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노장의 관록 02
‘세금은 지나갔다. 이다음은 반드시 이득을 본다.’
다음 타자는 앞선 타석에서 안타를 때린 3번 타자 윌리엄이었다.
김민은 생각했다.
경기 초반 분수령이 바로 지금이라고.
“여기서 윌리엄을 막아 내면 5회까지는 무난하다.”
“반대로 막지 못하면 힘들어지겠지.”
그의 말을 받은 것은 부르스였다.
부르스는 김민을 제외하면 선발 투수 중 가장 경험이 풍부한 선수였다.
클락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킴, 너무 바르도에 집착하는 것 아니야? 저 친구는 우리가 쓰러뜨려야 하는 적이라고.”
“그렇긴 한데…… 밉지 않단 말이지.”
부르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킴은 미완의 대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킴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바르도를 키워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김민은 속내를 살짝 들킨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투수 코치 시절 버릇이 나온 모양이군.’
탬파베이 선발 투수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카운트가 2-1로 바뀌었다.
“윌리엄이 유리한 고지에 섰어.”
“다음 공에서 승부가 갈린다.”
바르도는 헤르만처럼 공을 하나 넣고 뺄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윌리엄을 잡으려면 여기서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상대도 그것을 알고 있다.’
어설픈 공은 당한다.
가능하다면 코너를 공략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바르도의 패스트볼은 그런 제구를 바랄 수 없었다.
‘커브로 승부?’
사무엘은 커브 사인을 내는 데 주저했다.
커브는 분명 패스트볼보다 제구가 좋았다.
하지만 코너에 들어온다고 자신할 수 없었고,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최악의 결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산체스와 윌리엄, 두 사람만큼은 조심해야 한다.’
고민하던 사무엘이 네 번째 사인을 냈다.
- 하이 패스트볼.
구위로 윌리엄의 배트를 찍어 누르자는 뜻.
‘오늘 바르도의 공 중 가장 좋은 공은 커브다. 하지만 바르도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는 타자를 움찔하게 만드는 패스트볼이다. 99마일(159km)에 육박하는 공이라면 중심 타선도 막아 낼 수 있다.’
잠시 뒤 패스트볼이 높은 코스로 날아왔다.
슈욱!
윌리엄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빠, 빠르다!’
스트라이크와 볼.
0.1초 안에 이뤄지는 판단.
윌리엄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배트가 멈춘 순간 공이 미트를 파고들었다.
파앙!
이번 공은 미트를 때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코스에서 벗어난 건가?’
윌리엄이 고개를 돌린 순간 주심이 오른손을 들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라고? 존을 통과했단 말인가?’
바르도의 하이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존을 그대로 통과해 미트를 강타했다.
게다가 구속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었다.
“100마일(161km)입니다!”
“오늘…… 아니, 이번 시리즈 최고 구속이 나왔습니다. 바르도, 정말 빠르군요.”
캐스터와 해설자는 바르도가 기록한 구속에 목소리를 높였다.
윌리엄도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을 확인했다.
그는 배트를 내려놓으면서 미간을 좁혔다.
‘100마일이 제구까지 된다고?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것은 바르도가 아니라 랜디 존슨이군.’
바르도가 다시 같은 공을 던질 수 있다면, 윌리엄은 바르도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공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이것은 타자와 투수 그리고 포수도 알고 있는 사실이이었다.
‘같은 공은 두 번 들어오지 않는다.’
윌리엄은 얼굴을 굳힌 뒤 다시 배트를 들었다.
이반 감독은 윌리엄의 타격 자세를 보곤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이 승부의 끝을 보고 싶군.”
“감독님, 지금 우리는 월드시리즈를 치르고 있습니다.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 승부는 흥미진진하단 말이야.”
탬파베이 팬들은 윌리엄의 적시타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윌리엄, 부탁한다!”
“홈런도 아니고 안타! 딱 그것만 바랄게!”
“동점을 만들자고!”
2루 주자 산체스는 발이 빨랐다.
짧은 안타라도 안타가 나오기만 하면 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윌리엄, 이대로 물러서는 건 아니겠지?’
산체스는 윌리엄의 승리에 배팅했다.
그가 리드를 넓힌 순간이이었다.
바르도가 빠르게 몸을 돌면서 견제구를 던졌다.
팡!
유격수 글러브가 산체스의 다리를 터치했다.
산체스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위험해!’
다음 순간 2루심의 판정이 나왔다.
“세이프!”
