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갔다 오더라도 한번은 가라!
막내 이모가 어머니를 낮에 봐주시기로 했지만, 이른 아침에 내가 출근을 해야 하니 오전 시간을 맡아줄 간병인은 있어야 했다.
이모가 사정상 오지 못할 경우도 있기에 간병인은 꼭 있어야 했다.
다행히 동생이 다니는 호텔에서 일을 그만두신 아주머니가 근처에 사셨기에 오전 시간 어머니를 돌봐주고 집안일을 해 주시는 조건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동생은 주말에 안 나오고 일하는 것이 평일 하루 3시간 남짓이라 100만 원으로 여사님과 이야길 했는데, 너무 적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빠 마음은 알겠는데, 돈 많이 드린다고 더 잘 봐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거야. 그리고, 서울하고 부산 물가 다르다니깐. 이 조건도 나쁘지 않아.”
동생 말이 맞는지 오시는 오 여사님도 만족스러워하셨다.
여사님이 나름 음식 솜씨도 있으셔서 밥반찬도 아주 잘 해주셨는데, 반찬값으로 얼마를 더 드리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아유. 건호야. 알고 보니깐 오 여사가 국민학교 후배였어. 어쩐지 얼굴을 많이 봤다고 했다니깐.”
“그러게요. 이렇게 언니들을 알게 되어 너무 좋네요.”
다들 국민학교를 졸업하신 지 40년은 넘으셨는데, 서로 얼굴 낯이 익었다면서 누구 아냐, 누구랑 어떻게 되냐 하면서 인맥을 맞춰본다고 잠시도 입을 쉬지를 않으셨다.
뭐, 막내 이모와 오 여사님까지 합이 맞아서 어머니와 잘 놀러 다니시고 한다면 최고이긴 했다.
“오빠 다행이지?”
“그래. 너무 잘 맞아서 이번 주말에 집들이도 하자고 하시네. 외삼촌들도 다 안다고 해서 다들 보고 싶으시대.”
“그 시절에는 한 학년에 막 900명 1000명씩 있었다고 하던데, 어떻게 기억하는 거지.”
“나도 그게 신기하다. 집들이는 니가 좀 신경 써주라.”
“알았어. 오 여사님하고 내가 요리는 할게. 돈만 줘.”
“그래. 그런데, 너 전에 사귀는 남자 있더만. 소개 안 시켜주냐? 아예 이참에 한번 데리고 와. 결혼 생각은 있지?”
사실 어머니가 아프신 이후 우리 집에서 2년 동안 계실 때 동생은 부산 본가에서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는 눈치가 살짝 나긴 했었다.
그리고 동생도 나이가 29살이니 때가 된 듯해서 운을 띄운 것이었다.
“결혼은 무슨. 돈이 어디 있어.”
“야 니가 돈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남친이 돈이 있어야지.”
“걔도 이제 30살 초반인데 무슨 돈이 있겠어. 호텔 조리실에 있다고 해도 우리 호텔이 특급 호텔도 아니고 수세프도 아닌데. 돈이 어디 있어. 월급이 다 거기서 거긴데.”
돈 문제가 나오자 건희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지금 사귀는 남자친구와 결혼까지도 생각해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냥 마음속으로는 ‘내가 집 사 줄게. 내년 30살 되기 전에 시집가.’라고 큰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돈 출처를 궁금해할까 싶어 꾹 눌러 참았다.
“그래도, 날 잡아서 그 친구 한번 보자고 해.”
“아, 됐어.”
“되긴 뭐가 되는데. 그러다 30 넘어서 그 친구랑 헤어지면 너 시집가기 힘들어.”
“아, 그냥 엄마랑 살면 되니깐 이제 이혼남인 오빠 앞길이나 잘 살펴봐. 딱 봐도 부산 지사 가시밭길이 보이는구만.”
“무슨 소리고. 탄탄대로 펼쳐져 있는 거 안 보이나? 니 안경 써야 되겠네.”
“사투리 억양 그거 아니거든요. 서울 사람이 흉내 내는 거 같거든요.”
“니가 서울 말투 흉내 내는 거 같거든.”
“니뿡이다. 하여튼 시집가라고 닦달하지 마라. 안 가도 되니깐.”
