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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으로 유통재벌-24화 (24/203)

024. 가신(家臣).

“이...이익이 없다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창모 부장은 김독수 전무의 말을 들었음에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싶었다.

자사의 물건이 많이 팔리면 당연히 회사에 이익이 들어오는 것인데, 판매해도 이익이 없다고 하니 그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서들이 일어나서 인사하는데도 무시하며 사무실로 들어가는 김독수의 모습에서 그와 자신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가 잘되면 자신도 잘된다고 생각하는 자신과 내가 잘되어야 회사도 잘된다고 생각하는 김독수 전무와는 종(種)이 다른 것이었다.

아침 일찍 김독수 전무의 엘리베이터에 난입할 때만 해도 김독수 전무와 담판을 짓고 빨리 일을 진행 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기들에게 이익이 없어서 못 해주겠다는 말에 더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이창모 부장과 상품 판매관리부는 김독수 전무에게 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장님. 색(色)입니다. 색.”

이창모 부장이 안되어 보였던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비서가 한마디를 했다.

“색?”

김 비서에게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엘리베이터 문에 이창모 부장의 형체가 비쳤는데, 불투명하고 뿌옇게 보이는 형체를 보게 되자 김 비서가 이야기한 색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색을 정하고 줄을 서라는 뜻이었다.

***

재계 10위의 거산그룹. 거산랜드는 창업주 최민배로부터 내려와 손자이자 현 회장인 최지운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현 회장인 최지운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았다.

속이 달라진 이유는 상속세 때문이었다.

창업주 최민배에서 아들인 최요한에게 상속될 때만 해도 정치군인의 시대였기에 회사를 대물림하는 게 어느 정도는 수월했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시작되며 제대로 된 상속세를 때리기 시작했고, 대기업이 되어 있던 거산랜드는 최대 주주 주식 할증평가까지 감안 되어 실질 세율 60%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속세를 처리하기 위해 외부의 투자단이 들어왔고, 90년대 외형을 늘리기 위해 독립채산제로 사업부나 지사들을 인수 합병하며 그 속에 계파가 만들어졌다.

회장 최지운과 이채영 상무 등이 이끄는 젊은 2세, 3세들의 후계파와 투자단이 임원이 되며 들어온 파트너스 계파.

그리고, 독립채산제로 자율권이 있는 사업부와 지사들의 외(外)파였다.

김독수 전무는 당연히 외파였고, 이창모 부장과 상품 관리부는 중립이기는 하나 후계파로 인식이 되었다.

사실 근무연수가 20년이 넘어가는 40~60대의 부장단들은 유교 관념적인 군신의 예처럼 가신화(家臣化) 되어 있었다.

그런 후계파를 버리고 외파로 들어오라는 말에 이창모 부장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매출이 미미하고 힘 없는 부서지만, 오래된 부서가 외파로 갈아타게 되면 그 사실만으로도 적지 않은 반향이 있다는걸 알기 때문이었다.

“까짓거 이참에 갈아타지요. 솔직히 후계파에서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신제품 개발 예산을 몇 년째 신청해도 아예 안 챙겨 줬지 않습니까.”

이창모 부장이 의논할 게 있다고 부른 김한철 차장은 이참에 갈아타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외파로 우리가 돌아서면 다른 걸 잃게 되지 않을까?”

“까짓거 잃을 게 있어야 잃지요. 우리가 뭐 있는 게 있습니까? 버터 오징어 말고는 아무것도 없구만.”

김한철 차장은 작심한 듯이 이제까지 쌓였던 불만을 쏟아 냈다.

“후계파가 제일 많은 만큼 잘나가는 부서만 챙겨 주지 우리 같은 쩌리 부서는 안 챙겨 줬지 않습니까? 이미 잡아둔 고기한테는 먹이 안 준다는 말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몸값을 올리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잡아둔 고기에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이창모 부장의 가슴을 찔렀다.

