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시작과 끝 01
이반 감독은 김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필승조를 아껴 내일 경기에 투입하자는 말이군. 킴은 양키스와 디비전 시리즈를 이기고 싶은 거야.’
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양키스와 탬파베이의 전력 차이는 극심했다.
김민이 등판하는 경기조차 쉽게 승리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필승조를 대기시키는 정도로 비벼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물론 필승조를 써버리는 것보다는 아끼는 것이 훨씬 나았다.
“킴,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무리한 투구는 선수 생명을 갉아 먹을 수도 있어.”
김민이 표정을 굳혔다.
“이 정도로 끝날 선수 생명이 아닙니다.”
이반 감독은 김민의 단호함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런 눈동자는 거절하기 힘들지.’
그가 김민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딱 110개까지 기다리겠네.”
“그 이상은…….”
이반 감독이 고개를 흔들었다.
“던질 수 없네.”
그는 디비전 시리즈 승리보다 중요한 것이 에이스의 어깨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큰 부상이 없었지만, 킴의 내구성은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많은 투구수는 분명 과부하를 줄 것이다.’
이반 감독은 블렛소 투수 코치를 불러 불펜 가동을 늦추라 말했다.
“블렛소, 10회는 킴이 올라간다.”
애너하임의 포포비치 감독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공격 전술을 짜고 있었다.
“오스카는 10회 초까지밖에 던질 수 없다. 그 말은 우리가 10회 말에 점수를 뽑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이었다.
“킴 다음으로 올라올 유력한 투수는 볼튼이다. 그는 탬파베이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기 때문에 히팅 포인트를 앞에 놓아야 한다.”
포포비치 감독이 선수들에게 몇 마디를 더하려고 하는 순간 스텝이 공수교대 시간이 끝나감을 알렸다.
“바로 그라운드에 나가야 합니다.”
포포비치는 그 말을 듣곤 선수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간단하게 말하겠다. 10회 초를 막고 10회 말에 끝낸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애너하임 선수들은 한 목소리로 감독의 물음에 답하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10회 초.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4번 타자 아울부터 공격에 나섰다.
“4번 타자 아울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연장 10회, 아울도 하나 해 줄 때가 되었습니다.”
아울은 배트를 바짝 세웠다.
‘4번이 이렇게 침묵하면 팀이 이길 수 없지.’
그는 자신이 해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패스트볼이야. 패스트볼을 노려야 해.’
슉!
바깥쪽 빠른 공.
아울은 배트를 멈췄다.
‘패스트볼이 아니야.’
파앙!
미트에 들어온 공은 그의 예상과 달리 패스트볼이었다.
“스트라이크!”
윌리엄은 아울이 고전하고 있는 것을 보곤 혀를 찼다.
“쳇, 패스트볼을 슬라이더로 착각한 모양이군.”
머레이가 배트를 들며 윌리엄에게 물었다.
“슬라이더를 패스트볼로 착각할 수 있어도 패스트볼을 슬라이더로 착각할 수도 있는 건가?”
“무브먼트 때문이야.”
“무브먼트?”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킴의 패스트볼이 뛰어난 무브먼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알고 있지?”
“타석에서 본 적은 없지만 들어는 봤지.”
윌리엄이 말했다.
“난 킴의 패스트볼을 몇 번이고 타석에서 상대했지. 킴의 패스트볼은 마치 위로 떠오르는 듯 움직인단 말이지. 전문가란 친구들의 말을 빌리면 회전이 다른 패스트볼보다 많아서 그렇다고 하더군. 인터넷에서는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머레이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럼 오스카의 패스트볼도 떠오르는 건가?”
“아니, 오스카는 옆으로 크게 휘어져. 패스트볼인데 마치 커터처럼 움직인다고 할까?”
“그럴 리가? 오스카가 그냥 커터 그립을 잡고 던지는 것 아니야?”
윌리엄이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오스카의 말에 따르면 포심 그립이 맞다고 해.”
