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레전드 매치 03
김민은 자신의 포지션을 변경했다.
슉!
두 번째 공은 급격히 떨어지는 스플리터.
제레미는 이 공에 반응하지 않았다.
‘보인다. 보인다고. 크크크…… 킴, 넌 이제 내 상대가 아니야.’
“제레미가 참아냅니다!”
“가운데에서 떨어지는 공. 제레미, 참기 힘든 공인데 잘 참았습니다.”
카운트는 이제 1-1.
김민은 모자를 벗었다.
“하아…… 반응도 하지 않는군. 그냥 버린 건가? 아니면 내 손끝의 움직임이라도 읽은 건가?”
극강의 동체시력이라고 해도 공을 던지기 전 투수의 손가락 위치를 읽을 수는 없었다.
‘극강을 넘어선 초능력 수준이라면? 아니, 생각하지 말자. 그건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날아가는 공의 실밥을 하나하나 읽을 수 있을 테니까.’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머릿속으로 소설을 써서는 곤란했다.
그리고 경기는 잘 풀리지 않는 게 아니었다.
9회 초까지 양키스는 단 한 점도 뽑지 못하고 있었다.
‘원하는 그림은 그려졌다.’
김민은 모자를 쓰곤 록튼과 사인을 교환했다.
“킴,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이 공이 중요합니다. 볼이 된다면 다음 공은 반드시 스트라이크존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레미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공이 보이고 있다. 어떤 공인지 알기만 하면 이쪽의 필승이다.’
스테로이드와 한도를 넘어선 각성제.
제레미는 그것으로 자신이 초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슉!
바깥쪽 빠른 공.
‘스플리터는 아니야.’
공의 움직임이 스플리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슬라이더? 아니, 그러기에는 좀 빠르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패스트볼.
‘보나 마나 떠오르는 공이겠지.’
약물은 그에게 떠오르는 공을 때려낼 수 있는 눈과 반사 신경을 주었다.
제레미는 배트를 움직였다.
‘이번에 승부를 낸다.’
노리는 것은 김민의 시그니처인 라이징 패스트볼.
목표는 펜스 밖.
즉, 그는 홈런을 원하고 있었다.
‘그대로 넘긴다!’
제레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배트가 점점 공에서 멀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왜?’
공의 움직임은 떠오르기보다는 떨어지고 있었다.
‘이 속도에서 떨어진다고? 녀석의 스플리터가 이렇게 빨랐나?’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 배트는 공과 멀어지고 있었다.
‘잡아야 해.’
짧은 시간, 그는 절박함에 가까운 초조함을 느꼈다.
배트가 공을 향해 맹추격을 시작했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유격수 쪽으로 향합니다.”
“이런 공을 브라이튼이 놓칠 리가 없죠.”
브라이튼은 애연가가 담배를 꺼내듯 자연스럽게 공을 잡아 1루에 송구했다.
팡!
“아웃!”
제레미는 1루수 미트에 들어간 공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자만심이…… 이번 승부를 망쳤다.’
라이징 패스트볼을 쳐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카운트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공이 자신이 원하는 코스와 반대로 움직였다면 그대로 허공을 쳐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해서 공을 따라갔고, 평범한 내야 땅볼에 그치고 말았다.
제레미가 허공을 향해 물었다.
“투심이었나?”
대답은 없었다.
아마도 투심일 것이다.
김민이 던질 수 있는 공 중 그 속도로 떨어지는 공은 투심 패스트볼뿐이었으니까.
이반 감독은 김민의 호투에 박수를 보냈다.
“훌륭해! 최고의 투구야.”
그는 김민의 젊음을 믿었다.
‘같은 시기 데뷔했다면 모를까? 랜디와 킴은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든 킴이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는 랜디에게 질 리가 없다.’
물론 승패는 나이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었다.
은퇴 직전의 노장이 사이영상 수상자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야구였다.
랜디 존슨은 전광판에 비친 느린 화면을 보곤 미소를 지었다.
“저 친구 재미 난 공을 던지기 시작했군.”
“투심 말입니까? 예전에도 가끔 던졌습니다.”
랜디의 말을 받아 주는 건 라몬스였다.
그는 양키스로 이적한 뒤 조연이 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음 이닝에서는 나도 던질 작정이야.”
“랜디가 투심을 던진단 말입니까?”
“왜? 이상한가?”
