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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으로 유통재벌-42화 (42/203)

042. 기다림의 낚시.

여·적·여.

‘여자의 적은 여자다’ 의 줄임말이었다.

본래 건호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고, 부정적으로 봤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여적여란 말에 들어있는 괴롭힘이었다.

이창모 부장은 말년 병장 건드리는 게 아니라는 관념으로 다음 달이면 나갈 사람이니 괜히 분란을 만들지 말라고 했었다.

그 말도 맞았기에 내가 손대지 않고, 같은 계약직 여직원들에게 맡겨 버렸다.

당장 내일부터 소문을 들은 계약직 직원이라면 백안시(白眼視)할 것이 뻔했고, 여직원들의 커뮤니티를 통한다면 서울까지도 이야기가 퍼질 수 있었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이런 일에 지독하게 집착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나를 대신해 알아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안겨줄 터였다.

그거면 서류를 유출한 죄과는 충분할 것 같았고, 내 자잘한 복수에 이용된 김이서에게는 나중에 뭐라도 사줘야 할 것 같았다.

“임 차장님! 자리에 오면 김독수 전무님 방으로 바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회사와 상표권을 넘기는 것에 하루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는데, 아침부터 물어볼 생각인 듯했다.

“그래. 바로 갈게. 킁킁 근데 이거 무슨 향수냐? 오늘 해운대 구청 들어갈 일 있는 거야? 36만 개 아직 계약 안 된 거야?”

“그게...오늘 확실히 계약 마무리 짓고 다음 주에 정식 계약서에 도장 찍도록 하겠습니다.”

김승재는 뭐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는데, 왠지 혼자서 헛물만 켜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 잘하자.”

김승재의 어깨를 두들기고 나가려고 하다 언뜻 떠오르는 게 있어 다시 김승재를 잡았다.

“김 대리 우리 해운대 구청 납품 일 이거 누구누구 알고 있는 거냐?”

“에? 차장님과 저 말고는 아직 아무도 모를 건데요.”

“그래?”

“계약 결정 나면 보고하려고 했는데, 다음 주에 계약할 것 같다고, 부장님께 먼저 보고서 올릴까요?”

“아니. 아니야. 일단 비밀로 해. 니 연애 사업하고 살짝 연계되어 있으니깐 일단 비밀로 가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제 연애 사업이 잘되면 그때 같이 이야기하자는 거지요? 헤헤헤. 제가 그런 건 또 잘 압니다.”

“어. 어 그래. 그 말 맞아. 일단 이 건 비밀로 하고, 서류도 이신애 씨나 부장님께 보이면 안 되는 거야 알겠지?”

자기 연애 사업 때문에 이 건을 비밀로 하자는 걸로 이해한 김승재는 입이 무겁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건호가 해운대 구청 납품 건을 비밀로 하자고 한 이유는 다른 이유였다.

해운대 라면의 가격을 올려받기 위한 히든카드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해운대 구청을 시작으로 부산라면, 경기도라면, 충청라면, 전라도라면 등등 지자체 관련 라면을 납품하는 것은 일단 숨겨둬야 했다.

제시한 금액이 서로 맞지 않을 때 다른 지자체의 상표권까지 다 들고 있다고 협상 카드로 꺼낸다면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아직까진 지자체 납품 건이 비밀로 있어야 했다.

***

“어제 밤잠 못 잤지?”

“아닙니다. 꿀잠 잤습니다.”

“구라도 좀 잘 쳐야지 눈 충혈되어 있구만. 그래 얼마를 부를지 생각해 봤어?”

“어제 전무님 이야기 듣고, 공장 쪽에 연락을 하니 이재영 상무가 공장에는 300억 불렀다고 하더군요.”

“이 상무가 300억? 그래서, 임 차장도 300억 받고 싶은 거야?”

김독수는 짜증 난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지만,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기업 인수는 물론이고, 거래를 할 때는 가진 패를 먼저 다 내놓지 않는 게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헌데, 이재영 상무가 처음부터 300억을 불렀다면 거기서 위로 몇십억, 아니 몇백억까지도 더 교섭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김독수는 속으로 왜 첫 베팅부터 그렇게 크게 불렀는지 이재영 상무를 욕했다.