머레이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포심 패스트볼 그립에서 나오는 커터라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그가 배트를 든 순간 아울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오스카!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체인지업이 멋지게 떨어졌습니다. 오스카를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만을 던지는 투수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김민은 오스카의 현재 폼이 마리아노 리베라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전성기 오스카는 대단하군. 타자들을 속이는 게 아니라 몰아붙이고 있어.’
그는 오스카의 전성기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성기만큼은 그 어떤 클로저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그렉스인가?”
윌리엄의 말을 브라이튼이 받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올스타전을 다녀온 뒤로 말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영감님이 하나 치면 그대로 게임이 끝날 텐데 말이야.”
그렉스는 휘어져 나가는 슬라이더를 공략했지만, 1루수 땅볼에 그치고 말았다.
‘큭…… 배트가 따라가지 못했어.’
그는 1루를 향해 전력질주했지만, 넉넉하게 아웃당하고 말았다.
“그렉스! 1루에서 아웃! 순식간에 투 아웃입니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중심 타선이 이렇게 침묵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특히 클린업의 침묵은 뼈아픕니다.”
이번 시즌 탬파베이를 와일드카드 결정전으로 이끈 것은 에이스 김민의 괴력과 짜임새 있는 타선이었다.
그러나 탬파베이 타선은 오늘 그 짜임새를 전혀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6번 타자 안데르센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머레이는 대기 타석으로 향하며 미간을 좁혔다.
‘마지막 타자가 안데르센이라. 안데르센은 그렉스 영감님보다 못하지. 그렇다면 10회 초 공격은 여기에서 끝인가?’
그는 11회 초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설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딱!
경쾌한 타격음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데르센이 쳐낸 공이 2, 3루 사이를 뚫고 외야로 흘러나갔다.
“안타! 안타가 나왔습니다!”
“2사 후 주자가 출루하는군요.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릴지 궁금합니다.”
머레이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장갑을 고쳐 꼈다.
‘안데르센이 안타를 치고 나갈 줄이야. 전혀 생각도 못했어.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어!’
그는 배트를 들고 타석에 들어섰다.
2사 주자 1루.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장타 한 방이면 결승점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머레이는 심호흡을 한 뒤 시선을 투수에게 맞췄다.
‘그러고 보니 저 친구, 투구수가 꽤 많군.’
오스카는 8회부터 마운드에 올라왔기 때문에 평소보다 많은 공을 던지고 있었다.
‘어쩌면 내게 기회가 올지도 몰라.’
그는 바짝 배트를 당겼다.
슉!
초구는 빨랐다.
그는 패스트볼이라 생각하고 배트를 돌렸지만, 실제로 들어온 공은 슬라이더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88마일(142km) 슬라이더.
‘고속 슬라이더군.’
머레이는 배트를 세우곤 다시 한번 장갑을 고쳐 꼈다.
‘아직 카운트가 2개 남았어.’
오스카는 주자가 1루에 나갔지만 위축되지 않고 공을 던졌다.
클로저에게 주자는 늘 함께 하는 그림자와 같았다.
슉!
이번에도 빠른 공.
머레이는 무릎을 굽히면서 팔을 쭉 뻗었다.
‘이렇게 하면 슬라이더도 칠 수 있단 말이지.’
그러나 그의 판단은 이번에도 빗나가고 말았다.
파앙!
미트에 들어온 공은 패스트볼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머레이는 두 번째 공을 확인하곤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종잡을 수 없는 공이야. 아울의 기분을 이제 알겠어.’
윌리엄은 머레이의 연속 헛스윙에 어깨를 으쓱했다.
“다 가르쳐 줬는데도 속는군.”
브라이튼이 윌리엄에게 물었다.
“윌리엄은 오스카의 공을 칠 수 있는 건가?”
윌리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그래, 방금 머레이에게 다 알려 줬다면서?”
윌리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뭐야. 그럼 머레이하고 다를 게 없잖아.”
“오스카는 리그 최고의 클로저라고, 쉽게 공략할 수 있는 투수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경쾌한 타구가 나왔다.
딱!
2루수 키를 넘어간 공.
공은 그대로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갈랐다.
“멋진 타격입니다! 공이 펜스로 굴러갑니다!”
