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퇴사?
“오전에 말이야. 동일 업종 금지 건으로 금액을 계속 깔 때 진짜 ‘그래서 할겨말겨! 딱말햐!’ 이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니깐.”
“선배가 급할 때 나오는 충청 사투리 들었다면 바로 도장 찍었을 겁니다. 하하하.”
계약이 마무리된 기념으로 호텔의 한식당 룸을 빌려 저녁을 먹고 술을 한 잔씩 했다.
정진이는 물론이고 변호사인 이지란 선배와 문대표의 변호사까지도 술이 들어가니 텐션이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것이 700억대의 기업 인수 건을 맡아서 일을 처리한 것이니 그들의 변호사 경력에도 주요 실적으로 들어갈 만한 일이었다.
“그럼, 얼마를 새 공장에 투자해 주실 겁니까?”
“아니, 문 대표님 오늘 공장을 넘겼는데, 바로 새 공장 이야기입니까?”
“하하하. 초심을 잃지 않으려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지요. 일이 일단락되었다고, 퍼져서 있다 보면 그 일하는 자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새로운 일을 바로 시작하려는 문 대표를 보자 나도 자극이 되었다.
특히나, 로또의 저주(?)에 한번 걸렸던 적이 있었으니, 그보다 더 큰 금액을 가진 지금이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때였다.
로또 당첨자들 중 흥청망청 쓰지 않고, 인생의 행복을 추구했다고 인터뷰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로또에 당첨된 이후에도 직장을 퇴사하지 않거나 하던 일을 계속했다고 했다.
늘 하던 평소의 일을 하면서 그동안 해보지 못한 일탈을 즐기는 것이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했다.
그런 인터뷰 내용과 문성철 대표의 새 일을 찾는 적극적인 행동이 같은 맥락이라고 느껴졌다.
“그럼, 오늘 까인 금액 30억 만큼 투자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임원 자리 하나만 주시면 됩니다.”
“그거면 됩니까?”
“네. 나머지는 그냥 새.로.운 라면만 잘 생산해 주시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뭐 다른 거도 해야 합니까? 생산 쪽은 잘 모르는데...”
“하하하. 다른 거 할 거 전혀 없습니다.”
문성철은 임건호의 말을 듣곤, 기분이 좋았다.
본래 문성철은 투자와 동업으로 사업을 하는 형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끼리도 투자를 받거나 동업을 하게 되면 싸우고 의가 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건호에게 투자를 받으려고 한 이유는 그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장과 생산에 간섭을 하지 않는 사람.
즉, 공장 운영에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공장에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임건호였으니 최적의 동업자였다.
애초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속칭 말하는 기(?)가 센 사람들이었고, 그런 기가 센 사람들과 동업을 하게 되면 서로의 기를 펴기 위해 싸우다가 사업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가 세더라도 서로가 자신의 업무만 신경을 쓰고 다른 이의 영역에 신경을 꺼준다면, 애초에 싸울 일이 없는 것이었다.
“공장은 칠곡이나 그 인근일 것 같은데, 그래도 되겠지요?”
“네. 그런 지역이 지자체 혜택이 많으니깐 저는 찬성입니다. 애초에 매일 출근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건호도 투자를 해서 임원으로 월급을 받더라도 열심히 회사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새로 만들어 내는 지역 향토 브랜드 라면을 제대로 만들어만 준다면 그거로 충분했다.
서로가 서로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한다면, 다른 문제가 일어날 리 없었다.
매각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하루 정도는 흥청망청 업소에 가서 술을 마시고 즐겨도 되었지만, 오히려 새로운 일에 대해서 논의한다고 한식과 함께 나온 술도 마시지 않았다.
공장을 다 넘기는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새 공장 부지가 결정되면 다시 만나 그때 투자 건을 문서화 하기로 마무리했다.
호텔 방에 올라와 정진이에게 변호사 수임료 1억을 보내주었다.
변호사인 이지란 선배와 어떻게 나누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2주 조금 넘게 일하고 몇천만 원을 벌었으니 괜찮은 건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지란 선배도 충청도 출신이라 그런지 사람이 여유가 있었고, 정진이와도 꽤 친한 선배였기에 나중에 다른 법적인 일이 있을 때도 신세를 지기로 했다.
커컹컥걱 큐우우으~
커걱컥컥 크르르르~
그리고, 정진이는 진짜 코골이 병원에 꼭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잠이 들었다.
