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인연과 사정들...
“도협 씨 방송국 일로 밥때를 놓칠 거 같아서 빵을 사러 갔는데 빵집에서 지선 언니가 일을 하고 있더라고. 아니, 뭐 이게 가보라는 그런 말은 아닌데. 그냥 거기서 언니가 일하고 있더라고.”
건희도 조심스레 이야길 했지만, 전처인 지선이는 내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미안해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 알았어. 일부러 시간 내서 보러 갈 이유는 없겠지.”
“그래. 일단 그렇다고. 알고는 있으라고. 그래서 전화 한 거야. 끊을게.”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이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명쾌한 답이 나올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번 깨진 그릇을 강력 본드로 붙여본들 그 자국은 남을 터였고, 다시 힘이 가해지면 그 부분에서부터 깨어질 터였다.
그저 인연이 있으면 여의도에 갔을 때 볼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못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애써 지선이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
“차장님 일주일 정도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4과의 김민욱은 시간을 달라고 했다.
김승재처럼 대기업의 간판이 필요하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제 입사 2년 차로서 바로 회사를 그만두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을 터였다.
“그래, 천천히 생각해봐. 급한 건 없어.”
김민욱이 결론을 내려 퇴사하더라도 인수인계라던지 그런 문제들이 있기에 한두 달은 걸릴 터였다.
반면에 김이서는 내 말을 듣고는 바로 퇴사하겠다고 이야길 했다.
“계약직이라 내년에 끝이 나는데, 뭐 1년 빨리 그만두는 걸로 생각하면 되죠. 근데, 차장님 새 회사에는 계약직이 아닌 거죠?”
“그래. 창립멤버로 정직원일 거다.”
“전 그거면 돼요. 차장님 이제 부자니깐 월급 밀리고 하는 건 없겠죠?”
“그래 그건 확실히 해주마, 그리고 월급 인상도 해주마.”
“오! 그럼,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는 거예요?”
“일단 퇴사 인수인계 다 해야 하니 그때 이야기해주마.”
이신애 때문에 괜히 회사 잘 다니는 사람들을 퇴사 시켜시키는 거 아닌가 했지만, 오히려 좋다고 이직하겠다는 이서의 반응에 힘이 났다.
그만큼 자신을 믿고 따른다는 생각에 든든했다.
“그런데, 전에 내가 구두 사라고 상품권 줬잖아? 왜 그때 그 구두 그대로냐? 구두 안 사고 옷 산 거야?”
6개월 전인가 PC방 관련해서 일을 부탁했을 때 구두 앞코가 다 까져 있는 것을 보고 백화점 상품권을 줬었다.
헌데 그대로 옛날 그 신발을 신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아, 그게 동생이 있다 보니깐 애들 신발 사줬어요.”
상품권으로 다른 짓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고 보니 김이서에 대한 것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미성년자 약취인가 하는 죄로 소년원을 다녀왔다는 것 말고는 이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동생이 몇 명 있는데?”
“남동생 하나랑 여동생 하나요.”
“둘 다 중고등학생이겠네.”
“남자애는 중학생이고 여자애는 이제 초등학생 6학년이에요.”
“...그럼 이번에 이직하기로 했으니깐 내가 너 신발 사준다. 오늘 마치고 보자.”
부모님이 계신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건 괜히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냥 새 신발을 사주겠다고 이야길 했다.
사실 부모님 여부나 다른 것도 정진이를 통하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아니다, 둘만 가면 또 말 나올 수 있으니깐 민욱이도 데리고 가고, 네 동생 둘도 불러.”
“네? 그래도 돼요?”
“되지 안될 거 뭐가 있어. 애들 학원 안 가고 하면 집에 있으면 데리러 가면 되지. 마치고 밥도 먹고 백화점에 신발 사러 가지 뭐.”
이서는 비서 겸 서류 정리를 전담시킬 예정이었기에 가족들에게도 뭘 좀 먹이면서 정을 붙여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밥도 사주고 신발을 사주면서 잔정을 붙여둬야 신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마치고 보자.”
***
“그런데, 본사에서 임 차장 퇴사 안 시켜 준다는데.”
이창모 부장은 내 사직서를 받고는 다시 돌려줬다.
