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으로 유통재벌-3화 (3/203)

003. 돈의 가치.

“아아, 잠시만요. 그러면 좀 더 쓰기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농협 직원은 일일 이체 한도를 1억으로 바꿔줬고, 체크카드와 신용카드의 출금 한도도 1억으로 변경해 주었다.

“핸드폰으로 금융거래를 하신다면 앱도 설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직원은 건호의 핸드폰을 받아서는 직접 보는 앞에서 앱을 설치하고 비밀번호를 몇 번 처넣고 인증을 하더니 핸드폰으로도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해주었다.

“타행 계좌로 큰 금액이 입금이 되면, 보통은 그 은행에서 연락을 하거나 할 겁니다. 가족들에게 증여, 상속의 목적으로 송금하시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니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세무 관련 이야기까지 은근슬쩍 해주는 것으로 봐서는 건호의 환자 코스프레가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현명한 소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이 직원에게 투자를 맡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온 것이기에 우선은 돌아가 이리저리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처음 안내해준 청원경찰이 나가는 문을 열어주며 인사를 해 주었는데, 이런 대우 때문인지 아니면 당첨금을 수령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건물 밖에서 맡아보는 공기도 달라진 것 같았다.

우선은 길 건너에 있는 서대문경찰서 입구로 움직였다.

월요일에 농협 본점을 나오는 당첨자를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인터넷 괴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듣고 흘려도 되는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당첨자의 정보를 어떻게 알아내는지 기부단체나 종교시설에서 연락이 오고 한다는 TV 방송도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거였다.

서대문경찰서 민원봉사실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민원실 의자에 앉아서 농협 앱을 실행했다.

1등 당첨금 7,432,492,110원에서 세금 33%를 뗀 4,979,769,714원이 계좌에 들어와 있었다.

앱을 설치하고 확인할 때 농협 직원과 확인했었지만, 혼자서 몰래 보는 건 그 맛이 달랐다.

그리고 살짝 아쉬웠다.

딱 50억이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뭐 49억이면 어떤가.

아, 4 9 깽판이면 곤란한데.

사실 아직까지도 내 수중에 들어와 있는 돈이 허상인 것 같았고, 꿈인 것 같아서 혹여나 깨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여전히 있었다.

민원봉사실을 나와 편의점에서 죠스바를 또 사 먹고는 서울역까지 걸었다.

서소문 역사공원을 걷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직장인들이 밥을 먹기 위해 삼삼오오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본사에 들려 권영두 선배에게 밥이라도 사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서울에서 신세를 졌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좋은 인연들에게 베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다음에 여유를 가지고 올라와서 제대로 술이든 밥이든 사주고 싶었다.

그런 좋은 인연들을 생각하다 보니 괜스레 남이 된 지선이도 떠올랐다.

연락을 해 볼까.

지금의 금전이 있다면 지선이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이미 깨져서 떨어진 그릇인데 그게 다시 돈으로 붙인다고 붙어질까.

물론, 돈이 있고, 편한 생활이 보장된다면 깨진 금을 품고서 살아갈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마음속 앙금이 사라질까.

그리고, 깨진 것을 다시 붙이기보다는 이 돈으로 건물을 사고 자산가 행세를 해서 훨씬 더 어리고 예쁜 여자를 만나 살면 된다는 본능에 충실한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어린 여자가 힘든 시기를 같이 견뎌줄까 하는 생각을 하자, 본능에 충실했던 생각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웃기고 있네. 결혼해 주겠다는 여자도 없는데, 혼자 아주 망상쇼를 하고 자빠졌네.

쓸데없는 망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서울역이었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갈까 하다 KTX 시간도 있고 혼자 먹는 거보다는 집에서 같이 먹자는 생각에 가장 빠른 시간의 특석을 잡아 탔다.

아침에 이어 특석 좌석에서 제공되는 견과류와 쿠키 2개, 생수 한 통이 점심 요기가 되었다.

분명 이렇게 먹었으면 배가 고프다고 난리가 나야 하는데, 당첨금 수령이라는 엄청난 일 때문에 호르몬이 뿜어져 나왔는지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리고 잠도 오지 않아 그저 멍하게 창밖을 보며 내려왔고, 가끔 핸드폰을 켜서 돈이 제대로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해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부산에서 가장 품질 좋은 고기를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부산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국제식품으로 가라고 입을 모았다.

