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선의는 없다.
“기업은 돈을 버는 목적의 조직입니다. 그리고, 우리 거산은 그 목적에 맞게 몸집을 불려왔습니다. 12개 분야에서 꾸준히 성장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재계 순위 10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2개 분야 어디에서도 업계 1위인 분야는 없는 것이 거산의 현실입니다.”
“흠흠.”
“거 듣기 거북하구만.”
김독수 전무가 거산랜드의 기분 나쁜 현 상황을 지적하자 몇몇 임원들은 불만을 토해냈다.
“그래서, 식품 사업부가 비즈니스 빌딩 건을 가져가게 되면 업계 1위가 가능하다는 겁니까?”
대표이사인 최지운은 거산 랜드의 약점을 대 놓고 이야기하는 김독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2개 분야 중 업계 1위 분야가 없다는 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거산의 성장방식 자체가 잘 나가는 기업을 따라 ‘me too’ 하며 따라하기로 성장하는 것이었기에, 업계 1위가 없다는 것은 그룹의 치부나 다름이 없었다.
그 치부를 대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니 김독수가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더구나, 최지운은 그 동종업계 1위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 외국에서 성공한 프랜차이즈 사업을 들고 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자국에서 검증받은 프랜차이즈였기에 그 시스템과 맛을 그대로 들고 온다면 리스크 없이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그래서 외식 사업부를 업계 1위로 만들기 위해 비즈니스 빌딩 건을 외식 사업부에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헌데, 최초의 입안자라며 김독수가 설치고 있으니 괜히 눈에 거슬렸다.
“네. 대표님. 저희가 비즈니스 빌딩 건을 맡는다면, 저희 식품 사업부가 업계 1위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저런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CT그룹의 푸드밀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본래라면 작년에 우리가 업계 1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대전 중앙 청사 구내식당 경쟁에서 이겼다면, 작년에 CT를 제치고 업계 1위를 달성했을 것입니다.”
김독수는 정부 기관이기에 공개할 수밖에 없는 회계자료와 거래금액을 그래프로 보여주었다.
그의 말처럼 대전 중앙 청사 매출이 우리에게 다 왔으면 매출 규모로 업계 1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 대전 중앙 청사 구내식당을 따낼 생각을 해야지 왜 비즈니스 빌딩 건을 따내려고 하는 겁니까? 김 전무 말처럼 대전 중앙 청사만 따내면 업계 1위인데.”
“맞습니다. 하지만, 다시 경쟁을 붙어도 우리는 대전 중앙 청사를 따오지 못할 것입니다.”
“왜 또 지는 겁니까? 다시 경쟁이 붙어도 지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사회공헌 점수 때문입니다. 관공서에서는 관련 사업을 발주할 때 대기업이 들어오면 그 매출에 따른 사회공헌 점수를 평가에 추가합니다. 이 사회공헌 점수에서 우리는 CT그룹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김독수는 작년 대전 중앙 청사 입찰 건에서 패배하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은 입찰 평가서를 스크린에 올렸다.
“가격, 메뉴, 운영시간 등 모든 부분에서 우리와 CT그룹은 비등한 점수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공헌 점수에서 20점 차이가 나버렸습니다.”
“CT그룹이 푸드뱅크를 적극 지원해서 그런 건가?”
“네. 그렇습니다. 우리와는 달리 CT그룹은 식품 사업부에서 레토르트 제품을 직접 제조 유통하다 보니 남는 음식을 푸드뱅크에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자체 제조 없이 OEM 제조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는 불가능한 점수군. 그럼 대전 중앙 청사를 우리가 앞으로도 따올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가?”
“아닙니다. 따올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이 비즈니스 빌딩 구내식당이 그 키포인트입니다.”
김독수는 스크린에 부산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올렸다.
[학교 밖 청소년들의 사회복귀 일자리를 만들고 있는 거산 랜드의 식품 사업부!]
“청소년 갱생 협회의 요청으로 아르바이트를 뽑을 때 탈선 후 갱생하려는 청소년을 우선 고용하여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다는 기사입니다.”
