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179화 (179/296)

179화 챔피언십 시리즈 04

아울의 상대는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

사람들은 그를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라 말했다.

그는 데뷔 전부터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최고의 무대에 어울리는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20년 뒤 그는 그것을 이뤄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팬은 물론 언론들까지 그를 역대 최고라 말했다.

파앙!

포수 미트를 찢는 듯한 강렬한 울림.

타자의 배트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의 외침과 제스처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헛스윙 삼진을 당한 아울은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제길…… 40세 투수가 저런 공을 던지다니.”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100마일(161km).

정확히 제구된다면…….

아니 제구되지 않아도 특유의 무브먼트만 지킬 수 있다면, 로저 클레멘스는 타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로저가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합니다!”

“탬파베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마는군요. 앞으로 이런 기회가 몇 번이나 올까요?”

“상대가 로켓맨이라면 많지 않을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탬파베이가 이 경기를 잡기 위해서는 이번 기회를 잡았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남자 로저 클레멘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7년 전.

그는 선발 투수로 자리를 잡은 이후 가장 적은 140이닝을 던지면서 4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40이닝과 4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도 하지 못해 메이저리그를 떠나는 선수가 1년에 수십 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 대상이 메이저리그 역사에 도전하는 로저 클레멘스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호사가들은 로켓맨의 질주도 여기서 끝이라고 말했다.

- 로저가 뛰어난 투수라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역대급은 아니야.

- 단기간에 뛰어난 실력을 보인 것은 분명 대단해. 하지만 통산기록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 것 같군.

- 이대로 나간다면 300승은 어렵겠어. 200승이나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

- 200승 투수는 흔하지. 노년기에 평균자책점이 더 떨어지면 호프(명예의 전당) 입성은 힘들 거야.

-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투수라니, 절대 아니지. ‘1980년대 보스턴에서 활약했던 에이스 로저 클레멘스.’ 이 정도 평가가 딱 어울려.

로저 클레멘스는 강한 사내였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과 설전을 벌이기보다는 훈련에 집중했다.

‘내가 끝났다고? 절대 그렇지 않아. 부상으로 잠시 쉬었을 뿐이야.’

그는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그리고 맞이한 다음 시즌.

로저 클레멘스는 240이닝을 던지며 3.6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하락세라던 지난 시즌보다 100이닝을 더 소화했고, 평균자책점도 3점대로 끌어내렸다.

부활이라고 말해도 어긋남이 없는 성적.

그러나 구단의 평가는 냉담했다.

“로저가 좋은 투수라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전성기는 이미 지났어.”

“준수한 2, 3선발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이영상에 도전할 수 있는 실력은 아닌 것 같군.”

“최고의 연봉은 무리일세.”

로저 클레멘스는 구단의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적을 내주지.”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다.

“정의? 그런 것은 나를 지켜 주지 않아. 오직 힘만이 나를 존재하게 만들 것이다.”

로저 클레멘스는 팀을 옮긴 뒤, 약물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1997년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

로저 클레멘스

21승 7패 평균자책점 2.05

264이닝 그리고 292삼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성적과 퍼포먼스.

로저 클레멘스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 그게 바로 로저 클레멘스야.”

“로켓맨의 투구를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영광이지.”

“그가 호프(명예의 전당)에 가는 날 어떤 모자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도 보스턴 아닐까?”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 로저 클레멘스.

쏟아진 찬사와 환호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로저 클레멘스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힘은 절대적이다.”

4회 초가 끝난 현재 탬파베이와 양키스의 스코어는 0-0이었다.

“록튼 천천히 나와도 괜찮아.”

록튼이 장비를 착용하는 동안 백업인 스미스가 대신 연습구를 받아 주었다.

팡! 팡!

스미스는 공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킴의 공을 받아 보고 싶다.’

백업 포수인 그는 디비전 시리즈 동안 선발 투수가 아닌 불펜 투수와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툭.

미트 끝에 맞은 공이 뒤로 흘렀다.

“스미스, 정신 차리라고.”

그에게 공을 가져다준 사람은 양키스 1번 타자 데릭 지터였다.

“지터?”

“고향으로 돌아왔잖아. 조금은 기분을 내도 좋을 것 같은데…….”

스미스의 고향은 이곳 뉴욕이었다.

“지터도 고향이 뉴욕이었나?”

지터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마운드를 가리켰다.

“스미스, 투수가 기다리고 있어.”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공을 김민에게 던졌다.

팡!

김민은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곤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터의 여유, 우리 팀에서는 확실히 찾아볼 수 없는 것이야. 포스트 시즌의 경험.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군.’

적당한 긴장감은 집중력을 높여줬지만, 과한 긴장감은 플레이에 경직을 가져올 뿐이었다.

