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제가 판관은 처음이라.
권영두 선배의 전화를 받고 4과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데 김독수 전무의 호출이 왔다.
권 선배가 전화를 했었으니, 아마도 승진에 대한 것이 김독수 전무에게도 전해진 것 같았다.
자기가 힘써줬네 하는 공치사를 듣고 싶어서 부른 것 같기도 해서 고개 숙이고 손 좀 비벼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무실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허문도 팀장은 또 열중쉬어자세로 있었는데,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건가 싶어 표정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시발 새퀴들이 서울 놈들끼리 다 해 처먹네. 부산 놈들 더러워서 살겠어. 시발.”
김독수는 임건호의 타부서 발령이 자신의 수족을 끊어내는 것이라 여겼기에 화를 냈지만, 욕을 쏟아내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월요일에 인트라넷에 인사공고가 뜨는데, 니 차장 승진 공고일 거야.”
“네. 인사과에 동문 선배가 있어서 연락 받았습니다.”
“들었어? 그럼 다른 부서로 가는 거도 알고 있었어?”
“네에? 다른 부서요? 어, 그건 못 들었습니다.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난 겁니까?”
“그래, 상품 판매 관리부야.”
“상품 판매 관리부요? 음. 3층에 있는 부서니깐 부산은 안 벗어나는군요.”
“햐- 이 새끼 니가 뭘 모르니깐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한번 상품 판매 관리부로 가면 승진은 끝인 곳이야.”
김독수는 답답하다는 듯이 넥타이를 풀어 젖혔다.
“가서 5개월만 있어. 다시 불러올릴 테니깐.”
내년 인사철에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김독수 전무의 말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설령 저 말이 빈말이라 하더라도 카바쳐주고 끌어주겠다는 파벌이 있다는 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거기 가서 좀 쉬고 오겠습니다.”
“쉬기는, 거기서도 빠릿빠릿하게 일을 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4과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3과와 합쳐지는 겁니까?”
“아니, 4과는 이수길 차장이 맡게 될 거야.”
김독수 전무의 말에 건호는 안도했다.
3과와 합쳐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아마도 인사철이 아니니 내년에 다른 과에서 과장 승진자가 나올 때까지 이수길 차장이 임시로 맡는 것 같았다.
허문도 팀장과 계단을 내려오는데,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나를 달랬다.
“거기서 좀 버티고 있어 금방 올려줄 테니깐.”
“네. 헌데, 상품 판매 관리부는 어떤 상품을 관리하는 겁니까?”
부서의 이름이 워낙에 두리뭉실하다 보니 어떤 상품을 주로 취급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쉽게 떠오르는 거산랜드의 대표적 상품은 그룹의 출발점인 의류 상품이었다.
하지만, 의류 관련 부서는 모두 다 서울 본사에 있지, 지사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임 과장은 편의점에 가면 맥주 안주로 오징어 뭐 사 먹어?”
“집에서 캔 맥주를 자주 먹지 않는지라...아, 버터 발린 오징어! 그거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래, 맞아. 상품 관련 부서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체 생산하는 상품이 그거야. 그거랑 육미 육포가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지.”
허문도 팀장의 말에 상품 판매 관리부가 어떤 상품을 관리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맥주 안주인 오징어와 육포는 물론이고, 즉석식품인 레토르트 가열 식품들을 주로 취급하고, 관리하는 부서였다.
한마디로 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가 되는 식품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머리를 굴려봐도 버터 바른 오징어와 육미 육포를 제외하고는 다른 제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두 개 제품을 제외하고는 다 OEM으로 생산해서 상표만 거산을 붙여 팔았기에 쉽게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판·관하는 게 대략 100여 개가량 될 건데, 대부분이 OEM이나 직수입 판매유통일 거야. 이 말은 실매출이 미미하다는 거야.”
허 팀장의 말을 듣고 나니 왜 김독수 전무가 승진은 끝인 곳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장 이름이 알려진 주력 상품이 값싼 1~3천 원짜리 안주류이니 매출이 크게 나올 수가 없었고, 수입하거나 OEM으로 들여 파는 품목은 많다 보니 잔잔하게 챙겨야 할 부분들이 많을 게 뻔했다.
