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힘든 라면.
올린 예산의 반도 못 탔음에도 이창모 부장과 김한철 차장은 좋아했고, 과장과 대리들도 작년 대비 3배 이상 나온 예산에 즐거워했다.
오다리 신상품 개발로 일에 대한 재미가 살아났으니 다들 이 기세로 내년에는 더 받아 내겠다는 그런 공동의식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 직원들의 모습을 보는 건호는 그들의 그런 감정에 이입할 수 없었기에 겉돌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생각했던 아이템을 추진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상품 판매 관리부서가 몇 개월만 있다가 돌아가는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했기에 더 그런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
몇 개월 있다가는 뜨내기라는 생각이 들자 며칠 동안 라면 공장을 알아보고 했던 열정의 불꽃이 금세 사그라들어 버렸다.
내 마음속으로 절름발이 오리 레임덕(lame duck)이 찾아와 버렸다.
“자, 오늘은 회식합시다! 김민희 씨 문현동 칠성 곱창으로 예약 넣어! 공장 쪽도 회식하라고 김과장에게 연락 넣고.”
다들 으샤으샤 하는 분위기에 초를 칠 수 없었기에 건호도 따라나섰다.
문현동 곱창 골목에는 20여 개의 곱창집이 몰려 있었는데, 목요일이었음에도 가게마다 사람들이 몰려 앉아 곱창을 구워댔다.
덕분에 골목 자체가 연기로 뿌옇게 연무가 낄 정도였다.
그런 뿌연 연무에 취한 것인지 이창모 부장은 술에 취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보고 다들 나이 들어서 호르몬이 이상해져서 잘 운다고 하는데 말이야. 내가 호르몬을 얼마나 많이 먹는다고! 나보다 호르몬 많은 사람 없을 거야!”
일본어로 곱창, 내장을 호르몬(ホルモン)이라고 하는데, 그걸로 유머를 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유머에 아무도 웃지는 않았다.
“내가 말이야. 처음에 그랬잖아. 임 차장이 왔을 때 드디어 인재가 왔다고. 다들 봐서 알겠지만, 과감한 추진력! 그게 진짜라니깐!”
이 부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고, 얼굴에 금칠이 칠해진 나는 마주 인사를 하며 반응해 주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이창모 부장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하며 내 칭찬만 하자 분위기가 박살이 났다.
아무리 좋은 말도 한두 번인데, 굴러온 돌을 계속 칭찬하니 김한철 차창은 물론이고 다들 표정이 굳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창모 부장의 입을 막아야 할 것 같았다.
“부장님. 다들 많이 먹었는데, 노래방으로 가시죠!”
“응? 그럴까? 그럼 다들 가는 거야!”
술에 취한 이 부장을 억지로 노래방에 욱여넣자 여직원들부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늘 하듯이 택시비를 챙겨 주려고 했는데, 김승재 대리가 나를 억지로 끌고 골목 계단에 앉혔다.
“차장님. 택시비 주시려는 거라면 안 주시는 게 좋습니다.”
“왜?”
“그게...다들 차장님이 말단들 집에 갈 때 택시비 주는 거 알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안 줘도 될 거 같습니다.”
“계약직이라서?”
식품사업부에 있었을 때도 계약직들에게 택시비를 챙겨 줬기에 안 주는 건 좀 그랬다.
“계약직을 떠나서 다들 일 많아졌다고 차장님 욕을 뒤에서 많이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택시비 주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그 정도로 씹어 대는 거야?”
“네. 정직원인 우리는 뭔가 일이 많아지더라도 일이 커가고 키우는 재미를 보는 즐거움이 있는데, 저치들은 계약 끝나면 가는 입장이다 보니 일 많아지는 걸 안 좋아합니다.”
“재계약은 아예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정규직 전환이 될 수도 있잖아?”
“그게, 저희 부서 문제도 있지만, 부산 쪽은 계약직 재연장이나 정규직 채용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1명도 없었습니다. 저치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그냥 일 많은 걸 싫어하는 겁니다. 그냥 계약 일자만 채우면 되는 거니깐요.”
서울 본사에서는 계약직이 일을 잘하고 하면 정식 채용이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기에 부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김승재가 아는 한도에서 1명도 없다고 하니, 이제까지 태업을 했던 이신애의 입장도 이해가 되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보이지 않는 벽이 어떻게 보면 부서의 단합이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미래가 정해져 있다곤 해도 일이 많아져서 싫다는 그들의 마인드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세 내가 누워서 침을 뱉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띵했다.
