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초심(初心).
문성철 상무의 집무실은 대기업 임원실 못지않게 꾸며져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수제 원목으로 만들어져 있는 책상과 자연목 테이블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라면 OEM이 꽤 많이 남는가 봅니다. 제가 가본 그 어떤 사무실보다 고급집니다.”
“하하하. 뭐 조금 돈벌이는 됩니다. 앉으시죠.”
비서가 내오는 찻잔도 고급이었고, 커피도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직접 내린 커피였기에 문성철 상무는 뭔가 신선놀음 하는 재미로 회사를 다니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있어 보이게 회사를 다니고 할 날이 있을까 싶었다.
“그럼, 기본 제공 스프에 별도의 레시피를 추가하시고 싶다는 이야기지요?”
“네. 저희 쪽 생산 제안서에 나와 있듯이 스타 마케팅의 일환으로 라면을 생산해서 홍보용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겁니다. 해서 기본 스프에 별도 레시피를 더해서 맛을 좀 변경해 볼 생각입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그럼 먼저 저희 쪽 스프와 면 연구소로 가시죠. 직접 맛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내에 만들어져 있는 스프 연구소에는 기본 스프 외에도 김치 파우더가 들어간 김치 스프, 해물 파우더가 들어간 해물 스프 등 10여 종류의 스프가 제공되고 있었다.
그냥 계약만 하고 돈만 지불하면 바로 라면을 만들 수 있게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이었다.
“라면 위탁 생산이 어떻게 보면 땅 짚고 헤엄치기 같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레시피도 자체 개발이라기보다는 위탁받아 만들었던 레시피를 그대로 모아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처음 계약서상에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생산을 위해서는 레시피 제공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요. 그리고, 레시피에 따라 새롭게 생산을 위한 투자를 하고 있으니 공짜는 아닙니다.”
정진은 건호의 말투가 괜히 거슬리게 들렸다.
처음 공장에 왔을 때도 그렇고 정진이 보기에는 묘하게 건호가 햇살 식품을 아래로 본다는 늬앙스의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상대하고 있는 문성철 상무는 연륜에 걸맞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제삼자의 입장인 정진이 보기에는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게 어쩌면 대기업의 방식인지도 모르지. 가스라이팅(gaslighting)하듯이 은근히 하청 공장을 낮게 만드는 그런 협상 대화법 일지도.’
“면 종류도 다섯 종류가 있습니다. 마트나 여러 PB상품을 위탁 생산하다 보니 자연스레 레시피가 모였습니다.”
각 면발과 여러 종류의 스프로 끓인 라면을 조금씩 맛을 봤는데, 매제인 최도협은 라면을 하나 먹고 다음 것을 먹을 때마다 입을 물로 헹구어 가며 먹었다.
“하하하. 확실히 요리사는 다르네요. 그럼, 스프에 대한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계약에 대해서 이야길 해 보죠.”
연구실에 도협을 놔두고 다시 집무실에 마주 앉았는데, 실무자인 부장 2명이 추가되어 협의를 시작했다.
“우선 최소 수량인 것도 그렇지만, 일자가 너무 촉박합니다. 5월 첫째 주 인도는 무리입니다.”
“기본 레시피라면 모르겠는데, 따로 추가된 레시피로 한다면 다시 스프 구성부터 바꿔서 재 공정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산 일자가 안 나옵니다.”
“연구실에 가면서 보니 공장 라인이 1개만 돌아가고 있던데, 지금 발주 받은 물량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충분히 그렇게 새로 스프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그냥 막무가내로 일자 맞춰 달라는 건 맛과 위생 퀼리티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런 걸 맞추는 게 현장 담당자들 아닙니까? 주문량이 밀려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안 된다는 건 문제가 있는 거지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루인 스프는 정량이 제대로 섞여서 포장이 되어야지 되는 겁니다. 대충 만들면 라면마다 맛이 달라지게 됩니다. 원하시는 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일자를 절대 못 맞춥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냥 만들어져 있는 스프로 일 편하게 하기 위해서 현장 사람들이 몽니 부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휴 말이 안 통하니. 사장님 우리는 이렇게 날짜 못 맞춥니다.”