“야 그래도 한번은 가야지. 갔다가 돌아오더라도 갈 수 있는 상대가 있으면 가야지.”
“웃기고 있네. 이혼을 위해 결혼을 하냐? 하여튼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
더 뭐라고 하려 했지만, 귀를 막고 큰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건호도 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건호는 이렇게 시집가라고 참견하는 것이 극 꼰대 늙은이 참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이 아니라 여동생의 일이다 보니 나서서 입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재정적 지원도 해 줄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좋은 사람과 사귀고 있다면 어떻게든 빨리 시집을 보내고 싶었다.
어머니가 더 아프시게 되어 그 이유로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다 보니 어떻게든 서두르고 싶었다.
***
“이건 한 번 충전에 1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제품입니다.”
집에서 쉬는 동안 생활 편의를 위한 전자기기들을 사기 시작했다.
전자마트에서 가장 먼저 구매한 것은 청소기였다.
기존에 쓰던 것이 있었지만, 코드 선이 달린 제품이라 들고 다니기 편한 코드 프리 청소기를 구매했다.
그리고, 집안일에서 가장 귀찮다는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에 매립하는 식기 세척기도 구매를 했다.
바닥 먼지 청소와 설거지만 해결되어도 집안일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었기에 가장 먼저 산 것이었다.
여기에 일체형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사서 구비하자 어머니나 동생이 집안일에 쏟는 신경을 확실히 줄일 수 있었다. 물론, 나도 편했고.
이모님과 오 여사님이 어머니와 같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안방의 작은 티비도 큰 벽걸이 티비로 바꾸었다.
어머니는 이모와 오 여사님과 매일 초읍동 어린이 대공원으로 산책도 가시고 허심청까지 목욕도 다니시고 하니 혈색도 좋아지셨다.
집 앞의 미군부대가 시민공원이 되기로 했으니 나중에 집 앞 공원이 개장하면 더 운동하시기 편할 터였다.
***
“이야, 집들이한다고 음식 많이 했네.”
“갈비에 꽃등심에 오늘 기름칠 제대로 하겠네.”
오 여사님과 동생이 만든 음식이 판에 놓이자 외삼촌과 이모 내외분들이 둘러앉아 맛있게 음식을 드시기 시작했다.
아버지 쪽으로는 고모가 한 분 계셨는데, 젊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기에 사실 볼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서 한번 봤고, 내 결혼식에서 본 것이 전부일 정도로 고모 쪽과는 왕래가 없었다.
대신에 오 남매인 외가 쪽으로는 다 가까운 거리에 살아서 왕래가 잦았고, 이종사촌들과도 같이 어울려 컸다.
“그럼 월요일부터 출근하는 거냐?”
창원에서 오토바이 대리점을 하시는 큰 외삼촌이었다.
“네.”
“역시 대기업은 좋네. 이사 오고 한다고 일주일이나 휴가를 주고. 이사비 지원 같은 거도 해주냐?”
“아무리 대기업복지가 좋다고 해도 이사비는 안 줘요. 그리고, 저도 연차하고 다 몰아서 겨우 만든 거예요. 인사과 빽도 좀 썼고요.”
“지방 발령인데 이사비 지원이 없어? 아, 성과 좋을 때 나오는 김장 보너스처럼 회사가 잘 돌아가야 그런 것도 주는 거야?”
큰외삼촌은 대리점을 했고, 작은 외삼촌은 중소제조업에 다니다 보니 대기업에 대한 것을 다들 궁금해하셨다.
“저희도 김장 보너스 안 받아 본지 오래되었어요. IMF 이후로 대부분 사라졌을걸요.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을 거예요.”
“그래? 부산은 김장 보너스, 명절 떡값 주는 회사도 거의 없다 보니 텔레비전에서 준다고 하던 김장비가 아직도 있는지 알았지. 대기업 복지가 좋다고 하던데 그건 또 아니네.”
“저희 회사가 대기업치고는 복지가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에요.”
“야, 그래도 중소기업보다는 좋겠지. 우리 회사 사장은 회식해서 고기 사주는 게 회사 복지로 알고 있어. 돼지고기 사주면서 회사 복지가 좋다고 가오를 잡는다니깐. 소주에 삼겹살 사주면 회사 스트레스 다 사라지는 줄 알아요. 아 참, 웃긴 이야기해 줄까?”
