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인터 리그 04
“여섯 타자 연속 삼진이라고?”
놀란 얼굴의 주인공은 바로 AK. 불루였다.
“우리 타선이 그렇게 당할 리가 있나?”
블루는 다니엘과 듀크 그리고 페코가 이끄는 말린스 타선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나란히 삼진을 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백업 내야수인 돌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페코는 심리전에 탈리슨은 구위에 무너졌어. 킴이란 녀석…… 예상보다 대단해.”
블루가 그라운드로 나가며 미간을 좁혔다.
“다음 공격 때 녀석이 던지는 걸 한 번 봐야겠어.”
그는 김민처럼 휴식을 취하는 동안 불펜에서 몸을 풀었다.
덕분에 김민의 투구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3회 초.
탬파베이 타선은 하위 타순이었다.
“7, 8, 9번에게 블루를 상대하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 같습니다.”
바이슨 수석 코치의 말대로 탬파베이의 하위 타순은 블루의 상대가 아니었다.
7번 타자 브라이튼이 삼구삼진으로 물러났다. 다음 타자는 포수인 록튼이었다.
“다음 타자가 킴이라는 걸 생각하면 록튼이 어떻게든 출루해야 해.”
인터 리그는 홈팀의 룰로 경기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늘 경기는 내셔널 리그 룰에 따라 투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스윙 스트라이크!”
록튼은 98마일(158km) 패스트볼을 헛스윙한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빠르군.”
98마일 패스트볼을 미트로 잡는 것과 공으로 맞추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배트가 미트처럼 넓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는 다시 배트를 세웠다.
‘삼구삼진만은 당하지 말자.’
슈우욱!
바깥쪽으로 날아온 빠른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났다.
“카운트 1-2, 록튼, 세 번째 공을 잘 골랐습니다.”
“탬파베이,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주자도 1루를 밟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공을 고른 록튼.
그는 심호흡을 한 뒤, 커브를 노렸다.
‘이쯤이면 하나 떨어질 때가 됐어.’
그러나 블루의 승부구는 커브가 아닌 패스트볼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록튼은 삼진을 당한 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 패스트볼은 도저히 타이밍이 맞지 않아.”
김민이 록튼에게 다가와 말했다.
“타이밍만 맞지 않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응?”
“무브먼트를 고려하지 않으면 저 공을 칠 수 없을 거야.”
록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타이밍 자체가 나오지 않아서 무브먼트까지는 정확히 볼 수 없었어.”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코스타 타격 코치가 다가왔다.
“킴, 그냥 배트를 들고 서 있게.”
“치면 안 되는 겁니까?”
“빚맞은 타구에 손가락을 다칠 수도 있어.”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냥 서서 삼진을 당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코스타 타격 코치의 말대로 타격에 능숙하지 않은 투수가 어설프게 98마일 패스트볼을 공략했다가는 손가락을 다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가운데로 온다면 하나쯤은 노려보고 싶은데…….’
김민이 배터 박스에 서자 블루가 미간을 좁혔다.
‘저 친구가 우리 타선을 6연속 삼진으로 묶었다고?’
그가 미간을 좁힌 것은 김민에게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체구, 아니…… 투수치고는 작은 체구에 어깨도 그리 넓지 않아. 저런 투수에게 우리 타선이 당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
블루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초구를 던졌다.
슈욱!
힘을 조금 뺀 패스트볼.
파앙!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기록된 구속은 95마일(153km)이었다.
김민은 블루가 던진 공이 눈 깜짝할 사이 미트에 들어온 것을 보곤 눈을 깜빡였다.
‘95마일이 이렇게 빨랐나?’
그는 블루가 다시 한번 95마일을 던진다고 해도 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록튼이 무브먼트를 챙기지 못한 것이 당연해.’
두 번째 공도 패스트볼이었다.
슈우욱! 파앙!
“스트라이크!”
블루는 거침없이 포수 미트에 패스트볼을 꽂아 넣고 있었다.
“블루, 킴을 상대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습니다.”
“킴은 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다음 이닝을 위해 힘을 보전하겠다는 뜻이겠죠.”
블루는 세 번째 공도 패스트볼로 선택했다.
‘완급 조절은 필요 없어.’
슉!