이반 감독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이번 승부가 갈릴 뻔했군.”
“산체스의 리드가 너무 컸습니다.”
“홈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사무엘은 산체스의 세이프 판정이 크게 아쉬웠다.
‘견제가 조금만 더 정확했으면 산체스를 잡을 수 있었을 거야.’
그의 견제 사인은 완벽했다.
하지만 바르도의 제구는 견제구를 던질 때도 썩 좋지 못했다.
“카운트 2-2, 날카로운 견제가 나왔지만, 산체스를 잡는 데 실패합니다.”
“1사 2루, 메츠는 여기서 동점을 주지 않으려 할 겁니다.”
윌리엄은 빠르게 내야수들의 위치를 살폈다.
‘시프트는 없다. 지금 야수들의 위치를 보면, 시프트가 나온다고 해도 크진 않을 것 같다.’
그는 코스타 타격 코치의 지시대로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췄다.
‘이번에는 크게 벗어나는 공만 아니면 친다.’
투 스트라이크 투 볼.
공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오면 친다.
이것이 윌리엄의 생각이었다.
바르도는 사무엘과 사인을 교환한 다음 셋업 피치에 들어갔다.
윌리엄은 바르도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와인드업이 아닌데도 최고 구속을 찍었군. 이쪽은 와인드업보다 셋업 피치가 더 낫다는 건가?’
슉!
빠른 공이 바깥쪽을 향했다.
‘애매하다.’
투 스트라이크.
애매할 경우에는 배트를 내는 것이 더 나았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총알처럼 날아갔다.
“타구는! 아! 라인을 살짝 벗어납니다!”
윌리엄의 타구가 떨어진 곳은 1루 라인 바깥쪽이었다.
“파울!”
1루심의 판정과 함께 윌리엄이 배터 박스로 돌아왔다.
“아까웠어.”
유리 감독이 윌리엄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좋은 타자야. 98마일(158km) 패스트볼을 정확히 밀었어.”
“그래도 힘은 조금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겠지. 한 번도 40홈런을 쳐 본 적이 없으니까.”
윌리엄은 제레미, 에이로드와 같이 50홈런 이상을 노리는 홈런 타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민은 그것은 윌리엄의 재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지 않고 50홈런 이상을 칠 수 있는 이는 메이저리그 천재 중에서도 선택받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지 않은 위대한 홈런왕 켄 그리피 주니어도 50홈런을 넘긴 시즌은 22시즌 중 단 2시즌에 지나지 않았다.
배리 본즈 역시 스테로이드를 만나기 전에는 50홈런을 넘지 못했다.
그만큼 메이저리그에서 50홈런 이상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카운트는 여전히 2-2입니다!”
윌리엄은 스트라이크존을 넓게 보고 있었다.
‘타이밍은 잡았다. 같은 코스로 하나 더 오면 이번에는 안타다.’
그러나 다음 공은 패스트볼이 아닌 커브였다.
휙!
느릿하게 떨어지는 공.
윌리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틀렸군.’
느릿한 커브.
하지만 그의 배트는 이미 홈플레이트 앞에 위치했다.
98마일(158km)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춘 결과였다.
‘이번에는 네 승리다.’
윌리엄은 힘차게 허공을 쳤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윌리엄의 삼진.
클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하아! 여기서 윌리엄이 삼진이라니, 큰일이군.”
부르스도 이 장면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진루타도 아니고, 삼진이라. 이런 식이면, 렉터도 김이 빠지겠군.”
김민은 두 사람과 달리 조용히 마운드를 주시했다.
‘이전 타구가 파울이 된 게 컸다. 그 타구가 라인 안으로 들어갔다면, 바르도는 급격하게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타구는 라인을 벗어났고, 바르도는 살아났다.’
바르도는 삼진을 잡은 뒤 소매로 땀을 닦았다.
‘내가 해냈어. 윌리엄을 잡아냈어.’
어려운 승부였다.
그러나 그는 그 어려운 승부에서 이겼다.
1사 2루.
아직도 위험한 상황.
하지만 바르도는 이번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모든 게 사무엘 덕분이야. 그의 리드는 메이저리그 최고야.’
객관적으로 말해 사무엘의 리드는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 바르도의 능력을 100% 끌어 내고 있었다.
유리 감독은 캄진 수석 코치의 제안이 적중한 것에 만족을 표했다.
“캄진,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사무엘이 이렇게까지 버텨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로브터와 배터리를 이룰 때보다는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로버트는 탬파베이의 고전이 믿겨지지 않았다.
