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마이 턴(my turn).
건호는 밥 먹다 말고 일어나서는 계산 카운터 주위를 살폈다.
같이 밥을 먹던 김승재나 영양사로서 계산 카운터를 지키던 이미애는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다.
“공간도 나오고 계산도 문제가 없겠네. 왜 이때까지 이 생각을 아무도 못 한 거지.”
건호는 구내식당 카운터 옆에 간이 매대를 만들어 거산에서 파는 물건들을 진열해서 팔 생각을 했다.
옛날 구내식당이나 기업체 위탁의 경우에는 식권을 팔았기에 포스기(POS)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카드 결제가 많기에 구내식당에도 포스기가 기본 세팅이었고, 바코드를 찍어 판매를 하게 되면 재고 관리도 자연스레 되니, 여기서 상품을 팔면 되는 것이었다.
식품 사업부가 부산에서 위탁 관리하는 기업체와 관공서만 30곳이 넘었고, 전국을 다 합쳐 보면 180곳이 있었다.
우리 상품을 카운터 바로 앞에 진열하고 판매할 수 있는 판매 채널이 신규로 180곳이 만들어진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실시간으로 판매나 매출 파악이 불가능한 마트나 편의점과는 달리, 우리 포스 시스템을 통해 판매관리가 이루어지니 판매 추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걸 바로 적용하고 싶은 마음에 밥을 급하게 먹고는 다시 회사로 운전을 했다.
김승재는 이게 뭔가 하는 눈치였다.
“밥 먹다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지 우리 회사가 운영하는 구내식당에서 우리 제품을 파는 게 어떨 거 같아? 안 먹는 반찬이 나와서 밥을 적게 먹었거나, 오후 간식으로 진열되어 있는 제품을 사 갈 거 같지 않아?”
김승재는 그제야 밥을 급하게 먹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오후에 가끔 간식 사 먹지 않습니까.”
“글치? 근데, 이때까지 이런 판매 채널 확대에 대해서 이야기 나온 적이 있었어? 회사 내 판매 채널을 활용하는 내용에 대해서 말이야.”
건호가 몇 년 치 회의록을 살펴봤을 때 이런 논의가 없었던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해서 김승재에게 물었다
“제 기억으로는 회사 내 다른 부서를 통해 팔아보자는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습니다.”
“맞지? 없지?”
“네. 근데, 좋은 아이디어 같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나온 제품을 파는 것이니 따로 문제도 없을 것 같고요. 다만, 일본 직수입 제품은 좀 그럴 거 같습니다.”
“카운터 옆에 간이 판매대를 놓는다고 해도 공간이 작을 거야. 우리 직 생산이랑 거산 이름 박힌 OEM만 전시하고 판매하기도 빠듯할 거야.”
건호는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이 판매 채널 확대가 매출 증가로 이어질지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상품 판매 관리부가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위쪽에 어필하는 행동으로는 꽤 좋은 액션이 될 터였다.
이런 액션을 보여주면서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 이창모 부장이 내년 사업 예산을 챙겨 오기 쉬울 터였다.
이 아이디어를 이창모 부장이나 다른 사람들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실제 판매대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회사로 향하던 차를 경성대 앞 경성서점으로 움직였다.
“이 잡지꽂이 얼마면 살 수 있습니까?”
“네에? 거기 꽂혀있는 잡지는 파는데, 그 전시대는 파는 게 아닌데요.”
“저희가 지금 당장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이거 얼마면 됩니까?”
“헐. 사장님 바로 부를게요.”
건호는 이걸 원한 것이었다.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은 주인이 없기에 기물을 팔 수 없지만, 작은 지역 서점은 사장과 담판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경성서점으로 온 것이었다.
황당해하는 아르바이트생의 호출을 받고 서점 주인이 오자 건호는 돈부터 내밀었다.
“저희가 잡지꽂이가 당장 필요한데. 20만 원이면 되겠습니까?”
오만원권 4장을 바로 놓자 서점 주인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건호를 봤다.