‘여유가 없으면 결국에는 깨어진다. 나부터 바뀌어야 해.’

김민은 그립을 쥔 뒤 스미스에게 말했다.

“스미스! 100마일(161km)을 던질 테니, 준비해.”

스미스는 김민이 목소리를 높이자 긴장한 채 미트를 들었다.

‘다짜고짜 100마일인가? 하지만 킴은 100마일을 던질 수 없잖아.’

그는 김민이 가능한 빠른 공을 던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민의 손끝을 떠난 공은 그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공이었다.

‘이…… 이것은!’

느리디, 느린 이퓨즈.

팡!

미트에 들어온 공은 소리까지 가벼웠다.

“나, 나이스 볼.”

김민은 당황한 스미스에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스미스, 이게 바로 내 100마일이야. 잘 기억하라고!”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지터는 김민의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퓨즈인가? 공에 담긴 뜻은 아마도 체인지 오브 페이스. 킴의 체인지 오브 페이스는 그 누구도 흉내를 내지 못하지. 4회 초 로저의 마지막 공에 시그니처로 응답한 모양새로군.’

그는 김민이 모두가 듣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생각했다.

1분 뒤.

주심이 우렁찬 목소리로 4회 말 시작을 알렸다.

“플레이!”

지터는 김민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홈의 어드밴티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늘 시합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 킴, 더 이상 양보는 없다.’

배트를 세우자 초구가 날아왔다.

슉!

바깥쪽 빠른 공.

지터는 미간을 좁혔다.

‘또 바깥쪽인가?’

김민은 한 타순, 아니 한 이닝에도 몇 번이나 볼 배합을 바꾸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터에게 던진 초구는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정말로 패스트볼인가?’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탁!

배트에 걸친 공이 뒤로 흘렀다.

“파울!”

전광판의 구속은 93마일(153km).

지터는 전광판을 확인한 뒤 고개를 갸웃했다.

‘라이징 패스트볼은 아니었어. 그렇다면 역으로 간 건가?’

그는 시프트를 걸었던 내야수들이 정위치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단순히 역으로 간 게 아니야. 이 위화감은…….’

지터는 단순한 패스트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 더 지켜보면 알겠지.’

슉!

두 번째 공도 바깥쪽 빠른 공.

지터는 이 공을 보자마자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킴, 얕보는 것도 정도껏 하라고.’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킴 정도 되는 투수가 두 개 연속 같은 코스로 평범한 패스트볼을 던질 리가 없다.’

게다가 김민은 4회가 시작되기 전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강점이 체인지 오브 페이스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건 패스트볼이 아니야.’

패스트볼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자 가장 먼저 스플리터가 떠올랐다.

‘그래 킴에게는 훌륭한 스플리터가 있어. 패스트볼 다음에 던지면 효과가 아주 좋지.’

스플리터를 노리기 위해 배트가 아래로 내려간 순간 공이 앞으로 뻗었다.

‘이건!’

김민이 던진 공은 92마일(148km) 패스트볼이었다.

탁!

배트 위쪽에 맞은 공이 그 자리에 떠올랐다.

“공이 높이 떠오릅니다! 록튼, 마스크를 쓴 채 미트를 가져갑니다.”

팡!

미트에 들어간 공.

지터는 조금 전 자신의 타석에서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포수 파울 플라이라고? 아니, 그 전에 킴이 내게 연속으로 평범한 패스트볼을 던졌다고? 지금 여긴 챔피언십 시리즈가 열리고 있는 양키 스타디움이라고.’

지터가 당황한 순간 로저 클레멘스가 입술 끝을 올렸다.

“리듬을 탔군.”

“지터 말입니까?”

로저의 말을 받은 것은 3차전 선발로 내정되어 있는 라몬스였다.

“아니, 킴 말이야. 좋은 투구 리듬을 타고 있어.”

“플라이볼 하나로 그것까지 알 수 있는 겁니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봐야지.”

로저 클레멘스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뛰고 있는 선수 중 경험이 가장 많았다.

그는 챔피언십 시리즈는 물론 월드시리즈 경험도 풍부했다.

“과정이라면?”

“바깥쪽, 그리고 또 바깥쪽이었어.”

라몬스는 로저 클레멘스의 말을 듣자마자 한 선수를 떠올렸다.

“톰…….”

“톰 글래빈. 잘 말했군. 그런 리듬이야.”

라몬스는 미간을 좁혔다.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가 톰 글래빈처럼 던진다고? 하지만 그건 오히려 손해 아니야? 킴은 빠른 공을 던지는 마스터(그렉 매덕스)였다고.’

그는 마이너리그 시절 김민이 그렉 매덕스보다 톰 글래빈에 가까운 투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민은 1번 타자 데릭 지터를 2구만에 파울 플라이로 잡아낸 뒤, 2번 타자 더글라스도 우익수 플라이로 간단히 잡아냈다.

