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씨앗이 뿌려지다.
매달 천만 원 넘는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생각에 이걸 또 어떻게 굴려볼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망상을 하기도 전에 김독수 전무의 호출로 9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전무실로 들어가니 허문도 팀장이 책상 옆에 서 있었는데, 자연스레 그 옆으로 서게 되었다.
“야, 우선 여기 데이터에 오류가 있어. KNM 방송국의 직원이 150명 밖에 없다고 되어있지만, 그건 정규직만 나와 있는 거고, 기업 정보에 나와 있지 않은 비정규직 200명을 추가해야 해. 그러면 구내식당 수치 자체가 달라지는 거야.”
김독수 전무는 건호를 보자마자 기획서의 수치 오류부터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운팅도 마찬가지야. 중복 어떻게 처리할 거야? 그리고, 센텀시티 광장 내 푸드 트럭이라던지 새로 생기게 되는 백화점 푸드 코트로의 고객유출은 변수로 아예 들어가 있지 않잖아.”
김독수의 성격대로 괜한 딴지를 거는 것 같았지만, 타당한 지적이었다.
“허 팀장이 이런 오류를 먼저 찾아내서 수정하고 데이터를 재가공해야 할 거 아니야. 이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거야?”
“시정하겠습니다.”
늘 사람 좋게 웃던 허문도 팀장이 열중쉬어 자세로 시정하겠다고 자세를 잡으니 건호도 열중쉬어를 하고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야, 또라이.”
“네.”
“오류가 좀 있지만, 꽤 괜찮은 기획제안이야. 데이터 재수정하고 해도 확실히 수익이 남으면서 사업부 예산 내에서 처리도 가능해. 원래 이쪽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 틈새를 알아낸 거야?”
“그냥 하다 보니 알았습니다.”
“그래? 그럼, 여기 재임대 해 주겠다는 법인대표랑은 어떤 사이야? 친인척이야? 아님 학연이야?”
“동문이시라고 좋게 봐주셨습니다.”
“학연? 그래 좋아. 이래서 학벌 좋은 애를 데리고 있어야 해. 오래되고 좋은 학교 출신들은 동문들이 다 위에 있거든. 영업에 학연, 지연, 혈연을 쓰면 안 된다고 하지만, 이게 최고의 효율이 나는데, 왜 안 쓰겠어. 안 그래? 이런 학연이 없으니깐 비겁하다고 입을 터는 거지.”
“...”
건호는 뭐라 더 대답하고 싶었지만, 괜히 켕기는 게 있다 보니 입을 다물었다.
“이 건 다음 주에 부장 회의에 올리도록 하고, 바로 진행하도록 해.”
“외식 사업부에서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보증금 걸고 식당 운영하는 게 자기들 방식이라고 따질 수 있겠지만, 이렇게 중간에 업체가 하나 껴서 업체 위탁을 받은 거니깐 뭐라고 못할 거야.”
김독수 전무가 이렇게 확답하듯이 이야기를 하니 허문도 팀장도 다 된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 팀장은 별도로 팀 하나 꾸려.”
“네. 일단 임 과장을 영업 4과로 해서 따로 과를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야. 4과 만들어서 쟤한테 맡기고 하는 건 알아서 하고, 내가 이야기하는 팀은 전국구로 영업할 팀이야.”
“네? 전국구 영업요?”
허문도 팀장은 갑자기 전국구 영업을 한다는 말에 그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센스가 없어서야. 너도 이거 봤잖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해운대 센텀시티처럼 경기도와 인천에 이런 특수성이 있는 비즈니스 빌딩이 많을 거란 말이야.”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 신도시 비즈니스 빌딩의 특수성을 CT그룹에서 알아채고 나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점해야 해.”
“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본사 특수 판촉팀에서 몇 명을 내가 불러 내릴 테니까 그쪽하고 해서 새로운 팀을 하나 짜봐. 이거 전국적으로 펼칠 수만 있다면 수익 꽤 짭짤할 거다.”