덩치가 큰 박 부장이 문성철 상무에게 사장님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영업이나 그런 걸 위해 대표이사라고 하지 않고, 상무로 그냥 명함을 파고 다니는 것 같았다.
“우선 임건호 차장님께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일 편하게 하자고 있는 스프를 고집하는 게 아닙니다. 새 스프로 만들게 되면 우리 자산이 더 늘어나는 건데 왜 마다하겠습니까?”
“그럼, 진짜 새 스프 만드는 게 그렇게 날짜가 걸린다는 겁니까?”
“네. 20일 이상 딜레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이 20일 늦어지게 되면 다른 건 다 괜찮아도 해운대 백사장 장사에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신상품인 만큼 6월부터 홍보하고 영업에 들어가야 7월부터 제대로 납품되어 팔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생산 단가 깎아 달라고 안 합니다. 바로 현금 결제까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일자 조정해 주십시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있는 스프 중에서 선택을 하시면 안 됩니까?”
“상무님, 아니 사장님도 그렇게 있는 스프로 하길 원하고, 새 스프를 만들며 일자 단축해보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네요.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스프라면 레시피를 만들었다고 하는 요리사의 이름을 넣을 이유가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날짜는 도저히 못 맞춥니다.”
“지금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시간에 바로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냥 일 편하게 하시려는 걸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럼 결렬이지요. 그렇게 우리를 신뢰하지 않으시는데, 앞으로 같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아 안타깝네요.”
문성철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자 맞춰 주는 다른 회사와 거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지요.”
더 이야기할 기회도 안 주겠다는 듯이 문성철은 집무실 문을 열고 먼저 나갔고 빨리 나오라고 안내를 했다.
건호도 10억이 넘는 건인데도 안 받아도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문성철이 괘씸해서 그대로 집무실을 나왔다.
스프 연구소에서 샘플을 챙겨 오고 있던 최도협은 훈훈했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자 눈치 보기 바빴다.
로비까지 배웅하고는 문성철은 바로 건물로 들어가 버렸고, 주차장에서 차를 빼며 건호는 구시렁거렸다.
“집무실 좋은 거 봤지? 저거 다 우리한테 했던 거처럼 일 편하게 해서 돈 번 거야.”
“야, 그건 니 뇌피셜이잖아. 왜 그렇게 각이 서 있냐?”
“내가 각이 서 있다고?”
“그래 인마. 너 부산 내려왔을 때부터 뭔가 간이 배 밖에 나온 거처럼 똥 배짱이었거든.”
“내가 똥 배짱이라고? 저 문 사장이 아니고?”
“그래 인마 니가 이상했거든. 돈 쉽게 버는 거 같다고 대 놓고 상대방에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내가 문성철 상무였다면 기분 나쁜 티 팍팍 내었을 거다. 무슨 하는 짓이 양아치 졸부 같냐.”
“양아치 졸부 같다고?”
“그래. 인마 운전 내가 할 테니깐 너 뒷자리에서 뭘 잘못했는지 생각 좀 해라. 새끼가 부산 와서 에이스 입네, 부장들이 밀어주니깐 아주 목에 깁스한 거처럼 설치네.”
정진이가 억지로 뒷좌석에 밀어 넣고는 운전을 했는데, 건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몰랐다.
하지만, 양아치 졸부 같다는 정진이의 말에 뭔가 느껴지긴 했다.
로또 당첨이 소문날까 싶어 당첨금을 마음대로 쓰지는 못했다.
하지만, 통장에 20억 넘게 있다 보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자신감은 생겼다.
그리고, 부산에선 한국에서 최상위인 SKY 대학 출신이라고 대우를 해줬다.
거기에 비즈니스 빌딩 건을 입안해서 김독수 전무의 외파(外派)가 크게 득세하게도 만들었다.