내가 속으로 욕을 하는 계약직의 태업과 내가 오늘 생각했던 것이 같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계약직 직원들의 태업에 가까운 업무 태도가 예산 확정 이후 식어버린 내 열정과 같은 것이었다.
속으로는 계약직들이 일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고 욕을 했는데, 레임덕이 찾아왔던 내가 바로 그 모양이었다.
몇 개월만 있다가 가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그 자체가 계약직의 마음과 같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계약직을 욕할 만큼 내가 잘한 게 없었다.
결국 같은 수준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예산 통보서의 비고 부분에 신상품 예산이 하반기 추가 증액 가능하다는 문구가 생각이 났다.
그냥 포기할 순 없었다.
“부장님이 우리 찾겠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그래.”
앞에서 이끄는 김승재 대리를 보기가 미안했다.
레임덕처럼 대충 시간 때우다 다시 식품사업부로 돌아갈 생각을 했는데, 성심껏 상사로 모셔주는 김승재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잠시 없었다고, 보고 싶었다고 다시 무한 칭찬을 하는 이창모 부장에게도 미안했다.
“그래, 우리 임 차장도 노래 하나 해야지. 무슨 노래? 이 언니가 웬만한 노래는 책도 안 보고 바로 번호 나온다니깐.”
“그럼, 다진아의 ‘미안 미안해.’ 찍어주세요.”
진짜 도움받으려고 도우미를 불렀는지 후덕하신 분이 계셨는데, 이 부장의 말처럼 책도 없이 바로 노래 번호를 찍어주셨다.
노래방 도우미도 저런 완벽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너무 나태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노래에 혼신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 미안해~ 너를 두고 여길 떠나려니 미안해~~]
“임 차장 우리 버리고 어디 가면 안 돼!”
“차장님 가시면 안 됩니다앗!”
노래에 대한 호응으로 부장과 대리들이 가면 안 된다고 고함을 지르며 반응해 줬는데, 약간 양심에 찔렸다.
그래서 넥스트의 Here, I stand for you 까지 불러줬다.
[희열 아~ 스탠 포오 오 유~~]
***
금요일 출근하자마자 식품사업부의 김민욱에게 연락해서 부산 구내식당에서 1년 동안 소비되는 라면량이 얼마 정도인지 확인을 부탁했다.
전국 구내식당에서도 소비되는 수량도 알 수 있으면 자료를 뽑아달라고 했다.
“네 차장님. 이게 봉지면과 소컵 면만 있고, 대컵 면은 자료가 없습니다. 재작년, 작년 자료를 메일로 보내뒀습니다.”
전국 구내식당에서 소비되는 봉지 면은 1년에 30만 개 소컵 면은 8만 개였다.
봉지면 이 월등히 많은 이유가 궁금해서 보니, 초, 중, 고 급식에서 김밥이 메뉴로 나갈 때는 라면이 같이 나가다 보니 1년에 30만 개나 소비되는 것이었다.
소컵 면은 내 예상대로 국이 호불호가 있을 때 100원으로 판매되거나 무료 제공되는 케이스였다.
단순하게 보면 봉지면, 소컵 면 38만 개였지만, 최소 생산은 봉지면이든 소컵이든 100만 개가 되어야 했다.
이 수치로는 생산을 하더라도 재고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민욱이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민욱아. 혹시 외식 사업부에는 동기나 친한 사람 없냐?”
“외식 사업부요?”
“그래. 외식 사업부의 업장에서 부대찌개나 김치찌개를 파는 곳도 있을 건데, 거기서 소비되는 라면 수량 알 수 없을까?”
“동기는 없는데, 제가 한번 알아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비즈니스 빌딩 식당 건으로 김독수 전무와 이재영 상무의 관계를 알기에 내가 연락을 하면 외식 사업부에서는 아예 상대도 안 해줄 터였다.
하지만, 2년 차 햇병아리 직원의 ‘천지를 몰라요!’ 버프를 이용해서 물어보면 그쪽에서도 같은 신입일 터라 어어!? 하면서 자료를 보내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햇병아리 버프가 통했는지 자료가 왔다.
“외식 사업부 직원도 매출 자료를 그렇게 마음대로 줄 수 없다면서 금약이 없는 물류 팀에서 납품받은 자료를 줬습니다. 그래서, 물류 팀에서 안 받고 따로 사입을 했다면 포함이 안 되는 수령이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민욱아 땡큐! 조만간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이야기해. 이서랑 해서 같이 먹으러 가자.”