“저렇게 하면 그 사회공헌 점수가 올라가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 표를 보시면, 복지 법인이나 복지 단체에 지원을 하는 경우에는 사회공헌 점수를 20점을 줍니다. 푸드뱅크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이 항목을 봐주십시오. ‘취약계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는 사회공헌 점수를 40점을 주게 됩니다.”
“오! 두 배로군. 헌데, 일자리 숫자는? 몇 명을 고용했다고 저 점수를 다 주는 게 아닐 것 같은데.”
“맞습니다. 갱생 협회와 대전 중앙 청사 쪽에 문의해보니 200명 이상이어야 40점을 준다고 하더군요.”
“너무 많군.”
다들 인건비에는 민감했기에 200명 이상을 고용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서 틈새를 찾아내었습니다. 고용 유지에 대한 부분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 3개월 후 퇴사를 시켜도 된다는 말인가?”
“네. 그렇게 해도 되지만, 갱생 협회에서 말하길 탈선 청소년들은 우리가 퇴사시키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중간 퇴사하는 비율이 높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하긴. 그렇겠지. 참을성 없는 애들이니깐. 그럼, 이 빌딩 건으로 만드는 구내식당에 탈선 청소년들을 계약직으로 받아들이고 자연스레 입사, 퇴사가 일어나게 된다면 200명을 쉽게 채울 수 있겠군.”
“맞습니다. 대표님. 그래서, 저희 식품 사업부에서는 이 비즈니스 빌딩 건이 필요합니다. 빌딩 구내식당에서 나오는 매출과 사회공헌 점수로 내년 대전 중앙 청사를 따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CT그룹을 젖히고 우리 거산 랜드 식품 사업부가 업계 1위가 됩니다. 대표님 저희를 밀어 주십시오.”
“흐음.”
최지운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외식 사업부에 외국 프랜차이즈를 밀어주고, 비즈니스 빌딩 건까지 합쳐서 업계 1위를 만들려고 했는데, 새로운 1위 가능성이 있는 분야가 나온 것이었다.
우선, CT그룹에서 1위 자리를 뺏어 온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외국계 프랜차이즈는 수치나 매출 자료가 없지만, 김독수는 명확한 자료와 수치로 빌딩 건을 달라고 어필하고 있으니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정하기 전에 외식 사업부의 이재영 상무를 쳐다봤다.
이보다 더 어필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재영 상무는 나서지 않았다.
“이건 식품 사업부에서 진행하도록 하세요.”
***
“오빠 이건 무슨 돈이야?”
건희는 갑자기 통장에 입금된 200만 원에 놀라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너 명의 좀 빌려 달라고 했잖아. 거기서 들어온 돈이야.”
“일도 안 했는데, 돈이 이렇게 들어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말이 되지. 떳떳하게 번 돈이니깐 받아.”
“드라마 보면 떳떳하게 돈 벌었다는 사람들 다 사기꾼이더라.”
“이상한 드라마 좀 그만 보지 그러냐. 그러니깐 시집을 못 가는 거야.”
“웃기고 있네. 다 필요 없고, 어떻게 벌었는지 빨리 이야기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명의만 빌려주는데, 20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거냐고.”
“네 명의만 빌린 게 아니라 동규랑 정진이랑 해서 부동산 임대 법인 하나 만든 거야. 거기서 임대 수입이 나온 거고.”
“와 무슨 부동산이기에 그렇게 수익이 나는 거야? 대단하네.”
“수익 나온 거에 내 돈도 넣어서 보낸 거니깐 돈 모아서 시집 밑천이나 만들어. 집을 사도 되고.”
“치. 어느 세월에 집을 사?”
“이걸 시드머니로 해서 모으고, 대출 땡기면 집 살 수 있지.”
“근데. 이렇게 돈 줘도 되는 거야? 이모에게 주는 거랑 아주머니에게 주는 거, 그리고 나에게까지 주면 오빠 월급 그냥 다 쓰는 거 아니야?”
“맞아. 월급 그대로 다 나가는 거야. 근데, 난 돈 거의 안 쓰거든. 이제 개인 돈 쓸 일도 없는고. 그리고 보너스도 나오니깐 걱정하지 말아.”
이제는 법인 카드를 쓸 거니깐 개인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돈 쓸 일이 없다는 말에 동생인 건희가 울컥했다.
