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챔피언십 시리즈 05
토린 감독은 전광판을 확인하곤 하머스 투수 코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려운 시합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했어.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군. 9회 말까지 0-0이라니,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서 이런 게임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단 말이지.”
양키스에게는 아직 하나의 아웃 카운트가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토린 감독은 그 하나의 아웃 카운트로 뭔가가 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남은 아웃 카운트 하나가 지나가는 동안 홈런이 나올 수도, 2루타가 나올 수도 있지. 하지만 왠지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야.”
탁!
빗맞은 타구가 내야에 높이 떠올랐다.
공을 친 더글라스는 전력을 다해 1루로 달렸고, 내야수들은 공을 잡기 위해 다이아몬드 안쪽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누군가 공을 놓친다면…….”
그렇게 된다면 양키스는 9회 말 2사 후에 찬스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희망 사항이 현실로 이뤄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팡!
1루수 아울의 미트에 들어온 공이 짧은 소리를 냈다.
“아울이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냅니다. 양키스의 정규 이닝도 점수 없이 끝이 납니다!”
하머스 투수 코치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연장전이군요.”
“로저는?”
“더 던지겠다고 합니다.”
토린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로저라면 믿을 수 있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10회 초.
로저 클레멘스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양키스 팬들은 에이스의 연장전 등판에 기립 박수를 보냈다.
“로저! 로저!”
“로켓맨! 사랑한다!”
“뉴욕을 지켜다오!”
그를 상대하는 탬파베이 선두 타자는 3번 타자 윌리엄.
“윌리엄이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섭니다.”
윌리엄은 배트로 홈플레이트를 두 번 긋고는 자세를 잡았다.
‘지금까지는 믿기지 않은 무브먼트와 구속으로 타자들을 요리했다. 하지만 연장전에도 그런 구속을 유지할 수 있을까?’
40세의 나이를 가정한다면, 연장전에서 그런 구속을 유지할 가능성은 적었다.
‘아마 2, 3마일(3-5km)은 빠지게 되겠지.’
슉!
바깥쪽 빠른 공.
윌리엄은 재빨리 배트를 냈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그대로 1루 관중석에 떨어졌다.
‘이전 타석보다는 히팅 포인트가 좋아졌어. 하지만…… 여전히 공을 라인 안으로 넣지 못하고 있군.’
그는 고개를 돌려 전광판의 구속을 확인했다.
“98마일(158km)이라고?”
로저 클레멘스는 누구처럼 힘을 아끼면서 9이닝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하위 타선은 조금 쉬어갔지만, 나머지 타자들에게는 전력으로 공을 던진 그였다.
그런데도 연장전에 98마일이 나오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군. 연장전에서 98마일이라니.”
윌리엄은 혀를 차곤 배트를 세웠다.
‘인간을 초월한 것인가? 아니면 타고 태어난 재능이 다르단 말인가?’
슉!
두 번째 공이 빠르게 안쪽 코너를 찔렀다.
‘빠, 빨라.’
윌리엄이 배트를 냈지만, 공은 그대로 미트에 꽂혔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로저 클레멘스는 탬파베이가 자랑하는 최강의 타자를 상대로 압도적인 피칭을 이어갔다.
‘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이반 감독은 전광판에 찍힌 99마일(159km)을 보면서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바이슨,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로저의 구속 말입니까?”
“연장전에 저렇게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있다고 생각하나?”
“25세 이전의 팔팔한 투수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봐 로저는 40세라고.”
김민은 다른 이들처럼 로저의 구속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로저의 비밀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괴물 같은 체력과 구속의 정체는 스테로이드지. 그러고 보니, 양키스는 유독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선수들이 많군.’
4번 타자 제레미.
에이스 로저 클레멘스.
두 선수는 각각 투타를 대표하는 선수였으나 약물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딱!
윌리엄의 배트에 맞은 공이 유격수 데릭 지터에게 향했다.
“지터가 공을 가볍게 처리합니다.”
“연장전에도 지터의 풋워크는 살아 있군요.”
김민은 10회 말 등판을 준비하기 위해 불펜으로 이동하고자 했다.
그런 그를 블렛소 투수 코치가 막아섰다.
“킴, 어딜 가려고 하는 건가?”
“불펜입니다.”
“다음 이닝은 볼튼에게 맡기게.”
김민이 블렛소 투수 코치에게 물었다.
“감독님의 생각입니까?”
“감독님과 내가 상의한 결과일세.”
