“아니, 너무 서운한 거 아니냐? 아무리 퇴사 전 인수인계하러 왔다지만, 이제 연락을 하냐.”
“죄송합니다. 선배님.”
“야 그렇게 저 자세로 나오면 내가 뭐라고 할 수가 없쟎냐. 이젠 나보다 직급도 더 높은데. 거디가. 돈도 훠어얼씬 많네.”
인사과의 권영두 과장은 학교 동문 선배이자 응원단 선배이기도 했다.
그리고 본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내가 라면으로 대박이 난 것을 아는 선배이기도 했다.
“그럼 오늘 비싼 거 먹고 좋은데 달리는 거다!”
“네. 선배님 오늘 제대로 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권영두 선배가 내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장 T/O가 아닌데도 억지로 부산 지사로 발령을 내어주었고, 그 덕분에 로또도 걸렸었다.
그 당첨금이 해운대 라면이라는 아이템에 투자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으니 권 선배에게는 술을 한두 번 쏘는 걸로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배가 가자는 데로 계속 가다 보니 삼성동에서 유명한 속칭 셔츠룸이란 곳까지 오게 되었다.
“야! 내 인생의 낙이 이거야!”
딸과 마누라를 캐나다로 보낸 기러기 아빠다 보니 이런 유흥을 즐기는 게 권 선배의 유일한 낙이었던 것이었다.
선배는 아주 단골인지 여자들도 아는 척을 했고, 내게도 달라붙었지만, 그냥 셔츠만 벗어주고 최대한 선배를 왕으로 대우해주라고 팁도 꽂아줬다.
무려 4명을 붙여줘서 그런지 선배는 아주 행복해했는데, 괜히 오늘 통화한 정은애 실장과의 통화가 기억났다.
그리고, 옆에 앉아서 안주를 집어주는 젊은 여자를 보니 전처 생각도 났다.
행복해하는 선배를 아가씨 네 명과 보내 주고는 이 주 동안 빌린 레지던스로 돌아와 누웠다.
건희가 여의도에서 지선이를 봤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터인데,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아니 괜히 마음이 더 그쪽으로 쏠렸다.
그래. 어떻게 사는지 한번은 가보자.
***
오후 2시에 김한철 차장에게 슬쩍 외근을 가야 한다고 하니 눈치껏 가라고 해줬다.
사실, 알려줄 거 다 알려줬고, 서류도 다 넘겨주었기에 궁금한 거 물어보는 게 아니라면 더 인수인계해 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전처가 일하고 있다는 여의도로 가려는데, 본사가 있는 가산동에서 여의도까지 4~50분이나 걸린다는 게 생각났다.
예전 서울에 살았을 때였다면 그러려니 할 테지만, 부산에서 어디든 30분 내외로 움직이다 올라왔기에 이런 시간이 아까웠다.
그리고 그냥 뚜벅이보다는 멋진 차를 몰고 있는 모습을 지선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가는 길에 벤츠 매장이 보여 바로 들어갔다.
의사인 동규의 차가 벤츠 C220이었기에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C클라스 대신에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검은색의 SUV가 눈을 채웠다.
사각으로 각져 있는 비주얼에서 오는 압도감이 있었다.
“G클래스는 남자의 자신감이죠.”
다른 차는 보지 않고 G클래스만 보고 있자 영업사원이 말을 걸어 왔다.
“혹시 예약을 하시고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세단을 생각했는데, 이걸 보니 마음이 바뀔 거 같아서요. 혹시 시승은 되는가요?”
“아 고객님 안타깝게도 G클은 시승이 안되는 차량입니다. 이게 1억 5천이 넘는 차량이다 보니 전시 시승 차량이 잘 배정이 안 되어서요. 죄송합니다.”
영업사원은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차량 금액을 이야기하는 의도가 느껴졌다.
금액을 듣고 다른 차를 보라는 거였다.
뭐, 영업사원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정장에 목 뒤로 드러난 사원증 줄이 보였으니 끽해도 C클래스가 한계라고 판단을 했을 터였다.
그리고, 영업사원의 이 말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영업사원의 의도를 알았으니 기분 나빠서 다른 영업사원에게 바로 차를 일시불로 결제하는 가오를 보여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보험이나 이전이 안되었지만, 더 돈질해서 전시 차량을 바로 타고 나갈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전처에게 보여주고자 그렇게 돈질하는 게 쓸데없는 돈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구경 잘했습니다.”
매장을 나와서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움직였는데, 그러고 보니 여의도 방송국 옆에 어느 빵집인지를 몰랐다.
결국, 네인버 지도를 보며 일일이 빵집을 찾아 지나가는 척하며 빵집 안을 살폈다.
