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챔피언십 시리즈 06
10회 말 1아웃 주자 없는 상황.
양키스 4번 타자 오스번은 타격 자세를 가다듬었다.
‘제레미를 잡은 공은 분명 투심이었다. 지금까지 던지지 않았던 투심. 왜 지금에서야…… 설마 연장전을 위해서 남겨 둔 것인가? 아니야. 연장전을 생각하고 마운드에 오르는 선발 투수는 없다. 미완성인 공을 포스트 시즌에 급히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규시즌 동안 김민은 투심을 심심치 않게 사용했다.
그러나 스플리터와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와 체인지업에 가려져서 그의 투심 패스트볼을 모르는 타자들도 많았다.
오스번은 그중 한 명이었다.
‘스플리터 타이밍에 날아오는 투심. 완성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조심해야 한다.’
그는 배트를 꾹 쥐었다.
투심을 공략하는 방법은 싱커를 공략하는 방법과 같았다.
몸 쪽으로 공을 붙여 놓고 스플리터나 포크를 치듯 어퍼 스윙을 가져가는 것이다.
단,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공의 횡적인 무브먼트였다.
그것을 간과하고 퍼 올리기에 집중한다면 제레미처럼 범타가 나올 가능성이 컸다.
투심을 공략하는 방법은 어퍼 스윙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구안이 좋거나 타고난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레벨 스윙으로 투심 패스트볼을 쳐 낼 수도 있었다.
오스번은 자신의 선구안이 제레미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휘어져 나가는 공을 어퍼 스윙으로 걷어 올린다.’
그는 투심 패스트볼을 상대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슉!
초구는 빠른 공.
‘안쪽!’
스플리터보다는 투심 패스트볼이 먼저 머릿속을 스쳤다.
‘시작부터 투심인가?’
투심 패스트볼을 구사하는 투수는 메이저리그에 수십 명이 넘었다.
오스번은 배트 헤드를 내리면서 어퍼 스윙으로 스윙을 전환했다.
‘메이저리그에 투심 패스트볼을 공략하지 못하는 타자는 없다. 킴, 미완성 투심 패스트볼을 마구라 생각하지 마라!’
다음 순간 공은 그대로 배트를 통과해 미트에 꽂혔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김민이 던진 공은 스플리터나 투심 패스트볼이 아닌 94마일(151km)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오스번은 자신의 생각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미완성 투심은 던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는 성급한 판단으로 카운트 하나를 잃었다고 자책했다.
‘그건 그렇고. 킴을 상대할 경우, 생각해야 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같은 빠른 공이라고 해도 스플리터, 커터, 고속 슬라이더, 투심 패스트볼까지…… 경우의 수가 한둘이 아니야.’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팔색조 김민.
토린 감독은 적이지만 칭찬할 만한 선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 많은 공을 다 익힌 건지 모르겠군.”
“타고난 손재주가 뛰어난 것 같습니다.”
“천재란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토린 감독은 악의 제국 양키스의 수장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감독 생활을 하면서 천재라 불리었던 선수들을 여럿 만나보았다.
하지만 김민처럼 빛나는 선수는 몇 보지 못했다.
‘상대를 압도하는 재능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승리를 가져가 버린다. 운영의 마술사 김민.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정말 잘 지었군.’
탁!
배트에 빗맞은 공이 2루수 머리 위에 떠올랐다.
“내야 플라이입니다.”
오스번은 고개를 숙였다.
토린 감독은 그 모습을 보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스번, 모르고 있는 건가? 양키스의 4번은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는 오스번의 날개가 완전히 꺾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리즈가 어렵겠군.”
“타자들의 컨디션 때문입니까?”
“아니, 기세가 죽었어. 월드시리즈를 끝장낼 때의 모습이 나오지 않고 있어.”
오스번 다음으로 배터 박스에 들어선 것은 5번 타자 홀리스였다.