“네 추진하겠습니다.”
김독수 전무의 말에 건호도 순간적으로 그 전국구 팀에 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전무가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즈니스 모델인 만큼 그 영업 성과도 꽤 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부품처럼 돌아가는 반복적인 업무보다는 뛰어들어 이루어 냈을 때의 쾌감을 아는 직원이라면 다들 저 전국구 팀에 들어가고 싶어 할 터였다.
하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있고, 이제는 매달 천만 원씩 들어오는 연금복권과 같은 노다지가 있는데, 그런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었다.
뭐, 야망을 잃어버린 동물원의 맹수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 때가 되면 동물원에서 밥도 주고 씻겨도 주고 온종일 잠만 자고 놀아도 좋아해 주니 동물원이 최고였다.
갇혀 있는 것이 단점이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동물원 맹수 팔자야말로 최고의 팔자였다.
“야 임 과장.”
“네.”
“그때 내가 이야기했지, 엘리베이터 PC충 짓 하는 건 성과 내고 나서 하라는 거.”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내가 타는 엘리베이터 타도 돼.”
“네? 아직 성과가 나오지 않았는데요.”
“이 새끼 웃기네. 허락해주는 거야 인마.”
한마디로 자기 라인에 넣겠다는 그런 말이었다.
“네. 그럼, 시간대가 맞으면 부담 없이 타겠습니다.”
“새끼. 괜찮다고 사양은 안 하네. 그만 꺼져.”
“네.”
배꼽 인사를 하고 전무실을 나오니 그제야 아쉬운 마음이 좀 들기 시작했다.
좀 더 크게 전국구 팀에 가서 연금복권을 더 만들었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보증금으로 내 돈을 태워야 했고, 그게 아니라면 자신처럼 재임대를 해 줄 수 있는 돈 운용이 가능한 전주들을 확보해야 돌아가는 모델이었으니, 그런 전주들 상대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았다.
뭐, 돈 많은 전주들은 독사 전무가 더 많이 알고 있을 테니 알아서 잘하겠지.
“아아!”
계단을 내려오며 방금 일을 다시 천천히 생각하다 보니 뒤통수를 후리는 깨달음이 있었다.
김독수 전무가 임대업자와 어떤 관계이냐고 내게 물었던 게 떠올랐고, 그때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을 떠올리자 내 잔머리 수법이 들통났구나 하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목 뒤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임대 법인을 내세워 월세 작업을 친 것을 김독수 전무가 파악했고, 추궁할 수 있음에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넘어가 줬다는 걸 깨닫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괜히 부끄러워졌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설쳐대었던 손오공이 이런 자괴감을 느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이거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되었다.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자.
이젠 자신이 탄 엘리베이터에 타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은 나를 자기 라인에 넣어 준다는 뜻이었으니, 머릿속으로 긍정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국구로 영업을 하겠다는 이 비즈니스 모델에도 중간에 임대 업자를 끼워 넣는다면, 내가 쓴 방법 그대로 월세를 빼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빼먹는 사람은 김독수 전무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도의 특판팀을 본사에서 내리겠다고 한 것도 이해가 되었고, 수익구조를 전국구로 늘려 규모를 크게 하겠다는 것도 결국엔 다 자기가 크게 뽑아 먹겠다는 말이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무가 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걸 다 파악하고 뽑아 먹을 계획까지 짠 거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성깔 더러운 꼰대 임원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독사처럼 무서운 사람이었다.
내 잔머리 수법을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준다는 그런 독사의 눈빛이 다시 떠오르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커피만 홀짝였다.
***
“임 과장 이리 컴!”
허문도 팀장의 자리로 불려가니 3과의 권영일 과장도 와 있었다.
“ 임과장이 올린 기획서가 통과되었고, 4과를 만들기로 결정이 났다. 그래서 할 말이 있으니깐 같이 커피나 한잔하지.”
