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월드시리즈로 가는 길 03
지터는 배터 박스에 들어선 뒤 생각을 정리했다.
‘패스트볼 구속은 91마일(146km)에서 95마일(153km)까지. 가장 많이 사용한 브레이킹볼은 커브, 그 다음 많이 사용한 구종은 스플리터.’
전형적인 김민의 피칭.
양키스 타자들은 어제 경기가 끝난 직후부터 김민의 볼 배합에 대비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나도 안타를 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볼 배합인데도 안타가 나오지 않고 있다. 초능력이라도 사용하는 건가?’
지터는 미간을 좁히면서 배트를 세웠다.
슉!
초구는 바깥쪽 빠른 공.
바깥쪽 코너를 찌르는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존을 9분할 했을 때, 가장 낮은 피안타율을 자랑했다.
‘그래서 투수들은 이곳에 공을 던지려고 하지.’
지터의 배트가 패스트볼을 밀어냈다.
딱!
“파울!”
1루심의 판정에 지터가 배터 박스를 벗어났다.
‘95마일(153km)…… 떠오르는 무브먼트가 없는 패스트볼 중에는 가장 빠른 공이다.’
그는 배터 박스에 들어간 뒤 다음 공을 기다렸다.
‘로케이션, 아니면 체인지 오브 페이스.’
김민은 같은 곳에 같은 구종을 두 번 던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체인지 오브 페이스보다는 로케이션 가능성이 크다.’
그는 빠른 공에 타이밍을 맞췄다.
슉!
바깥쪽 빠른 공.
‘로케이션이 아니라 다시 바깥쪽이라고? 그렇다면…….’
지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구종은 낮게 가라앉는 스플리터였다.
‘패스트볼이 연속해서 2개나 들어올 리 없지. 이번 공은 스플리터다.’
그는 손목을 사용해 스윙 궤적을 바꿨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뒤쪽 관중석에 떨어졌다.
“파울!”
지터는 배트를 두드리면서 혀를 찼다.
‘94마일(151km) 패스트볼. 스플리터가 아니라 두 개 연속 패스트볼인가?’
호이스트는 김민 공략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킴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매 이닝 다른 투수가 등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는 김민이 전혀 다른 투수로 변신이 가능할 만큼 다양한 구종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지터는 미간을 좁혔다.
‘한 투수가 여러 패턴으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킴의 강함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녀석의 강함은 마치 거대한 산과 같다.’
로저 클레멘스는 지터가 고전하는 모습을 보곤 혀를 찼다.
“쯧쯧…… 아직 어리군.”
“지터가 어리다는 말입니까?”
라몬스의 물음에 로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뉴욕, 뉴욕의 연인…… 지터는 뉴욕을 상징하는 인물 그 자체지. 하지만 야구 선수로서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아.”
라몬스는 지터를 변호하고 나섰다.
“클러치에서 지터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선수는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가 미숙하다면 어떤 선수가 성숙하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로저 클레멘스가 입술 끝을 올리며 말했다.
“클리치에서 뛰어나다고? 그건 평소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성숙이란 자신의 기량을 그라운드에 완벽하게 쏟아부을 수 있어야 해.”
탁!
배트에 맞은 공이 백네트 뒤에 꽂혔다.
“파울!”
해설자는 지터가 연속해서 파울을 쳐 내자 감각이 살아 있는 것이라며 그를 칭찬했다.
그러나 지터는 감각이 살아나긴커녕 완전히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감을 잡을 수 없어. 패스트볼을 노렸는데도 안타가 나오지 않아.’
승부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찬스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김민은 투구수가 늘어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헛스윙을 예상하고 던진 공인데 그걸 쳐 내는군. 양키스의 캡틴은 역시 쉽지 않아.’
경기 전 그는 이반 감독에게 80구 안에 경기를 끝낼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지터처럼 버티는 선수가 나타나면 80구로 경기를 끝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런 패턴이면 7이닝 교체군.’
김민은 포심 그립을 꾹 잡았다.