“공장에서 300억을 제안받았다고 하니 솔직히 마음이 혹합니다.”

“그래서 300억?”

“네. 저도 그만큼 받고 싶습니다.”

임건호의 말에 김독수는 임건호의 눈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거 같았지만, 자신에게 지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넣어서 쳐다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 배짱이 좋았다.

“그럼, 300억을 받아야 하는 그 가치를 본인이 평가해서 한번 서류 들고 와봐. 그 근거가 300억을 받을 수 있는 근거라면 그대로 주겠어. 다만, 그 근거가 공장이 300억 받으니 저도 300억 받고 싶다는 유치원생 같은 생각이라면 거래 깨지는 거다.”

“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전무실을 나와 계단으로 움직이는데, 예상 밖이었던 김독수 전무의 말이 떠올랐다.

‘가치 근거를 가져올 수 있다면 300억을 주겠다.’

밤새 고민했던, 상표권의 가치가 그 정도 된다고 김독수 전무에게 인증을 받은 것과 같았다.

상표권과 생산 공장을 합쳐서 600억.

뭔가 많다고 생각하면 엄청 큰 금액이지만, 실제로 공장을 세우고, 신제품을 개발해서 출시까지 하는데도 그 정도의 투자금은 필요했다.

오히려 600억으로 승승장구하며 커가는 신규 라면의 이름과 생산 공장을 쉽게 확보할 수 있으니, 기업 입장에서는 이게 시간을 줄일 수 있기에 저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김승재에게 입단속을 시킨 지자체 상표권까지 거래의 저울에 올리게 된다면 더 불러도 되는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전무의 방을 나왔을 때는 당장 가치평가서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 가치의 상승을 위해 시간을 끌기로 했다.

이제 7월 여름 시즌의 시작이었으니깐.

이 3개월 판매 추이와 판매량을 가치 판단의 자료로 써서 가치를 환산하는 것이 내게는 이득이었다.

해운대 라면의 계약은 내년 연말까지였으니 아예 내년 이맘때까지 질질 끌면서 가치를 올리고 배짱을 튕기는 것이 더 이득일 듯했다.

당장 몸이 달아오른 건 내가 아니라 거산이었으니깐.

문성철 대표에게도 전화를 걸어 책임지고 그 이상을 받아주겠다고 설득을 하여 이재영 상무에게 확답을 주지 말라고 했다.

“햐아. 확답을 주지 말고 시간을 끌어서 몸값을 올리자 라. 뭔가 위험한 거 같지만, 이게 또 끌리긴 하네요. 그럼, 임 차장만 믿고 한번 배짱부려 보지요.”

“네. 일단 여름 끝나고 판매량이 더 나오면 그때 더 유리하게 거래 가능할 겁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자기 믿으라고 했던 사람들 중에 사기꾼 아닌 사람이 없었는데, 또 한 번 속는 셈 치고 믿어 보지요. 하하하.”

***

사무실로 오니 이신애가 출근해 있었는데, 아예 모르는 척을 했다.

김승재도 나갈 사람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이신애를 아예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상품 판매 관리부의 여직원들도 이신애가 재계약을 해서 서울로 간다는 이야길 듣자, 내가 원했던 행동을 그대로 해주었다.

‘은따.’

회사에 출근하면 온종일 한마디 말도 건네는 사람이 없었고, 투명 인간으로 다들 이신애를 취급했다.

그런 대우에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마음이 여린 이창모 부장이 그래도 퇴사한다고 송별 회식을 해주려고 했으나, 본인이 거부했고, 계약 종료일 사흘 전부터는 아예 회사에 나오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모두 다 본인이 초래한 일이었다.

그렇게 부서를 배신해서 다른 이익을 얻었으니, 이런 따돌림도 그녀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다들 계약직 직원으로 이신애란 사람이 있었었다고 기억을 했고, 새로운 계약직 여직원이 그녀의 자리를 채우자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도 옅어져 갔다.

그렇게 잊히는 것이 직장의 인연이고 생활이었다.