“바르도는 투 피치 투수다. 패스트볼 아니면, 커브…… 탬파베이가 왜 공략을 하지 못하는 걸까?”
어제 선발로 나섰던 헤르만이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바르도의 공이 좋거든.”
로버트가 목에 힘을 주었다.
“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커브가 머릿속에 있으면 패스트볼을 칠 수 없어.”
“커브를 버리면 되는 일이야.”
헤르만이 말했다.
“커브를 버린다고 결정한 뒤, 배터 박스에 들어서도 이전 타석에서 들어왔던 스트라이크는 지워지지 않아. 잔상이 남아 있는 거야.”
“바르도가 커브를 스트라이크존에 넣었기 때문에 탬파베이 타자들이 공략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건 너무 과장된 이야기 아닌가? 커브를 스트라이크에 넣는 것쯤은 누구나 다…….”
헤르만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넌 바르도의 커브를 항상 유인구로 사용했어. 스트라이크존에서 떨어지는 브레이킹볼로 헛스윙, 그렇게만 사용했단 말이야.”
로버트가 미간을 좁혔다.
“그…… 그게 일반적인 커브의 운용법이잖아.”
“오늘같이 커브가 좋은 날에는 스트라이크존에 꽂아도 괜찮아.”
“커브가 좋은 날이라고?”
헤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바르도의 커브는 평소 이상이야.”
로버트가 멈칫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보면 알잖아. 로버트, 그라운드를 넓게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해.”
가장 중요한 것.
로버트는 드디어 깨달았다.
“그랬어. 그런 거였군. 헤르만, 정말 고맙다. 네 말대로 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어.”
수비 시프트와 타자의 자세, 주자의 상황.
이것은 모두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 관찰이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투수의 공은 달랐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미트로 그것을 잡을 수만 있다면, 좋고 나쁨을 알 수 있었다.
‘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어.’
그가 고개를 든 순간 아울이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3루 주자 산체스가 3루까지 진루합니다.”
“2사 주자 3루군요. 탬파베이는 다음 타자인 라이트에게 기대를 걸어 봐야 할 것 같군요.”
라이트는 바르도와 끈질긴 승부를 펼쳐 볼넷을 얻어냈지만, 이 볼넷은 승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케니히! 풀 카운트에서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2사 주자 1, 3루.
탬파베이의 찬스는 케니히의 삼진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4이닝 무실점입니다.”
이반 감독은 경기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 모자를 벗었다.
“1점 차가 이렇게 커 보일 줄은 몰랐군.”
“곧 따라갈 겁니다.”
바이슨 수석 코치가 그를 위로하듯 말했지만, 바르도의 컨디션은 퍼펙트 게임을 앞둔 투수처럼 좋았다.
5회 초.
이번에는 메츠의 반격이었다.
“렉터가 이번 이닝에도 마운드에 오릅니다.”
“탬파베이는 렉터를 믿는 모양이군요.”
“렉터는 아직 1실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오늘 렉터의 구위는 타자들의 배트를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해도 렉터는 부르스, 클락과 함께 선발 삼총사로 불리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그는 팀의 4선발을 지키는 것도 버거웠다.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김민처럼 상대를 압도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앞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딱!
첫 타자에게 안타를 맞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예전처럼은 안 되는군.’
아직 노장이라 말할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몸은 노장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렉터는 미간을 좁혔다.
‘부르스처럼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닌데 이건 좀 그렇잖아. 몸아, 힘을 내달라고.’
그가 미간을 좁히자 록튼이 타임을 걸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렉터, 괜찮아?”
렉터가 글러브로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괜찮아.”
“이번 안타는 어쩔 수 없었어.”
“알고 있어. 다음 타자에게 집중하는 수밖에.”
“부탁한다. 아직 1점 차이야.”
록튼은 짧게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로 돌아갔다.
경기가 재개 되었고, 록튼은 5번 타자 엔드류를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려 했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홈플레이트 왼쪽에 떠올랐다.
“록튼이 미트를 들고 기다립니다!”
팍.
미트에 안기는 공.
렉터에게는 행운.
엔드류에게는 불운이었다.
“빌어먹을!”
엔드류는 혀를 찬 뒤 화를 참을 수 없는지 배트를 부러뜨려 버렸다.
“아깝게…….”
렉터는 그 모습을 보며 여유를 찾았다.
‘엔드류는 잡았고, 다음 타자는 혼즈, 이제 위기는 넘어간 모양이군.’