홀리스는 앞서 3, 4번이 힘없이 물러난 것을 똑똑히 보았다.
‘패스트볼 구위는 죽었지만, 예측하지 못하는 코스에 예측하지 못하는 공이 온다. 본격적인 심리전인가?’
그는 심리전에 앞선 두 타자보다 다소 강했다.
그러나 초구는 그의 심리전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파앙!
사람들의 시선은 미트에 들어온 공보다 배터 박스에 쓰러진 홀리스에게 향했다.
“홀리스, 배터 박스에 쓰러졌습니다. 공에 맞은 걸까요?”
주심은 아무 사인도 하지 않았다.
단순한 볼이라는 뜻.
“맞지 않았어.”
“하지만 저 위치는…….”
김민이 홀리스에게 던진 초구는 머리 쪽으로 날아가는 패스트볼이었다.
“이 자식이!”
홀리스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마운드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 홀리스를 록튼이 뒤에서 잡았다.
“진정해. 공을 던진 건 킴이라고. 그의 제구력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좋아.”
홀리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빌어먹을. 그 제구력이 좋은 자식이 나한테 위협구를 던졌단 말이야!”
“맞는 공은 아니었다고. 머레이를 생각해.”
머레이는 앞서 로저 클레멘스에게 안쪽 패스트볼로 위협을 당한 바 있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시작은 양키스가 먼저라고!”
“제길!”
두 사람이 몸싸움을 하는 사이 양쪽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관중석에 위치한 호이스트는 콜로세움을 찾은 로마시민처럼 중얼거렸다.
“벤치 클리어링이라도 일어나려는 걸까?”
일촉즉발의 상황.
홀리스가 배터 박스로 돌아가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한 번만 더 그 따위 공을 던지면 끝장내 버리겠어.”
그는 마운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고, 김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그건 그렇고, 킴은 위협구를 던질 때도 생각을 많이 하는군.”
호이스트는 김민이 철저한 계산하에서 홀리스에게 위협구를 던졌다고 생각했다.
‘머레이는 탬파베이의 마지막 타자였다. 머레이가 당한 위협구를 갚아 준다는 명분을 중요시 생각했다면…… 첫 타자 제레미에게 위협구를 던졌을 테지. 하지만 킴은 그러지 않았어.’
그의 예상대로 김민은 철저한 계산에 따라 위협구를 던졌다.
‘난 킴을 이해해. 제레미 같은 타자를 상대로 불리한 볼카운트를 가져간다면, 장타를 맞기 딱 좋지. 연장 10회 말. 게다가 경기는 챔피언십 시리즈, 킴은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을 거야.’
호이스트의 생각대로 단순한 기분으로 위협구를 던질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연장 10회 말 결정적인 안타를 맞게 된다면, 그 후유증은 1경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민은 팀의 우승과 시리즈 승리를 위해서 제레미 타석을 넘어간 것이었다.
‘제레미에게 던지지 않는다면 4번 타자 오스번, 오스번은 양키스를 상징하는 타자이기도 하지. 명분을 중요시했다면 사실 이쪽이 더 좋아. 하지만 킴은 그에게도 위협구를 던지지 않았어. 아직은 위험하다는 뜻이었겠지. 그래서 킴의 선택은 홀리스.’
홀리스는 제레미, 오스번과 함께 양키스의 클린업을 이루는 스타플레이어였다.
가장 약하기 때문에 그를 타겟으로 삼았다고는 볼 수는 없었다. 그의 공격력은 올스타 포수 포사다 이상이었다.
‘동료가 위협구를 당했는데 에이스로서 위협구를 던지지 않는다면, 라커룸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연장 10회 말 모험은 할 수 없었겠지. 그래서 킴은 2아웃을 기다린 거야. 실점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말이지.’
김민이 홀리스에게 위협구를 던진 것은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2아웃이라는 상황이 이점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해서 데드볼이 나온다고 해도 2사 1루. 그리 위협적인 찬스는 아니지.’