1루에 있던 안데르센은 스타트가 빨랐기 때문에 벌써 2루를 돌고 있었다.
“안데르센! 그대로 달립니다!”
“에인절스 빠르게 공을 처리해야 합니다! 여기서 점수를 내주면 위험합니다!”
윌리엄은 속도를 높이고 있는 안데르센을 보며 생각했다.
‘안데르센은 2사에 0-2였기 때문에 스타트가 빨랐다고 치고, 머레이는 어떻게 오스카의 공을 쳐 낸 거야.’
머레이는 1루를 지나 2루로 내달리고 있었다.
‘운이 좋았어.’
오스카가 그에게 던지려 했던 공은 바깥쪽 꽉 차는 패스트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던져진 패스트볼은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에서 2개 정도 안쪽으로 들어온 공이었다.
머레이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실투를 쳐 내는 것도 실력이라고.’
포포비치 감독이 그라운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연결해!”
그는 안데르센이 홈을 노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음 타자는 칼튼이다. 칼튼이 오스카를 상대로 안타를 뽑아낼 가능성은 적다. 탬파베이는 여기서 점수를 뽑으려 할 거야.’
3루를 통과한 안데르센.
그는 포포비치 감독이 예상한 것처럼 홈으로 돌진했다.
“안데르센! 홈으로 달립니다!”
조금 위험해 보이는 승부.
그러나 탬파베이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공이 홈으로 날아옵니다!”
포수 빌의 미트에 공이 들어간 순간 안데르센이 홈플레이트를 쓸고 지나갔다.
“세이프! 세이프!”
주심의 선언과 동시에 머레이가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해냈어!”
리그 최강 마무리를 쓰러뜨린 것은 안데르센의 발과 머레이의 배트였다.
“탬파베이! 연장 10회 초 드디어 점수를 뽑아냅니다!”
“애너하임에게는 뼈아픈 실점입니다.”
포포비치는 몸을 일으키고 있는 안데르센을 보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이야.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어.”
그는 1점이라면 어떻게든 따라붙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스카를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투수 코치의 조언에 포포비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오스카는 너무 많이 던졌어.”
아웃 카운트 여섯 개.
선발 투수에게는 별 것 아니었지만, 마무리 투수에게는 평소 던지는 것에 2배였다.
포포비치 감독은 오늘 경기에서 패한다면 그 책임은 오스카가 아닌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탬파베이 타선을 너무 얕봤어. 슈퍼스타가 없다고 해도 95승 이상을 올린 타선인데 말이야.’
바뀐 투수 러셀은 칼튼을 잡아내곤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제 경기는 에인절스의 마지막 10회 말 공격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제가 이반 감독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로버트를 투입할 겁니다.”
단 한 경기로 시리즈 승패가 결정되는 서든 데스 게임.
필승조를 아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10회 말 탬파베이 마운드에 오른 선수는 선발 투수인 김민이었다.
“킴! 킴이 등장했습니다.”
“투구수 99개에서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여유 투구수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로저 클레멘스나 지뉴 같은 투수라면 모를까?
김민은 100개 이상 투구가 많지 않은 투수였다.
에인절스 팬들은 김민이 마운드에 올라온 것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졌다.
“킴이 올라왔어.”
“이반 감독이 도박을 걸었군.”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야.”
그러나 포포비치 감독은 김민이 마운드에 올라온 순간 맥이 풀리고 말았다.
“볼튼이 아니고 킴이란 말인가?”
팡! 팡!
김민은 많은 투구수에도 불구하고 연습 투구까지 하고 있었다.
에인절스 타자들은 미간을 좁혔다.
“체력이 남아 있다는 걸 과시하려는 연습 투구군.”
“실제로 99개밖에 안 던졌잖아. 120개까지 던지는 괴물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1이닝은 충분할지도 몰라.”
“탬파베이는 좋겠어. 단 한 경기가 남아 있다고 하면 저 친구를 올리면 되잖아.”
“본, 야구는 그렇게 쉬운 스포츠가 아니야. 킴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건 서든 데스 게임뿐이야.”
애너하임의 첫 번째 타자는 2번 타자 조지였다.