그렇게 4번째 빵집에서 지선이를 찾을 수 있었다.
카페와 빵집을 같이 하는 넓은 매장이었는데, 거기서 유니폼을 입고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온 것을 들킬까 싶어 길 건너 버스 정류장 기둥에 숨어서 지켜봤다.
이렇게 지켜보는 내가 뭔가 한심하고 꾸질꾸질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감정을 이길 만큼 가게 안의 지선이를 보고 싶었다.
밝게 웃으며 손님을 응대하는 모습을 보니 잘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예전부터 빵을 좋아했었다는 생각도 났다.
헤어진 지 1년이 넘었지만, 법원 앞에서 헤어질 때 모습 그대로였다.
지켜보면서 다시 같이 살자고 해볼까 고민도 했다.
“엇? 저놈 뭐야?”
제빵 조리실에서 나온 남자와 지선이가 자연스레 이야길 하며 서로 거리낌 없이 어깨동무를 하거나 팔짱을 끼듯이 서로 장난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
그런 웃음을 보니 지금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보자고 말을 하려고 했던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 1년이 넘는 시간이었지.
새로운 사람이 생기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정은애 실장의 이야기나 셔츠룸의 어린 여자를 보고 기껏 생각해낸 여자가 전처였고, 나름의 기대를 하고 찾아온 게 우습게만 생각되었다.
이미 남이 된 여자인데, 다시 살 생각을 했던 것이 우스웠다.
걱정과는 달리 저렇게 웃으며 잘살고 있으면 된 거였다.
물론, 미국놈들 마인드로 축하를 해주고 앞에서 웃어주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더는 버스 정류소 기둥에 숨어 볼 이유가 없어져 택시를 타고 바로 여의도를 벗어났다.
“기사님 여기 좀 세워주세요.”
BMW 매장 앞이었다.
우스갯소리로 BMW를 강남 소나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직장생활할 때는 아파트 대출금이 있다 보니 언감생심 살 생각도 하지 못한 차였다.
BMW도 벤츠의 G클처럼 덩치 크고 포스가 넘치는 차가 있었다고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거는 보지도 않고, 바로 x6 SUV를 구매하고 싶다고 했다.
“이거 계약하면 얼마 있다 나옵니까?”
“고객님. 오늘 계약하셔도 3주는 걸리십니다.”
“제일 빠른 거는요? 전시차량 같은 건요?”
“전시 차량이 있긴 있는데, 그 친구는 페이스가 작년 모델입니다. 저기 친구입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포스가 넘치는 올블랙이 아니라, 군청색의 파란색 차량이었다.
올블랙이어야 포스가 사는데, 검은색이 아니니 뭔가 노티가 나는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여태까지 판매가 안 된 건가 싶었다.
“이 차는 시승용으로 사용되는 차인데, 내일도 출고 가능합니다.”
“이건 얼마까지 할인됩니까?”
“가솔린 모델로 1억 2천인데, 천만 원가량 할인이 가능합니다.”
뭔가 구형 모델을 사갈 호구가 왔다고 생각하는지 영맨이 아니라 소장이 달라붙었다.
“2천 할인해서 1억에 주시면 바로 구매할게요.”
품에서 바로 카드를 꺼내서 소장에게 건네주었다.
“고객님. 아무리 그래도 2천만 원은...”
“지금 2010년까지 3개월 남았습니다. 2008년 모델을 1억 내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시승차로 계속 굴리는 거 같은데, 내년 되면 9천 해도 살 사람이 없을 겁니다. 아니면 인도 거부당해서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리스크 안고 사겠다는 겁니다.”
영업소장은 고민하다 내가 내민 카드를 받았다.
“일시불로 결제해 주시면 됩니다.”
서류처리를 하는 중에 차를 살폈다.
시승을 엄청나게 했는지 전시 차량인데도 킬로 수가 3천 킬로나 되었다.
서류이전과 더불어 중고차를 샀을 때처럼 각서를 쓰고 바로 차를 전시장에서 뺐다.
영업소장은 외제차를 10년 넘게 팔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번에 1억짜리 차를 사며 즉흥적일 만큼 결정을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뭔가 심적 변화가 있었기에 지른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것도 그만큼의 경제력이 있으니 질렀다는 뜻이었다.
“고객님 제 명함입니다. 언제든지 차량 관련해서 연락 주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명함 한 장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영업소장은 전문직 종사자일 거라고 보고 그쪽 인맥이라도 건져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명함은 드릴 수 있는데, 이게 전 직장 명함이라 드려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헌데, 그럼 새로운 직장은 어디 신가요?”
“스타트업이라 아직 명함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이제 창업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