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한번 해준다고.
속에서 뜨겁게 솟구치는 게 열정이나 분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술이 섞인 토였다.
“우웩! 우웩!”
몇 번을 더 토해내자 속이 정리되었고, 정신도 차츰 맑아지는 것 같았다.
변기 뚜껑을 닫고 걸터앉았다.
사실, 이런 대우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수길 차장의 말처럼 영업을 해 본 적도 없었고, 단체 급식 판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취급을 당할 거라는 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듣고 보니 예상했다곤 해도 멘탈에 충격이 있었다.
특히나 신입사원 같고, 실적을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마음에 깊이 남았다.
시바, 영업이 별거야?
그저 신규 거래처 뚫어서 개척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래처 관리하면 되는 거잖아.
실적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 때문에라도 제대로 된 실적을 따내서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호승심이 끓어 올랐다.
영업맨으로 자부심이 강한 팀장과 차장에게 영업에 대해 개뿔도 모르는 내가 제대로 실적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번 해준다고, 내가 보여 준다고!
끓어오르는 혈기에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사실, 로또 당첨 이후로는 직장 생활에 대해서 예전처럼 전심전력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사라지긴 했었다.
그저 부산에서 영업해서 거래처 몇 개 만들고 그걸 관리 운영하기만 한다면 몇 년은 회사에 붙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붙어 있는 동안 여유 있게 당첨금으로 뭘 할지 생각하자고 나름의 헐렁한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내 자신, 인간 임건호가 능력 없는 봉급쟁이로 취급되는 건 기분이 더러웠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퇴사할 때 퇴사하더라도 제대로 된 실적을 만들어서 보여주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따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적을 만든 이후에 엘리베이터 같이 타는 것을 말하라고 했던 김독수 전무에게도 이제는 혼자 타고 다니지 말라고 입을 털어주고 싶었다.
회식 오기 전에 만들고 있던 기획서를 다시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바닥을 다져 실패하지 않는 기획서가 있어야 했다.
허문도 팀장에게 병원 영업기획서로 까였던 것처럼 다시 까이긴 싫었다.
뭔가 술기운과 호승심에 제대로 된 능력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본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런 각오를 하고 영업팀을 보니 또 뭔가 다른 게 보였다.
영재 교육원을 서로 가져가기 위해 술 싸움을 하고 있는 1, 2과 과장들과 팀장에게 잘 보이고자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아리가또하고 있는 이수길 차장.
그리고, 언제 자리가 끝이 나는지 윗대가리들 눈치만 보고 있는 대리와 사원들.
다들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남 같지 않았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었던 수많은 과거의 ‘내’가 이들에게서 보였다.
어떻게든 회사에 남아 자리를 잡으려고 술을 마시고 아부를 하며 눈치를 보았던 수많은 ‘내’가 이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로또에 걸리지 않았다면 나도 저들과 같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더더욱 실적을 내고 싶어졌다.
***
“자자 2차 호프집 가실 분은 이쪽으로! 바로 귀가하실 분은 여기서 사요나라입니다~!”
혀가 살짝 꼬인 이수길 차장의 말에 나이가 많은 축에 드는 과장급 이상들은 다 저쪽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대리, 사원급에서 서로 눈치를 보더니 김민욱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뒷수발할 사람으로 짬이 안 되는 막내가 자진해서 나선 거였다.
“저도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 죄송합니다.”
“음. 그래 임 과장은 어서 들어가 봐야지. 그러고 보니 술이 꽤 센데. 얼굴에 전혀 취한 표가 안 나네.”
“하하하. 팀장님이나 차장님이 계신데 어떻게 취하겠습니까?”
“하하하. 그렇지 그런 마음가짐 좋아! 우리랑 2차? 아아, 안된다고 했지. 그럼 다음에 봐아!”
“넵. 들어가십시오.”
팀장 차장들이 수영로터리 쪽으로 사라지자 남겨진 사람들은 집으로 흩어질 준비를 했다.
그런, 대리, 사원급들을 세우고는 미리 뽑아 두었던 돈을 3만 원씩 손에 쥐여줬다.
“부산 대리운전비나 택시비 가격을 잘 모르지만, 이거로 다 갈 수 있지?”
“아휴. 과장님 이런 거 안 주셔도 됩니다.”