“이거 5만 원밖에 안 하는 건데요. 20만 원이나 주면 문제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금 아니겠습니까? 그럼 10만 원으로 할까요?”
“음. 20에 옆에 있는 매거진 랙 도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김대리 빨리 차에 실어. 이제 이거 우리꺼야.”
무대뽀로 잡지꽂이를 사는 모습에 김승재는 황당했지만, 뭔가 재미있었다.
필요하다고 쳐들어가서 바로 현질이라니.
밥을 먹다가 다른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길 듣고 구내식당에서 물건을 팔 생각을 하고, 그 판매대 모습을 바로 보여주겠다고 막무가내로 서점에 뛰어들어서 잡지꽂이를 사는 추진력이 재미가 있었다.
‘아, 맞다. 출근 첫날 엘리베이터에서 독사 전무에게 들이박았다고 했었지.’
그제야 김승재는 자신의 상사가 보통 미친놈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같이 일을 하면 이런 황당한 일이 계속 있을 것 같았다.
***
“자, 그럼 승재 씨는 유통 물류 팀에 협조 요청 보내서 식자재가 구내식당으로 보내질 때 우리 상품들도 같이 보내질 수 있는지 확인해 봐. 그리고, 포스기에 상품 항목으로 우리 제품을 등록해서 판매할 수 있는지 전산 개발팀에 문의 넣어 보고. 무조건 된다. 안 된다. 이것만 확답 받아.”
“네. 알겠습니다.”
김승재는 일다운 일을 하게 되었다는 느낌에 서류를 만들면서 유통 물류 팀의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비공식적으로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신애 씨는 회의록 작업하는 거 멈추고, 우리 부서 제품 중에서 직접 생산하는 품목과 OEM 받아서 포장지가 한글인 것을 리스트 업 해주세요.”
“네? 그럼, 이거 이달 말까지 안 해도 되는 거죠?”
“네 제품 리스트 업부터 해주세요.”
“네에.”
대답은 ‘네’라고 하지만, 이신애의 얼굴 표정은 ‘저거 하라고 했다가 왜 또 이거 하라고 하는 거야. 귀찮게.’ 하는 표정 있었다.
공채출신과 계약직의 차이인 건지 아니면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일을 시키는 게 불편한 사람이었다.
공장에 나가 있는 이창모 부장에게 연락하여 회사로 들어오게 했고, 샘플실에 있는 제품 중에서 한글 포장지인 제품을 들고 와서 잡지꽂이에 배치를 했다.
***
“그러니깐 저 잡지꽂이 매대를 구내식당 카운터 옆에 놓고, 거기에 우리 제품을 진열한다고? 일단 부산 지역만 시범적으로?”
“네 맞습니다.”
이창모 부장과 김한철 차장은 내가 사무실에 설치한 잡지꽂이 2개를 흥미롭게 보았다.
“진열대가 보기는 좋은데, 제품을 20개도 못 놓을 거 같은데.”
“네. 우리가 유통하는 제품은 직수입 제품까지 150개가 넘지만, 대부분이 일본산 주전부리이지 않습니까? 리스트를 확인을 해보니 포장지가 한글로 되어 있는 제품이 14개였습니다. 이런 잡지꽂이에 꽂아두기에 딱 좋은 숫자입니다.”
“흠. 구내식당이 학교에도 있을 수 있으니 왜색 짙은 걸 진열했다가 욕 들을 수도 있지. 그럼, 이렇게 진열된 건 식당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 거고?”
“네. 포스기에 제품 등록해서 판매하는 건 개발부서에 문의를 넣어 놨는데, 바코드 찍지 않고 15개 정도의 상품이라면 바로 메뉴 추가해서 판매가 가능하다고 구두로 답을 들었습니다.”
“각 식당에 재고 관리는?”
“식자재를 매일 배송하는 유통 물류팀에도 문의는 넣어 두었습니다. 구두로는 일단 가능은 할 것 같다고 합니다. 포장 제품이나 유제품도 식자재와 이미 같이 들어가고 있기에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럼 다 된 거네. 하하하. 판매처를 그렇게 늘릴 수 있으면 확실히 매출이 늘겠네. 여윽시, 인재구만 인재야. 왜 이제까지 이런 생각을 아무도 못 했던 거야.”