김민은 호이스트가 생각한 것에 하나를 더했다.
‘수 싸움을 좋아하는 홀리스가 상대라면 위협구의 위력이 배가 되지.’
그는 홀리스에게 던진 위협구를 단순한 볼로 생각하지 않았다.
카운트 1-0.
홀리스는 기분 나쁜 위협구와 마주했지만, 볼 카운트를 동료들보다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저 녀석…… 시작부터 냅다 안쪽에 공을 꽂아 넣었어. 그 말은 즉, 다음 공은 바깥쪽이라는 뜻이야.’
그는 배터 박스에 바짝 붙었다.
‘바깥쪽 코너를 노리는 패스트볼. 50%의 확률이다.’
김민은 록튼과 짧게 사인을 교환하고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슉!
빠른 공이 한가운데로 날아왔다.
‘바깥쪽이 아니라 가운데라고? 이건 실투인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스플리터라고 해도 이 높이라면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공이었다.
홀리스는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그대로 중견수 머리 위에 떠올랐다.
“홀리스의 타구가 높이 떠오릅니다.”
타격음과 타구의 방향을 생각하면 이 타구는 상당히 멀리 날아가야 했다.
하지만 비거리는 생각보다 나오지 않았다.
“중견수 정면이라고? 어째서?”
홀리스는 미간을 좁혔다.
한가운데 들어오는 실투를 그대로 노려 쳤다.
홈런은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2루타는 나와야 했다.
그러나 타구는 평범한 중견수 플라이에 그치고 말았다.
김민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앞서 던진 위협구 때문에 힘을 제대로 다 쏟아부을 수 없었겠지. 이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연속해서 패스트볼을 접한 홀리스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다.
움츠러든 근육은 파워를 죽였으며, 배트 속도마저 떨어뜨렸다.
평소보다 비거리가 줄어든 것은 당연했다.
로저 클레멘스는 김민의 투구를 보곤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훌륭해. 아주 좋을 때 위협구를 던졌어.’
그는 김민이 덤으로 투구수까지 절약했다고 생각했다.
“한 걸음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녀석이군.”
로저 클레멘스는 글러브를 들고 마운드로 향했다.
연장 11회 초.
로저 클레멘스가 마운드에 섰다.
“또 로저입니다! 토린 감독, 투수를 교체할 생각이 없는 걸까요?”
“토린 감독은 이 경기를 킴과 로저의 데스 메치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실점할 때까지 투수를 내리지 않는다.
1970년대라면 몰라도 지금은 2000년대였다.
밀레니엄 시대, 투수 혹사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로저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러게 나이가 있잖아.”
40세 선발 투수의 연장 11회 초 등판.
토린 감독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로저는 그 어떤 투수도 가지지 못한 철완을 타고 태어났다. 포스트 시즌 한두 경기로는 어떻게 되지 않아.”
그는 로저 클레멘스의 내구성을 믿었다.
이반 감독은 로저 클레멘스가 단순히 자신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서 등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하위 타선을 얕보고 있군.”
11회 초, 탬파베이 타순은 7, 8, 9번이었다.
“대타를 준비할까요?”
탬파베이는 대타가 부족한 팀 중 하나였다.
“아니, 그대로 가지.”
로저 클레멘스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7, 8, 9번을 틀어막고 11회 말 팀이 끝내기 안타를 터트리는 것이었다.
‘챔피언시리즈 11이닝 완봉승. 정말로 멋진 일 아닌가?’
그는 7번 타자 스나이더를 힘으로 압도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팡!
미트에 꽂힌 공의 구속이 96마일(154km)을 기록했다.
“로저도 사람이군. 더 이상은 98마일(158km)이 나오지 않아.”
“연장 11회라고, 96마일은 미친 속도야.”
스나이더는 있는 힘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지만, 스플리터에 삼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다음 타자는 8번 타자 칼튼입니다.”
