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대관식 05
7회 초와 8회 초.
샌프란시스코 불펜진은 탬파베이 타선을 무실점으로 묶는 데 성공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불펜이 확실히 좋아.”
“선취점을 뽑았다면 불펜이 더 큰 힘을 발휘할 텐데 아쉽군.”
이반 감독은 타선의 부진보다는 김민의 투구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7이닝 동안 89개. 평소보다 많은 투구수다.’
블렛소 투수 코치는 이반 감독의 생각을 읽었는지 패스트볼 구속을 체크했다.
“7회 말 최고 구속은 95마일(153km)이었습니다. 아직 지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의 높이는?”
“아직은 괜찮습니다.”
이반 감독이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인가?”
선발 투수가 지쳤을 경우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구속 저하다.
구속은 전광판에 표시되기 때문에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는 물론 관중석의 팬들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변화는 공의 제구.
체력이 떨어진 투수의 공은 일반적으로 높게 형성된다.
릴리스 포인트에서 공을 끝까지 눌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록튼은 지난 7회 말 마지막 타자를 상대하면서 공이 뜬다는 느낌을 받았다.
‘위험한데…….’
투구수 110개를 넘었을 때도 공이 뜨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90개도 채 던지지 못했는 데도 공이 조금씩 뜨고 있었다.
‘투구 리듬이 좋지 않았다면 벌써 맞았을 거야.’
록튼은 8회 말이 시작되기 전 마운드에 올랐다.
“킴, 불펜에게 마운드를 넘기는 게 어떻겠어?”
“스페이츠에게?”
“3일 휴식 후 등판은 확실히 표가 나.”
김민이 글러브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하지만 스페이츠로는 배리 본즈를 막을 수 없어.”
“그렇게 단언하지 말라고 스페이츠도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지고 있어.”
“록튼,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없다는 것쯤은 알잖아?”
클래스가 다르다.
아니, 웬만한 투수로는 배리 본즈를 막을 수 없다.
스페이츠가 아닌 록튼으로도 장담할 수 없는 상대.
그게 바로 배리 본즈였다.
“킴, 체력이 빠진 상태에서 본즈를 상대하는 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지막 공, 그렇게 많이 떴어?”
록튼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많이 뜨진 않았어. 하지만 난 네 공이 뜨는 걸 처음 봤어.”
김민은 록튼이 느끼고 있는 불안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티 없이 맑은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진 거군.’
완벽하던 것이 완벽하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 록튼이 그랬다.
김민은 제구가 불안한 날도 좀처럼 공이 뜨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90개도 던지지 않았는데 한계 투구수에 이른 투수처럼 공이 뜨고 있었다.
“배리 본즈까지만 잡고 생각하자.”
김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맞는다면?”
“아직 최고가 아닌 것이지.”
록튼이 미간을 좁혔다.
“킴, 야구는 팀 스포츠야.”
“알고 있어. 그래서 배리 본즈를 막겠다고 나선 것이잖아.”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아.”
김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3점 정도 리드하고 있었다면 나도 미련 없이 마운드를 불펜에 넘겨줬을 거야. 하지만 리드는 단 1점. 이 상태로 젊은 친구들에게 마운드를 넘기는 건 위험하다고.”
록튼은 김민의 설명을 어느 정도 수긍했다.
“킴도 젊긴 하지만…… 두 사람보다는 경험이 많으니까.”
“경험만이 아니야. 이쪽이 심장도 크다고.”
위기 상황을 버텨내는 강심장.
이것은 다른 투수들이 갖지 못한 김민의 무기 중 하나였다.
“알겠어. 배리 본즈를 잡고 다시 생각하자.”
“그렇게 하자고.”
록튼은 홈플레이트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공 1, 2개…… 그 안에 배리 본즈는 킴의 힘이 다했다는 것을 알아낼 것이다. 그렇다면 승부는 초구인가?’
그가 홈플레이트로 돌아오자 배리 본즈가 말을 걸었다.
“록튼, 볼 배합이 어긋난 건가?”
