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이혼.
“그래, 이제 그 잘난 효자 노릇 혼자서 잘해봐.”
법원 앞에서 이 말을 남긴 여자는 5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떠나갔다.
돌아서 가는 전처의 그런 모습이 미워 보여야 했는데, 가냘프게 한껏 움츠린 뒷모습을 보니 왠지 서글퍼 보이기만 했다.
아픈 어머니를 모시냐 못 모시냐 하는 문제로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나름대로 3년의 연애와 5년의 결혼생활로 돈독하다 여겼던 부부 사이는 서로를 미워하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기 인생을 희생할 수 없다고,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의 말에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23살에 나를 만나 30살이 넘어 이혼녀가 되었으니 지선이, 아니 이제는 남이 된 저 여자의 팔자도 힘든 팔자라는 생각만 들었다.
내가 좀 더 능력 있는 남자였다면 지선이가 참고 아픈 어머님을 모셨을까 하는 헛된 아쉬움만이 마음속을 헤집었다.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은 아이가 없는 게 다행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안도감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아이를 가지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에 돌이라도 올려둔 것처럼 갑갑했다.
멀어지던 전 마누라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건호도 몸을 돌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친구들은 아픈 시어머니 안 모시겠다고 이혼하자는 마누라가 못된 년이라고 카톡 방에서 욕을 했지만, 지선이 아니 이제는 남이 된 저 여자도 견디기 힘들었을 터였다.
[전화 받으세요! 전화 받으세요!]
“어. 그래 이제 막 법원 나왔어. 그래 다 끝났으니깐. 바로 갈게.”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동생의 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
“아니, 다들 본사로 올라오지 못해서 안달인데, 왜 부산 근무를 자원한 거야? 아무리 제2의 도시라곤 하지만, 부산 인프라가 서울이나 수도권보다는 못하다고.”
인사과 과장이자 건호의 학교 선배인 권영두 과장은 지방 근무 지원을 한 임건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기껏 과장을 달자마자 바로 지방 근무 지원이라니.
“그게 어머니 고향이기도 하고, 여동생이 부산에서 일을 하다 보니 어머니 병간호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에휴. 그래. 그건 듣긴 들었는데, 너무 아까워서 그런다. 학교 후배에 같은 응원단 출신이라 어떻게든 같이 갔으면 했는데...”
권영두 과장은 피고 있던 담배 필터를 거칠게 씹어댔다.
회사 내에 우호 세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가장 가까운 직계 후배가 본사를 떠난다고 하니 아쉬웠다.
“사유야 어떻든 간에 지방으로 한번 가면 다시 본사 못 올라오는 거 알고 있지?”
“네 어쩔 수가 없지요.”
이들이 다니는 거산랜드란 대기업은 본사가 있는 서울, 경기가 핵심이었고 지방의 지사들은 그저 쭉정이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에는 영업 TO밖에 없어서 너 영업으로 가야 해. 그것도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 이사도 하고, 정리도 해야 하니깐 최대한으로 연차랑 공휴무로 해서 출근 날짜를 좀 미뤄주십시오.”
“그래. 최대한 해 줄게. 발령은 다음 주에 날 것이고, 부산 출근은 최대한 미뤄줄 테니까 정리 잘해.”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서울 올 때마다 인사 드리러 오겠습니다.”
***
“포장이사니께 사장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되고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음료수나 좀 사주시면 됩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업체 이사를 끝내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우리 이삿짐을 옮기기로 한 이삿짐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으며 웃돈도 필요 없고, 음료수나 사달라고 했다.
음료수를 사기 위해 들린 아파트 상가에는 저번 주에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왔다고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로또를 구매하고 있었다.
“저번 주에 1등이 나왔다고 엄청 많이도 사네.”
사실 로또 명당에서 구매를 하든, 1등 당첨자가 한 명도 안 나온 곳에서 구매를 하든, 로또 당첨 확률은 똑같았다.
하지만, 심리적인 만족감과 기대감 때문에 괜히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에서 구매를 하면 로또에 당첨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건호도 괜히 그런 기분이 들어서 음료수를 사고, 로또도 자동으로 5천 원어치를 구매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에 아재들과 같이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니, 낙동대교를 지나면서부터 뭔가 공기부터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스레 차 창문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부산 사람이라드만. 낙똥강 냄새 맡아서 뭐 할라꼬.”
“10년 만이니깐요. 부산도 많이 바꿨네요.”
“뭐 바뀌어봤자 고서 고지. 근데, 내가 부산 서울 이사를 전문으로 하다 보니깐. 느끼는 것이 직장만 있으면 부산이 최고인기라.”
“그렇죠. 그런데, 직장이 없죠.”
“글치. 그게 문젠기라. 우리 아들내미도 부산에서 직장 찾다가 결국 공무원 시험 봐서 서울 갔다 아이가.”
이삿짐 아재의 자식 자랑인가 싶었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어휴 요즘 공무원 시험 경쟁률 높은데 잘했네요.”
“근데 그 노마도 ‘아빠 부산에서 신입 연봉 2400주고 칼퇴 시켜주는 회사 있으면 거기 가지 서울 올라가기 싫다.’ 이러더라고. 그 정도로 지금 부산 경제상황이 안 좋은 기라. 제대로 된 회사가 없는 기지. 서울 가면 신입 사무직 2400 준다고 하면 욕하는데, 부산은 그런 회사도 잘 없는 기라.”
이삿짐 아재의 말처럼 부산은 대기업이라고 부를만한 회사가 없었다.
노령인구 1위와 인구 유출 1위에 빛나는 한국 제2의 도시. 부산.
고용이 불안한 부산으로 자원해서 내려가는 건호의 입장에서는 자식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아재의 넋두리가 무서운 공포 이야기로 들려왔다.