***
“오빠. 나 호텔 그만두기로 했어.”
집에 오자마자 호텔을 그만두겠다는 동생의 말에 벌써 회사를 팔았다는 소문이 난 건가 했다.
“도협 씨가 이제 매니저가 있어야 하겠대. 스케줄도 이제는 따로 챙겨줘야 할 정도로 일이 생겼어. 그래서 내가 일 그만두고 매니저 하려고.”
“아아, 그거 때문에? 그럼, 다행이네.”
“그럼 뭐 때문에 호텔을 그만두겠어. 도협 씨도 서울, 경기 위주로 하기 위해 호텔에 그만둔다고 했는데, 호텔에서는 도협 씨를 어떻게든 잡더라고. 그래서 일주일에 이틀은 또 부산에 있어야 해.”
“호텔 입장에서도 당연히 도협이를 잡지. 이젠 진짜 스타 셰프인데.”
“그래서, 매니지먼트 회사를 세워야 하는데, 정진이 오빠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정진이도 법적인 부분만 잘 알아. 회사 설립이나 그런 건 내가 해줄게.”
“오케이. 그럼 내 이름으로 매니지먼트 회사 만들어 줘. 이름은 ‘최선’으로 해줘.”
그렇지 않아도, 세금 문제나 그런 부분을 내가 챙겨줘야 했기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럼 이건 회사 출자금으로 주마.”
기존에 건희가 쓰고 있던 통장으로 5억을 넣어줬다.
“헉! 오, 오억? 오빠 이거 무슨 돈이야? 어디서 이런 돈이 났어?”
“네 이름으로 되어 있는 라면 회사 판다고 했잖아. 그 돈의 일부분이야.”
“일부분? 그럼 더 있다는 거잖아? 얼마에 팔았는데? 얼마에 팔았길래 이렇게 5억이나 그냥 주는 거야? 와 미친! 5억이 한 번에 입금되는 건 또 처음 보네.”
“음. 대충 백억대로 팔았다.”
“배,배, 백억? 지, 진짜야? 진짜 백억? 와! 그럼 나 일 안 해도 되잖아? 그냥 건물 사서 월세 받고 하면 되는 거네. 와 미친!”
“야야. 네 돈이 아니라 내 돈이거든. 니 명의 빌린 값이 5억이야. 어디서 내 돈에 무임승차하려고 각을 잡아! 신혼집으로 빌라도 줬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데, 진짜 100억에 해운대 라면을 사 갔다고? 와아 뒈에박!”
건희는 백억대로 팔았다는 말을 백억으로 알아들었고, 와 진짜야? 이 말을 몇 번이나 외쳤다.
“그런데, 이건 도협이에겐 비밀로 해라.”
“왜? 안 그래도 이게 인기 좀 있다고 간이 좀 커지고 있던데, 우리 집이 이제 부자라는 걸 알려줘야 신혼 초 기세를 제압할 수 있지.”
“그래서 비밀로 해야 하는 거야. 지금 인기 조금 있다고 간이 커져 있는데, 집에 돈이 생겼다고 하면 뭐 하겠어?”
“으음...아마도, 가게를 내고 싶어 하겠지?”
“그래. 나중에 진짜 인기 많고, 뭘 하든 최고의 음식을 할 수 있으면 그때나 차려야 하는데, 지금 돈 있는 거 알고 애가 초심 잃고 바보짓 할 수도 있어.”
건희에게 초심을 잃으면 안 된다고 이야길 하면서도 낯이 간지러웠다.
자신이야말로 로또에 걸렸다고 천방지축으로 설치고, 사람들을 아래로 봤었던 적이 있었기에 부끄러웠다.
그리고, 매제가 자신처럼 인기나 돈에 취해 초심을 잃고 막 나가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긴, 안 그래도, 다른 셰프들은 다 오너 셰프인데, 자기는 아니라고 좀 부끄러워하는 게 보이긴 했어. 돈이 없으니깐 참고 있는 거겠지?”
“그래. 돈 있는 거 알면 바로 돈 들여서 가게 큰 거 하자고 할 거다. 남자는 다 마찬가지거든.”
“오케이. 나중에 진짜 방송일로 돈 벌게 되면 그 돈으로 가게 하자고 그때까지는 초심 잃지 말고 킵 고잉(keep going) 해라고 해야겠어.”