절대 다른 계파로 가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방치를 해도 되는 부서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지금도 무엇이 이득인지는 알지만, 괜히 배신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부장님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바꿨습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계파를 바꾼다고 최만배 회장님, 최요한 회장님을 배신하는 게 아닙니다. 외파도 거산입니다.”

“그래. 외파도 거산이긴 하지. 하지만...”

“부장님.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우리가 외파로 가면 전국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내년에 예산을 받아 오고 다시 우리가 부활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배신이라고 심적으로 고민하던 이창모 부장은 내년 예산과 매출 증대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왠지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역적모의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임건호가 생각이 났다.

김독수의 야망과 독기에 찬 눈빛과는 다르게 임건호의 눈빛은 야망에 찬 눈빛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뭔가 호기심이 가득했던 눈빛으로 이 일을 추진했었다.

아주 오래전 동기들과 사수와 함께 새로운 식자재로 상품을 만들 때 자신과 동료들이 보여주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IMF 이후로 자신과 동료들에게 그런 눈빛이 사라졌었고 이후 상품 관리부도 빛을 잃어 갔었다.

지금 선택을 하지 않으면, 다시는 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을 부하로 둘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창모는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휴우. 그래. 넘어가자.”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년은 외파로 들어간 첫해이니 예산도 분명 잡아줄 겁니다. 그래야 다른 찬밥 신세인 다른 후계파들이 넘어올 테니깐요.”

“그래. 그렇게 되겠지.”

***

“오늘 또 초대받지 않고 탔습니다. 그리고, 색을 정해서 오라길래 색을 정해서 왔습니다.”

“훗. 무슨 엘리베이터 정치도 아니고, 그래 무슨 색입니까?”

“동색(同色)으로 가야지요. 그래야 같은 색으로 이득이 될 거 아니겠습니까?”

“후후. 색을 바꿨다는 건 마음에 드는데, 계파를 갈아탈 만큼 뭔갈 해 보고 싶으셨던 겁니까?”

“한번 뭘 해 보고 싶은데,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 팀장에게 협조건 이야기해 둘 테니까 오후에 서울 본사 회의에 같이 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띵! 9층입니다.]

이창모 부장은 갑작스레 본사로 따라가야 했기에 7층 허문도 팀장에게 먼저 이야길 하고자 계단으로 내려갔다.

“전무님. 색을 갈아탔다고는 하지만, 바로 본사로 같이 갈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야 많지. 먼저, 나이 든 부장단에서 이창모 부장 평판이 좋다는 거. 그리고 한 부서에서 20년 이상의 근속이라는 거. 그런 후계자파의 사람이 갑자기 나를 따라다니게 되었다면,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그러면 비슷한 처지의 부장들이 알아서 접촉하러 올 거야. 그거면 충분해.”

그 외에도 자신에게 부족한 ‘인정(人情)’을 커버해줄 사람이라는 말은 김 비서에게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건도 임건호가 시작했다던데 맞아?”

“네. 서점에 들이닥쳐서 잡지꽂이를 현질해서 사 왔다는 이야기가 사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퍼졌습니다. 무대뽀 같은 모습이 사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거 같습니다.”

“자기가 다 입안하고 설계 다 해 놓고는 허문도나 나에게는 한마디도 안 했다는 거네. 이게 딴 주머니 차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이창모를 이쪽으로 넘겨주려고 작업을 친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아! 그렇게 또 볼 수가 있는 거군요. 본인이 하면 더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이창모 부장을 움직이게 해서 이쪽에 붙게 만들었다면 대단한 건데요.”

“보통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니깐 이런 생각을 하고 작업을 하는 거겠지. 이 진열대로 매출 올라오는 거 확인해서 내게도 보고해.”

“네.”

***

식품 사업부에서 카운터 옆에 진열대를 세울 수 있게 허락을 해주자 일이 쭉쭉 진행되었다.