부산 진구에서 성장하신 우리 어머니도 그랬고, 사하구에서 성장한 대학 동기의 어머니도 그렇게 이야길 하셨었다.

부산에서 좀 번화한 곳이라면 국제식품이란 기업이 3~4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초원농원이라는 프리미엄급 식육식당을 운영했기 때문이었다.

아이 일이든, 어른 일이든 간에 집에 좋은 일이 있으면 국제식품 초원농원에 가서 숯불갈비를 먹는다는 그런 공식이 부산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다른 대형 식육식당들이 많이 생겼음에도 어르신들은 국제식품의 고기가 여전히 최고라며 따봉을 날리셨다.

그래서 부산역에 도착해 집으로 가는 길에 초원농원에 들려 그 비싸다는 한우 투뿔 꽃등심을 50만 원어치를 집어 들었다.

스티로폼으로 된 고기 팩 5개를 내려다보니 사실 별거 없는 고기였다.

물론, 때깔이 좋긴 좋았지만.

이렇게 쉽게 사면 되는 것인데, 평범한 직장인일 때는 이게 비싸서 마음 놓고 먹어보지를 못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있었다.

실하게 갈비가 들어간 갈비탕도 10만 원어치를 샀고, 고기와 구워 먹을 새송이버섯과 아스파라거스도 구매했다.

[띠링!]

결재 알람 문자가 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로또 당첨금이 진짜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손에 꽃등심을 들고 집으로 가는데, 고기를 먹지 않았음에도 그냥 배 속이 든든한 것 같았다.

***

“웬 고기야? 초원 농원꺼네! 서울에서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와 니 예리하네. 좋은 일 있는 거 어째 알았냐? 서울 올라간 일이 잘되었거든.”

“다행이네. 근데, 서울 다녀왔다고 오빠 부산말 억양 또 이상해졌거든.”

“그런가.”

“어. 근데, 고기 먹고 출근하게 빨리 구워줘. 내가 구우면 고기 냄새 몸에 밴단 말이야.”

동생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가 구워서 줄 생각이었다.

신혼 때 사서 몇 번 쓰고 난 뒤로 쓰지 않았던 전기 그릴을 꺼내서 올리브유를 두르고 바로 꽃등심을 올렸다.

[챠아아악~]

기름에 튀겨지듯 구워지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속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역시 고기는 진리였다.

새송이버섯에 아스파라거스까지 구워서 가위로 잘라가며 어머니와 동생의 접시에 덜어줬다.

소금 기름장에 육즙이 쟈르르 흐르는 꽃등심을 보고 있으니 그제야 아침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위장이 화를 내는지 미친 듯이 고기를 원하고 있었다.

“오빠, 여윽시 초원농원이야. 고기 장난 아니야. 투뿔 꽃등심이 진짜 살살 녹는 거 같아. 엄마, 내가 쌈 싸줄게.”

“아이고 입 찢어지겠다. 고기 그만 넣어 잘 안 씹혀.”

“엄마, 진짜 고기가 살살 녹는다니깐. 한번 먹어봐.”

“어휴, 출근해야 하는 너나 어서 먹고 가.”

서로 옥신각신하던 것은 동생이 크게 싼 쌈을 엄마가 받아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입을 한껏 벌려 쌈을 받아먹은 이진숙은 딸의 호언장담대로 고기가 연하고 부드러워서 녹는 거처럼 씹히자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어머, 진짜 고기가 막 녹는다 얘. 꽃등심! 꽃등심! 하는 이유가 역시 있네.”

“엄마 이번에는 아들이 싼 고기쌈도 먹어봐.”

“아이고 그래그래. 오늘은 자식들 서비스가 좋네.”

이진숙은 아들인 건호가 싸주는 고기 쌈도 맛있게 씹어 먹었고, 출근하려는 딸에게는 다시 쌈을 싸서 먹여줬다.

“너도 엄마가 싸주는 쌈 먹어봐라.”

“네.”

우걱, 우걱.

어머니나 여동생의 말마따나 진짜 고기가 입에서 녹는 듯이 부드럽게 씹혔고, 맛이 있었다.