이반 감독은 시리즈가 길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1차전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1차전을 잡기 위해서 무리하게 투수 운영을 가져간다면 나머지 게임을 그르칠 가능성이 크다. 킴의 오늘 등판은 정규 이닝까지다.’
그는 원정 1차전을 내주더라도 2차전에서 이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등판하는 게임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렉터와 클락은 정규 시즌 분명 좋은 피칭을 해 주었다. 하지만 포스트 시즌은 다르다. 그들이 양키스의 빅3를 상대로 1승 1패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등판 경기에서 승률 50%를 기록한다면, 승부는 김민의 등판 경기에서 갈리게 되어 있었다.
‘내가 로저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탬파베이의 포스트 시즌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끝나고 만다. 월드시리즈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로저를 넘어야 한다.’
김민의 두 손에 팀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블렛소, 감독님께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10회 말에도 제가 올라간다고.”
블렛소 투수 코치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킴!”
김민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로저가 계속 내려가지 않는다면 11회에도 마운드에 올라갈 겁니다.”
“한계 투구수가…….”
김민이 블렛소 투수 코치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한계 투구수에는 아직 여유가 있을 겁니다. 12개 정도. 그 안에서 10회 말을 끝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블렛소 투수 코치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후우…… 킴, 양키스의 10회 말 타선을 알고나 있는 건가?”
김민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선발 투수가 그걸 모를 리 없죠. 3번 제레미, 4번 오스번, 5번 홀리스입니다.”
“그들은 악의 제국이 자랑하는 클린업이야!”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라면 그 정도는 넘어야 하지 않을까요?”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올스타 게임에서 6명의 올스타를 상대로 5개의 아웃 카운트 삼진으로 올렸다.
그리고 그 5개의 아웃 카운트에는 당대 최고의 타자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김민은 페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드로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 줬던 게임은 이벤트 성격이 짙은 올스타전이었다.
그에 반해 김민이 지금 던지고 있는 게임은 투수와 타자의 집중력이 최고로 올라 있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였다.
“킴…….”
김민이 블렛소 코치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포스트 시즌입니다. 에이스로서 팬들의 기대에 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저 클레멘스를 꼭 이기고 말겠다는 뜻인가?”
“이기지 못하면 다음 시리즈가 없습니다.”
블렛소 투수 코치는 김민이 불펜으로 향하는 것을 이 이상 막지 못했다.
그는 김민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포스트 시즌에 펼쳐지는 에이스의 역투. 팬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스타디움을 찾는다. 맞는 말이다. 관리와 운영으로는 절대 슈퍼스타가 될 수 없다.’
고개를 그라운드로 돌린 순간 아울이 삼진으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아울 마저 삼진인가?”
로저 클레멘스가 아웃 카운트 2개를 잡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4분.
그렉스를 2구 안에 잡아낸다면 5분 안에 10회 초 수비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5분 컷이라. 끈질긴 타선이지만 아직 강함이 부족하군.’
로저 클레멘스는 다음 타자를 확인하곤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이 상황에서 노신사의 등장이라. 탬파베이는 왜 대타를 쓰지 않는 걸까?’
그렉스는 탬파베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 그는 약물을 끊은 뒤 다른 선수들처럼 완만한 하락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연장전.
그의 육체는 젊은 선수들과 다르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지명 타자 제도가 있어서 다행이야.’
로저 클레멘스는 그렉스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렉스, 정의라는 허울에 빠져 힘을 잃어버린 가여운 친구. 미안하지만 난 그런 가여운 친구를 동정하지 않아.’
슉!
포심 패스트볼이 한가운데로 날아왔다.
주변을 압도하는 빠른 공.
그렉스는 그 공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데릭 지터의 글러브를 넘어갔다.
“그렉스! 10회 초 공격에서 안타를 쳐냅니다!”
로저 클레멘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렉스가 내 99마일(159km) 패스트볼을 쳐 냈다고? 설마 포스트 시즌을 위해 약을 다시 시작한 것은 아니겠지?’
그는 그렉스의 약물을 의심했지만, 그렉스의 안타는 약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렉스는 1루 베이스에 들어간 뒤 코치에게 주루용 장갑을 건네받았다.
“훌륭한 타격이었어.”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렉스의 한마디는 진심이었다.
‘대단한 공이었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떠오를 줄이야.’
그는 앞선 세 타석에서 로저 클레멘스의 패스트볼 타이밍을 잡아냈다. 그 결과 네 번째 타석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배트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로저 클레멘스의 라이징 패스트볼은 타이밍만으로 칠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배트가 공에 닿으려는 순간 공이 그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떠올랐다.
‘다 틀렸다고 생각한 순간이었지.’
