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핑계.
정진이의 ‘너 로또라도 걸린 거냐’ 하는 말에 간이 철렁했다.
이 자식이 어떻게 내가 로또 걸린 걸 알았지 하는 의구심이 생겼고, 이걸 다 털어놓아야 하나 고민했다.
“법인이 계약한 다섯 곳 보증금만 20억이 넘는데, 네가 로또에 걸렸을 것 같진 않고, 혹시 이거 회사 임원이 껴서 작업하는 거야? 월세 통행료 받는 그런 작업이야?”
간 떨어질 뻔했지만, 지레짐작해준 정진이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래. 그거 맞어. 월세 통행료. 전무님이 비자금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이렇게 중간에 끼어서 뽑기로 했어.”
“역시. 하여튼 그놈의 비자금. 어휴. 있는 놈들이 더해요. 더해.”
정진이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욕을 뱉어 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욕을 듣게 된 김독수 전무에게 미안해졌다.
독수형 미안해. 그래도 우리 같은 라인이잖아. 엘리베이터 같이 타는 깐부사이니깐 이해해 줘.
“그럼 세무 관련으로 인건비와 상여금으로 최대한 처리해서 작업해볼게.”
“그래 탈세와 절세는 한 장 차이라고 하던데, 네가 좀 수고해 주라. 근데, 세무법도 잘 아냐?”
“아버지 청과물 가게 세무 봐 드린 지 벌써 5년이 넘었어.”
“오케이. 그럼, 내가 특별한 밥 사줄게.”
“특별한 밥? 설마, 구내식당 밥?”
“당연하지. 이제 더 스타 빌딩 구내식당만 이용하기로 했거든.”
“KNM 방송국 밥이나 거기나. 무슨 특별함이 있다고.”
“다르거든. 친구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밥이거든.”
“웃기고 있네.”
정진이랑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으니 애들이 옷을 다 골랐다고 들고 왔다.
남자애들은 이상한 골프웨어 바지랑 조끼를 들고 왔는데, 이것도 다 취향이란 생각에 그냥 사줬다.
“너희들도 알바 자리 만들어 줄 테니까 그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알았지?”
“네에!”
***
본사 설비 팀이 설비를 마무리할 때쯤 영양사와 조리사도 채용이 되었는데, 이들도 2년 계약직이었다.
영양사와 조리사가 영양과 조리 난이도를 고려해 월간 메뉴를 정하게 되면, 거기에 소요되는 식재료를 올리게 되고, 그걸 사원인 김민욱이 받아 본사의 식자재 물류팀에게 발주를 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보조원들과 아르바이트도 처음에는 본사의 인사과에서 인력 관리 업체에 의뢰해 직원을 받았다.
그런, 직원에 대한 관리를 계약직으로 입사한 김이서가 담당하는 것이었다.
물론, 현장에서 매출이 올라오는 것을 정리하는 일이나 조리복이나 휴지 같은 소모품의 관리도 김이서가 하게 될 일었다.
지금은 더 스타 빌딩 한 곳밖에 없기에 일이 좀 편한 느낌이었지만, 앞으로 4곳이 더 순차적으로 오픈할 예정이었기에 점점 일도 늘어날 터였다.
“과장님. 현장 OT는 오픈 사흘 전으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현장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
“네, 보통은 준비하면서 서로 보고하지만, 이서 씨 같은 경우나 아르바이트생의 경우에는 실제 전부 다 같이 모이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픈 사흘 전에 다 같이 OT로 모여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으며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집니다.”
“오픈 전날 예행 연습의 연습이라고 보면 되겠군. 더불어 회식까지 하는 그런 거야?”
“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케이 그럼 그날 다 같이 보자고.”
***
탁탁탁! 타닥타닥!
현장 OT를 위해 더 스타 빌딩 구내식당으로 온 김이서와 김민욱은 조리복을 입고 주방 안에 들어가 있는 임건호를 보고 한번 놀랐고, 그의 칼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기에 두 번 놀랐다.
“여 어서 와! 둘 다 조리복 갈아입고, 조리실로 들어와. 오리엔테이션이라면 이렇게 직접 체험하면서 해보는 게 최고 아니겠어?”
어서 옷 갈아입고 들어오라는 건호의 말에 둘은 조리복을 받아 입었다.
