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회초리로 때릴 수도 없고.
“아니, 그런 의도가 아니라, 아닙니다. 사무실로 돌아갑시다. 매장 더 돌아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신애의 공과 사를 구분해 달라는 말을 듣고는 그냥 마음을 접었다.
집 근처 마트에 우리 제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냐고 물어보려는 것인데, 그걸 개인 정보와 연관 지어 답을 하니 더는 말도 하기 싫어졌다.
처음 김해에 있는 마트를 둘러보러 나올 때만 해도 이 둘을 데리고 맛있는 밥집에 가서 비싼 밥도 사 먹이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일 이야기를 하며 뭔가 그럴듯한 하루를 보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왠지 회사 구내식당 밥도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승재 씨는 작년에 만들었다는 업무 근황 보고서 다시 만들어서 내일까지 주시고, 거래처 매장별 진열 상황 전수 조사해서 이번 주 내로 올리세요.”
“네에.”
“신애 씨는 7층 문서 보관실에 가서 우리 부서 문서를 전부 다 들고 오세요.”
“저, 전부 다요?”
“네. 계약서, 계산서 같은 서류 빼고, 회의록, 입안서 같은 서류가 있을 겁니다. 그런 서류를 다 가져오세요.”
“몇 년 치를요?”
“위에 올라가서 몇 년부터 있는지 보고 내선으로 전화 주세요.”
서류의 디지털화 작업은 회사에서 하고 있었지만, 예산이나 배정 인원 자체가 적다 보니 아직도 서류를 뒤적여야 했다.
1990년부터 서류가 있다고 해서 전부 다 들고 오라고 했다.
L 카트 한가득해서 싣고 내려왔는데, 대부분이 회의록이었다.
서류에서 몇 없는 신상품 제안서나 제품출시 관련 서류를 뽑았고, 회의록은 이신애에게 다 넘겨줬다.
“회의록을 일자별로 엑셀에 정리하는데, 모든 걸 하는 게 아니라, 읽어보고 상품 관련 내용만 뽑아서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저 그럼 다른 업무 못하는데요.”
“다른 일 안 해도 됩니다. 이것만 하세요. 다른 일보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달 말일까지 13일 남았으니깐 말일까지 끝내주세요.”
카트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를 보며 이신애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는 곳이 회사인데.
둘 다 능동적으로 일을 알아서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일일이 시키고 확인하며 일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 이거 역시 다르구만 달라. 역사를 알아야지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경영의 참뜻을 이렇게 실천하다니.”
이창모 부장은 서류 보관실의 오래된 서류들을 보고는 뭔가 감격에 젖은 눈빛이었다.
“이제까지 온 사람 중에서 우리 부서 역사를 알아보려고 한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하하하 여기 내 이름도 있구만. 내가 쓴 회의록이야. 이거 감회가 새로운데.”
이창모 부장은 90년 11월 회의록을 보고선 한참이나 들여다봤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이었다.
“여기 보면 자갈치 공동 어시장에 들어오는 연근해 오징어로 안주를 만들어야 한다고 나랑 김익현이 주장했었네. 이때는 내가 진짜 햇병아리였는데. 그때 사람은 이제 다 없네.”
이창모 부장은 그렇게 씁쓸해하며 공장으로 간다고 나갔는데, 그가 사라지자마자 바로 사무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름대로 업무를 보던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고, 다들 탕비실에 가서 커피를 가져와선, 조잘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이창모 부장 다음으로 직급이 높은 김한철 차장이 있었지만, 여자가 많아서 그런지 뭔가 분위기가 일에 열중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공장을 중요시하는 이창모 부장이 공장으로 가버리면 사무실은 늘 이런 상태였던 것 같았다.
김승재처럼 자신이 맡은 판매처 관리를 위해 나가는 직원도 없었고, 그냥 사무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분위기였다.
이런 걸 보니 김해 외에도 다른 마트의 판매처 관리가 어떨지 뻔히 보였다.
진짜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부서였다.
***
이신애가 정리하는 것과는 별도로 회의록을 살폈는데, 일주일 단위로 있는 주간 회의록에 히스토리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당시 회장이던 최민배 회장이 식품 가공업에 뛰어들길 원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부서가 바로 여기였다.