“네. 차장님. 수고하십쇼!”
외식 사업부에는 일반 봉지 면으로 용심의 용성탕면과 심라면이 공급되고 있었고, 라면 사리로는 공두기의 사리면이 들어가고 있었다.
봉지면 2종 합쳐 18만 개, 라면 사리는 12만 개가 소비되었다.
물류 팀의 공급망 자료였기에 더 수량이 늘 수도 있겠지만, 부장이나 윗사람을 설득하려면 이 자료의 수치를 써야 했다.
단순 합산으로 봉지면은 30만 개 + 18만 개 해서 48만 개.
컵라면은 8만 개.
사리면 12만 개.
3개를 다 합쳐도 68만 개로 100만 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제조 공장도 봉지면 100만 개였지 컵라면을 섞어서 100만 개가 아니었다.
봉지 면만 우선하여 생산한다고 해도 50만 개가 남을 터였다.
그리고, 라면의 유통기한이 1년이 아닌 6개월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유통기한을 따지면 48만 개도 소비하기 힘들었고, 외식 사업부에서 자체 상품이라고 다 써줄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지금 판매 채널로 가지고 있는 마트와 편의점, 그리고 이번에 개척한 PC방에 납품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경우에는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마케팅이 필요했다.
그렇게 되면 배보다 배꼽이 커져 버리게 되는 것이라, 답이 나오지 않았다.
확 개인 돈으로 납품회사를 차려서 질러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몇억을 쑤셔 넣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결국, 예산을 10억 정도 받아 낼 수 있을 때 시작해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뭔가 부서의 체질을 확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서랍에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
“어머님. 최도협이라고 합니다.”
“응. 그래그래. 잘생겼네. 건희랑 결혼할 거라고?”
“네. 저희 부모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
매제가 되기 위해 도협이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어머니는 반응이 느리기는 해도 정신이 있으셨다.
계속 도협이의 손과 얼굴을 어루만지며 기억하려고 하셨는데, 그런 모습에 또 집안은 눈물바다였다.
이모님이 음식을 해 주시고 해서 다 같이 저녁을 먹는데, 도협이 호텔 요리사라는 이야기에 이모님은 호텔 요리사가 해 주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제일 잘하는 요리를 해달라고 농담 비슷하게 이야길 하셨다.
어머니도 그런 요리를 먹고 싶다고 하자 앞치마를 하고 도협이 주방이 들어갔다.
이태리 요리가 전공이기도 했고, 집에 있는 재료가 파스타밖에 없었기에 토마토 미트 스파게티를 만들어 내었다.
“질겨! 원래 이렇게 먹는 거야?”
이모가 질기다고 하자 어머니도 질기다고 했고, 당황해하는 도협을 보며 나는 웃어줬다.
“알단테가 아니라 푹 익혀야지. 어르신들 치아를 전혀 고려 안 했네.”
“그냥 라면을 끓여. 그게 좋겠다. 이모랑 엄마는 뭔가 특별한 요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 호텔 요리사가 해 준 음식이 그냥 먹고 싶은 거야.”
난처해하던 도협은 다시 라면을 끓였는데, 자기 딴에는 특별하게 한다고, 케첩과 토마토의 껍질을 벗겨 넣은 토마토 라면을 끓여내었다.
[후루룩!]
“맛있어! 진짜 요리사가 맞네. 멀쑥하게 생겨서 요리사가 아닌 줄 알았는데, 요리사가 맞네.”
이모와 엄마가 라면을 맛있게 먹자 그제야 도협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리사 하면 돈 많이 버는 거 아니었어?”
다시 이모님의 오지랖이 발휘되었다.
“그..그게 요리사도 유명세가 있어야 돈을 많이 법니다.”
“우리 조카사위 잘생겨서 텔레비전만 나오면 될 거 같은데.”
“티비에 나가거나 이름을 건 음식이 있으면 유명세를 타는데, 그게 힘듭니다. 돈도 많이 들구요.”
“흠. 그렇구만. 쉬운 게 없네.”
이모는 돈을 많이 버는 요리사가 되려면 먼저 돈이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에 바로 흥미를 잃어버리셨다.
대신에 나는 그 소리에 흥미가 생겨 버렸다.
“이름을 건 음식이 있으면 유명 쉐프가 될 수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