칼튼은 탬파베이 하위 타선에 가시 같은 타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탬파베이 하위 타선은 볼티모어보다 낮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로저 클레멘스는 칼튼은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에게 밀린 불쌍한 친구 아닌가?’
그는 칼튼이 예전부터 높은 코스에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계속 뛰고 있다는 건 약점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이겠지만, 완전히 그것을 극복할 수는 없었을 거야.’
로저 클레멘스의 빠른 공이 높은 코스로 향했다.
슉!
공을 던지기 전 로저 클레멘스가 그린 시나리오는 하나였다.
- 떠오르는 공에 헛스윙.
‘그것 말고 뭐가 있겠어?’
공이 미트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한 그 순간 칼튼이 몸을 숙였다.
‘기습 번트!’
연장 11회 초.
칼튼은 길어진 경기로 피로에 노출된 양키스 수비를 노렸다.
툭!
배트에 맞은 공이 3루 방향으로 굴러갔다.
클락은 타구 방향을 보자마자 주먹을 세웠다.
“멋진 번트야!”
칼튼은 번트를 댄 뒤, 타구 방향조차 확인하지 않고 1루로 내달렸다.
‘로켓맨의 패스트볼을 안타로 만들 수는 없어. 하지만 내 다리라면…… 땅볼을 안타로 만들 수는 있다.’
1루 베이스를 밟을 때까지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제발…… 제발…….’
파앙!
1루수 미트에 공이 들어온 소리가 들린 것은 그가 베이스를 밟은 직후였다.
“세이프! 세이프!”
1루심의 판정에 양키스 팬들이 노성을 터트렸다.
“아웃! 아웃이야!”
“눈을 똑바로 뜨고 판정하라고!”
약간의 홈콜이 존재했지만, 연장 11회 초 결정적인 오심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1루심은 자신이 확실히 보았다면서 세이프를 연발했다.
“세이프!”
전광판에 느린 TV 화면이 공개되자 양키스 팬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발이 조금 빨랐잖아.”
“젠장 세이프란 말이군.”
“수비가 헐거웠어. 칼튼, 저 녀석…… 하위 타선 주제에 상당히 빠른 발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1사 1루.
로저 클레멘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무 얕봤군. 그런 방법을 쓸 줄이야.”
그는 칼튼이 도루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1사 1루, 타석에는 9번 타자. 진루타보다는 단독 도루가 더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거야.’
파앙!
미트에 들어간 공은 홈플레이트와 거리가 멀었다.
“피치아웃! 그러나 칼튼은 뛰지 않았습니다.”
칼튼은 리드를 좁히며 1루 베이스로 되돌아갔다.
로저 클레멘스의 예상과 달리 칼튼은 도루를 노리지 않았다.
‘포수가 포사다라서 포기한 건가? 그렇다면 고마운 일이겠지만…….’
그는 주자가 아닌 투구에 집중하기로 했다.
슉!
빠른 공이 바깥쪽 코너에 꽂혔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록튼은 있는 힘껏 배트를 돌렸지만, 허공을 치는데 그치고 말았다.
“후…… 지치는군.”
포사다가 미트에서 공을 빼며 말했다.
“록튼, 10이닝 동안 공을 받았잖아.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포사다, 넌 11이닝이잖아.”
“난 올스타 포수니까.”
포사다의 여유에 록튼이 쓴웃음을 지었다.
“평범한 플레이어와 올스타 포수의 차이란 말이지?”
“맞아.”
배트를 들자 세 번째 공이 날아왔다.
슈욱!
낮게 떨어지는 스플리터.
록튼은 몸을 낮추면서 이 공을 컨택했다.
‘외야로 빠져나가라!’
2루타는 바라지도 않았다.
발 빠른 칼튼을 3루에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딱!
그러나 타구는 내야를 뚫지 못하고 2루수 글러브에 걸려들었다.