가족들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을 수밖에 없는 장남의 무게가 느껴진 거였다.
“내가 더 잘할게 오빠. 고마워.”
“그래 더 잘해라. 이거 녹음했다. 잘 못 할 때는 이 통화 녹음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틀어 달라고 할 거다.”
“미친. 전화 끊는다.”
동생과 통화가 끝이 나자 이번엔 정진이에게 전화를 했다.
“야, 정진아. 진짜 그 신문기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위에서 공문이 내려왔어.”
“청소년 협회와 고용 협정 맺고 아이들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고 하는 거?”
“어, 맞어. 아르바이트 6개월 후로는 계약직 전환 검토하는 걸로 되어 있더라, 신문기사 나고 이렇게 바로 결정이 날줄은 몰랐어.”
“우리도 놀랐다 야. 거산 랜드가 이렇게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니깐. 그런데, 또 기부금은 안 낸다고 하더라.”
“당연하지. 이름처럼 거산이 되고 싶은 언덕배기급 작은 산이니깐. 통이 작아요. 이름만 거산이야 아주.”
“하하하 그래도 애들 뽑아 주는 것만 해도 땡큐다.”
“그럼 애들 서류 보내주라. 다른 4곳 다 설비 공사 들어갔고, 다음 주부터는 더 스타 빌딩 조리실에서 교육받고 해야 해.”
“알았어.”
***
[띵똥]
법인 통장에 2580만 원이 들어왔다는 문자를 보니 뭔가 웃겼다.
두 달 동안 다섯 곳의 구내식당을 관리하며 정신없게 살았더니 월세가 들어오는 날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반절은 임차한 월세로 빠져나가고 1260만 원이 법인의 수익이었지만, 한 달에 1200만 원이 넘는 돈은 보너스 달에도 받아 본 적이 없는 큰돈이었다.
헌데, 매달 이렇게 돈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금세 우울해졌다.
금융자산이 있는 사람은 이리 쉽게 한 달에 천만 원을 버는데,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만큼의 돈을 벌 수 없다는 생각에 부의 격차가 체감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이 돈으로 뭘 사고, 무얼 하고 하는 욕구에 충실한 소비를 하려고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돈을 보고도 그런 소비를 위한 욕구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든지 쓸 돈이 있으니, 지금 당장 돈을 써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안 생기는 거였다.
그저, 가족을 위해 돈을 쓰고, 직원들에게 맛있는 회식을 사주는 게 소비 지출의 전부였다.
어쩌면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들어가는 고정 비용이 있고, 회사 일이 바빴기 때문에 그런 소비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은 매달 들어오는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장학재단을 설립해 볼까 하는 것이었다.
청소년 협회와 협정을 맺은 이후로 자활 의지가 있는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로 왔는데, 개인 면담을 해보면 다들 가정에 문제가 있었다.
결손 가정이거나 홀 부모 밑에서 자라며 학업을 놓고 탈선을 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구내식당에서 일을 하다 요리 일이 적성에 맞는다면 그쪽으로 계속 배울 수 있게 검정고시나 요리학교에 갈 수 있는 지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 일에는 장학 재단이 딱이었다.
물론, 다른 생각도 있었다.
예를 들면. 황계재단 같은 곳이었다.
청소년 장학 지원을 위해 만들었다는 황계재단은 기부금이나 재단 재산으로 장난질을 치고 있다고 뉴스에 몇 번 보도가 되었었다.
법인도 공익 목적 법인이라고 있었지만, 법인인 만큼 그 제재와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장학 재단은 그런 제재나 법적 한계가 거의 없는 무소불위의 재산 보관소였다.
더구나 장학 재단의 수익 사업이라고 한다면 부동산 임대업 수입이든 다른 일로 번 수입이든 마음대로 꺼내어 쓸 수 있었다.
물론, 꺼내 쓸 때는 장학금 지급이라는 명목으로 지급해서 쓰는 꼼수가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장학금 지급 대상선정 자체가 재단의 고유권한이었기에 그 수혜 대상이 이상하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장학 재단을 운영한다고 하면 얼마나 있어 보이는가.
“오케이 장학 재단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