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다 너 때문이야.
“사실, 이 라면에 대한 것은 회사의 치부나 마찬가지이고, 아주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회사 내에 파벌이 나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김독수 전무는 파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입을 열었다.
“상품 판매 관리부의 이창모 부장이 우리 쪽으로 넘어온 것은 다들 알다시피 예산 배정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연도 상품 판매 관리부의 예산은 4억 정도로 작년 대비 3배 정도 올랐습니다. 제가 예산 배정에서 어떻게든 챙겨 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채 2억도 되지 않는 예산이었습니다.”
김덕수 전무의 말에 몇몇이 웅성거렸다.
“네. 너무 적은 예산이 쉽게 믿어지지 않으실 겁니다. 부서의 예산이 2억이 안 된다는 것이 못 미더우시면 한번 확인을 해보시면 됩니다.”
몇몇 총무 쪽 임원들은 자료를 확인하고 김독수 전무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작년 예산이 이 정도로 형편없었다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가 3배를 올려서 예산을 책정하고 배정해 주었지만, 이 4억 예산으로 라면을 생산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예산이면 위탁 생산비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예산 배정 요청서에는 신제품 개발 요청예산이 들어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예산은 반영되지 않았지요. 예산 없이 이렇게 라면을 생산하고 진행하실 수 있으신 분이 여기에 계십니까?”
김독수의 말에 이재영 상무는 아차 싶었다.
“라면을 직접 생산하고 할 수 있는 예산이 상품 판매 관리부에 있었다면 이창모 부장도 직접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예산이 없으니 판매관리비라도 벌기 위해 납품 업체를 찾아 거산의 상표를 달고 생산 유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산 부족.
이재영 상무가 재기한 매출 문제가 결국엔 예산 부족으로 인해 이렇게 기형적인 사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창모 부장은 식품 사업 쪽으로 알려지지 않은 거산의 이름을 달고 라면을 만들 업체들을 찾아다녔을 겁니다. 그리고, 저 판관비를 받는 조건의 회사를 찾아 계약을 했을 것이고요. 이창모 부장이나 제가 부끄러워해야겠습니까?”
김독수 전무는 이의 제기할 것이 있다면 이야기하라며 좌중을 둘러봤다.
“그러면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애초에 이창모 부장이 라면을 추진할 수 있게 예산이 제대로 배정되었다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게 몰아 놓고, 이렇게 비판을 하시니 참으로 난감합니다.”
“하지만, 그 상표권도. 그 회사가...”
“그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돈도 하나도 태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상표권을 넘기라고 그 회사에 요구합니까? 개발비를 우리가 지원한 적도 없고, 제품 개발에 관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상표권이나 특허 관련을 우리에게 넘기라고 했었다면 어느 업체가 사업을 진행하겠습니까? 그렇게 모든 걸 다 줄 수 있다는 나이스한 사업체가 있다면 소개 좀 해주십시오.”
김독수 전무의 말에 이재영 상무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렇게 갑질을 했다가 뉴스에라도 나오면 갑질 기업이라고 욕을 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식품뿐만 아니라 B2C 기반인 의류 쪽에도 피해가 미쳤을 겁니다.”
김독수 전무의 말이 맞았다.
괜히 갑질 계약을 하려 했다가 언론에 보도라도 되었다면 잘 굴러가는 의류 쪽도 피해를 볼 수 있었다.
야심 차게 김독수 전무의 약점을 잡았고, 내부거래가 있을 거라고 공격을 했지만, 김독수 전무는 슬렁슬렁 담을 넘는 구렁이처럼 공격을 받아 내었고, 오히려 독니로 반격을 했다.
“상황이 그랬던 것이군.”
미리 언질을 받긴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예상과 달라지자 최지운 회장이 나섰다.
“안타까운 일이야. 회사 자체적으로 준비를 했었지만, IMF로 인해 취소되고, 결국 예산이 없어 자기 사업화하지 못했다는 거. 문제가 되었던 예산 배정 문제를 다시 살펴보지. 총무 부서는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게 TF팀을 하나 만들도록 하세요.”
“네.”
“그리고, 투자 없이 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입했다고 판단되는 만큼 그 가능성이 더 있는 것이겠지요. 라면을 직접 생산하는 쪽으로 사업을 추진해 봅시다.”
“회장님. 공장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진입장벽을 넘어 들어간 ‘해운대 라면’의 브랜드가 중요합니다. 상표권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합니다. 김독수 전무에게 책임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야 합니다.”
이재영 상무는 자신이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었으나 끝까지 김독수 전무를 끌고 들어갔다.
“회장님. 상표권을 인수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문제는 이것도 돈이 든다는 것이지요.”
김독수 전무도 이재영 상무처럼 해운대 라면이 가진 브랜드의 힘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브랜드로는 힘들까요?”
“네. 보통 라면은 한번 이름이 알려지면 그대로 스테디셀러가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라면은 그런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사장(死藏)됩니다. 해운대 라면은 우연히 지상파 방송에 나왔고, 바닷가와 부산 지역의 특산 라면화된 이미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브랜드를 그대로 가져와야 합니다.”
“흠. 뉴스에서 봤듯이 매 여름마다 몇백만 개씩 팔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상표권 인수도 알아보고, 라면을 생산하는 그 공장도 인수하는 것으로 진행을 합시다.”
“네. 회장님.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김독수 전무님 명심하세요. 알아보라는 거지 시행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외파 마음대로 이 건을 처리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이 건은 이재영 상무와 협의를 해서 같이 진행하도록 하세요. 두 분이 상표권과 생산 공장 건을 같이 진행하세요.”
***
예년과 달리 무더위가 일찍 찾아왔고, 해운대에는 연일 100만 명의 피서 인파가 몰린다고 뉴스가 보도되었다.