“볼 배합은 킴이 합니다.”
“볼 배합이 아니라면 뭐지?”
록튼과 배리 본즈의 메이저리그 경력은 15년 가까이 차이가 났다.
록튼이 야구의 야자도 몰랐을 때 배리 본즈는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록튼은 배리 본즈를 상대로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볼넷이죠.”
- 당신을 볼넷으로 거를지 말지 이야기한 것이다.
배리 본즈는 록튼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쪽이 거르자고 했나?”
록튼이 연습 투구를 받으며 대답했다.
“맞춰보시겠습니까?”
배리 본즈가 배트를 두드렸다.
“왠지 자네일 것 같은데…….”
“정답입니다.”
8회 말, 배리 본즈를 거른다면 1루에 주자를 놓고 5, 6, 7번을 상대해야 했다.
‘베스트는 아니지만 굿은 줄 수 있는 판단이군.’
김민의 연습 투구가 끝나자 주심의 경기 재게 사인을 냈다.
“8회 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두 타자는 배리 본즈입니다!”
“자이언츠에게는 딱 2번의 공격 기회가 남았습니다. 이번 8회 말에 어떻게든 동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음성이 높아졌다.
TV 앞에 모인 팬들 역시 8회 말이 다른 이닝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한 방이면 동점이야.”
“배리 본즈라면 반드시 해 줄 거야.”
“하지만 점수를 내지 못한다면…….”
“끝장이지. 9회 말은 하위 타순이니까.”
샌프란시스코 팬들은 배리 본즈가 호쾌한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면 탬파베이 팬들은 배리 본즈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길 바라고 있었다.
“8회 말이야. 여기서 한 번 더 잡아내면, 배리 본즈를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본즈만 잡는다면 9회 말까지 막아 낼 수 있어. 9회 말은 하위 타순이거든.”
중립이라고 할 수 있는 포사다와 지터는 저녁내기를 벌였다.
선수를 친 것은 지터였다.
“난 배리 본즈를 선택하겠어. 포사다, 혹시 내기가 성립 안 되는 건 아니지?”
포사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난 처음부터 킴을 선택하려고 했어.”
“오? 그래? 이상하군. 포사다라면 당연히 본즈일 줄 알았는데.”
“왜 내가 당연히 본즈인데?”
포사다가 묻자 지터가 대답했다.
“8회 말이라고 모든 부분에서 배리 본즈는 상승세, 킴은 하락세니까.”
포사다가 말끝을 올렸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되는 거야?”
“어떻게라니? 투수는 공을 던지면 던질수록 체력이 소모된다고. 타자와는 다르지. 게다가 배리 본즈 정도 되는 타자라면 앞선 두 타석에서 투수의 공을 모두 분석했을 거야.”
타자들도 체력을 소모하지만, 투수들과는 절대적인 양이 달랐다.
경기 후반 불리한 것은 보통 투수였다.
“킴은 체력이 떨어졌고, 본즈는 공에 익숙해졌다?”
“맞아.”
지터의 이론은 단순명료했다.
포사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타자와 투수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투수에게 유리하다고.”
뛰어난 타자의 기준이라는 3할.
열 번 타석에 들어서서 세 번 안타를 쳐 내는 타자.
또는 세 번 타석에 들어서서 한 번 안타를 칠 수 있는 타자.
포사다가 말했다.
“배리 본즈가 이번 타석에서 안타를 친다고 하자고. 하지만 그 안타 하나로는 게임을 이길 수 없어. 승자는 결국 킴이 되게 될 거야.”
안타 정도로는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말.
지터가 팝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흠, 그건…… 포사다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이런 상황이라면 적어도 2루타는 쳐 내야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지.”
“2루타는 기본이고, 킴을 상대로 승리를 확신하려면 타점을 만들어 내야 할 거야.”
8회 말 선두 타자로 배터 박스에 들어선 배리 본즈.
그가 타점을 올릴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홈런.
포사다는 김민이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홈런을 때려내지 못하면 킴의 승리야.”
