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2002 시즌 올스타전 02
“카운트 1-1. 킴이 균형을 맞췄습니다.”
“이번 슬라이더는 절묘한 각도에서 날아 들어갔습니다. 마치 랜디의 그것을 보는 것 같군요. 전 이런 슬라이더가 있기 때문에 킴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올스타전 해설을 맡은 라이프는 내셔널 리그 경기를 주로 중계했기 때문에 김민이 슬라이더를 많이 던지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반면 지터는 김민이 슬라이더를 거의 던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속 슬라이더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고속 슬라이더라. 본즈…… 킴이 비밀 병기를 빼들 정도로 뛰어난 타자인가?’
그는 본즈가 양키스의 3번 타자 제레미나 오클랜드의 신성 호세와 비슷한 클래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민의 생각은 달랐다.
김민은 본즈가 그 두 사람보다 두 클래스는 더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좋았어. 첫 번째 카운트를 잡았어.’
그는 이번 승부의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쉽게는 안 되겠지만, 이길 수 없는 건 아니야.’
잠시 뒤, 세 번째 공이 그의 손끝을 떠났다.
슉!
이번 공은 위에서 크게 떨어지는 커브였다.
본즈는 이 공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할까? 칠까?’
친다면 무조건 안타 이상의 타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본즈는 배트를 멈추기로 했다.
‘존에서 벗어나는 공이다. 억지로 안타를 만들기보다는 하나 버리도록 하자.’
경기 초반.
단타로 1루에 나가는 것은 그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1루는 지겨워.’
팡!
포수 미트에 들어온 공은 본즈의 예상대로 볼이었다.
“카운트 2-1입니다. 본즈가 다시 앞서 나갑니다.”
“킴은 아마 본즈가 이 공을 컨택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입니다.”
김민은 배트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본즈의 선구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군. 커브를 정확하게 골라냈어. 뭐, 여기까지는 예상한 일이야.’
그는 카운트가 2-1로 나빠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 공에 집중하자.’
김민은 포사다와 사인을 교환한 뒤 4번째 공을 던졌다.
슉!
그의 손을 떠난 공이 섬광처럼 빠르게 미트로 날아갔다.
본즈는 높은 코스로 날아오는 패스트볼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이 패스트볼이군.’
그의 배트가 오랜만에 움직였다.
그러나 본즈의 배트는 공을 타격하지 못한 채 허공을 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본즈의 오늘 경기 첫 헛스윙.
포사다는 공을 받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킴, 오늘 경기 최고의 공이었어.’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96마일(154km)이었다.
본즈는 헛스윙한 뒤 왼쪽 입술 끝을 올렸다.
‘세 번째 공으로 느린 커브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이 공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였군.’
본즈의 감각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20마일(32km) 이상 차이가 나는 구속에는 타이밍이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카운트 2-2, 킴이 다시 본즈를 따라잡았습니다.”
“재미있는 승부가 이어지고 있군요. 킴이 다시 한번 슬라이더를 던지면 어떨까 싶습니다.”
김민의 고속 슬라이더는 충분히 위력적인 공이었다. 그럼에도 김민은 고속 슬라이더로는 본즈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공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해.’
본즈는 헛스윙 이후 배트를 내리고 장갑을 고쳐 꼈다.
‘후후후…… 게다가 위로 떠오르는 공이었어. 그런 공이면 공략할 맛이 나지.’
그는 김민의 공 끝이면 충분히 사이영상에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이영상을 받는다고 해서 날 넘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본즈는 사이영상 투수 위에 존재하는 최고의 포식자였다.
그는 약물이라는 전제를 뺀다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의 타자였다.
내셔널 리그 중견수 호세는 김민이 2-2로 버티는 것을 보곤 미간을 좁혔다.
“이번 승부…… 시프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시프트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시프트로 상대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본즈는 호세를 비롯한 다른 올스타들과 클래스가 달랐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본즈 녀석은 우리와 전혀 다른 등급의 타자야.”
그가 말을 내뱉은 순간 김민이 다섯 번째 공을 던졌다.
슈욱!
빠른 공이 바깥쪽을 향했다.
본즈는 그 공을 보고도 배트를 움직이지 않았다.
팡!