사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한우 투뿔 꽃등심이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고기를 더 맛있게 만들어 주고 있는 건 가족들 간에 서로 먹여주고 아껴주려 애쓰는 가족애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오빠. 나 퇴근하고 나면 또 같이 먹게 한 팩만 빼둬! 맛있다고 억지로 다 먹지 말고.”

“알았어. 근데, 또 그렇게 먹으면 맛없는 거 알지?”

“아니거든요. 일단 난 간다.”

잘 먹었다고 출근하는 동생과 만족스레 고기를 드시며 티브이를 보시는 어머니를 보고 있으니 행복이 별건가 싶었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이게 돈의 가치지.

페라리 스포츠카니 비싼 요리니 다 필요 없었다.

그저 가족이 배부르고 즐거워하면 그게 최고였다.

***

“어휴 진짜 고기 맛있네. 이거 비싼 거 아냐? 국제식품 거라며?”

“네. 별로 안 비싸요. 서울에 비해서 부산은 고기도 싸다니깐요. 이모 오시면 제가 매일 고기 구워 드릴게요.”

건호는 오전부터 집으로 놀러 온 막내 이모와 어머니께 고기를 구워주고 있었다.

“오호호. 그럼 고기 얻어먹기 위해 나 매일 온다.”

“아휴 언제든지 오세요. 고기는 언제든지 사드릴게요.”

“그럼 진짜 매일 와야 되겠네. 오호호. 그리고, 오후에는 내가 매일 오면 되니깐 언니 간병인은 구하지 말어.”

“이모가 오후에 와주신다면 좋죠.”

사실,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으로 온 이유이기도 했다.

장녀인 어머니의 외가는 5남매였는데, 큰외삼촌과 큰이모, 둘째 외삼촌과 막내 이모 모두 부산과 경남에 계시기에 자주 찾아오길 원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모들이 오시면 어머니를 좀 돌봐 주시지 않으실까 하는 그런 얌체 같은 속마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어머니와 막내 이모는 12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었기에 아직 젊으신 이모가 어머니의 케어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셨다.

“그래, 언니가 나를 업어 키웠는데, 나는 업어 드리진 못해도 언니 간병은 해줘야지. 우리 언니 어쩌다 몹쓸 병에 걸렸누.”

이모는 아이처럼 고기를 받아먹으며 좋아하는 어머니를 보곤 울기 시작했다.

그런 이모의 모습에 어머니도 큰일이 난 줄 알고 울기 시작했고, 나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

“그래도 언니는 증세가 양호해서 다행이다. 내 아는 사람 중에는...”

어머니가 정신이 돌아오시고 티비를 보시자 이모는 내가 고생이 많다며 봉투를 내미셨다.

“아이고, 이모 오히려 제가 드리려고 준비했어요.”

이모가 내미는 봉투를 만류하며 나도 봉투를 내밀었다.

“이모 다른 거 없이 제가 매주 50만 원씩 드릴 테니까 낮에 어머니랑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같이 놀아만 주세요. 카드도 따로 드릴게요.”

“야 그러면 한 달에 200만 원 넘어야. 부담 가!”

“이모가 어머니 봐 드리고 하는데, 돈 쓰는 재미라도 있어야죠.”

이모는 내가 건네주는 돈 봉투를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억지로 손에 쥐여드렸다.

“아이고, 우리 조카가 대기업 다닌다고 손이 크네. 근데 너무 쓰는 거 아냐? 이리 돈을 주면 부담될 건데.”

“걱정 마세요. 열심히 벌고 있으니깐. 엄마랑 매일 맛있는 거 드시러 다니시고, 놀러 가시고 싶은 곳 있으면 택시 대절해서 어디든지 다니세요. 그러면 됩니다.”

“이야. 그럼, 허심청이라도 매일 갈까. 어릴 때는 산을 넘어 걸어서 온천장에 갔었는데.”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쓰시라고 제가 드리는 거니깐요. 목욕하고 맛난 거 드시고 하세요.”

건호는 지갑에서 5만 원권을 10장 빼서 더 드렸다.

“그럼, 우리 신사임당 언니 덕에 내일 허심청 가고 하마. 둘째 언니도 불러야겠다.”

이모는 내 덕에 때 빼고 맛난 거 먹겠다고 즐거워하셨다.

“큰언니, 건호가 말이지 내일 같이 허심청 가라고 이렇게 돈을 주네. 옛날처럼 같이 목욕하자. 언니도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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