부산의 다른 해수욕장인 송정과 광안리, 다대포 해수욕장까지 합치면 하루 200만 명이 부산 바닷가로 몰렸다고, 역대 최고의 피서객 숫자라며 해운대 구청과 시청은 자화자찬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런 피서객들이 먹고 마시며 돈을 쓰고 가는 것 중에 해운대 라면도 있었다.
자동포장되어 생산된 라면이 창고에 쌓일 새도 없이 생산하는 족족 실려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햇살 식품의 문성철 대표는 행복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가슴 쓸어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옆에서 같이 미소 짓고 있던 공장장의 말에 문성철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이야. 뭔가 대기업의 막돼먹은 건방진 사람 같아서 생산 못 해준다고 그냥 돌려보냈었는데, 다시 안 돌아왔으면 큰일이 날뻔했어. 하하하.”
“그러게요. 하루에 30만 개씩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더운데 라면이 이리 잘 나갈 줄이야.”
“밤에 백사장에서 소주 한잔하다 보면 춥지. 밤바다 바람이 라면을 땅기게 하지.”
“해운대 쪽 편의점 매대는 재고가 없어서 금방 품절이 되고 있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햇살 식품의 하루 최대 생산량은 봉지면 10만 개와 컵라면 2종류 각각 5만 개씩으로 하루 20만 개가 최대치였다.
증산에 대해 임건호 차장과 이야길 했지만, 현실적으로 당장은 불가능했다.
공장을 확장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설비를 멈추어야 했기에 제2공장을 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제2공장을 짓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철 아니, 1년도 보지 않고, 추가 공장 증설부터 생각하기엔 너무 일렀다.
늘 구매할 수 있고, 재고가 남아돈다면 오히려 인기가 떨어질 수도 있기에 딱 지금 정도가 좋다고 둘러대는 것이 아직까지는 먹혔다.
하지만, 해운대에 해운대 라면이 없다는 지역지에 기사가 날 정도가 되니 압박이 생기긴 했다.
“대표님. 서울 본사라고 거산 외식 사업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거산 외식 사업부? 거기서 왜?”
문성철 대표는 거산의 로고가 들어가긴 하지만, 거산에서 진행하는 사업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본사에서 전화가 온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일단 거산의 로고가 인쇄되어 나가는 것이라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거산에서 햇빛 식품을 인수하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한번 만나서 이야길 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문성철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지 싶었다.
***
“저는 전무님이 햇빛 식품 쪽을 맡으셔야 한다고 봅니다. 상표권 쪽을 전무님이 맡게 되면 부하 직원이었던 임건호 차장과 이면거래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회장의 지시로 마주 앉은 김독수 전무와 이재영 상무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맞지 않았다.
해서, 상표권과 생산 공장을 나눠 각자 진행하기로 했는데, 서로 상표권을 맡으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둘 다 라면 400만 개라곤 하지만, 아직은 그 수익이 미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생산 공장보다 상표권이 거래가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독수 전무는 뭔가 깨닫는 게 있었다.
서로 상표권을 맡으려고 이야길 하다 보니 자신보다도 이재영 상무가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상품 판매 관리부의 97년도 회의록까지 가지고 나왔었어. 매출을 잡지 못하고 거래금액으로 잡는다는 것까지도.’
부산 지사는 아직 과거 중요 서류의 전산화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김독수는 알고 있었기에 그 회의록이나 매출 관련 서류가 상품 판매 관리부 내에서 유출된 것이라 판단했다.
이걸 역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이재영 상무는 판단을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오늘 임원회의에 나왔던 서류들을 넘겨준 직원이 있다고 하면 임건호 차장이 기분이 좋을까요?”
“크흠. 임원회의에 나왔던 말이 거기까지 가겠습니까?”
“뭐, 안 갈 수도 있고. 갈 수도 있고. 하지만,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배신자에게 칼 맞은 기분일 텐데. 뭐, 그 기분까지도 살 수 있는 돈을 준다면 되긴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금 누가 돈을 더 많이 쓰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최소비용으로 사와야 하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안면이 있고 상사였던 제가 이야길 해야 더 낮은 가격으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옆에 배신자를 박아 넣은 사람보다는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반대로 서로 이득을 보기 위해 이면거래를 하려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상무님. 지향점이 달라서 회사 구성원 간에 서로 치고받고 싸움질을 하지만, 샐러리맨은 자기 회사에 손해 가는 짓은 하지 않는 법입니다. 회사에 손해 가게 하는 놈은 샐러리맨이 아니라 양아치 새끼인 거지요. 이 상무님은 저를 그런 양아치 새끼로 보신다니 기분이 아주 더럽네요.”
“아니, 그 말은 그게 아니라...”
30년을 샐러리맨으로 바닥부터 올라온 김독수와 이제 마흔 살에 아버지를 잘 만나 임원이 된 이재영의 차이는 이런 것이었다.
강하게 나가야 할 때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것.
“그럼, 상표권은 제가 맡는 것으로 하지요. 이제 일어나시지요. 칠곡으로 가시려면 여기 앉아 있을 시간 있겠습니까?”
“아니, 이렇게 일방적으로 결정을 하시면...”
이재영 상무가 다시 말을 이었지만, 김독수 전무는 일이 끝났다는 듯이 자리를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이 시발 독사 새끼가...”
***
임건호는 김독수 전무가 따로 보자는 이야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임 차장 일을 참 잘하고 있어. 그 추진력이나 생각지도 못한 기발함까지.”
김 전무가 갑자기 칭찬을 하니 이게 뭔가 싶었다.
“헌데, 말이지. 주변 사람은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 거 같네. 아니 관리하는 걸 잘하지 못하는 건가.”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니 주위에 뿌락치(faktsiya)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