“네. 해주세요.”
술 한잔하신 어르신들의 레파토리가 시작되었기에 둘째 외삼촌의 말에 확실한 리액션을 해줬다.
“내가 하는 일이 용접이다 보니 힘들어서 애들이 오래 다니지를 않어. 그래서 사장이 퇴직률을 줄이기 위해서 노털들인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애들이 도망 안 갈지를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뭐라고 했겠냐?”
“돈 더 줘야 된다고 했겠죠.”
“그렇지. 애들 회사 잘 나오게 하는 핵심이 연봉이지. 근데, 그렇게 돈 이야길 하니깐 자기는 돈이 없데. 아니 썅놈이 돈 없다면서 법인 차로 외제 차를 끌고 다니고, 지 마누라는 출근도 안 하면서 사내이사라고 꼬박꼬박 연봉을 받아 가는데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러면 뭐 계속 신입들 도망가겠죠. 솔직히 봉급쟁이한테 가장 큰 복지가 돈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런데 돈 없다고 연봉 말고 다른 방법 이야길 하라고 하니깐 웃기는 거지. 제일 중요한 돈을 외면하는데, 회사에 누가 남아 있겠냐고? 우리 같은 노털들만 남아 있는 거지.”
“근데, 둘째 외삼촌은 경력도 많고 하잖아요. 다른 데 옮기면 되는 거 아니에요? 기술잔데.”
“그러려면 거제도 유배 가야 해. 부산은 갈만한 회사가 없거든. 그게 부산시에서 이직률 낮추는 방법이었잖아. 하하하.”
“이직할 수 있는 회사를 없애서 이직률을 낮추는 방법 그거 직이는 방법이네. 하하하.”
부산 출신들이 하는 자기 지역 비하 개그이다 보니 다들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었다.
“외삼촌. 집들이가 아니라도 이렇게 가족들끼리 자주 모여서 같이 밥 먹어요.”
“그래 오늘처럼 꽃등심 사주면 내가 진짜 창원에서 날아 오꾸마. 오늘 잘 먹었데이.”
“진짜, 오늘 조카 덕에 배에 기름칠 제대로 하고 간다.”
외갓집 사람들은 다들 큰 부자는 없었지만, 또 크게 가난한 집도 없었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기에 그런 고만고만함이 일가친척들 간의 우애와 화목함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런 화목한 일가친척을 위해 고기쯤이야 언제든지 사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로또에 당첨됐다는 것은 평생 숨길 생각이었다.
큰돈은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큰 화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
대기업으로 불리는 거산랜드의 부산 지사는 영화 명대사로도 유명한 ‘너그 서장 남천동에 살재?’ 할 때 나오는 그 남천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부산 KBC 방송국 앞 9층 건물이었는데, 다른 지역의 세 들어 사는 지사들과는 다르게, 자체 소유 빌딩이었다.
부암동 집에서 서면으로 10분 정도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로 25분 이동 후 내려서 5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꽤 짧은 출근길이었다.
물론, 부산 사람들 기준에선 30분만 넘어도 출근 시간이 긴 것이긴 했다.
[띵!]
경쾌하게 울리며 열리는 빈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탔다.
다들 자기 부서 층을 누르고 거울을 보거나 닫힘 버튼을 누르는데, 갑자기 닫힘 버튼을 누르던 이가 급히 열림을 누르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갑자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에 뭐지 싶었는데, 뒤에서 헉! 하는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후다닥이라는 소리가 날 것처럼 엘리베이터에 있던 이들이 급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자신이 눌렀던 층수 버튼을 눌러 불을 끄며 내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있으니 내가 바로 중역이다 하는 표정을 가진 50줄의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 뒤로 비서로 보이는 이가 올라타서는 내게 어서 내리란 눈짓을 했다.
“넌 안 내려?”
“네?”
“아, 거래처 사람인가?”
날카롭게 생긴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는데, 눈빛이 날카로운 것이 영 기분이 꺼림직했다.
“아닙니다. 오늘부터 부산 지사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신입? 전입? 서울에서 온 거야?”
“네.”
“으음. 눈치 없는 거 보니 서울에서 부산으로 보내질 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