2과의 이경태 대리는 입으로는 안 줘도 된다고 했지만, 눈은 이미 얼마인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이경태의 모습이 예전 나를 보는 듯했다.
3만 원씩을 받으라 안 받는다 하는 술주정 옥신각신을 하며 6명에게 3만 원씩을 쥐여줬다.
“아휴. 과장님 진짜 이렇게 안 주셔도 됩니다.”
“아니야. 서울에서는 2차 안 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주는 게 기본이야. 2차 안 가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의 보상은 있어야지. 안 그래?”
“아, 감사합니다.”
이경태 대리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내 말에 공감하는 눈빛이었다.
2차, 3차로 회식을 하며 법인카드를 쓰는데, 일찍 가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없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팀장과 차장들이 나를 좋지 않게 본다면 돈질이라도 해서 대리, 사원들에게 어느 정도 인망을 얻어 둬야 했다.
그런 잔잔바리 인망에는 현질이 최고였다.
돈 싫어하는 놈이 어디 있던가.
서울에서 내려온 임 과장은 영업팀의 고인물 꼰대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이미지를 애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돈 잘 쓰는 호구라고 불릴 수도 있겠지만, 회사 내 소문은 결국 탕비실에서 입을 터는 젊은 사원들이 만들어 주니 나름 긍정적인 이미지를 위해 이런 베풂은 필요했다.
“자 그럼 다들 다음 주에 봐요.”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택시를 타니 영업부 특유의 문화인지 아니면 내가 건넨 대리비, 택시비의 위력인지 다들 허리를 굽혀가며 ‘과장님 들어가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를 크게 외쳤다.
“거산랜드 다니시나 봐요?”
택시 기사의 말에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는지 궁금했다.
“아, 직원들 우아기에 배지가 보이더라고요. 삼각형 큰 산 배지는 바로 눈에 보이거든요.”
“하하하. 그렇죠. 초록색의 산 모양이 좀 눈에 띄고 촌스럽죠.”
“디자인은 좀 촌스럽지만, 사실 그 배지가 나타내는 것은 다 부러워할 겁니다. 대기업이잖습니까.”
“아유,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닙니까? 신성전자나 대운기업도 아닌데요.”
“부산에서는 거산랜드만 해도 우와! 해 줍니다. 서울에서는 SKY 대학 출신이라고 하면 오! 공부 좀 했는데. 하지만, 부산에서는 부산대만 나와도 이야, 공부 좀 했는가 보네. 하는 거랑 비슷한 겁니다.”
택시 기사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칭찬 같으면서도 애둘러 까는 그런 말 같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기업 본사가 아예 없는 지방에서는 대충 시총 10위권의 대기업만 다녀도 대단하다고 치켜세워 주는 것이 지방의 현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일 정진이를 만나러 갈 때는 물론이고 부산에서 영업할 때는 거산 랜드의 직원이라는 것을 티를 좀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들먹거리는 것이 아니라, ‘거산’ 이란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
“정진아, 네가 하는 일이 비행 청소년 상담해주고 애들 갱생 도와주는 일이라고 했지?”
“비행 청소년뿐만 아니라 보육원에서 나와야 하는 애들이나 불우환경에서 자라는 애들에게 법률적인 지원을 해주고 하는 일이야.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도와주는 거지.”
“그럼, 그런 애들 중에 네 명 정도 알바할 애 있을까? 시급 4천 원 그대로 주고, 7시간 근무하면 30,000원 줄 수 있다. 당연히 밥 사주고.”
“무슨 일 시키려고?”
“시장 조사 리서치 일.”
병원 영업기획서와는 다르게 철저하게 조사를 해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빌딩 내 구내식당을 추진해볼 생각이었다.
그런 데이터를 구축하기 위해 리서치를 해 줄 친구들이 필요했다.
본래, 이런 인력을 써서 리서치를 하려면 회사에 품의를 올려 허락을 받아야 했다.
물론, 조사용역 아르바이트를 쓰는 품의를 올리면 그 타당성을 떠나 팀장 선에서 커트가 되는 게 기본이기도 했다.
아니면, 다른 파트의 일에도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할 때 그때 같이 집행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품의를 올려 통과가 되더라도 집행이 되기까지 또 일주일에서 길면 한 달 가까이 걸리기에 인력을 쓰기 위해 품의 올리고 받아내는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먼저 돈을 집행해서 처리하고 후에 품의를 올려 받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또 총무 쪽에서는 진짜 그 돈이 제대로 집행되었는지를 따져보는 데 한 세월이 걸렸다.