“이상하죠. 랜디는 투 피치 투수로 알려졌는데…….”
랜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공이 필요했어. 그래서 배웠지.”
투 피치로 널리 알려진 랜디 존슨이었지만, 애리조나 시절부터 투심 패스트볼을 비롯한 다른 구종을 던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그라운드로 돌리자 에이로드가 배터 박스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다음 타자는 에이로드입니다.”
에이로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메리칸 리그 최강 타자였다.
블렛소 투수 코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9회 초가 험난하군요. 제레미 다음이 에이로드라니.”
이반 감독이 투수 코치의 말을 받았다.
“그 다음도 쉽진 않아 오스번은 통산 디비전 시리즈 타율이 정규 시즌보다 높으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월드시리즈는 낮지만, 디비전 시리즈에 한 한다면 정규 시즌보다 무서운 타자야.”
블렛소 투수 코치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디비전 시리즈에 등판하는 투수들은 정규 시즌보다 뛰어난 경우가 많았다.
그런 투수들을 상대로 정규 시즌 이상의 성적을 그것도 10년 가까이 뽑아낸다는 것은 그의 포스트 시즌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제레미와 에이로드를 넘기고, 긴장이 풀리는 순간…… 오스번의 배트가 스나이퍼의 총알처럼 심장을 파고들 수도 있다.’
블렛소 투수 코치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투수와 포수가 사인을 교환합니다. 이 순간 특별한 사인이 있을까요?”
“글쎄요. 에이로드가 상대라면 어렵게 가자는 쪽으로 볼 배합을 할 수도 있겠죠.”
에이로드는 여전히 김민의 제구된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었다.
‘어떤 볼 배합을 가져가든 그걸 던지지 않을 수는 없을 테지.’
배트를 세우자 초구가 날아왔다.
초구는 낮게 떨어지는 패스트볼.
‘이건 아니군.’
팡!
미트에 공이 들어왔으나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초구가 볼입니다.”
“제 말씀대로 쉽게 가지 않을 겁니다.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면서 타자를 유인하려고 하겠죠.”
먹이를 사냥하듯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가던 김민이었다.
하지만 이번 투구는 그의 평소 모습과 많이 달랐다.
“카운트 1-0입니다.”
“다음 공도 아마 쉬운 공은 아닐 겁니다.”
에이로드는 배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상대는 킴이다. 도망가는 승부는 없다. 이번에는 카운트를 잡는 공이 들어온다.’
두 번째 공마저 빠진다면 카운트는 2-0으로 나빠졌다.
김민은 이런 카운트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가 아니었다.
슉!
빠른 공.
그러나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하는 공은 아니었다.
‘또 빠진다고?’
에이로드는 미간을 좁히면서 몸의 중심을 뒤로 물렸다.
‘고의사구 작전이군.’
그는 제레미를 유격수 땅볼로 처리한 여유를 자신에게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꺾여 들어왔다.
팡!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93마일(150km).
에이로드는 포수 미트를 확인하곤 혀를 찼다.
“거참!”
‘투심 패스트볼이군.’
제레미를 땅볼로 잡아냈던 바로 그 공.
호이스트는 김민의 변화무쌍한 볼 배합에 미간을 좁혔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무시무시한 친구군. 이 상황에서 투심 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존에 넣다니.”
“킴의 투심 패스트볼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킴이 투심을 던지면 그 위력이 배가 된다.”
경력이 많지 않은 팀원은 호이스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킴은 키도 작은 편이고, 구속도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 평균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위력이 더 나온다는 말입니까?”
호이스트가 대답했다.
“네 가지 구종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볼 배합의 경우의 수와 다섯 가지 구종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볼 배합의 경우의 수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하면 답은 간단히 나오는 문제다.”
심지어 김민은 다섯 가지 이상의 구종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투심 패스트볼이 추가되면 타자들은 그의 볼 배합을 예상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타고 난 반사 신경으로 예측 없이 공을 때려내는 타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안과 밖 정도는 구분하기 마련이다. 투심 패스트볼은 이런 안과 밖의 예측도 어지럽게 만들 수 있다.”
슬라이더와 커터.
투심 패스트볼은 두 구종과 반대로 움직여 타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김민이 투심 패스트볼을 사용하기 전까지 타자들은 떨어지는지 아니면 밖으로 휘어져 나가는지 두 가지만을 고민하면 됐다.