미트에 들어온 공은 스트라이크존에서 하나 정도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볼! 볼입니다. 본즈가 스플리터를 골랐습니다. 어떻게 이 공을 고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스플리터는 홈플레이트 앞에서 살짝 떨어졌기 때문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배트를 멈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마 본즈는 공이 중간지점을 통과하기 전에 볼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본즈라면 가능합니다.”
내셔널 리그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 윌리엄이 혀를 찼다.
“본즈 녀석은 공의 무브먼트가 아니라 구속을 읽은 거야.”
브라이튼은 윌리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구속을 읽었다고? 그게 가능해?”
윌리엄이 답했다.
“나도 종종 할 수 있는 일이야. 본즈라면 당연히 가능하겠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타자들의 경우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의 구속을 체크해 어떤 구종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본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구속을 바탕으로 구종을 예측할 수 있었다.
‘스플리터는 내게 통하지 않아. 킴, 아까 던졌던 그 공을 다시 한번 던져 보라고.’
본즈는 김민의 하이 패스트볼에 관심이 있었다.
“카운트 3-2, 풀카운트입니다!”
“다음 공으로 승부가 갈리겠군요.”
메이저리그 팬들의 시선이 모두 다음 공에 모였다.
“승부구로 어떤 공을 던질까?”
“스플리터는 던졌으니, 아마 하이 패스트볼이 아닐까?”
“내 생각도 그래 킴의 하이 패스트볼은 최고의 구종 중 하나야.”
김민은 공을 던지기 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번 승부가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뒤 가장 어려운 승부인 것 같군.’
그는 공을 꾹 잡은 뒤, 여섯 번째 공을 던졌다.
슉!
안쪽 빠른 공.
본즈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하이 패스트볼이 아니라 로케이션 승부인가? 아니야. 이건…….’
그는 두 손에 힘을 풀면서 배트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안쪽에서 떨어지는 스플리터다.’
본즈가 배트가 멈춘 바로 그 순간 공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했다.
팡!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포사다는 공을 받은 직후 오른손을 들었다.
“나이스 볼! 킴, 최고의 피칭이었어!”
본즈는 미트에 들어온 공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분명 스플리터였다. 그런데…… 공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김민의 공이 미트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도 스플리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민이 던진 공은 스플리터가 아니었다.
그가 던진 공은 스플리터와 똑같은 구속을 가진 패스트볼이었다.
윌리엄은 김민이 던진 마지막 공을 보곤 혀를 찼다.
“천하의 본즈도 저 공에는 속수무책이군.”
브라이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88마일(142km) 패스트볼이 그렇게 대단한 공이었나?”
윌리엄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저건 단순한 88마일이 아니라고.”
“단순한 88마일이 아니라니?”
“스플리터가 들어올 타이밍에 스플리터와 정확히 같은 구속으로 들어오는 공이라고.”
브라이튼은 윌리엄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김민의 패스트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달았다.
“스플리터를 노리고 있는 타자는 절대로 칠 수 없는 공이란 말이군.”
“맞아, 스플리터를 노리고 배트를 아래로 내린 순간 공의 그 위를 지나가게 되어 있지. 물론 저 공을 예상하고 받아친다면 좋은 타구가 나올 거야. 하지만 킴은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만 저 공을 던진다고.”
본즈는 더그아웃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포사다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플리터 사인이었나?”
포사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걸 말해 줄 수는 없어.”
“왜지?”
“영업비밀이니까.”
본즈는 포사다의 대답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패스트볼이었군.”
그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김민을 슬쩍 바라보았다.
‘스플리터와 같은 구속의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다니, 체인지 오브 페이스 그 이상이군.’
본즈는 김민의 클래스가 내셔널 리그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커트 실링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2, 3년 안에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라는 명예를 얻게 될 거야.
그는 그때 다시 한번 김민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킴, 본즈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네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았습니다.”
“두 명만 더 잡아낸다면 2이닝 퍼펙트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2이닝 퍼펙트.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세울 수 있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무대가 올스타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상대하는 타자는 전부 팀에서 클린업 또는 테이블 세터를 맡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퍼펙트를 가져간다는 것은 2이닝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 타자는 5번 타자 발리우스입니다.”