‘할 수 없지. 이걸 쓰는 수밖에.’
그는 포수 미트를 보곤 강하게 공을 던졌다.
슉!
바깥쪽 빠른 공.
지터의 배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3번째. 타이밍은 알고 있다. 하지만…….’
히팅 포인트가 어긋나면 타이밍이 아무리 좋아도 안타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위로 떠오르는 무브먼트…… 그것을 잡아야 한다.’
지터는 손목을 움직여 배트를 컨트롤했다.
‘떠오른다!’
배트가 떠오르는 공을 잡기 위해 궤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지터의 배트는 다시 한번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지터!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타이밍은 좋았는데 공과 차이가 꽤 컸군요. 스플리터라고 생각한 걸까요?”
지터는 배터 박스에서 나오면서 배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말도 안 되는 공을 봤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3번 타자 제레미가 불러 세웠다.
“지터.”
지터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조금 전 그 스윙…….”
지터는 제레미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완벽한 타이밍인데도 왜 못 쳤냐고?”
제레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터가 배트를 꽂아 넣은 뒤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터무니없는 공이 들어왔어.”
“터무니없는 공?”
“크게 떠오르는 공이라고 하면 설명이 쉬울까?”
제레미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킴이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어.”
지터가 제레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 공은 라이징 패스트볼이 아니었어.”
“뭐라고?”
지터는 눈에 힘을 풀곤 혀를 찼다.
“위로 떠오르는 변화구. 제길……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양키스의 리드오프가 하고 있군.”
제레미는 지터가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이징 패스트볼보다 더 떠오르는 공이라. 지터가 말했으나 아마 맞을 거야.’
그가 배트를 세우며 말했다.
“지터, 배트를 피해서 도망치는 공이 아닌 이상 우리가 치지 못할 공은 없어. 익숙해지면 반드시 칠 수 있을 거야.”
지터는 제레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익숙해지면 칠 수 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익숙해지기 전에 시리즈가 끝나고 말 거야.’
오늘 패하면 2승 3패.
혹여라도 홈에서 1패를 안게 된다면 시리즈는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어떻게든 점수를 내야 해.’
“2번 타자 더글라스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더글라스는 빠르고 정확하며 파워를 겸비한 좋은 타자였다.
그러나 이번 시리즈에서 그는 자신의 장점을 하나도 보여 주지 못했다.
그가 좋은 활약을 보인 것은 양키스가 대량 득점을 했던 경기뿐이었다.
“지터를 대신해서 더글라스가 좀 나가 줬으면 좋겠습니다.”
수석 코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구가 내야에 떠올랐다.
“2루수!”
록튼의 콜을 받은 칼튼이 글러브를 들었다.
정확히 1.8초 뒤, 공이 글러브에 들어왔다.
팡!
“더글라스! 2루수 플라이 아웃입니다!”
김민이 더글라스를 잡기 위해서 소모한 공은 단 하나에 불과했다.
토린 감독이 쓴 약을 마신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클래스를 넘어서진 못하는 모양이군.”
더글라스는 올스타와 평범한 레귤러, 그 사이에 위치한 선수였다.
토린 감독은 그가 올스타 레벨로 올라오길 바랐지만, 그는 그 벽을 넘지 못했다.
“1, 2번이 나란히 아웃이라. 또 주자 없이 타석에 들어서는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사람은 바로 3번 타자 제레미였다.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제레미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럴 때는 큰 걸 노려보는 것이 좋습니다.”
제레미는 이번 시리즈에서 양키스 타자 중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가 없었다면 이미 시리즈가 탬파베이 쪽으로 기울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K! K! K!”
탬파베이 팬들은 김민의 삼진을 원했다.
그러나 김민은 삼진을 노리기보다는 플라이볼을 노리는 피칭이 낫다고 판단했다.
‘제레미 같은 괴물을 정면 승부로 잡아내려면 적어도 업 라이징 패스트볼 같은 공이 2, 3개 정도는 필요해. 아직 4회 초 체력을 낭비할 수는 없지. 하나 정도 존에서 빠지는 공이 가장 좋아.’