조지는 오늘 김민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이번 타석만큼은 친다.’
다섯 번째 타석.
이번 타석마저 망친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배트를 짧게 잡고 패스트볼을 기다렸다.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라고 해도 100개가 넘어간 순간부터 구위와 제구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슉!
바람을 가르며 초구가 날아들었다.
‘또 바깥쪽인가? 이 속도라면 패스트볼이다!’
조지가 미간을 좁히며 배트를 내밀었다.
툭.
배트 끝에 맞은 공이 바운드를 일으켰다.
‘스플리터!’
조지는 또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팍!
“홈플레이트 앞에서 큰 바운드가 일어납니다.”
김민은 재빨리 앞으로 내달렸다.
‘내가 처리해야 해.’
두 번째 바운드가 컸지만, 김민은 글러브를 뒤로 빼며 공을 잡아냈다.
“킴이 1루에 송구합니다!”
팡!
아울의 미트에 공이 들어간 순간 1루심이 아웃을 선언했다.
“공 하나로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았습니다!”
“킴은 투수부문 골드글러브를 노릴 만큼 수비가 좋은 선수입니다.”
투구수 100개.
남은 아웃 카운트는 2개.
포포비치 감독은 연장 10회라는 것을 빼고 보면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 수비. 어딘가 이상했어.”
그의 눈은 정확했다.
김민은 공을 던진 직후 오른쪽 발에 통증을 느꼈다.
‘공을 잡을 때, 삐끗한 건가?’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마운드를 내려갈 수는 없어.’
오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10회를 맡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불펜이 텅 비어 있었다.
지금 당장은 어떤 투수에게도 뒤를 맡길 수 없었다.
김민은 마운드로 간 뒤 발을 가볍게 돌려보았다.
‘통증이 있어.’
이반 감독은 김민의 동작이 이상한 것을 보곤 블렛소 코치를 호출했다.
“마운드로 올라가 봐.”
블렛소 코치가 마운드로 향하려는 순간 김민이 괜찮다는 사인을 냈다.
“두 타자 남았을 뿐입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경기를 빨리 끝내고자 했다.
그러나 포포비치 감독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말론에게 공을 최대한 보라고 지시해.”
“알겠습니다.”
3번 타자 말론은 벤치에서 나온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는 초구와 2구 그리고 3구를 그대로 서서 지켜보았다.
“카운트 2-1, 킴답지 않게 좋지 않은 카운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김민은 로진백을 만지면서 미간을 좁혔다.
‘구속은 1마일 정도 떨어졌을 뿐이야. 하지만 밸런스가 좋지 않아.’
오른발 부상은 구속보다 제구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말론은 김민의 흔들림이 그대로 눈에 보였다.
‘조금 전 수비 때 발을 다친 모양이군. 킴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행운이야.’
그는 배트를 세우며 패스트볼을 노렸다.
‘제구가 좋지 않을 때는 패스트볼을 한가운데로 던질 수밖에 없다.’
김민의 손에서 네 번째 공이 떠났다.
휙!
말론은 김민이 던진 공을 보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이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커브.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이었다.
‘틀렸어. 친다고 해도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을 거야.’
공은 홈플레이트를 통과해 투수 미트에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카운트 2-2.
김민은 공을 던지곤 다시 로진백을 만졌다.
‘아직 하나 더 남았어.’
그는 로진백을 내려놓은 뒤 두 손을 모았다.
“카운트 2-2, 킴이 말론을 상대로 다섯 번째 투구에 들어갑니다!”
105번째 투구.
김민의 선택은 한가운데 패스트볼이었다.
슉!
말론은 드디어 기다리던 공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다.
‘이것으로 동점이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높이 솟아올랐다.
“중견수가 뒤로 물러납니다!”
중견수 머레이는 자리를 잡은 뒤 안정적으로 공을 포구했다.
“킴! 중견수 플라이로 말론을 잡아냅니다!”
말론은 고개를 흔들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기다리던 공이 들어왔는데도 안타를 뽑아내지 못했어.’
힘이 너무 들어갔기 때문일까?
히팅 포인트가 맞지 않았다.