옮긴 부서에서는 태업에 가깝게 대충 일하는 이들을 자극시켜 제대로 일하는 사람들로 일깨웠다.
부산지사에선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줄 수 있는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떠받듦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렸고, 어디를 가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거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로또에 대한 미신이 떠올랐다.
한국은 물론이고, 로또 복권이 있는 어느 나라 든 1등 고액 당첨자의 20% 가까운 사람들이 5년 이내 당첨금을 다 쓰고, 패가망신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되게 되면 다들 안전한 투자처를 찾아 투자를 하고, 소시민적으로 살 거라고 이야길 하지만, 실제 당첨이 되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채 30%가 되지 않았다.
없던 돈이 생김으로 해서 자신감이 생기고 그 자신감에 비례해서 소비도 커지는 게 당연했다.
그게 인간이었으니깐.
그리고 어느 선을 넘은 20% 정도의 당첨자들은 그 커지는 자신감과 소비에 자기 자신이 잡아 먹히는 것이었다.
자신은 뭘 하든 될 놈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몇백만분의 1에 걸릴 정도의 운빨이었으니 뭘 하든 다 할 수 있고, 될 거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로또의 저주였다.
그 로또의 저주에 나도 걸려 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문성철 대표는 젊은 날을 다 바쳐 햇살 식품을 키워 냈을 거고, 그 젊음을 희생한 대가로 그런 멋진 집무실을 가지게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로또 당첨금이라는 노력 없이 얻은 돈을 가진 나는 그 집무실을 만드는데 들어간 문성철 사장의 노력과 희생이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저 일을 편하게 하려고 새 스프를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는 뇌 내 망상만을 하며 내 입장만을 관철하려고 한 것이었다.
정진이가 이야기한 근본 없는 졸부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저주에 걸린 내가 그대로 했던 것이었다.
로또의 저주로 내가 초심을 잃었던 것이었다.
내게 이런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정진이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영 철학에 어긋나는 일을 강요했던 나를 거래하기 싫다고 내쳐준 문성철 사장에게 신뢰가 갔다.
“정진아. 고맙다.”
“뭐가 인마.”
“부산 와서 내가 존나게 잘생긴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 속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징어는 아닌데, 존잘은 아닌 거 같다.”
“뭔 개소리야.”
“차 돌려. 다시 햇살 식품으로 가자.”
“뭐래? 왜? 가서 개아리라도 틀려고?”
“아니. 미안하다고 하려고. 네 말 듣고 생각해보니, 부산 와서 사람들이 띄어 준다고 어깨에 뽕이 들어갔던 것 같아. 초심을 잃었던 거지.”
“깨달아서 다행이다.”
“저기. 형님. 대충 이야기 들었는데, 스프는 그쪽에서 제공하는 거 그대로 써도 됩니다. 대신에 블록 형태로 내용물을 추가하게 되면 라면 맛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별첨 스프 같은 거?”
“네. 그거면 라면 맛을 다르게 바꿀 수가 있습니다. 대신에 단가는 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기본 야채 플레이크와 스프 외에 별첨 스프가 더 들어가 있으면 고급 라면이라는 생각이 있기에 별첨 스프를 추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야 차 돌리라니깐. 햇살 식품으로 돌아가자고.”
“새꺄! 이미 고속도로 탔다고! 역주행이라도 하랴?”
“아, 미안.”
“그리고, 그쪽도 지금 감정이 격해져 있을 테니깐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고 연락부터 해. 그게 맞아.”
***
“돌아가면서 생각하다 보니, 일을 맡으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정을 강요하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어제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튿날 약속을 잡고 정진이와 다시 햇살 식품에 방문했다.
문성철 대표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다시 맞아 주었고, 다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럼 스프 중에서 8번이 제일 좋다고 하던가요?”
“네. 칼칼한 맛의 스프에 별첨 스프로 해서 건조 콩나물 블록을 추가하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생산 일정도 괜찮고, 라면 맛에 쉐프의 추가 레시피가 들어갔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럼, 일정 문제와 계약 건을 한번 다시 살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