***
“이사 박스는 며칠 있다가 찾으러 올 테니까 정리되시면 연락해주시고 복도에 놔두시면 됩니데이.”
이사를 할 때 아무리 포장이사라고 해도 집 주인이 직접 정리하고 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돈값 한다고 입주 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이 깔끔하게 청소를 해 주셨고, 서울, 부산 이삿짐 전문이라는 분들은 모든 배치까지 완벽하게 해 주셨다.
그리고, 이혼 후 반으로 줄어든 살림살이 덕분에 밤 9시가 넘자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휴 다했네.”
대충 씻고 거실 소파에 주저앉으니 사방이 조용했다.
그제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 왔다는 게 실감 되었다.
그리고, 혼자 있다는 외로움이 슬금슬금 밀려왔다.
물론, 내일이면 여동생 집에 계신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올 것이니 조용하게 혼자 있다는 외로움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외로움과는 다른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처음으로 산 집을 팔고, 다른 집에 이사를 왔다는 것도 있지만, 늘 함께했던 사람이 이제는 없다는 상실감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회사가 나름 대기업이라 2004년 결혼을 할 때 대출을 받아 3억5천짜리 신혼집을 하남시에 구했었다.
그렇게 5년을 살고, 헤어질 때 집은 6억이 되어있었다.
잔여 대출 1억을 갚고, 남은 5억에서 지선이에게 2억을 줬다.
법적으로는 2억 5천으로 딱 나눠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지선이가 양보를 해줬다.
“어머니 치매라서 간병인 비용 비쌀 거야. 아무리 아가씨가 돌본다고 해도 병원비 많이 나올 거야.”
쌀쌀맞게 이야길 하면서도 양보해준 지선이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었다.
그 덕분에 부산에서도 공기가 좋다는 시민공원 옆의 24평 아파트를 사들일 수 있었다.
물론, 신축이 아니라 6년이나 된 아파트였지만.
“휴우...이제 남이 된 여자 추억해서 뭐하냐. 이삿날이니 짜장면이나 먹자.”
아파트 상가정보 책을 살펴보니, 뭔가 재미있었다.
짜장면의 가격이 서울이나 경기도에 비해 20~30% 가량 저렴했다.
일자리가 없는 지역 특성인지 아니면 수도권과 지방의 차이인지 음식 메뉴들의 가격이 확실히 저렴했다.
“착한 음식값은 마음에 드네.”
그냥 짜장이나 시켜 먹으려던 것을 짜장 탕수육 1인 세트로 시켰다.
그렇게 시켜도 11,000원이었다.
주문을 하고 나니 할 게 없었다.
이사를 토요일에 오다 보니 인터넷, TV 연결은 월요일에나 될 터였다.
그러다, 아파트에는 공용안테나가 달려있기에 동축선만 연결하면 공중파티비가 나온다는 것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선을 찾아 연결하니 깨끗한 화면의 공중파 영상이 나왔다.
“캬! 역시 황령산 안테나 탑이 잘 보여서 그런지 공중파는 잘 나오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황령산 안테나 탑을 보니, 부산으로 잘 내려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3억으로 황령산 전경이 보이는 24평 아파트라니.
서울 남산이 보이는 아파트라면 못해도 6억은 했을 터였다.
[자 그럼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는 461회 로또 추첨 방송. 오늘의 추첨 버튼을 누르겠습니다.
당첨은 공이 나오는 순서와 상관없이 번호만 맞으면 됩니다.
로또 발행을 통해 조성된 기금은 저소득층, 장애인들 공익사업 등에 사용됩니다...]
티비에서는 로또 추첨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그냥 다른 채널로 틀어버렸겠지만, 오늘은 음료수를 사며 자동으로 구매해둔 로또복권이 있었다.
얼른 지갑을 가져와 복권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
[자. 461회 로또 추첨 방송 첫 번호가 나옵니다. 16번... 6번... 27번... 5번... 23번... 마지막 번호는 44번입니다. 나눔 로또 제761회 당첨 번호는 5번, 6번, 16번, 23번, 27번 44번입니다...]
“헛!”
티비에서는 아나운서가 뭐라고 떠들어 대었지만, 건호에겐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 건호의 눈에는 티비 화면 하단에 표시되어 있는 당첨 번호와 손에 들고 있는 로또 용지에 나와 있는 번호가 같다는 것만 보였다.
다시 확인해 봐도 5천 원어치 구매한 로또 용지의 맨 위에 있는 번호가 분명 티비에 나오고 있는 번호와 똑같았다.
“시...시발 이거 서울에서 이사 왔다고 서울 촌놈 놀리겠다고 몰래카메라 하는 거 아니지? 서울서 왔다고 부산시에서 서프라이즈 장난하는 거 아니지?”
건호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봤는지 걱정이 되어서 방금전만 해도 전망 좋다고 했던 베란다 커튼을 다 닫았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혹시나 사람이 있나 싶어 집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거 진짜 내가 1등에 걸린 거 맞지?”
이게 진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이사를 하고 나서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어서 꾸는 꿈인지 구분이 안되었다.
일부러 손등도 만져보고 뺨도 때려보았지만, 분명 아픔이 있었고, 현실이었다.
“와아! 진짜 로또에 걸린 거야? 미친...”
[띵동!]
갑자기 들려 온 벨 소리에 건호는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
[작가의 말]
존경하고 친애하는 독자님!
저는 평소에 허언증이 있으며, 거짓말을 잘하고, 꿈에서 본 것을 현실처럼 꾸며서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글에 나오는 모든 기업과 인물, 대명사는 제가 꿈에서 보고 쓰는 것이오니, 혹여나 같은 이름이나 기업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실제와 동일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여라도 이름이 같다거나 하는 우연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니 그냥 생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