빗맞은 타구가 되리라 확신한 그 순간 배트가 공을 외야로 밀어냈다.
그렉스는 공이 한가운데로 들어오지 않았거나 0.01초만 늦었어도 결과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사 1루.
로저 클레멘스가 로진백을 만졌다.
“쳇, 5분이 지나고 말았군.”
그는 다음 타자를 확인했다.
6번 타자 머레이.
그는 준수한 선수였으나 올스타로 뽑힐만한 재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
‘준수하지만 딱 거기까지인 친구군.’
로저 클레멘스는 초구를 강하게 던졌다.
파앙!
99마일(159km) 패스트볼이 미트를 강하게 때렸다.
머레이는 배트를 내긴커녕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크윽…….”
화를 낸 것은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코스타 타격 코치였다.
“저 자식이! 고의로 머리 쪽에 공을 던졌어.”
머레이는 마운드로 달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소가 양키스 홈구장인 양키 스타디움인 데다가 상대가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투수라 불리는 로저 클레멘스였기 때문이었다.
코스타 코치는 더그아웃에서 화를 삭힐 뿐이었다.
‘선수가 움직이지 않는데 코치가 앞장서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김민은 로저 클레멘스의 투구를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나하고 전혀 다른 투수군.”
스미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티처와 로저는 확실히 다르지. 로저는 힘을 앞세운 투구를 하니까.”
김민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로저는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투수고. 난 그렇지 않다는 거야.”
그는 초구로 들어온 높은 공 때문에 머레이가 바깥쪽에 약점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런 공을 보고 배터 박스에 바짝 붙을 수 있는 타자는 없어. 로저 클레멘스는 지금부터 바깥쪽을 교묘하게 공략할 거야.’
김민의 예상대로였다.
로저 클레멘스는 머레이를 상대로 바깥쪽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결국 머레이의 배트가 허공을 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헛스윙 삼진.
김민은 글러브를 들고 마운드로 향했다.
‘이기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도 좋은 건 아니다. 만약 그것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이미 스포츠가 아니다.’
그는 반칙에도 허용될 수 있는 것과 허용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반 감독은 김민이 마운드로 향하는 것을 보곤 이마를 찌푸렸다.
“블렛소!”
그의 외침에 블렛소 투수 코치가 대답했다.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집을 피웠단 뜻인가?”
“로저를 이겠다고 합니다.”
이반 감독이 혀를 찼다.
“누가 최고인지 가리겠다는 말인가?”
김민은 이번 시즌 최고의 투수였다. 그러나 그를 최고의 투수라 부르는 사람은 적었다.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최고는 아직 로저 클레멘스였다.
바이슨 수석 코치가 걸치듯 말했다.
“대관식이라도 하려는 모양이군요.”
이반 감독이 팔짱을 꼈다.
“대관식이 아니라 왕위쟁탈전이야. 하지만 우리 쪽이 어느 쪽으로 봐도 약해.”
블렛소 투수 코치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이쪽에는 젊음이 있습니다.”
“저쪽에는 그 젊음을 능가하는 관록이 있어.”
탬파베이 더그아웃은 김민의 등판으로 시끄러웠지만, 누구도 마운드로 향하지 않았다.
코칭 스탭은 김민의 등판을 걱정했지만, 에이스의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순 없었다.
‘단기전은 투수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이스가 흔들린다면 시리즈는 끝이야.’
‘두 투수는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이 아닌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누구인지 가리고 싶어 하는 것 같군. 내가 나서서 이 대결을 망칠 수는 없지.’
탬파베이 코칭 스탭이 더그아웃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김민이 연습 투구를 시작했다.
팡! 팡!
그의 연습 투구는 평소와 같았다.
포사다는 그의 연습 투구를 보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포사다, 뭐 이상한 거라도 봤어?”
지터의 물음에 포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봤어.”
“뭐야?”
“킴이 제대로 연습 투구를 하고 있어.”
지터는 시선을 그라운드로 돌렸다.
‘정말이다. 지금까지 몸을 푸는 정도로밖에 연습 투구를 하지 않았던 킴이 코너에 공을 꽂아 넣고 있다. 연장 10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 걸까?’
포사다는 포수였기 때문에 지터보다 시야가 넓었다. 그는 김민이 왜 저런 연습 투구를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레미 때문이야.’
10회 말.
양키스의 선두 타자는 3번 타자 제레미였다.
“제레미가 오늘 4번째로 타석에 들어섭니다.”