그때는 실험적으로 여러 제품을 만들었는데, 그러다 김익현이란 사람이 버터 바른 오징어 안주를 최초로 기획해 91년도에 출시를 했었다.
이게 운이 좋았는지 92년 북경 아시안 게임 때 맥주 안주로 대박이 나며 히트 상품이 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92년 히트 상품이 아직까지도 상품 판매 관리부를 지탱해 오고 있었고, 이후의 상품들도 다른 제품들은 없어지고 안주류로 집중을 해 버리게 만들었다.
회사 인트라넷의 인적 정보에 김익현을 검색해 보니 차장으로 퇴사를 했고, 상품 판매 부서에서만 근무했던 말뚝 직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이 남긴 그림자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으니 사람은 없어도 그의 업적은 남아 있는 것이었다.
회의록에 따르면 버터 바른 오징어가 히트한 이후 여러 안주류를 출시하며 안주나 주전부리 쪽으로 계속 신제품을 출시해 왔었다.
그 결과가 나름의 인지도를 가진 육미 육포였다.
이렇게 꾸준히 신제품을 만들어 내었다면 새로운 히트 상품들이 간간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아픔이자 검은 기억인 IMF가 터지자 부서의 방향이 변해 버렸다.
초기 생산에 돈이 들어가는 자체 생산품 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일본의 안주류를 직수입해서 판매하는 것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
IMF로 인해 최소 비용으로 최대 매출을 만들어야 했을 터이니 당시에 이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IMF의 파고가 끝이 난 이후에 다시 신제품 개발로 방향을 돌렸어야 했는데, 제품 개발 없이 직수입 유통 판매에 그냥 안주해 버린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도 정식 유통 판권을 사 온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아마도 정식 유통 판매권을 사 오는 데 비용이 드니 그냥 도매상을 통해 직수입 판매를 했었다.
이런 일본 안주들이 초반에 인기가 있자 다른 수입상들도 뛰어들었고, 같은 일본 안주류를 파는 곳이 많아지다 보니 직수입 유통으로 버는 매출 자체도 꼬부라든 것이었다.
이런 직수입 유통 제품이 150개가 넘었는데, 재고 관리도 힘들고 유통기한 관리도 어려울 게 뻔했다.
잡다한 일은 늘어나고, 매출은 줄어드니 자연스레 사람들은 위로 올라갈 생각보다는 옆으로 눈을 돌렸을 터였다.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도, 회사 물류팀이 알아서 거래처 물류 센터로 물건을 보내주니 나태하게 일을 해도 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
이런 결과로 회사 묫자리 부서라고 불리는 상품 판매 관리부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이창모 부장의 말이 맞았다.
가장 급한 것이 자체 생산 제품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새로운 히트 상품이 나오면 느슨해진 분위기도 타이트하게 만들어질 것이고, 제대로 된 매출도 나오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신제품을 만들어서 런칭할 수 있는 예산이 과연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건호는 고개부터 저었다.
공채에서 부서와 맞아떨어지는 사람도 못 받아 오는 상황인데, 새로운 사업 예산을 회사에서 떡하니 배정해 줄 리 만무했다.
이 부분을 알아보고자 녹산 공단의 공장으로 움직였고, 이창모 부장과 밥을 먹으며 물었다.
“예전에 검토되었던 신제품 기획서를 살펴보았는데, 괜찮은 아이디어 상품들이 많더라고요.”
“그렇지? 그때는 다들 열정이 있었으니깐. 모르는 것도 찾아서 공부해서 식품 첨가물도 알아보고 했었는데, 요즘 친구들은 그런 게 아예 없어.”
“부장님. 그래서 그런데, 새로운 상품을 결정해서 만드는 데 예산을 얼마까지 쓸 수가 있습니까? 1년에 신상품 개발에 들어가는 예산이 얼마로 잡혀 있습니까?”
이창모 부장에게 최대한 자존심 상하지 않게 예산 범위를 물었다.
“그게 없어. 3년 전부터는 아예 신상품 개발에 대한 예산이 배정이 안 되고 있어.”
이 부장의 말을 들으니 이건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아예 신상품 개발 예산이 없다는 것은 그냥 말라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3년 전까지는 책정된 신상품 예산으로 뭘 만들었습니까? 회의록엔 그게 안 남아 있던데요.”