이창모 부장의 눈에 또 물기가 차오르는 거 같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구내식당을 운영하는 식품 사업부에서 카운터 인력의 업무가 과중 된다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카운터 전담 인력을 안 뽑지?”
“네. 주로 영양사나 조리사가 그 시간만 카운터를 보기에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을 나에게 풀라는 거군.”
“네. 윗선에서 정리를 해주셔야 일이 쉽게 진행이 될 겁니다.”
“알았어. 이건 내가 어떻게든 김독수 전무에게 이야길 해 볼게.”
사실, 이 일도 건호가 김독수 전무나 허문도 팀장에게 이야길 해서 진행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건호가 다 나설 수 없었고, 타부서에 그렇게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월권이기도 했기에 윗선끼리의 정리를 이창모 부장에게 해달라고 한 것이었다.
더불어, 이창모 부장이 눈물 많고 감성적이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눈물 많은 무능력한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싶었다.
“자, 승재 씨 이거 같이 좀 들고 옮깁시다.”
“이걸 어디로 옮길려고?”
“1층 로비 안내 데스크 옆으로 옮길 겁니다. 다른 부서 사람들도 이걸 봐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없던 게 갑자기 생기면 직원들이 궁금해서라도 데스크에 물어볼 겁니다. 그러면 데스크에서 이 진열대 그대로 여러 곳에 설치될 거라고 안내만 해주면 됩니다.”
“오호! 미리 선수 쳐서 보여주고 반응을 보겠다는 거구만.”
“네. 실물을 봐야 사람들도 호응도가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좋아, 좋아. 이런 추진력 정말 좋아!”
문제는 추진력 좋게 안내 데스크 옆으로 진열대를 놓았는데, 안내 데스크를 관리하는 운영지원팀에서 이런 걸 두면 안 된다고 치우라고 했다.
하지만, 이창모 부장이 운영지원팀에 가서 눈물로 호소를 하였고, 그 눈물이 통했는지 한 달간 데스크 옆에 놓아두기로 했다.
***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이창모 부장은 김독수 전무가 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고, 꾸벅 인사를 했다.
“상품 판매 관리부의 이창모 부장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회사 정보에 민감하시다고 스스로 이야기하시는 분인데, 제가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과 같이 타는 걸 싫어하는지 모르십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헌데, 독대하기가 힘들어서요. 허문도 부장에게 이야기하고 전무님과 약속을 잡고 싶었는데, 너무 바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엘리베이터에 탔습니다.”
허문도가 중간에 끊었는데도 말을 전달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탔다는 말에 김독수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가 알기에 이창모 부장은 우유부단하고 늘 허허거리며 돌아다니는 소심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전국에 비즈니스 빌딩 구내식당 일로 바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길 하겠습니다. 식품 사업부에서 운영하는 구내식당에 저희 제품을 파는 진열대를 설치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진열대요?”
“안내 데스크 옆에 설치되어 있는 거 못 보셨습니까?”
“아아. 본 거 같네요. 그걸, 구내식당에 설치하고 팔아 달라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전무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부서가 매출이 미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매출을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자회사 내 판매 채널을 활용해보고자 합니다.”
“아이디어는 좋군요. 헌데 말입니다. 허문도 부장이 왜 중간에서 컷을 했을까요? 뭣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계산해서 판매하는 카운터 직원의 업무가 많아지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시제가 안 맞게 될 수도 있는 일이고.”
“훗. 단순하게 생각하시네요. 그게 아닙니다.”
[띵! 9층입니다.]
“그, 그럼 뭣 때문입니까? 뭣 때문에 아예 중간에서 못 만나게 하는 겁니까?”
이창모 부장은 매달리듯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김독수 전무에게 물었다.
“저에게 이득이 안 되니 그런 겁니다. 우리에게 이익이 없는데, 왜 타부서의 판매일을 맡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