“그리고, 네가 매니지먼트를 차리게 되면 거산이랑 라면 패키지 광고 계약을 새로 해야 해. 솔직히 너나 나나 엔터 사업을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러니, 그쪽 업계에서 4~5년 이상 되는 실장급을 구인해봐.”
“오! 광고? 와 맞다. 그 생각을 못 했네. 라면이 팔렸으니깐 광고 계약도 해야 하는 거네. 와! 이거도 대박인 거네.”
“아직은 큰돈은 안 되겠지만, 티브이 광고나 지면 광고도 할 거니깐 지금의 깔끔한 셰프 이미지를 잘 관리해야 할 거야.”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우선 실장급을 빨리 영입해야겠네.”
“그런데, 너네 결혼식은? 10월에 하기로 안 했어?”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파. 혼인 신고는 되어 있는데, 아직 총각 셰프로 알고 있는 곳도 많고 해서.”
“네가 미리 혼인 신고해서 도망갈 여지 없게 잘한 거 같지?”
“아니거든. 그 반대일 수도 있거든.”
괜히 건희는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일단, 일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보니깐 결혼식은 연기해야 할 거 같아.”
“그래. 물 들어올 때 열심히 노 저어야지. 이미지를 잘 만들어. 그래야 나중에 가게를 차리든 뭐든 다 될 거니깐. 그때도 내가 도와줄 테니까 자신감 있게 뭐든 해봐.”
“알았어. 오빠 사랑해!”
“아 됐거든. 사랑은 도협이에게만 줘라.”
***
이튿날 회사로 출근하니, 라면 인수 건이 소문이 나서 그런지 다들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리고, 김한철 차장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내가 아니라 김한철 차장이 대박난 줄 알 것 같았다.
“그게, 내부 승진 관련으로 정보가 떴거든요. 별도의 라면 사업부를 만든다고 하는데, 거기 부장으로 김한철 차장님이 내정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쪽으로 간다고 하네요.”
“오! 그럼 승재 너도 과장으로 승진하는 거 아냐?”
“헤헤.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사람 좋게 웃는 김승재를 보면서도 의아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창모 부장이 책임자가 되고 상품 판매 관리부에서 그대로 해운대 라면을 핸들링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따로 부서를 만들어 사업부를 새로 만드는 것을 보니 위에서 뭔가 조율이 된 거 같았다.
“그럼, 승재 너는 퇴사할 생각이 없겠구나.”
“네? 퇴사요? 왜요?”
“내가 계속 다니기가 좀 애매하잖냐. 그래서 창업을 하려고 승재 너를 데리고 가고 싶었는데. 어때 생각 있어?”
“아아아아. 제가 그게...”
김승재는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하지를 못했다.
“이제 과장 다는데, 좀 무리긴 하지?”
“아니, 그게 저는, 진짜 차장님을 따라가고 싶은데, 제가 장가를 가려면 대기업 간판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았어. 그래 해운대 구청 언니랑은 잘되어가고?”
“그것이 아직도 좀 그렇습니다. 하여튼 그쪽에 가져다 대려면 대기업 간판이라도 있어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스카웃 제의였는데.”
“이젠 자주 받게 될 거야. 연애 사업 때문이라면 다 이해되지.”
이신애 건 이후로 어떻게든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외모는 볼품없어도 나름 일을 할 줄 아는 김승재 대리를 데리고 가고 싶었었다.
하지만, 연애 사업에 쓸 간판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에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업 4과의 김민욱과 김이서에게도 같이 가자고 이야길 할 생각이었는데, 둘 다 사원급이라 대리급이 필요했다.
그리고, 김민욱도 대기업 간판을 버리고, 이제 시작하는 작은 회사로 이직을 하겠다고 할지 염려스러웠다.
4과로 가려고 나서는데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어 그래 왜?”
“오빠, 밥은 먹었어?”
“점심 이제 먹으려고. 왜?”
“그게...이야기해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야아! 설마 어제 준 돈 벌써 다 쓴 거냐? 사기라도 당했어?”
“아니, 돈 이야기가 아니라고! 좀 들어봐.”
“그래. 무슨 이야기인데, 이리 뜸을 들여?”
“그게...지선 언니를 여의도에서 봤거든.”
괜히 뜸을 들이길래 뭔가 했는데, 헤어진 전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