“포사다, 그러면 내가 너무 불리하잖아.”
지터는 배터 박스에서 홈런을 때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킴이라고, 그런 투수에게 홈런이라니. 아무리 배리 본즈라고 해도…….’
포사다가 선심을 쓰듯 말했다.
“좋아. 그럼 2루타까지 해 주지. 무사 2루라면 자이언츠도 점수를 뽑을 수 있을 테니까.”
지터는 이쯤에서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어. 2루타 이상이면 내 승리, 안타나 볼넷 또는 아웃이면 자네의 승리로 하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그 두 사람의 말이 갑자기 멈췄다.
그들이 본 것은 김민의 초구였다.
“이건…….”
“좋지 않군.”
김민이 던진 초구는 크게 휘어져 미트를 빠져나갔다.
탁……
펜스에 부딪힌 공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록튼이 처음으로 공을 잡지 못했어.”
포사다가 미간을 좁혔다.
“저건…… 나라고 해도 잡을 수 없을 거야.”
주자가 없었기 때문에 배리 본즈가 본 이익이라고는 카운트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이반 감독이 블렛소 투수 코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블렛소, 불펜은 누가 대기하고 있나?”
블렛소 투수 코치가 빠르게 대답했다.
“7회 말부터 스페이츠가 올라와 있습니다.”
“좋아,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이반 감독은 김민이 무너질 가능성이 50%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힘이 조금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조금 빠진 정도가 아니야.’
자이언츠의 피올라 감독은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킴의 제구가 흔들리고 있다. 이 찬스를 살리지 못하면, 오늘 경기에서 패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는 배리 본즈가 적어도 2루타는 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타순을 바꾸길 잘했군.”
피올라 감독은 오늘 경기에 앞서 하울러를 5번을 내리고 테닝험을 3번으로 올렸다.
기본적으로 하울러는 테닝험보다 뛰어난 타자였다.
배리 본즈가 2루에 나간다면 하울러가 그를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역전이 가능할지도……’
슉!
두 번째 공이 바깥쪽으로 향했다.
이번 공도 제구가 좋지 못했다.
팡!
미트에 공이 들어왔지만, 스트라이크존과는 거리가 멀었다.
“투 볼입니다!”
“킴의 제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처음 보는군요.”
블렛소 코치가 이반 감독에게 말했다.
“마운드에 올라갈까요?”
이반 감독이 대답했다.
“하나만 더 지켜보지. 여기서 다시 볼을 던지면 마운드로 올라가서 볼넷을 지시하게.”
쓰리볼에서 본즈와 승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김민도 본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공이 승부구다.’
배리 본즈는 배트에 힘을 주었다.
‘맞더라도 가운데. 아니,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도 카운트를 잡으려 할 것이다.’
그는 김민이 자신을 걸어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슉!
빠른 공.
‘이번에는 코스가 다르군.’
바깥쪽 제구가 어긋난 투수가 안쪽으로 승부를 걸어왔다.
배리 본즈는 미소를 지었다.
‘배짱이 두둑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두 손에 힘을 주며 단풍나무 배트를 내밀었다.
‘그대로 홈런이다.’
타이밍은 완벽했다.
남은 것은 히팅 포인트.
하지만 이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배트 스피드는 없는 히팅 포인트도 만들어 낼 정도로 빠르니까.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솟아올랐다.
‘이건!’
배리 본즈는 배트를 든 채 공의 궤적을 살폈다.
‘틀렸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툭……
공이 떨어진 곳은 1루 쪽 관중석이었다.
그가 친 공은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볼이었다.
그것도 꽤 안쪽으로 들어온.
“대형 파울이 나왔습니다!”
“이 파울로 킴은 첫 번째 카운트를 잡았군요.”
배리 본즈는 록튼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운드에 서 있을 컨디션이 아닌 모양이군.”
“그 정도는 아닙니다.”
록튼은 새 공을 받아 김민에게 던졌다.