“네? 왜요? 사직서 오늘 내면 인수인계하고 하다 보면 월급날 이후로 퇴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인수인계를 서울에서 하래. 새로운 팀이 만들어지는데, 거기 가서 전체적으로 인수인계 다 해야 퇴사할 수 있게 한다고 하네. 사직서도 서울 가서 내도록 해.”
“그럼, 서울 출장이나 마찬가지인데, 체재비는 다 챙겨 줄 거랍니까?”
“아, 돈 많은 사람이 왜 그래? 그냥 좀 베푼다는 생각으로 좀 해.”
“뭐, 이 부장님이 그 팀 수장이시면 그렇게 하겠는데, 왜 이 부장님 대신에 다른 사람이 그 팀에 수장이 되는 겁니까?”
“그거? 그냥, 내가 싫다고 했어.”
“네? 왜요? 왜 그러셨는데요?”
“뭐, 사실 라면 쪽을 나도 잘 모르기도 하고. 버터 바른 오징어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있고. 그리고, 나마저 여길 뜨면 어떻게 되겠어?”
다들 처음 하는 라면 일인데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라고 이야길 하려고 했는데, 생각나는 게 있었다.
김한철 차장이나 김승재를 비롯해서 상품 판매 관리부의 바쁜 사람들은 다 서울로 가게 된 것이었다.
해운대 라면을 팔며 판매관리비로 매출을 억대로 잡았던 상품판매관리부는 다시 예전의 묫자리 부서라 불렸던 그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묫자리로 돌아가더라도 부서를 지켜가겠다는 것이 이창모 부장의 생각일 터였다.
“자네가 라면 상품 하나로 대박을 터트렸듯이 남아 있는 우리들도 그런 상품을 만들어내야지. 그게 우리 부서잖아.”
이창모 부장은 요즘은 보기 힘든 미련한 사람이었다.
새로 생기는 부서에 부장으로 가기만 해도 성장세와 매출을 그냥 다 가질 수 있었다.
그러면 연차도 있기 때문에 봉급쟁이들의 꿈인 대기업 임원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한데, 그걸 거부하고, 묫자리에 남겠다는 거였다.
아니, 미련한 게 아니라 외골수이자 고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뚝심 있게 자리를 지켜주었기에 거산이란 회사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신기술의 신성, 관리의 대현, 화끈한 한정처럼 각 기업에 붙는 단어를 재미 삼아 이야기할 때 거산은 뚝심이란 단어가 붙었다.
신기술도 없고, 관리도 잘 안 되고 하지만, 따라 하기 Me Too 전략으로 덩치를 크게 키웠고, 뚝심 있게 일을 진행하다 보니 업계 1위는 없어도 업계 2~3위는 여러 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거산의 창업자였던 최민배도 그랬다.
낮은 인건비를 강점으로 미국과 유럽의 의류 회사들에게 하청을 받아 수익을 올릴 때도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며 뚝심 있게 몇 번이나 브랜드를 런칭했었다.
물론, 대부분이 망했지만, 그중 두 개의 브랜드는 살아남아 거산의 의류 부분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런 뚝심 있는 창업자인 최민배처럼 이창모 부장도 뚝심있게 지금의 자리에서 뭔가를 해보려는 것이었다.
이창모 부장이 보여주는 이런 뚝심이 1위 탑이 되는 것은 힘들어도 거산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 좋은 상품이 있으면 그때 또 납품하러 오겠습니다.”
“다음에는 인정사정없이 피 많이 받을 거야.”
***
“차장님 저기에 서 있는 애들이에요.”
“애들아 타라!”
중학생인 남자애와 여자애는 조수석의 김민욱이 타라고 하자 멈칫했는데, 뒷좌석의 이서를 보고는 얼른 뒷자리에 올라탔다.
“너희들 뭐 먹고 싶은 거, 아니다. 뷔페로 가자.”
수정동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서면의 노태 백화점과 호텔로 움직였다.
애들도 있으니 멋지게 호텔에서 발레파킹을 맡기고 싶었지만, 스포티지는 호텔 정문 앞에 왔는데도 문도 안 열어 줬다.
“로비에 주차하고 갈게.”