매출이나 성과는 안 좋은데, 일은 많다는 것은 그날그날 일을 쳐내는 것에 급급하다는 것이었고, 일 쳐내기에 바쁘다 보니 새로운 걸 시도해 볼 시간 여유가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제대로 된 실적이 없으니 승진은 고사하고 안 잘리기만 해도 다행인 유지만 겨우 하는 부서였다.
하지만, 직장에서 어영부영 버티는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또 최적의 부서였기에 건호는 그렇게 나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거기 가면 버터 발린 오징어는 많이 먹을 수 있겠네요.”
***
“엇! 인트라넷에 인사공고 올라왔는데, 임건호 과장님 승진하셨어요.”
월요일 주간 일정 관련 일을 브리핑할 준비를 하던 여직원은 인사공고에 깜짝 놀랐다.
인사철이 아닌데 인사공고가 났다는 것에 놀랐고, 그 대상자가 부산에 온 지 1년도 안 된 임건호 과장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차장 승진 후 타 부서 발령이 되었다는 것에도 놀랐다.
더구나 평판이 자자한 3층의 상품 판매 관리부로의 발령이니 영전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승진이었다.
인사공고를 허문도 팀장에게 보고를 했는데, 팀장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놀라지 않았고, 그 모습에 여직원은 뭔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탕비실에 가니 역시나 이 특이한 인사이동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성과가 너무 좋아서 다른 곳에 보낸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야?”
“맞을걸, 영업직 성과 달성 승진이라고 하더라고. 그거 아니면 이 시기에 승진이나 보직 이동 자체가 안 나오거든.”
“이야, 그 비즈니스 빌딩 건 성과가 그렇게 좋은 거야?”
“성과가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너무 좋은 거지, 그러니깐 그거 실적 다른 사람이 먹으려고 입안자를 다른 곳에 보내버리는 거고.”
“햐. 너무하네. 임 과장님 좋은 분인데.”
“그러게, 회식 끝나고 집에 갈 때마다 택시비 챙겨 주고 하셨는데.”
“나도 나도. 그거 이제 없어지는 거네. 말단 직원 챙겨 주시는 분은 그분밖에 없었는데. 너무 아쉽다.”
“그럼 너도 따라가.”
“아 싫어! 상품 판매 관리부라잖아.”
“거기 갔으니 이제 과장님 보기 힘들겠다.”
“근데, 임 과장님은 인사공고 난 거에 대해서 덤덤하던데.”
“이미 연락받았겠지.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다니는 거로 봐서는 독사 전무 라인을 탔드만.”
“그 라인도 반만 탄 거 아냐? 독사 전무 라인이면 그런 곳에는 안 보내야지.”
“추진력을 얻으려고 일부러 보낸 건지도 모르지.”
“오, 그럴 수도 있겠다.”
회식 때마다 뿌려둔 택시비 덕분인지 임건호에 대한 소문이 탕비실에서 제대로 퍼지고 있었다.
***
“임 차장, 커피 한잔하지.”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데, 이수길 차장이 먼저 불렀다.
“일단 내가 4과를 맡게 되었는데, 뭘 해주면 되는 거냐?”
이수길은 같은 라인이었기에 최대한 배려를 해주는 것도 있었지만, 김독수 전무가 다시 끌어 올릴 거라고 말을 했기에 내년에 다시 임건호가 4과를 맡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잠시 맡았다가 돌려줘야 한다고 여겼기에 직접 건호에게 어떻게 해줄지를 물은 것이었다.
“김민욱이랑 김이서 씨가 잘해 주고 있어서 5곳 관리는 뭐 특별한 게 없습니다.”
“그럼, 그냥 두면 된다는 거네. 오케이.”
빌딩 내 공간 임대 일은 정진이가 나서서 맡아 주기로 한 것도 있지만, 특별히 파본다는 그런 이유가 없다면 그냥 월세를 주고받는 일만 있을 뿐이라 마음이 놓였다.
“판매 관리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알아보니, 너는 김해 쪽을 관리하게 된다고 하더라.”