“세 시간 전부터 오셔서는 같이 조리하면서 저렇게 하시네요.”
영양사인 이미애의 말에는 약간은 부담스럽다는 어투가 묻어 있었다.
“열정이 넘치시는 거죠.”
둘은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들어갔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 뻘쭘하게 서 있었다.
“둘은 국을 저어. 우동 다시와 된장으로 만든 국이랑 계란국이야. 저게 기본이 되는 국이야.”
건호는 둘에게 설명을 하면서 우동 다시 국물은 바로 우동 국물로 쓸 수 있고, 잔치 국수의 국물로도 쓰이거나 다른 국의 기본 바탕이 되는 국이라고 설명을 했다.
“그럼, 계란국은요?”
계란국을 젓던 이서였다.
“계란국은 만둣국, 떡국의 기본이 되지. 미역국이나 김칫국은 다른 국으로 쓰이기 힘들어서 메인 국이라고 하기 힘들지.”
“그런데, 과장님은 어떻게 이리 잘 아시는 거예요?”
“내가 군에서 조리병이었거든. 그것도 간부식당.”
“와! 과장님 준비된 인재셨네요.”
이서는 이런 단체 급식에 최적화된 인재라고 감탄을 했다.
그에 반해 김민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장님. 보통은 고대 출신이면 다른 보직을 주지 않는가요? 제가 군대 있을 때는 인 서울만 되어도 다 행정병 차출이었는데.”
“보통은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국숫집을 하셨거든. 그리고, 내 과가 식품경제학과였으니 바로 조리병 직행이었지.”
“아아!”
공군과 해군은 급양병으로 특기를 지원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지만, 육군의 경우에는 평생 부엌칼 한번 안 잡아본 병사라도 집이 음식점을 한다고 하면 바로 조리병 차출이었다.
집에서 보고 듣고 한 게 조금이라도 있을 거니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면 조리 관련 학과를 나오면 차출이었는데, 학과 이름도 식품경제학과다 보니 2연타로 무조건 차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단체 급식 경험이 있으니 부산 TO가 여기밖에 없었는데도 보내 달라고 할 수 있었지.”
내가 라떼는 말이야 하며 군 조리병 썰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김민욱은 외면도 못 하고 흥미롭게 듣는 척을 했다.
그리고, 옆에서 양파를 까고 있던 알바생 세 명에게도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너희들도 영장 날아오면 조리병으로 아예 지원해서 가 그러면 자격증도 딸 수 있고, 어느 가게로 가든 경력 인정해준다니깐. 경력 좀 쌓고 창업을 해도 되고, 부산이니깐 호텔 조리 쪽으로 가도 되고, 좋지 않냐?”
“저는 오토바이 레이서 할 건데요.”
“그 위험한 걸 왜 탄다고 어휴. 하여튼 이제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다 현역으로 간다니깐 군대 갈 때 이 형 생각하면서 조리병으로 가. 그럼 평생 먹고살 기술 배워 오는 거니깐. 알았냐?”
“네네. 근데 우리 언제 밥 먹어요?”
사무실 근무 인원과 현장 조리 인원들의 업무 이해를 만든 현장 OT가 내가 라떼는 말이지 하는 건호의 설교 OT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작업 장화 안에 양면테이프로 탈습제를 붙이는 거라던지 칼을 가는 방법들은 도움이 된다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자 밥도 다 되었습니다.”
조리사인 채인화 씨가 작은 통에 밥을 퍼 놓고, 만든 반찬들을 하나둘씩 내놓기 시작했다.
식판에 밥을 다 퍼서는 기다란 탁자에 마주 앉았는데, 사무실 인원까지 10명이었다.
“내일 최종 예행 연습 전에 이렇게 직원들끼리 오리엔테이션 겸해서 밥을 만들어 먹으니 참 좋습니다. 밥을 먹으며 서로 얼굴도 익히고,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아둬야 나중에 의견 교환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먹고 합시다!”
다들 밥 퍼 놓고 뭐하냐는 눈치였기에 얼른 밥부터 먹자고 했다.
“음. 바로 해서 그런지 밥도 진짜 맛있어요.”
사정이 있어 자취하고 있는 이서는 흑미가 살짝 들어간 갓 지은 밥을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 같았다.