허문도 팀장은 두 과장은 커피를 들고 회사를 나섰는데, 길 건너에 있는 부산 KBC 방송국으로 움직였다.
지방 방송국이지만, 오래전 만들어져서 그런지 그 부지가 넓었고, 나름 산책이 가능할 정도의 정원도 있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이런 이야기 할 때 회사 옥상 같은 데 가서 멋지게 이야기하는데 우리 회사는 옥상에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이야길 할 수가 없어.”
방송국 정원에 조경석으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의자에 팀장이 앉자 두 과장이 마주 앉았다.
“영일아. 민욱이를 4과에 줘야 되겠다.”
인사이동에 애초에 협의나 조율 같은 건 없었다.
자기 밑에 있는 직원을 옆 과에 보내야 하는 권영일도 놀랐고, 그 말을 처음 들은 나도 놀랐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가야 놀라지를 않을 건데 일이 그렇게 되었다. 내 판단으로는 민욱이를 4과로 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그럼 신입사원으로 뽑아주시는 겁니까?”
권영일 과장은 이미 결정 난 것을 되돌리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신규 충원 인원부터 있는지를 물었다.
“정규직은 없다. 3과에는 계약직 2명, 4과에는 계약직 1명이 추가되는 것이 한계다.”
그 말에 권영일은 커피잔을 든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공채로 들어온 빠릿빠릿한 신입사원을 기껏 가르쳐 두었더니 4과에 빼앗기게 되었고, 대타로 들어오는 사람은 신규 계약직이니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임 과장이 서울서 내려왔고, 영업도 아예 모르다 보니 민욱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권영일은 표정 관리를 못 하겠는지 먼저 일어나 인사를 하곤 회사로 돌아갔다.
권영일도 이제 만들어질 4과가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인원 구성이 다 되어있는 팀웍 좋은 1, 2과에서 사람을 빼기보다는 이제 만들어 진지 1년 된 3과에서 빼는 것이 전체 영업과를 위해서 더 좋은 판단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씨. 왜 여기로 굴러와서 짜증 나게 하는 건데. 시바꺼.”
들고 있던 커피잔을 집어 던지고 커피잔을 밟으며 화풀이를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임건호가 자신에게 물어봤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때 보증금과 월세를 내고 입점하는 형태는 외식 사업부의 일이라고 조언을 해줬었다.
아직, 임건호가 올려 통과된 기획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몰랐지만, 분명 그 건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권영일은 급하게 사무실로 올라가 허문도 팀장의 책상에서 오늘 통과되었다는 기획서를 살펴봤다.
‘그래. 이거면 외식 사업부가 엮이는 거 맞네.’
급하게 기획서를 한 부 복사했고, 외식 사업부에 있는 동기에게 연락을 넣었다.
***
“즉시전력감인 민욱이를 붙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너 예쁘다고 그렇게 했겠냐. 다 팀을 위한 거지. 영일이 저놈이 나름 일은 잘하는데, 꿍한 게 좀 있는 놈이라 이거로 마음 많이 상했을 거야. 나중에 따로 술 한잔 사 주던지 해서 좀 풀어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계약직이 들어오는 건 다음 주는 되어야 하니깐 민욱이한테 제대로 상황 설명하고, 둘이 한번 만들어 봐. 다른 부서에 협조공문 보내고 하는 건 민욱이가 제대로 할 거야.”
“네. 헌데, 계약직 뽑는 건 임의대로 제가 뽑을 수도 있는 겁니까?”
“왜? 무슨 조건이 되는 사람이 필요한 거야? 그 스펙 조건 인사과 외주 담당에게 이야기하면 거기에 맞춰서 사람을 뽑아줄 거야.”
“아네. 그게 스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번에 임차해주시는 그쪽 법인에서 사람 한 명을 좀 꽂아줬으면 좋겠다고 해서요.”
“니미, 인사 청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