하지만 투심 패스트볼을 사용함으로써 반대의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3루 관중석을 직격했다.
탁!
공이 크게 튀어 오르면서 관중들이 비명에 가까운 함성을 내질렀다.
“위험한 공이었습니다!”
“관중이 맞지 않은 게 다행이군요. 야구장을 방문할 때는 항상 글러브를 지참해야 합니다.”
카운트는 이제 1-2.
에이로드는 미간을 좁혔다.
‘어느새 녀석이 유리해졌군.’
그는 김민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4년째 만나고 있지 않은가?
‘유리할 경우 녀석은 시간을 끌지 않는다.’
제레미를 상대할 때도 그랬다.
김민은 투심 패스트볼로 빠르게 승부를 결정지었다.
‘코너를 찌르는 패스트볼은 끝까지 던지지 않을 생각인 것 같군. 이럴 때는 포기할 수밖에 없지.’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곤, 배트를 쥐었다.
김민은 투구에 들어가기 전, 에이로드의 손 위치가 평소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삼진은 당해도 어설픈 스윙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군. 에이로드다워.’
힘을 담아 전력으로 배트를 휘두른다.
제대로 맞으면 비거리가 꽤 나올 것이다.
‘제대로 맞으면 곤란하지.’
김민은 포수 미트를 향해 힘차게 공을 뿌렸다.
슈욱!
높은 코스의 빠른 공.
에이로드의 배트가 움직였다.
‘온다!’
배트와 공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휙!
배트가 허공을 크게 치면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공이 미트를 쳤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에이로드는 마지막 순간 공이 한 번 더 떠오르는 것을 보곤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마지막은 그 공이군.’
업 라이징 패스트볼.
처음부터 목표로 했다면 모를까?
여러 공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을 때는 대처가 불가능한 공이었다.
이윽고 캐스터의 목소리가 커졌다.
“킴! 에이로드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9회 초에도 구속이 대단하군요. 힘을 감춰 두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전광판에 표시된 업 라이징 패스트볼의 구속은 96마일(154km)이었다.
“떠오르는 공으로 에이로드를 잡았군.”
포사다가 배트를 들고 대기 타석으로 나가며 지터의 말을 받았다.
“저 공은 쉽게 공략이 힘들어. 나라도 삼진을 당했을 거야.”
과거 호이스트는 김민의 라이징 패스트볼 공략이 힘든 이유를 2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공 자체의 무브먼트가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김민의 라이징 패스트볼은 타자의 착시 현상을 유도할 정도로 많은 회전이 걸려 있었다.
이 회전은 공과 배트가 만날 때에도 위력을 발휘했다.
- 정확한 컨텍이 아니면 플라이볼이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찍어 누른다는 느낌으로 다운스윙을 하지 않는다면 저 공은 절대 쳐 낼 수 없을 겁니다.
두 번째 이유는 김민이 강력한 브레이킹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 킴은 커브와 슬라이더, 두 구종 모두 훌륭합니다. 여기에 변형 패스트볼인 스플리터가 종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킴을 상대하는 타자들은 떨어지는 공에 먼저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떨어지는 공을 예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날아오는 떠오르는 공을…… 이건 100% 헛스윙입니다. 전 타자들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기 타석에 들어선 포사다.
‘에이로드도 때려내지 못한 공이다. 내가 칠 수 있을까? 아니, 치지 못할 리 없다. 녀석이 200마일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겁먹지 말자. 그는 그냥 뛰어난 투수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까지 찬스가 돌아오진 않았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좌익수 머리 위에 떠오릅니다.”
김민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어설픈 공이 아니라 확실한 공으로 오스번을 막아 냈다.
팡!
좌익수 케니히가 안정적으로 플라이볼을 처리했다.
“킴이 삼자범퇴로 9회 초를 막아 냅니다.”
“이것으로 양키스의 정규이닝 공격이 모두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이제 탬파베이의 9회 말 마지막 공격뿐입니다.”
포사다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골드글러브 출신에게 실책을 바랄 수는 없겠지.”
케니히는 탬파베이에 많지 않은 골드글러브 출신이었다.
지터는 공격이 끝나자 혀를 찼다.
“수비 집중력에서도 우리보다 위란 말인가?”
9회까지 인 플레이 타구가 제법 나왔지만, 기대했던 실책은 나오지 않았다.