그는 록튼과 사인을 교환한 뒤 빠르게 초구를 던졌다.
슉!
높은 코스로 향하는 공.
제레미는 이 공을 치지 않고 흘려보냈다.
팡!
포수 미트에 공이 들어왔지만 주심의 손을 올라가지 않았다.
하나 정도 빠진 공을 정확히 본 것이었다.
“볼, 볼입니다. 제레미, 초구를 잘 골랐습니다.”
김민은 록튼에게 공을 받은 뒤 속으로 혀를 찼다.
‘배트가 반응도 하지 않았어. 이건 처음부터 볼이 될 걸 알았다는 거야.’
이번 시리즈에서 제레미가 보여 주고 있는 선구안은 위협적이었다.
‘두 번째 타석이야. 어설픈 공은 제레미에게 찬스볼이 될 뿐.’
그는 강하게 가는 쪽을 선택했다.
슉!
패스트볼이 안쪽을 깊게 찌르고 들어갔다.
파앙!
“스트라이크!”
제레미는 록튼의 미트 위치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정도 벗어날 것 같았는데 그대로 들어왔군. 좋은 컨트롤이군.’
제레미는 배트를 내린 뒤, 록튼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터를 잡은 그 공, 내게도 던져 줬으면 좋겠는데.”
록튼이 미트에서 공을 빼며 말했다.
“일단 사인은 내보지.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제레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기대하겠어.”
그가 원하고 있는 공은 업 라이징 패스트볼이었다.
하지만 김민은 한 이닝에 업 라이징 패스트볼을 2개나 던질 생각이 없었다.
‘내 체력도 생각해 달라고.’
슉!
빠르게 날아온 공이 바깥쪽을 향했다.
‘떠오르지 않는군.’
제레미는 미간을 좁히면서 배트를 빠르게 돌렸다.
딱!
“안타! 2사 후에 안타가 나왔습니다.”
김민은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맞은 뒤, 모자를 벗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고속 슬라이더를 잡아당기다니…… 믿기지 않는 배트 스피드군.’
그는 타임을 걸곤 신발 끈을 고쳐 묶었다.
“킴이 시간을 끄는군요.”
“노련하군.”
김민의 노련함은 라몬스는 물론 로저 클레멘스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타자가 짜증을 느낀다면 이 승부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거야.”
양키스의 4번 타자 오스번.
그는 짜증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의 앞에 주자가 있는 것에 감사했다.
‘1루에 주자가 나갔군. 이것으로 킴이 던질 수 있는 코스가 20%나 줄어들었어.’
1루에 주자가 나가게 되면 1루수의 수비 위치가 1루 베이스 쪽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킴은 1, 2루 쪽으로 향하는 타구보다는 2, 3루 쪽으로 향하는 타구를 만들어 내려 하겠지. 즉, 내가 공을 당기기보다는 밀기를 원하겠지.’
오스번은 조용히 배트를 들었다.
김민은 그의 진지한 눈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양키스 4번 타자다운 눈이야. 전혀 동요하지 않는군.’
그는 경기 템포를 조절하는 것으로는 양키스의 4번 타자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인 것은 1루에 있는 제레미가 도루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녀석이 뛴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 질 거야.’
김민은 그립을 강하게 잡곤 안쪽으로 공을 찔러 넣었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3루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파울!”
오스번은 김민이 바깥쪽이 아닌 안쪽을 공략해오자 살짝 당황했다.
‘1, 2루 사이로 공이 빠져나가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토린 감독은 김민의 조금 전 투구를 보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으로 갔군. 킴은 승부사 기질이 있어.”
“하지만 파울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곧 안타가 나올 겁니다.”
몇몇 타격 코치들은 파울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안타로 가는 길목.
공이 배트에 맞았다는 것은 히팅 포인트와 타이밍, 둘 중 하나는 맞았다는 뜻이었다.