“2루수 홀랜드가 슬라이딩으로 공을 막아 냅니다.”
홀랜드는 급히 일어나 2루에 공을 던지려고 했다.
그 순간 로저 클레멘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2루는 늦었어! 1루!”
2루 주자 칼튼은 록튼이 배트를 움직이는 순간 스타트를 끊었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더블 플레이로 끝낼 수는 없잖아.’
그의 빠른 발은 끝내 더블 플레이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늦은 건가?”
2루수 홀랜드는 1루에 공을 던졌고, 타자 주자를 잡아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2사 2루입니다. 탬파베이, 연장 11회 초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에 내보냅니다.”
“양키스 불펜은 아직도 비어 있나요? 지금이라면 리베라를 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린 감독은 전설적인 클로저 리베라를 등판시키지 않고 로저 클레멘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로저라면 막을 수 있다.”
그가 로저 클레멘스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이반 감독이 김민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과 동등한 것이었다.
코스타 타격 코치가 이반 감독에게 고개를 돌렸다.
“브라이튼 타석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1번 타자 브라이튼.
그는 이번 포스트 시즌 내내 커리어 평균을 밑돌았다.
코스타 타격 코치는 대타를 쓰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반 감독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로 가지.”
그는 대타 대신 1번 타자 브라이튼에게 승부를 맡겼다.
“1번 타자 브라이튼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브라이튼은 배트를 세우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아마추어 시절 그는 야심이 많은 선수로 유명했다.
그것은 프로에 지명을 받은 다음에도 바뀌지 않았다.
초대형 에이전트와 계약하고 단순한 메이저리그 콜업이 아닌 FA 대박을 노렸다.
너무나 큰 야심에 탬파베이 프런트는 그를 콜업했지만, FA 때는 놓아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브라이튼이 지나치게 돈을 노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브라이튼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마을을 바꾸기 위해서는 성공하는 수밖에 없어.’
배트를 들자 마운드의 투수가 눈에 들어왔다.
‘로저 클레멘스.’
메이저리그 100년 역사상 최고이자 최강의 투수.
브라이튼은 숨을 죽였다.
그 순간 관중석의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상대 투수에게 겁을 먹다니!”
브라이튼은 그를 알고 있었다.
‘이 목소리는…….’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파앙!
미트에 들어온 공이 좋은 울림을 냈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고성은 덤.
브라이튼은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리며 쓰디쓰게 웃었다.
“저 녀석이 왔군.”
관중석에서 목소리를 높인 이는 유명 래퍼 오티즈 2세였다.
오티즈 2세는 브라이튼처럼 뉴욕 할렘 출신이었다.
할렘가라고 하면 흔히 마약과 흑인을 먼저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할렘가에는 흑인 못지않게 많은 백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흑인들처럼 가난했으며, 꿈을 잃어버린 채 죽은 듯 살아가고 있었다.
브라이튼은 할렘가에서 살아가는 백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학교에 다니는 내내 친구인 오티즈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힘으로 그곳을 바꾸고 싶어.’
오티즈 2세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아, 내가 힘을 보태 주지.’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술주정뱅이 아버지, 마약을 파는 형과 몸을 팔기 위해 거리로 떠나는 누나.
두 사람은 그 모든 것이 싫었다.
‘성공해서 모든 것을 바꾸겠어!’
그가 정신없이 야구를 했던 것은 할렘가의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뭐가 올스타냐! 뭐가 슈퍼 루키냐! 중요할 때 해 주지 못하면 슈퍼스타가 될 수 없어!’
따악!
배트에 맞은 공이 그대로 중견수 앞에 떨어졌다.
“브라이튼!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로 적시타를 때려냅니다!”
“연장 11회 초, 드디어 오늘 경기 첫 점수가 나왔습니다.”
브라이튼은 자신의 고향에서 메이저리그 최강의 투수에게 일격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