지터는 글러브를 들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9회 말을 막고 10회 초에 다시 승부다.’
탬파베이 선수들이 떠난 자리를 양키스 수비수들이 채웠다.
9회 말.
탬파베이 공격.
코스타 타격 코치는 시작에 앞서 선수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쉽게 칠 수 없는 공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물러서려고 하지 마라. 상대가 필사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필사적이어야 한다.”
마지막 9회.
“시작은 4번 타자 아울부터입니다!”
윌리엄과 산체스가 없었지만, 4, 5번 타순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울은 전형적인 스탠딩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건 특정한 코스나 구종을 노리고 있지 않다는 뜻이죠.”
기본기가 좋은 타자.
약점이 없는 타자.
이것은 밖에서 아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들이었다.
아울도 이것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나 슈퍼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중요할 때 한 방.
지난 포스트 시즌 때처럼…….
그것을 해 줘야 했다.
‘4번 타자잖아. 기죽지 말자.’
아울은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을 살리면서 배트를 세웠다.
슉!
초구는 빨랐다.
배트가 나갔지만 따라잡을 수 없었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100마일(161km).
“놀라운 구속입니다!”
“9회 말에 100마일입니다. 스피드건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지 확인을 해 보고 싶을 정도군요.”
랜디 존슨의 최고 구속은 100마일을 넘었다.
하지만 정규 시즌을 모두 치른 뒤 벌어진 디비전 시리즈 2번째 등판.
그것도 9회 말.
이 순간 100마일의 구속을 낸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이반 감독이 말했다.
“난 문득 명예의 전당을 보면서 생각해. 저 많은 선수들이 전성기에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스타워즈를 꿈꾸고 계신 겁니까?”
바이슨 수석 코치가 혀를 차듯 말했다.
“대단한 광경이 벌어지지 않겠나? 100마일짜리 공이 코너를 찌르면, 배트가 그 공을 담장 밖으로 밀어내는 거야.”
“그건 이미 하고 있습니다. 배리 본즈가 내셔널 리그에서 말이죠.”
탁!
두 번째 공은 파울.
이번 공도 패스트볼이었다.
“여기서 슬라이더가 하나 오겠군요.”
바이슨 수석 코치의 말은 무미건조했다.
아울의 생각도 같았다.
‘다음 공은 슬라이더다.’
알고도 칠 수 없다는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 알고도 칠 수 없는 공은 없어. 확신할 수 없으니까 칠 수 없지.’
랜디 존슨은 팁(투구 버릇)이 알려졌지만 압도적인 구위로 상대 타자들을 찍어 누른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팁이 유효하진 않았다.
랜디와 그의 소속 구단은 팁이 널리 알려진 것을 확인하곤 글러브를 바꿈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현재 랜디 존슨이 던질 다음 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슉!
‘빠르다.’
아울의 배트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는 90마일 전후, 빠른 것은 94마일(151km)에 육박하기도 했다.
탁!
떨어지는 공을 간신히 커트.
아울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빌어먹을…… 무리야. 알고도 칠 수가 없어.’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에서 애리조나를 만났다면 이기기 힘들었을지도 몰라.’
그는 배터 박스에서 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랜디 존슨은 투구 간격이 짧은 투수 중 한 명이었다.
바로 다음 공이 날아왔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아울의 삼진.
이반 감독은 이번 이닝에서 점수를 낼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연장이군.”
“킴을 또 등판시키는 겁니까?”
“킴의 의사를 물어봐야겠지.”
김민의 투구수는 정규 시즌 한계 투구수에 도달해 있었다.
“블렛소, 킴에게 다녀와.”
블렛소 투수 코치가 클럽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김민은 아이싱 대신 수건을 들고 있었다.
“킴, 더 던질 수 있겠나?”
김민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미안하군. 매번.”
“이건 블렛소가 미안할 일이 아닙니다. 팀이 어려울 때 에이스가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죠.”
“자네가 10회를 막으면 11회에는 볼튼이 등판할 거야.”
“셋업을 거치지 않고 바로 클로저입니까?”
블렛소 투수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도 리베라가 나올 테니까.”
탬파베이 코칭 스텝은 랜디 존슨의 투구를 10회 말까지로 한정했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도 40세가 넘어 10이닝 이상을 던질 수는 없어.”
“던질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던지게 해서는 안 되죠. 그건 감독과 코칭 스텝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