***

뜨거웠던 여름의 바캉스 시즌이 지나가고 10월이 되자 황량하게 메말라 가던 내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7, 8, 9월 햇빛 식품에서 생산된 1800만 개가 다 팔렸다.

첫 생산부터 해서 총 2200만 개.

그리고, 10월이 되었음에도 그 판매량이 팍하고 꺾이지 않았고, 준수한 성적을 내며 팔리고 있었다.

순이익으로 내 손에 떨어진 것은 개당 100원 정도로 대략 22억 정도였다.

생산에 들어갔던 20억까지 해서 통장에 40억 넘게 꽂혀 있자, 기분이 좋아졌다.

6개월에 22억.

1년이면 44억.

10년이면 440억이었다.

여기에 지자체 영업을 위한 상표권까지 히든카드로 태운다면 300억을 못 받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상품 판매 관리 부서는 유통관리비로만 6억 넘는 비용을 받았으니 부서의 매출과 이익이 1990년대 전성기에 육박할 정도였다.

모두가 기분이 좋았고, 햇빛 식품에서 알려줄 사항이 있다고 하여 칠곡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11월, 12월, 1월은 추위로 인한 라면 판매가 호조를 보이는 달입니다. 따라서 1년 전체를 환산해 보면 4천만 개 이상의 판매가 가능하다고 나옵니다.”

문성철 대표의 햇살 식품 라면 연구소에서 PT를 했는데, 다년간의 연구를 했던 사람들이 내린 판단이라 믿을 만했다.

아니 그렇게 되길 믿고 싶었다.

“그리고, 신제품으로 인천 짜장, 여수 라면, 강원도 비빔면 같은 제품을 출시하여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연구원의 추가 제안을 듣자 저런 상품 라인을 가지게 된다면 1억 개 판매도 꿈은 아닐 터였다.

“문제는 생산 여력이군요. 언제까지 배짱을 튕기면 됩니까? 지금도 막 짜증을 내며 칠곡 공장에 내려와서 인수 건 도장 찍자고 난리입니다.”

문성철 대표는 생산량 증가와 새로운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제2 공장을 만들어야 하기에 얼른 지금 공장을 팔고, 그 돈으로 새 공장을 짓고 싶었다.

“이제 결론을 내어야지요. 일단 이 판매량을 가지고 한번 접촉을 해보겠습니다. 더 우리의 가치를 올려서 한번 만나보고 하지요.”

“임 차장님만 그럼 믿겠습니다.”

***

“350억씩 해서 700억?”

김독수 전무는 석 달 넘게 가치평가서를 가져오지 않다가 매출서류를 가치평가서라고 들고 온 임건호를 쳐다봤다.

“네. 이 판매량 매출서류 보시면 아시겠지만, 마케팅과 생산량만 받쳐 준다면 1억 개 이상 판매도 가능합니다. 700억에 이런 상품을 텐 키로 구하기 힘들 겁니다. 물론, 700억으로 신규 제품을 런칭해서 이런 결과를 뽑기는 더 어려울 것이고요.”

“이게 그 가치라는 거지?”

“네.”

“인수 비용이 너무 비싸면 우리가 그냥 차라리 밑바닥부터 시작할 거라고 생각은 안 해봤어?”

“그래서 더 못 올리고 700억을 책정했습니다. 맨땅에 헤딩한다면 더 저렴하게도 가능하겠지만, 안착이 어려운 거 아니겠습니까?”

김독수도 임건호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더 저렴하게 공장을 만들고 할 수 있겠지만, 1년에 4천만 개 이상 시장 점유율 1%를 가져오려면 마케팅 비용에 들어가야 하는 판관비가 더 클 터였다.

그 가치는 인정해줄 수 있지만, 뭔가 원하는 대로 다 주고 인수하는 것은 불만이었다.

“그쪽에서 3개월 시간 끌어서 이 매출을 들고 왔으니 우리에게도 시간을 줘. 우리도 큰돈 쓰는데, 조율은 해야지.”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무실을 나오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독수가 낚일 것도 같았는데, 우리처럼 몇 개월을 질질 끌며 가격 협상을 하려고 할 것 같았다.

그러면,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우리가 될 터였다.

잔머리가 필요했다.

“문 대표님. 공두기 출신이시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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