‘크게 빠지는 2개의 공. 이건 자신의 떨어진 체력을 감추기 위한 공이다. 그리고 다음에 들어온 안쪽 패스트볼. 이 공이 좋았어. 배리 본즈의 선구안조차 속인 공. 하지만…… 이것으로 승부에 이긴 것은 아니다.’
김민은 여전히 불리한 카운트에 놓여 있었다.
‘배리 본즈만 상대한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마음이 편하군.’
9회 말까지 던지지 않아도 된다.
지금 배터 박스에 서 있는 타자만 잡아내면…….
그의 몫은 끝이다.
“후…….”
김민은 길게 심호흡을 한 뒤 그립을 고쳐 잡았다.
‘한번 해 보자.’
그는 평소보다 반족장 정도 더 슬라이드를 길게 뻗었다.
슈욱!
다시 한번 빠른공.
배리 본즈는 그 공을 주시했다.
‘바깥쪽!’
코너에 꽂힌다면 스트라이크.
그게 아닌 다른 구종이라면 볼.
‘스트라이크다.’
배리 본즈는 배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그대로 3루 베이스 옆에 떨어졌다.
3루심이 목소리를 높이며 양손을 좌우로 활짝 폈다.
“파울!”
배리 본즈는 타격 후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돌덩어리를 때린 느낌이다. 쳇, 나쁜 기억이 나는군.’
1986년.
배리 본즈의 데뷔 시즌.
당시 그는 끔찍한 느낌의 공을 받아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시 내셔널 리그 최강 투수 드와이트 구든의 패스트볼이었다.
배리 본즈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때의 기억이었다.
‘킴은 기본적으로 제구가 좋은 영리한 투수다. 강속구가 모든 것이었던 드와이트 구든이라니, 당치도 않아.’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전광판의 숫자는 본즈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96마일(154km)? 8회 말에?”
최고 구속에 단 1마일(1.6km) 뒤진 구속.
배리 본즈는 미간을 좁혔다.
‘설마 초반 공이 튄 것은 기어를 바꿔 넣기 위함이었나?’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
그는 피칭 메커니즘을 바꾼 것이다.
‘경기 중 그것이 가능한 투수가 있단 말인가?’
김민은 오늘 좋은 리듬으로 공을 던졌다.
배리 본즈는 생각했다.
그 좋은 리듬을 바꿀 정도로 위력적인 공은 아니라고.
‘같은 공이 다시 날아오면 펜스 밖으로 넘겨 주지.’
배리 본즈는 배트를 세운 채 김민을 주시했다.
‘와라!’
이윽고 김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슈욱!
빨랐다.
그리고 높았다.
‘하이 패스트볼!’
배리 본즈의 머릿속에 1차전 보았던 그 공이 떠올랐다.
‘기어를 바꿔 넣은 것은 이 공을 던지기 위해서였군!’
배트가 움직였고, 모든 이가 숨을 죽였다.
휙!
큰 바람과 함께 배트가 허공을 쳤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헛스윙 삼진 아웃.
배리 본즈에게는 최악.
김민에게는 최고의 결과.
배리 본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내가 본 최고의 공 중 하나야.’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이후, 그는 절대자가 되었다.
그 어떤 투수도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민은 고개 숙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와 당당히 맞섰다.
‘이런 공이 있다면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 당연해.’
배리 본즈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킴, 앞으로는 네 시대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회전을 최고로 올린 업 라이징 패스트볼이었다.
김민은 배리 본즈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오른손이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떨림은 팔꿈치를 거쳐 어깨로 올라왔다.
“한계군.”
그는 오른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직후 록튼이 더그아웃에 교체 사인을 보냈다.
“스페이츠를 올려보내지.”
이반 감독의 지시에 블렛소 투수 코치가 인터폰을 들었다.
“투수 교체. 스페이츠!”
정확히 21초 뒤.
김민은 이반 감독에게 공을 넘긴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킴이 마운드를 내려옵니다!”
7과 1/3이닝 1피안타 무실점 10K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김민에게 동료들의 박수와 하이 파이브가 쏟아졌다.
“나이스 피칭!”