어긋난 다른 하나를 바로 잡는다면 안타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다음 타구를 기대해 보죠.”
수석 코치의 말에 토린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번이라면 기대할 만하지.”
딱!
다시 한번 타구가 1루 관중석에 떨어졌다.
“두 번째 파울입니다!”
“오스번의 배트가 공을 잘 따라붙고 있습니다.”
카운트 0-2.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
“타임!”
타임을 외친 것은 바로 포수 록튼이었다.
“무슨 일인가?”
주심의 물음에 록튼이 대답했다.
“브레이킹볼 사인이 어긋났습니다.”
배트를 든 오스번은 그 한마디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인이 어긋났다가 아니고, 브레이킹볼에 사인이 어긋났다? 이건 나보고 들으라고 한 말인가? 아니면…… 무의식중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나온 건가?’
록튼의 한마디는 의도된 것이었다. 그는 오스번의 심각한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려들었군.’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마운드로 달려갔다. 그리곤 미트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오스번이 걸려들었어.”
김민도 글러브로 입을 가렸다.
“이런 작전은 별로 쓰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브레이킹볼 사인 작전’은 김민의 히든카드 중 하나였다.
작전 내용은 간단했다.
유리한 카운트에서 타임을 건 뒤, 고의로 브레이킹볼이란 단어를 흘려 타자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이었다.
“승부구는 패스트볼인가?”
“그래, 안쪽 깊이 찌르는 패스트볼.”
“오케이. 사인은 적당히 휘두르라고.”
김민은 록튼이 홈플레이트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작전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볼 배합이면 모를까?
사인이나 콜을 이용한 기만술은 선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확실하게 통할 거야.”
그는 록튼과 가짜 사인을 여러 번 주고받은 뒤 셋포지션에 들어갔다.
오스번은 이때까지도 김민이 판 함정에 단단히 빠져 있었다.
‘카운트 0-2, 사인 미스를 떠나서 브레이킹볼이 들어오는 게 당연한 타이밍이야. 록튼의 발언은 부주의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어.’
그는 원 바운드 공이 올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히팅 타이밍을 최대한 뒤에 놓는 게 좋겠어.’
배트를 세우자 세 번째 공이 날아왔다.
슉!
브레이킹볼이 아닌 빠른 공.
오스번은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여기서 빠른 공이라고!’
그는 배트를 내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늦었어. 배트를 내도 허공을 치고 말 거야.’
바랄 수 있는 것은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것.
파앙!
미트에 들어온 공이 완벽한 울림을 만들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4번 타자의 삼구삼진.
토린 감독이 모자를 벗었다.
“안타가 나오기에는 파울이 부족했던 모양이군.”
오스번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타격 코치에게 이야기했다.
“기만술이군.”
“기만술이라면…….”
“녀석은 고의로 브레이킹볼이라는 단어를 흘린 거야.”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타격 코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녀석에게는 반드시 자네를 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야.”
김민이 오스번을 상대로 기만술을 사용한 것은 80구라는 투구수 제한 때문이었다.
“양키스 녀석들의 컨디션이 너무 좋아.”
록튼이 장비를 떼어내며 말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패스트볼에 타이밍이 좋아. 브레이킹볼이나 체인지업을 더 적극적으로 써 보는 게 어떨까?”
“그렇게 되면 투구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
록튼이 손을 멈추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킴, 오늘 경기는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이야.”
김민은 그가 강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이지.”
“마운드에서 다른 생각을 하다가는 1, 2점으로 끝나지 않아. 양키스 녀석들의 컨디션은 최고라고.”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록튼이 김민의 손목을 잡았다.
“최소 투구수 완봉. 이런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불펜을 믿고, 최선을 다하라고.”
김민이 미소를 지었다.
“투수 코치 같은 말을 하는군.”
“빈말이 아니야.”
김민은 록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했다.
“알겠어. 투구수 따위는 잊고 최선을 다해 타자와 승부하겠어.”
그는 머릿속에서 9이닝 80구라는 두 가지 숫자를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