“김해요?”
“그래. 김해에 있는 마트 4곳과 SSM(기업형 슈퍼마켓) 8곳, 편의점 30곳이라더라.”
“와 많네요. 그런데, 거길 매일 다 돌고 재고 관리를 해야 하는 겁니까?”
“재고 관리는 직원이 하는 거지. 납품도 공급업체에다 본사가 직접 하는 거니깐.”
“그럼, 판매 매대 위치나 판촉 행사 쪽을 관리하는 거라고 보면 되는 거네요.”
“그렇지. 판매처 사람들한테 영업하는 거지.”
이수길 차장의 이야길 듣고 보니 그렇게 힘든 것은 없어 보였다.
물론, 직접 가서 부딪히는 것과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차이가 있겠지만...
***
“인트라넷에서 본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호 차장은 영업성과 우수자로 승진해서 우리 상품 판매 관리부로 오게 되었습니다.”
“부장님 제 이름은 임건호입니다.”
“어, 그래 임건호. 내가 임건호라고 했잖아.”
“아. 네네.”
이수길 차장에게 인수인계할 것도 별로 없었기에 사흘 만에 상품 판매 관리부서로 짐을 옮겼는데, 부서장인 이창모 부장은 오십 줄의 노련하다 못해 노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말이야. 이래 보여도 사내 정치에 아주 민감하다고.”
따로 칸막이로 만들어져 있는 부장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면담을 했는데, 이창모 부장은 뭔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한 부서의 장을 맡았다면 귀를 쫑긋 세우고 풍문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참 우수한 인재더란 말이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김독수 전무 쪽에 줄을 선 거 가지고는 뭐라고 안 해요. 왜? 내가 너무 잘 알아서 놀란 건가? 내가 속속들이 회사가 돌아가는 걸 잘 안다니깐 그러네.”
“대단하십니다. 저도 부장님처럼 귀를 세우고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런 배우려는 자세가 좋은 거야. 자네 차 가지고 출근했나?”
“네. 자차 출근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같이 공장에 나가 보자고.”
부서 내 사람들과 인사 나눌 새도 없이 이창모 부장과 회사를 나섰는데, 부산의 끝인 녹산공단이었다.
“여기가 바로 공전의 히트 상품인 버터 바른 오징어를 생산하는 공장이야.”
회사 입구에는 해썹 마크니 KS마크니 하는 여러 가지 인증이 붙어 있었지만, 건호가 보기에는 종업원 20명 정도의 작은 공장일 뿐이었다.
그리고 사무실의 사람들은 이창모 부장을 보곤 급하게 뛰쳐나와 인사하기 바빴다.
대기업이라는 거산랜드의 마크가 박혀 있지 않았다면 하청 공장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의외로 공장이 작네요.”
“어허. 이런 작은 곳에서 생산성을 끌어 올려야 되는 거야. 이 뒤로는 육미 육포 생산 라인이 있어.”
육미 육포를 만드는 곳은 이보다 더 작았는데, 직원도 10명이 안 될 정도로 작은 공장이었다.
“이게 끝이야. 이제는 더 구경할 거 없어.”
내가 공장을 보고 크게 반응해주지 않으니 이창모 부장도 힘이 빠져 버렸는지, 사무실에 들어가서 믹스 커피만 홀짝였다.
“자네가 보기에는 여기가 눈에 안 차지? 사실대로 이야기해도 괜찮아.”
“네. 신입사원 연수 때와 관련 업무 때문에 인천에 있는 의류사업부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과 비교하다 보니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네. 하지만, 근무하시는 분들의 눈에는 열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크기가 작다고 실망은 했으나 립 서비스로 근무자들의 눈에 열정이 있다고 해줬다.
“그으래! 역시, 사내에 사람 괜찮다고 소문이 난 게 이유가 있구만. 거기다 보는 눈도 있고 말이야. 제대로 된 인재가 우리 부서에서 드디어 왔구만.”
아니 부장님. 그 말은 립 서비스인데 말입니다.
그냥 예의상 해준 말에 이창모 부장은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내게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