“에이스, 수고했어.”
“킴, 뒤는 우리에게 맡겨 달라고.”
김민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라커룸으로 향했다.
“킴, 괜찮나?”
트레이너의 물음에 김민이 떨리는 손을 들었다.
“손끝이 떨립니다. 사실 팔꿈치하고 어깨까지 다 떨립니다.”
트레이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부상을 당한 것은?”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배리 본즈를 잡고 싶었거든요.”
트레이너는 급히 김민의 관절을 살폈다.
‘MRI를 찍어 봐야 알겠지만,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는 김민의 팔에 아이싱을 실시한 뒤, 블렛소 투수 코치를 찾아갔다.
“블렛소, 킴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블렛소 투수 코치가 고개를 돌렸다.
“설마 부상인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블렛소 투수 코치가 마른침을 삼켰다.
“병원, 아니…… 감독님부터.”
이반 감독은 블렛소 투수 코치로부터 이야기를 듣곤 바이슨 수석 코치를 불렀다.
“바이슨, 자네가 한 번 더 수고해 줘야겠네.”
바이슨 수석 코치도 함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병원입니까?”
“MRI까지 찍고 와.”
“알겠습니다.”
바이슨 수석 코치가 라커룸으로 향하며 트레이너에게 물었다.
“킴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나?”
“팔꿈치가 나간 투수들이 많이 보여 주는…….”
바이슨 수석 코치는 팔꿈치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설마!”
“저도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라커룸으로 들어서자 김민이 왼손을 들었다.
“수석 코치님까지 오시는 겁니까?”
“킴, MRI를 찍어야겠어.”
“엑스레이도 안 찍고 바로 MRI입니까?”
“상태가 심각할 수도 있으니까.”
바이슨 수석 코치와 트레이너는 김민을 일으켜 세우곤 병원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월드시리즈 4차전 중계를 들을 수 있었다.
“9회 말 자이언츠의 첫 타자는 7번 타자 로드리게스입니다!”
김민은 미소를 지었다.
“로드리게스가 첫 타자라면, 스페이츠가 8회 말 남은 두 타자를 모두 막아 낸 모양이군요.”
바이슨 수석 코치가 김민의 말을 받았다.
“스페이츠는 한 명만을 막았어.”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록튼이 막았지.”
록튼은 8회 말 2사부터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김민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1이닝 마무리와 1과 1/3이닝 마무리는 확실히 다르다.’
물론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쳤습니다! 1루 쪽 땅볼!”
결과가 나올 때까지 김민은 손에 땀을 쥐었다.
“아울이 공을 잡아 주자를 기다립니다! 로드리게스! 그대로 아웃! 탬파베이, 첫 아웃 카운트를 잡았습니다.”
김민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잘했어!”
두 번째 타자 테리.
그는 볼튼의 강속구와 스플리터에 속수무책이었다.
“유격수 브라이튼이 큰 바운드를 처리합니다! 탬파베이 이제 승리까지 아웃 카운트 하나만이 남았습니다.”
피올라 감독은 9회 말 2사에서 대타를 투입했다.
“대타, 히도!”
히도는 트리플A에서 괜찮은 성적을 올린 유망주였다.
“히도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김민은 히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주먹을 쥐었다.
“됐어!”
트레이너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킴, 아직 승부는 시작도 하지 않았어.”
“아니요. 승부는 끝났습니다. 히도는 볼튼을 넘을 수 없습니다.”
히도는 마이너리그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여 줬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다.
그 이유는 그가 97마일(156km) 이상 패스트볼에 0.129라는 낮은 타율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히도의 배트 스피드로는 제구가 된 강속구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이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록튼은 98마일(158km) 강속구로 히도를 압박했고, 그를 코너로 몰아넣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삼진! 삼진입니다! 경기 끝! 탬파베이가 4차전을 잡아냅니다!”
캐스터의 외침과 함께 바이슨과 김민 그리고 트레이너가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겼어!”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AT&T 파크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1-0으로 승리, 시리즈 스코어를 3-1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