폼나게 도어맨이 와서 문을 열어주는 독일 차로 바꿀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좀 더 타다가 다른 국산 차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는 승차감보다 하차감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괜히 부자입네 하다 보면 피곤한 일이 더 많이 생길 터였다.
주차를 하고 5층으로 올라가니 확실히 부산에서 최고의 뷔페라는 말이 체감이 되었다.
서울 시청의 더 프라자 호텔에 비해서도 더 좋았다.
뭔가 자주 왔다는 듯이 안내를 하고 싶었지만, 나도 처음이라 스탭에게 물어서 움직였고, 5석 자리가 없어 8인석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예약을 하고 오자. 그러면 야경 보이는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 같네. 자 가서 음식 들고 와!”
다들 음식을 가지러 갈 때 스파클링 와인을 시켰고, 애들이 집에 갈 때 가져갈 수 있게 쿠키와 케익류를 별도로 주문을 했다.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아이들도 좋아했지만, 이서와 민욱이도 고급스러운 뷔페에 왔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차장님. 새로운 회사는 뭘 하는 회사인가요? 사실, 뭘 알아야 고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먹는 것이 제법 들어가자 일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만드는 회사에 대해서 아예 하나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퇴사하고 오라고 했으니, 내가 멍청했다.
“그렇네. 그런 이야기도 안 했네. 일단 둘 다 해운대 라면을 팔았다는 건 들었을 거야. 공장까지 다 거산에서 인수했다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헌데, 라면이 잘 팔려서 지금 그 공장 하나로는 커버가 되지 않아. 그래서 새로운 2공장을 짓는데, 거기에 내가 임원으로 들어가. 이서는 내 밑에서 서류 쪽을 맡아주면 되고, 민욱이는 지금 하는 일과 비슷한 영업 관리를 하게 될 거야.”
새로운 지역 라면을 만들어서 팔 거라는 것은 나름 엄청난(?) 비밀이었기에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했다.
새로운 회사가 뭘 하는 회사인지 알게 되자 그제야 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뭐 하는 회사인지도 모르고 가겠다고 한 이서가 특별한 케이스였다.
“당연히 연봉도 20%씩 인상해 줄게. 이서는 계약직이라 좀 더 올려주게 될 거고.”
김민욱은 이야길 듣고 마음을 굳혔다.
사실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따라가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본 임건호 과장은 뭔가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긴 했으나,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부산에서 단체 급식으로 뭔가를 더 뚫을 만한 곳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소규모 업체들이 입주해 있는 비즈니스 빌딩에서 단체 급식을 만들어 내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내었었다.
그리고, 승진과 더불어 묫자리라는 곳에 가서는 상상만 하던 대박을 터트려 수백억대의 부자가 되었다.
김민욱이 보기에는 그런 것이 다 운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능력이 있고, 보는 눈이 있으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것이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을 자신도 배우고 싶었다.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자신의 롤모델이 바로 임건호 차장이었다.
옆에서 있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도 그런 눈을 가지게 될 것이라 믿었다.
“차장님. 함께 하고 싶습니다.”
***
김이서의 구두는 물론이고, 동생들의 신발과 옷까지 백화점에서 다 사주었다.
이서는 부담된다며 백화점 내에서도 상설 할인 코너에서 사도 된다고 했지만, 이렇게 쏘는 거 흔하지 않다며 애들에게 나이키 운동화와 티셔츠를 사줬다.
“나중에 일할 때 더 열심히 해주면 되는 거야.”
그리고 이서의 집 근처에 내려 줄 때도 쿠키와 케익을 쥐여줬다.
“민욱이는 집이 어디라고 했지?”
“수영 로타리 근처입니다.”
“오 회사랑 가까웠네.”
“그래서 차가 없어도 편했습니다. 마을버스 한 번에 출퇴근했거든요.”
“백화점에서 이서한테는 작은 거 많이 사줬는데, 민욱이 너한테는 안 사준 이유가 있었거든 다른 거, 사주려고...”
“아유 전 그런 거 안 사주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럴까? 그럼, 새 차 안 사주고, 내가 타는 이차를 주마. 자식이 분명 안 사줘도 된다고 했다. 영업도 해야 해서 좋은 차 사주려고 했는데, 대를 이어서 이 스퍼티지를 물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