제레미는 어설프게 아웃 카운트가 늘어나 있는 것보다 선두 타자로 나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연장 10회 말. 무사에 주자를 내보내긴 싫을 테지. 이번 타석은 정면으로 승부해 올 게 분명해.’
그는 배트를 들고 김민을 주시했다.
김민은 굳은 표정으로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에이스란 호칭을 받은 녀석들은 이럴 때 가장 빠른 공을 가장 자신 있는 코스에 던지곤 하지. 녀석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김민이 가장 자신 있게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코스는 바깥쪽 낮은 코스였다.
제레미는 배트를 살짝 내리며 그 코스를 주시했다.
‘이곳으로 공이 들어온다면 홈런이다.’
슈욱!
김민의 손을 떠난 공이 미트로 돌진했다.
‘빨라.’
초구가 패스트볼이라는 것은 맞췄다.
하지만 제레미가 선택한 코스는 김민이 선택한 코스와 전혀 달랐다.
파앙!
미트에 공이 꽂힌 순간 배트가 허공을 쳤다.
“스윙 스트라이크!”
제레미는 미트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가장 자신 있는 코스였단 말이지?’
약물의 힘으로 선구안까지 가지게 된 제레미.
그는 헛스윙을 했지만 여유가 있었다.
“킴이 초구를 자신 있게 꽂아 넣었습니다.”
“연장 10회 말 이렇게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많지 않습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김민과 로저 클레멘스의 대결에 주목했다.
“오늘 이 자리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를 가리는 자리가 아닐까요?”
“전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를 가리기 위해서는 한 경기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이번 시리즈에서 승리하는 선수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예를 얻게 될 것입니다.”
김민이 승리하면 새로운 최고가, 로저 클레멘스가 승리한다면 영원한 최고가 탄생했다.
“말씀드린 순간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슉!
빠른 공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향했다.
제레미는 이 공을 쫓아가다가 배트를 멈췄다.
파앙!
미트에 꽂힌 공은 좋은 소리를 냈지만,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카운트 1-1, 제레미가 바깥쪽 공을 골라냅니다.”
제레미는 2구를 고른 뒤 타임을 요청했다.
“배트가 좀 미끄럽군요. 왁스를 바르고 오겠습니다.”
지터는 제레미의 행동을 보곤 혀를 찼다.
“저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야. 투수의 공을 고른 뒤, 피칭 타이밍까지 빼앗겠다는 뜻이지.”
“내가 보기에는 불필요한 행동이야. 킴 정도 되는 투수라면 저런 정도로 흔들리지 않아.”
지터가 포사다를 향해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연장 10회 말이야. 약간의 어긋남으로도 투수는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고.”
“다음 공을 보면 알게 되겠지.”
김민의 3번째 공은 한가운데를 향했다.
슉!
빠른 공이었다.
하지만 패스트볼은 아니었다.
제레미를 상대로 이 코스에 패스트볼을 넣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실투는 아니다.’
제레미는 배트를 아래로 내렸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스플리터. 하지만 이 코스에서 떨어진다면…… 떨어진다고 해도 스트라이크존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공을 펜스 밖으로 걷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끝내기 홈런. 괜찮은 엔딩이로군.’
제레미는 끝내기 홈런을 머릿속에 그리며 배트를 휘둘렀다.
탁!
빗맞은 타구.
제레미의 머릿속에 그렸던 영상이 산산이 깨어졌다.
‘왜 이런 결과가?’
“느린 땅볼을 2루수 칼튼이 처리합니다.”
1루수 아울의 미트에 공이 들어온 순간 아웃 카운트 하나가 올라갔다.
“제레미 2루수 땅볼 아웃입니다!”
로저 클레멘스는 더그아웃에서 제레미의 타구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대단하군. 저 친구.”
라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누가 대단하다는 겁니까?”
“킴말이야. 연장전에 쓸 무기를 감추고 있었잖아. 생각해 보라고 9이닝 이후를 준비하는 선발 투수를 말이야.”
라몬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야. 놈은 제레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을 던졌어.”
김민이 제레미에게 던졌던 세 번째 공은 바로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녀석은 이 전 타석까지 제레미에게 투심 패스트볼을 하나도 던지지 않았어. 마지막 타석을 위해서 철저하게 감춰 둔 거지.”
스플리터와 투심 패스트볼은 횡무브먼트에 큰 차이가 있었다.
라몬스가 김민을 주시하며 말했다.
“스플리터를 치기 위한 스윙이었다면 빗맞은 타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해.”
로저 클레멘스는 웃음을 지우곤 얼굴을 굳혔다.
“누가 최고인지 이 자리에서 가리자는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