해서, 일단 내 돈으로 아르바이트를 쓰고 영업 기획이 통과되면 그때나 청구해서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니깐 해운대 비즈니스 빌딩의 출, 퇴근 시간에 카운팅하는 일이랑, 근무 시간에 빌딩 내 사무실에 가서 설문조사 받는 일이라는 거지?”
“그래. 출퇴근 카운팅도 하루만 하는 게 아니라 며칠 해서 평균을 내야 하니깐 한 달 동안 알바한다고 보면 될 거야.”
“알았으. 내가 건실한 애들로 한번 알아볼게. 그런데 이거 애들 아르바이트 이력에도 도움이 되겠냐?”
“한 달 단기 알바지만, 리서치 조사를 했다고 자소서나 이력서에 쓴다면 그쪽 업체에서는 완전 초짜보다는 우대해 주겠지.”
“오케이. 내가 알아보고 이번 주 내로 알려줄게.”
“그래. 부탁할게.”
건호는 정진과 헤어진 후 점찍어둔 비즈니스 빌딩의 관리사무소에 방문했다.
“아이고, 우리 쪽에서는 빌딩에 구내식당이 생긴다면 두 팔 벌려서 환영하죠. 더구나 거산랜드라면 대환영이죠. 여기 보세요.”
더 스타 빌딩 관리소의 이인후 부소장은 작은 가방을 들어 보여줬는데, 도시락 가방이었다.
“우리도 KNM 방송국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너무 멀어요. 걸어가서 밥 먹고 걸어오면 배가 다 꺼질 정도라니깐요.”
“하하하. 그렇죠. 저도 걸어가서 한 번 먹어 보니 너무 멀더라고요.”
“더구나, 이 동네가 빌딩풍도 더럽게 세서 겨울에는 진짜 밥 먹고 오다가 얼어 죽을 지경인데, 구내식당이 생기면 진짜 다들 좋아할 겁니다.”
이인후 부소장은 구내식당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침을 튀겨가며 멀리 나가 밥 먹는 게 힘들다고 어필을 했다.
“헌데, 구내식당을 저희가 만들려면 최소한의 보장 인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몇 명쯤 됩니까?”
“그 보장 인원이 규모에 따라 다릅니다. 식당을 만들 수 있는 공간에 따라 달라지고, 빌딩 내 거류 인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해서, 다음 주에 저희 리서치 직원들이 빌딩 내 출퇴근 인원 카운팅을 하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협조 좀 해 주십시오.”
“그런 협조라면 해 드려야지요. 아예 입주현황표를 드립니까?”
“아이고, 그렇게 제공해 주시면 계산하기 수월하지요.”
더 스타 빌딩은 45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입주 업체만 120곳이 넘었다.
단순 계산으로 업체 한 곳당 4명씩만 있어도 480명이었고, 그중 절반 정도만 이용해 줘도 기본 조건은 충당이 가능했다.
“그리고, 리서치 직원들이 각 업체에 방문해서 구내식당의 가격이나 운영시간, 선호 반찬 같은 것을 설문조사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일일이 방문하는 것도 가능하겠습니까?”
“아, 그건 각 기업체에서 보안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입주현황표까지도 흔쾌히 보여주었지만, 일일이 업체에 방문해서 설문을 받는 일에는 난처해했다.
“요 건은 제가 관리소장님이랑 해서 운영위원회 회장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 정보나 기업체 보안이 좀 민감한 문제라서요.”
“네. 무슨 말인지 잘 압니다. 구내식당을 운영하는데 손님들의 니즈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사이니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그렇지요. 제가 운영위원회에 문의해서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빌딩 내에 구내식당을 할 공간은 있습니까?”
“다행히 있습니다. 보러 가실까요?”
부소장을 따라간 곳은 지하 2층에 위치한 공간이었는데, 간판으로 스크린 골프 간판이 붙어 있었다.
대략 85평 정도 되는 큰 공간이었다.
“비즈니스 빌딩이라 스크린 골프장이면 대박 날 것 같은데, 잘 안되던가요?”
“잘 될 거 같았는데, 월세 감당이 안 되는지 1년을 못 버티더라고요. 여기가 4억에 250만 원입니다.”
이인후 부소장의 말에 아차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