“공 3개로 아웃 카운트 2개. 대단히 효율적이야.”

“이번 4회 말은 타자들이 성급했을 뿐입니다.”

라몬스는 두 번째 타순이기 때문에 타자들의 배트가 쉽게 나온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저 클레멘스의 분석은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첫 타순과 투구가 달라. 이건 단순히 볼 배합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어쩌면 챔피언십 시리즈로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한 타순 돌면서 풀렸는지도 모르지.”

그는 오늘 경기가 꽤 재미있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멋진 시합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로저에게 멋진 시합이라면 우리에게는 힘든 게임이겠군요.”

로저 클레멘스가 라몬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안심하라고 이쪽에는 내가 있으니까.”

그는 자신의 공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박빙의 승부가 되겠지만 이기는 것은 역시 나 로저 클레멘스다.’

딱!

먹힌 타구가 그대로 3루수 키를 넘어갔다.

“제레미! 챔피언십 시리즈 첫 안타를 신고합니다.”

양키스의 첫 안타.

토린 감독은 박수로 팀의 첫 안타를 축하했다.

“나이스 배팅! 제레미!”

다음 타자는 4번 타자 오스번, 장타가 나온다면 손쉽게 선취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로저 클레멘스는 오스번의 아웃을 예고했다.

“먹힌 타구가 안타가 되었을 뿐이라고. 킴의 리듬은 아직 괜찮아.”

“오스번은 약한 타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타자는 기본적으로 투수보다 불리해. 잘 친다고 소문난 친구들조차 10번 타석에 들어서서 3번 안타를 칠뿐이야.”

김민은 제레미를 상대로 완벽히 타이밍을 빼앗았지만, 그의 파워를 억누르지는 못했다.

‘무리해서 제레미를 잡을 필요는 없어. 27명 타자를 전원 삼진 잡아야 이기는 게임이 아니니까.’

야구란 결국 상대보다 점수를 적게 주는 팀이 이기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안타 한두 개는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타를 맞으면 분명 실점 확률이 올라간다. 하지만 안타를 두려워하면 실점할 확률 100%다. 두려워하지 말고 존에 공을 꽂아 넣는 쪽이 이긴다.’

김민은 바깥쪽에 과감하게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다.

파앙!

“스트라이크!”

오스번은 떨어지지 않은 공에 미간을 좁혔다.

‘스플리터가 아니라 패스트볼이라고?’

그는 김민의 구속이 92마일(148km)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럭키볼을 던져 준다면 마다하지 않겠다.’

배트를 세우자 다시 한번 바깥쪽으로 패스트볼이 날아왔다.

탁!

배트에 헤드에 맞은 공이 우익수 머리 위에 떴다.

오스번은 손의 느낌으로 공이 배트에 맞은 지점을 알 수 있었다.

‘공이 헤드 끝에 맞았다. 왜지? 킴이 던진 공이 그렇게 많이 빠져 있었나?’

김민은 볼을 거의 던지지 않는 투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4회 말 피칭은 달랐다.

그는 패스트볼의 절반을 스트라이크존 밖으로 던지고 있었다.

“하나 넣고, 하나 빼고.”

로저 클레멘스의 말에 라몬스가 혀를 찼다.

“그 간단한 걸 간파하지 못하다니, 양키스 타선답지 않습니다.”

로저 클레멘스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킴이기 때문이지.”

“킴이기 때문이라고요?”

“저 친구 제구력이 좋다고 정평이 나 있거든. 시즌 내내 볼넷도 거의 없었어.”

로저 클레멘스는 타자들이 정규 시즌 기록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트 시즌을 위해서 정규 시즌 볼넷이 없는 피칭을 고수했다고 할 수는 없고…… 저건 오늘 경기를 위한 새로운 플랜인 모양이군.”

라몬스는 로저 클레멘스가 김민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제구가 좋지 않았던 것 아닐까? 킴은 이번 시즌 너무 많이 던지고 있다고.’

김민은 5회와 6회 그리고 7회까지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양키스 타선을 단 2안타로 막고 있어.”

“로저 클레멘스도 대단하지만, 킴이 더 대단해. 그가 상대하고 있는 타선은 바로 양키스라고.”

이반 감독은 김민이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던지는 법을 터득했다고 생각했다.

“맞춰 잡는 투구에는 홈콜도 어찌할 수가 없지. 킴이 제대로 답을 찾았군.”

바이슨 수석 코치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대단한 친구입니다. 저렇게 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투수는 메이저리그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스타일을 바꾼 게 아니지 않나?”

“예?”

“킴의 데뷔 시즌을 생각해 보라고, 저게 킴의 진짜 모습이야.”