“발리우스 역시 대단한 타자입니다. 2002 시즌 전반기에만 24홈런과 77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시즌 40홈런과 120타점 페이스로군요.”
“그렇습니다.”
발리우스는 배드볼 히터로 유명했는데 그는 원바운드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들기도 했다.
김민은 발리우스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가져갔다.
슉!
빠른 공이 바깥쪽 코너를 노렸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그대로 3루 라인을 벗어났다.
“파울!”
배리 본즈를 먼저 상대했기 때문일까?
김민은 어깨가 가벼웠다.
‘좋아. 할 수 있어.’
그는 두 번째 공도 패스트볼을 선택했다.
슉!
높은 코스의 패스트볼이 타자의 배트를 이끌어냈다.
따악!
배트에 맞고 튀어 오른 공이 투수 왼쪽으로 향했다.
“유격수 지터가 글러브를 뻗습니다!”
타구는 그대로 지터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갔다.
‘괜찮아. 여유가 있어.’
지터는 타구를 잡은 뒤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그리곤 그 상태에서 1루에 송구했다.
“지터의 멋진 송구! 발리우스, 1루에서 아웃입니다!”
“A로드가 지명타자로 이동한 보람이 있군요. 지터, 최고 수준의 유격수 수비였습니다.”
발리우스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미간을 좁혔다.
‘무브먼트가 상당하군. 한 타석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공이 아니야.’
그가 때린 공은 바로 라이징 패스트볼이었다.
“킴, 2이닝 퍼펙트까지 한 타자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킴, 긴장해야 합니다. 내셔널 리그 타자들은 호락호락 기록을 내어주지 않을 겁니다.”
내셔널 리그의 여섯 번째 타자는 마이크 피아자였다.
호세는 피아자가 어떻게든 안타를 때려 주길 바라고 있었다.
‘여섯 명이 나란히 아웃되면 내 꼴이 우스워진다고.’
본즈는 진지한 표정의 호세를 보곤 입술 끝을 올렸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피아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까?”
“글쎄, 여기서 안타를 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지.”
슉!
김민의 초구가 바깥쪽에서 날카롭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피아자의 배트가 허공을 쳤다.
“스윙 스트라이크!”
본즈가 입술 끝을 올렸다.
“스플리터군.”
호세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저 공은 참았어야지.”
“바깥쪽 패스트볼을 노리고 들어갔다면, 참을 수 없는 공이었을 거야.”
본즈의 예상대로 피아자는 배터 박스에 들어갈 때부터 바깥쪽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었다.
‘큭, 패스트볼인 줄 알았는데 스플리터였군.’
배트를 세우자 두 번째 공이 날아왔다.
‘이번 공은 커브인가?’
그는 김민이 본즈에게 스트라이크존에서 빠지는 커브를 던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리할 필요 없겠지.’
피아자가 배트를 내린 순간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했다.
“스트라이크!”
피아자는 즉시 주심에게 항의했다.
“그게 어떻게 스트라이크입니까?”
그러나 주심은 단호했다.
“존에 들어왔어.”
“어떻게 말입니까?”
“떨어지면서 통과했다고.”
본즈가 목소리를 높이는 피아자를 보며 말했다.
“다음 공에 삼진이군.”
호세는 그의 말을 부정했다.
“피아자는 그리 쉬운 타자가 아니야.”
“쉬운 타자라고는 하지 않았어. 하지만 덫에 걸려든 이상 빠져나가기 힘들 거야.”
피아자는 주심과 언쟁을 벌이느라 다음 공에 대한 대처가 늦고 말았다.
본즈는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의 삼진을 예상한 것이었다.
‘다음 공은 높은 확률로 하이 패스트볼이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그 공을 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헛스윙이 나오는 공이라고.’
김민의 라이징 패스트볼은 머릿속 이미지만으로 칠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슉!
예상대로 높은 공에 피아지의 배트가 헛돌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삼구삼진.
호세는 삼진을 잡은 김민보다 삼진을 당한 피아자가 더 미웠다.
“우리 팀하고 할 때는 그렇게 잘하더니…….”
본즈가 호세에게 글러브를 내밀며 말했다.
“상대하는 투수의 클래스가 다른 거야. 자, 수비할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