윌리엄은 말론의 스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킴이 아무 생각 없이 한가운데로 공을 밀어 넣었을 리가 없어. 이번 공은 아마 라이징 패스트볼이었을 거야.’
그의 예상대로 김민이 마지막으로 던진 공은 94마일(151km) 라이징 패스트볼이었다.
“에인절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타석에 이 타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너하임 에인절스의 마지막 타자는 4번 타자 트로이였다.
김민은 트로이를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필 여기서 트로이인가?’
에인절스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타자.
그가 바로 트로이였다.
트로이는 대기 타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킴, 네 승부욕은 존중한다. 하지만 이번 10회 마운드에 올라온 것은 네 실수다.’
그는 부상을 입은 상대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김민은 배터 박스에 선 그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골리앗과 싸운 다윗이 된 느낌이군.”
그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 발이 부러진 건 아니야. 더 던질 수 있어.’
트로이가 배트를 세우자 김민이 투구에 들어갔다.
슉!
초구는 바깥쪽 빠지는 패스트볼.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킴, 구속이 상당히 내려가 있습니다. 탬파베이, 불펜을 가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포포비치 감독은 순간 승리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지금의 킴은 우리가 알던 킴이 아니다. 이 상황이라면 이길 수 있다.’
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공이 3루 라인을 벗어났다.
“파울이 되긴 했지만 정말 날카로운 타구였습니다.”
트로이는 파울이 된 공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
‘킴의 패스트볼이 겨우 이 정도였나.’
그는 배트를 세우며 히팅 포인트를 재조정했다.
김민은 전광판을 확인하지 않은 채 3번째 공을 던졌다.
오늘의 108번째 공.
슉!
빠른 공이 바깥쪽에서 떨어졌다.
트로이는 이 공을 참아내며 카운트를 2-1로 만들었다.
“트로이, 공을 제대로 보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타석. 제 생각에는 트로이를 거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반 감독 역시 트로이를 거르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트로이를 거르고 그 시간에 투수를 교체하는 게…….”
그가 말을 다 끝내기 전에 김민이 네 번째 공을 던졌다.
슉!
높은 코스의 패스트볼 트로이의 배트가 공을 밀어냈다.
“파울!”
트로이는 방금 스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떠오르는 공이 아니었어.’
파울이 난 것은 그가 떠오르는 궤적에 맞춰 스윙을 조정했기 때문이었다.
“킴은 승부를 서두르고 있다.”
김민은 몹시 지쳐 보였다.
이마의 땀.
가쁜 호흡.
흔들리는 제구.
평소와 다른 눈빛.
탬파베이 선수들은 걱정 섞인 시선으로 김민을 바라보았다.
‘킴이 막아 줄 수 있을까?’
‘여기서 킴이 잘못되면 모든 게 끝이야.’
‘킴! 버텨야 해.’
유격수 브라이튼은 동료들과 다른 시선으로 김민을 바라보았다.
‘킴, 당신이 정말로 리그를 호령하는 에이스라면 이 정도는 이겨내 줘!’
김민은 109번째 공을 던지기에 앞서 시프트를 걸었다.
브라이튼은 김민이 승부구를 던지고자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디어 마지막이군.’
트로이가 배트를 세우자 김민이 투구에 들어갔다.
‘안쪽으로 빠르게.’
슉!
그의 손을 떠난 공이 미트를 향해 밀려들었다.
트로이는 그 공을 보고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배트에 맞은 공이 빠르게 튕겨 나갔다.
“잘 맞은 타구!”
그러나 캐스터의 말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유격수 브라이튼은 자신의 머리 위로 향하는 타구를 향해 글러브를 내밀었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높이 든 글러브.
공이 들어오는데 걸린 시간은 0.1초 남짓이었다.
팡!
“브라이튼! 높이 점프해 공을 잡아냅니다!”
“길었던 승부가 이렇게 끝나는군요! 탬파베이가 애너하임을 물리치고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합니다!”
트로이는 1루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호수비와 시프트…… 아니야. 이건 킴의 투지가 만들어 낸 승리다.’
그는 오랜만에 멋진 승부를 펼쳤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