이반 감독은 아직 김민의 데뷔 시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데릭 지터는 세 번째 타석에서 아웃된 직후 포사다를 찾아갔다.

“이야. 못 치겠어.”

“그렇게 무브먼트가 심한가?”

“아니, 저 녀석이…… 하아…….”

지터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하나 넣고, 하나 빼고 있어.”

“그건 이미 알고 있잖아.”

“바깥쪽 패스트볼로 그렇게 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되겠는데 슬라이더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우타자 바깥쪽을 예리하게 공략하는 슬라이더.

그 슬라이더를 한계까지 컨트롤한다면 우타자로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했다.

“슬라이더가 그렇게까지 제구가 되는 건가?”

“타석에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다음 이닝 포사다가 타석에 들어서자 김민은 슬라이더가 아닌 스플리터로 지터가 말한 하나 넣고 빼고를 보여 주었다.

‘횡으로만이 아니라 위아래도 할 수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건 손가락 장난에 지나지 않아.’

포사다는 강하게 공을 내리찍었지만, 바운드 된 공은 그대로 2루수 칼튼의 글러브에 들어갔다.

김민이 그에게 던진 승부구는 스플리터가 아니라 패스트볼이었다.

‘패스트볼이라. 완전히 생각을 읽혔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이 들어왔어.’

“킴이 포사다를 2루수 땅볼로 돌려세웁니다.”

포사다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미간을 좁혔다.

‘지터의 말대로군. 못 치겠어.’

그는 배트에 공을 맞힐 수는 있지만,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김민은 7번과 8번을 각각 삼진과 유격수 플라이로 잡아내곤 8회 말 수비를 마쳤다.

“양키스를 상대로 8이닝 무실점이군.”

“로저, 그렇게 칭찬만 할 게 아닙니다. 로저도 이제 한계 투구수라고요.”

로저 클레멘스가 자신의 투구수를 확인하곤 쓴웃음을 지었다.

“89개라. 아직 30개는 더 던질 수 있어.”

앞으로 30개면 120개였다.

“아무리 로저라도 120개는…….”

“라몬스, 보고 있으라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의 투수가 어떻게 공을 던지는지 말이야.”

로저 클레멘스는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에 나선 탬파베이 타선을 단 7분 만에 요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라몬스, 몇 개였지?”

그는 자신의 투구수를 알고 있음에도 라몬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11개였습니다.”

“그럼 아직 20개는 더 던질 수 있겠군.”

로저 클레멘스의 미소에서 강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9회 말.

뉴욕 양키스는 9번 에드를 빼고, 대타 폴리오를 투입했다.

“폴리오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시즌 중반에 트레이드로 합류해 에드가 부상일 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반 감독은 토린 감독의 용병술이 한 발 후퇴했다고 평가했다.

“주전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백업 선수를 넣는 게 옳다. 하지만 오늘 에드는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어. 안타가 나오지 않은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야. 여기서 백업 선수를 투입하는 건 악수에 가깝다.”

이반 감독이 말한 것처럼 에드는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그가 안타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김민의 운영과 컨트롤이 에드의 컨디션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딱!

높이 떠오른 공이 그대로 중견수 머레이의 글러브에 들어갔다.

“킴, 첫 아웃 카운트를 중견수 플라이로 시작합니다.”

9회 말 1사 주자 없는 상황.

데릭 지터는 타석에 들어서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두 번째 아웃을 당할 때만 해도 무안타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 타석 내리 아웃을 당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킴이 마구를 던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녀석이 던지는 공은 마술이 걸린 것처럼 배트를 흘리고 있어. 제기랄……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어.’

슉!

초구가 다시 한번 바깥쪽으로 날아왔다.

‘실투인가? 이 정도 공이면 컨택할 수 있다.’

배트가 끝까지 따라갔지만, 파울에 그치고 말았다.

패스트볼이 아니라 고속 슬라이더였다.

‘빌어먹을…… 실투일 리가 없지.’

지터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

김민은 하나 넣고 하나 빼고를 반복하는 듯 보였지만, 타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볼 배합과 로케이션을 가져가고 있었다.

양키스에서 이를 꿰뚫어 본 것은 포사다 뿐이었다.

‘괴물 같은 친구야.’

탁!

다시 한번 파울.

포사다가 속으로 혀를 찼다.

‘공 2개로 카운트 0-2인가? 양키스를 대표하는 지터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고 있다니.’

지터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이대로 끝낼 수 없어.’

각오를 다지며 두 손에 힘을 준 순간, 공이 크고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이퓨즈!’

지터는 배트를 내고자 했으나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 이런…….’

정확히는 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배트를 내고자 하는 생각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한가운데를 통과해 미트에 들어왔다.

주심도 한가운데 공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지터가 더그아웃을 향해 걸어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100마일(161km). 제대로 된 표현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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