혼즈부터는 다소 상대하기가 쉬웠다.
록튼도 같은 생각이었다.
‘혼즈부터는 하위 타순, 조금은 편하게 갈 수 있겠군.’
너무 쉽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초구가 조금 안쪽으로 몰렸다.
록튼은 미간을 좁혔다.
‘이건 조금 높은데?’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무서운 속도로 솟아올랐다.
‘아…… 실투야.’
실투를 노린 혼즈의 타격.
렉터는 물론 모든 이가 맞는 순간 장타라는 것을 알았다.
“혼즈! 큽니다! 멀리 가는군요! 산체스가 쫓아갑니다!”
산체스는 공을 포기하지 않고 뛰었다.
그것을 본 렉터가 희망을 품었다.
‘넘어가진 않는 건가? 설마 워닝 트랙에서 잡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타구는 워닝 트랙에서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쭉쭉……
계속 날아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펜스를 넘어가겠어. 산체스는 왜 멈추지 않는 걸까?’
이 타구가 펜스를 넘어가면 스코어는 3-0까지 벌어졌다.
라이언은 그래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속도를 높여 2루를 통과했다.
‘펜스 끝에 맞을 수도 있다.’
산체스가 때렸던 타구처럼 홈런이 아니라 펜스 상단을 맞고 그라운드로 돌아오는 2루타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럴 경우 주자의 주루 플레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다.
‘무조건 홈에 들어온다.’
라이언은 속도를 높여 3루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2루를 돌기 전에 한 번 더 공을 확인해야 했다.
“산체스!”
캐스터가 목소리를 높인 순간 글러브가 앞으로 뻗어 나왔다.
‘잡을 수 있어!’
그가 내민 글러브가 펜스를 넘었다.
이제 글러브에 공이 들어오기만 한다면 그는 홈런을 스틸할 수 있었다.
‘제발!’
간절한 외침이 통한 것일까?
묵직한 느낌이 글러브를 통해 전해졌다.
‘잡았어!’
팍!
산체스는 글러브를 회수하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윌리엄의 목소리를 들었다.
“1루!”
윌리엄은 목소리를 높임과 동시에 1루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버런한 주자를 잡으라는 뜻.
‘라이언이 성급했군.’
산체스는 1루를 향해 강하게 공을 뿌렸고, 라이언은 오버런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라이언 귀루하지 못하고 아웃됩니다!”
“이건 산체스의 믿기지 않는 수비군요. 켄 그리피 주니어의 수비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펜스를 밟고 뛰어 올라가 홈런을 스틸하는 것은 켄 그리피 주니어의 시그니처 무브였다.
오늘 산체스는 켄 그리피 주니어의 전성기 시절처럼 펜스를 밟고 뛰어 올라가 홈런을 스틸했다.
트로피카나 필드에 모인 탬파베이 팬 중 이 수비에 흥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산체스! 산체스!”
“최고다! 최고야!”
탬파베이 팬들은 산체스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산체스가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내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반 감독은 생각했다.
‘이 타구가 넘어갔더라면 오늘 경기는 메츠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을 것이다.’
렉터는 산체스가 들어올 때까지 두 손을 든 채 기다렸다. 그리곤 그가 들어오자 하이텐을 시도했다.
“산체스! 정말 고맙다!”
산체스는 그와 하이텐을 한 뒤 엄지 손가락을 세웠다.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신인답지 않은 거만함.
그래도 탬파베이 선수들은 그를 사랑했다.
윌리엄이 산체스의 목을 뒤에서 휘어 감으며 말했다.
“이 괴물 같은 녀석…… 정말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니까!”
김민은 산체스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산체스를 데려오지 못했다면…… 아니 그의 투쟁심을 깨우지 못했다면, 이번 월드시리즈는 정말 힘들었을 거야.’
유리 감독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혼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그럴 때도 있는 거야.”
혼즈로서는 무척 아쉬운 타구였다.
이 타구가 넘어갔다면, 오늘 MVP는 그가 될 가능성이 컸다.
“다음에…… 다음에는 반드시 펜스를 넘기겠습니다.”
“그래, 다음에는 꼭 넘기자.”
유리 감독은 혼즈를 다독이곤 고개를 그라운드로 돌렸다.
경기는 탬파베이의 5회 말 공격으로 접어들어 들고 있었다.
5회 말.
탬파베이 선두 타자는 스나이더.
7, 8, 9번으로 이어지는 하위 타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