“예비비로 전용했어. 다른 쪽에도 예산이 잘 안 나오다 보니 돌려쓸 수밖에 없었거든.”
여기까지 이야길 들으니 그냥 포기할까 싶었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5년 전부터 부장이 된 이창모 부장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열정이 있고, 일에 대해 진심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능하다면 그 열정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민폐였다.
“신상품 기획이 선다고 해도 예산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지 않습니까? 예산이 없는데.”
“아니야. 진짜 자네가 11월 첫째 주까지 신상품 기획서 가져오면 내가 무릎을 꿇던 엎드려 뒹굴든 해서 예산은 받아 올게. 이건 진짜야.”
남자가 50살이 넘어가면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눈물이 많아진다고 했는데, 이창모 부장이 그런 사람 같았다.
내게 말을 하는데도 눈물을 글썽이다 못해 뚝뚝 흘리는데, 거기에 대고 안 될 것 같다고 못 하겠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장님 눈물 닦으시고요. 휴우. 일단, 그럼 부장님만 믿고 신상품 기획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예산 못 따오시면 저도 그냥 다른 직원들처럼 시간만 때우다가 다른 데로 갈 겁니다.”
“알았어. 진짜 예산은 나만 믿어. 어떻게든 내가 받아 올 테니깐.”
독기나 카리스마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린 부장의 말을 믿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믿음은 가지가 않았다.
일단 최대한 예산이 소요되지 않는 쪽으로 구상을 해봐야 했다.
***
이신애에게는 온종일 서류 정리와 타이핑을 치게 했는데, 매일 만들어 올린 엑셀 파일을 보니 뭔가 난잡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월별로 표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정리 자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양식에 맞춰 옮겨 적기를 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면 일에 열정이 없거나...
4과의 이서가 참 깔끔하게 잘 정리하고 알아보기 쉽게 해줬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김승재는 마트에서 깨진 것이 약이 되었는지 부서 근황 보고서와 판매처별 진열 상황을 사진까지 첨부해서 보고서를 올렸다.
나도 그날 이후 집 근처 마트들이랑 편의점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제품들을 확인했는데, 진열 상황이나 그런 부분은 김승재가 관리하는 판매장과 비슷했다.
그냥 다들 태업하는 것이었다.
“개선점도 나름대로 고민한 거 같고, 승재 씨가 반성을 좀 한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다른 지역 담당들이 개판을 쳐도 우리 구역은 제대로 관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일에 대해서는 부끄럽지 않은 프로가 됩시다.”
“네. 잘하겠습니다.”
자기 잘못을 알고, 반성하는 사람은 달래주어야 했다.
“그럼, 밥이나 같이 먹으러 갑시다.”
같이 갈지 이신애의 눈치를 봤는데, 같이 안 데리고 갔으면 하는 눈치라 김승재만 데리고 해운대 더 스타 빌딩으로 움직였다.
비싼 밥으로 시작하기보다는 구내식당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엇! 과장님!, 아니 차장님! 잘 오셨어요. 오늘 추어탕이에요.”
영양사는 물론이고, 알바생들까지 나를 반겼고, 따로 명란젓과 달걀을 구운 별미까지 내주었다.
1시 반이 넘은 시간이라 구내식당의 사람들은 밥을 먹고 나가는 분위기였는데, 내가 없는 동안 맛이 달라지거나 했는지 손님에게 확인하고자 귀를 세우고 있었다.
“아, 배부르다. 그럼 디저트는 뭐 먹을까?”
“방금 배부르다면서 또 먹는 거예요?”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거지.”
“전 달달한 거 먹고 싶은데.”
“난 탄산으로. 대리님. 음료수 사주세요.”
“근데 난 뭔가 간식 같은 거 하나 사야 할 거 같은데.”
“아, 대리님 추어탕 안 먹어서 양이 안 찼구나.”
“일단, 편의점 가서 뭔가 씹을 거 하나 사자.”
추어탕에 대한 호불호가 있는 사람이 있다 보니 추어탕을 내는 빈도를 줄여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뭔가 씹을 걸 사자는 소리에 이거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