건호는 이창모 부장이 계파를 갈아탄 것은 모르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김독수 전무를 구워 삶았던지 했으니 협조를 얻은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부서 자체가 예산이 없다 보니 잡지꽂이로 나온 진열대를 구매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예비비를 진짜 탈탈 털고 나서도 모자랐는데, 우리가 직접 가져와서 하는 조건으로 겨우 가격을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1차로 부산과 김해, 양산의 구내식당 39곳에 일일이 진열대를 가져다주었고, 영양사나 카운터를 보는 조리원에게 서비스로 안주를 몇 개 쥐여주며, 판매를 잘 부탁했다.

포스 시스템에 품목이 추가되는 것이 일주일 정도 걸렸기에 그 날짜에 맞춰 유통 물류팀에서 식자재를 배송할 때 우리 제품들도 들어갈 예정이었다.

“부장님. 이게 설치가 되어도 그렇게 극적인 매출 변화는 없을 겁니다.”

건호는 포스기의 매출 페이지만 뚫어져라 보는 이창모 부장에게 미리 언질을 줬다.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알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어. 학교의 경우에는 애들이 거의 안 사 먹을 것이고, 관공서도 마찬가지. 기업위탁이나 빌딩 내 구내식당에서만 매출이 나올 거야. 알지만 그냥 보는 거야.”

“그럼, 오늘은 공장으로 안 가실 겁니까?”

“오늘은 첫날이니깐 이거 지켜보고 싶어. 자네가 나 대신 가서 공장 사람들 응원도 해주고 해줘.”

“아유, 제가 간다고 뭐 힘이 나겠습니까? 매일 가시던 분이 가셔야지 되는 거지.”

“아 참. 새 상품 기획서는 어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아직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거 생각할 겸해서 그럼 현장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이창모 부장은 집요한 게 있다 보니 신상품 기획서 건으로 꼬투리 잡힐까 봐 바로 사무실을 나왔다.

녹산공단의 공장으로 가다, 공장 직원들에게 늘 뻔한 바카스 음료 대신 다른 것을 사주기 위해 차를 남포동으로 틀었다.

근래 도깨비시장에 푸드 구루마들이 새로 생겨났고, 특이한 음식들을 많이 판다고 해서 한번 가보는 것이었다.

“오이소! 요서 묵고가이소!”

“와보이소. 요가 원조입니데이!”

족발 골목부터 일본인들을 호객하는 아줌마들이 줄을 서서 손님들을 끌었는데, 부산 사람 입장에서는 사실 별거 없는 족발집일 뿐이었다.

도깨비시장이 열리는 곳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둘러봤고, 극장가가 있는 피프 광장 쪽도 둘러보았지만, 쉽게 눈이나 손이 가는 것은 없었다.

물론, 랍스터 구이니, 가리비 완자니 하는 새로운 먹거리가 있었고, 나시고랭이나 우육면 같은 외국 음식들도 많이 들어와 있었기에 눈이 즐겁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가 팔아볼 만한 상품화 시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모 방송 예능프로에 나와서 대박이 난 갠지스강 호떡도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이 줄을 서서 사 먹었는데, 저것도 상품화는 불가능했다.

다만, 공장 직원들에게 간식으로 주기로는 좋을 것 같아 갠지스강 호떡을 사기로 했다.

뒤쪽에 위치해서 손님이 없는 호떡집에 40개를 주문했는데, 주인은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으로 호떡을 구워내기 시작했다.

“40개 다 구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거라도 좀 먹고 있으이소.”

후덕하게 생기신 사장님이 종이봉투에 든 오징어 다리 튀김을 건네주었는데, 오랜만에 기름에 번들거리는 오다리를 먹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남포동에서 열렸을 때 건호가 자원봉사를 하면서 처음 먹어봤었던 그 맛이었다.

이게 맥주 안주로 최고지.

응? 잠시만, 우리 제품인 ‘버터 바른 오징어’에는 다리가 없잖아.

왜 우리 제품에는 오다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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