밥 옆으로는 김자반도 뿌려져 있었기에 김자반 반찬 하나만으로도 밥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저어가며 끓였던 계란국의 맛이 궁금했다.
계란국을 끓일 때는 당연히 직접 계란을 깨서 넣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유 팩처럼 계란물이 들어있는 패키지 제품을 사용해서 계란국을 끓이는 것이 신기했다.
또 계란국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던 굴소스로 간을 맞추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다.
집에서 자주 해 먹는 음식이라도 단체 급식에 나오는 음식은 그 조리법도 달랐고, 맛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떡갈비라고 식판에 올라와 있는 것도 달짝지근한 맛은 좋았지만 떡과 갈비 고기를 따로 조리한다는 것을 알고는 실망을 했었다.
이서의 생각으로는 떡과 갈비가 같이 어울리며 맛을 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조리 후 끝에 한 번 섞어주는 것이 전부였기에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식판에 올라가 있는 잡채와 멸치볶음, 나물무침까지 생각하자 조리의 편의성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치는 농협에서 납품받는 것을 그대로 쓴다지만, 한 끼 준비에 매번 4가지 반찬과 국을 준비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는 타협이라 생각되었다.
가격 또한 5,500원이었으니 맛과 가성비를 다 만족했다.
이서의 이런 생각처럼 다들 가격대비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물론, 자신들이 직접 만들었으니 맛이 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주중 메뉴표를 보며 다들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주방 동선과 업무 분장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잔반과 조리실 청소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며 현장 OT가 끝이 났다.
“정리가 일찍 끝났네요. 이제 4시 반인데, 간단히 저녁 먹고 헤어지는 게 어떻겠습니까? 술은 맥주 한 잔씩만. 미성년자는 못 먹는 게 당연하고. 어때요?”
“좋죠. 남이 차려주는 밥이 사실 제일 맛있으니깐요.”
영양사인 이미애가 찬성하고 조리사인 채인화도 찬성하자 다들 옷을 갈아입고 모였고, 광안대교를 타고 패밀리 레스토랑인 남천동 VABS로 갔다.
“헛. 과장님 너무 비싼 곳 오신 거 아니에요? 이거 회사에서 처리 안 해줄 건데.”
4과의 출납 업무도 이서가 맡고 있다 보니 먼저 걱정을 했다.
“괜찮아. 이럴 때 쓰려고 돈 버는 거지. 자 다들 4층으로 올라갑시다.”
VABS 4층은 바다가 보이는 단체 연회석이 있었는데, 여기서 먹는 스테이크는 경치 때문인지 더 맛이 있는 느낌이었다.
다들 남이 차려주고 서빙해 주는 음식을 먹다 보니 치워야한다는 일에 대한 불안감도 없었고, 맥주도 한 잔씩 했기에 자연스레 서로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회식이 되었다.
“그런데, 조리사님은 왜 팔에 쿨토시를 하고 계신 거예요?”
고1 알바생인 무영이가 채인화 조리사의 팔토시를 궁금해했는데, 사실 건호도 궁금하긴 했다.
7월이긴 했지만, 날이 더워서 다들 반소매를 입고 다녔는데, 채인화는 양손도 아니고, 오른손에 흰색의 팔토시를 꼭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을 할 때도 끼고 있었고, 지금도 오른팔에만 토시를 하고 있었다.
“문신 때문이라면 저도 있어요.”
무영이는 마치 자랑처럼 소매를 거둬서 어깨를 보여주었는데, 어깨에 웬 여자 얼굴이 있었다.
“여자친구?”
“맞는데. 전여친요. 하하하. 이거 못 지운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새 여자친구 생기면 리터칭해서 비슷하게 해줄 수는 있대요.”
무영이의 철없는 말에 헛웃음이 났는데, 다른 알바 둘도 문신이 있다고 목덜미와 팔꿈치를 보여줬다.
꼰대처럼 한소리 해주려고 했지만, 학교를 자퇴하고 탈선했던 애들이니 어쩌면 저런 문신이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위한 행동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조리사님은 무슨 문신이에요? 막 흑염룡이 있는 거예요?”
무영은 어떤 문신인지 궁금하다며 채인화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팔토시를 그대로 잡아당겨 버렸다.
건호는 갑자기 보여진 채인화의 팔 모습에 ‘헛’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게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