손끝을 떠난 공이 한가운데로 밀려들어 갔다.
이번 공은 앞에 던졌던 공들보다 구속이 떨어졌다.
‘93마일(150km) 정도인가?’
김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배트를 냈다.
‘날 허수아비로 생각하면 곤란해!’
탁!
배트에 맞은 공이 그대로 백네트에 꽂혔다.
“파울!”
이반 감독은 김민의 스윙을 보고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세 번째 공에 스윙을 했군. 그냥 서 있는 것이 좋을 텐데…….”
코스타 타격 코치도 지금 상황에서는 굳이 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배트 스피드가 구속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타이밍을 잡는다고 해도 안타를 쳐 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좋을 텐데, 킴이 왜 배트를 내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한가운데로 왔기 때문이겠지.”
이반 감독의 지적은 정확했다.
김민은 한가운데에 공을 그대로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 투수를 너무 우쭐하게 만들면 곤란해.’
그까지 삼진을 당하면 3회 초 공격에 나선 세 타자가 모두 삼진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3이닝 7K라니, 야구 게임도 아니고 말이야.’
김민은 블루의 삼진기록을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블루는 김민의 배팅에 혀를 찼다.
‘아메리칸 리그 풋내기가 그냥 물러나지는 않겠다는 말이군.’
그는 그립을 고쳐 잡았다.
‘그럼 이것도 칠 수 있는지 한번 보도록 하지.’
슉!
네 번째 공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커브였다.
김민은 그 커브를 보곤 무릎을 굽혔다.
‘차라리 이게 좋아.’
탁!
배트 끝에 맞은 공이 그대로 1루 라인을 벗어났다.
“파울!”
1루심이 양쪽 팔을 좌우로 펼치자 중계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킴! 커브를 커트하며 버팁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킴이 타석에 들어서는 것은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오늘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처음인데도 이 정도까지 버티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배트 스피드는 늦지만, 밸런스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민은 고교 시절 3번 타자로 활약한 바 있었다.
하지만 고교 투수들의 공과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의 공은 차원이 달랐다.
‘쳇, 타이밍을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히팅 포인트가 맞지 않았어.’
그는 배트를 잡은 채 이마를 찌푸렸다.
‘여기서 빠른 공이 오면 당해내지 못할 거야.’
블루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커브를 커트하다니, 제법이군.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
“카운트 0-2, 블루가 다섯 번째 투구에 들어갑니다.”
캐스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블루의 패스트볼이 날아왔다.
이번 공은 한가운데가 아닌 바깥쪽이었다.
‘패스트볼 코스가 달라. 설마 볼?’
잠시 망설였을 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김민은 배트를 낼 타이밍을 잃고 말았다.
파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결국 삼진.
김민은 배트를 내리면서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얼마나 나온 거야?’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97마일(156km)이었다.
‘97마일만 되도 나 같은 타자에게는 도저히 칠 수 없는 공이군.’
그가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코스타 타격 코치가 미간을 좁혔다.
“킴, 그 스윙은 위험했어.”
“죄송합니다. 한가운데 찬스 볼이라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97마일 공을 잘못 쳤다가 손가락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김민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덕분에 95마일 이상 패스트볼이 얼마나 빠른지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백네트 뒤에서 팔짱을 끼고 공을 보는 것과 배터 박스에서 배트를 들고 공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코치 시절 배터 박스에 들어섰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투수 코치만이 아니라 아메리칸 리그 투수들도 한 번쯤은 배트를 들고 배터 박스에 들어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3회 말.
블루는 불펜이 아닌 더그아웃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더그아웃에 들어서자마자 듀크를 찾아갔다.
“듀크, 어떤 공이야?”
듀크는 블루의 물음에 시선을 그라운드로 돌렸다.
“킴 말이지? 직접 배터 박스에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거야.”
“흠, 한마디로는 설명이 불가능한가?”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몬스터 볼이라 부르고 싶군.”
블루가 고개를 갸웃했다.
“몬스터 볼이라고?”
“터무니없는 공을 던지는 녀석이야.”
블루는 듀크의 대답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다.
‘터무니없는 공이라고? 알고도 칠 수 없는 공이란 건가? 하지만 녀석의 체구는 그런 공을 던지기에는 너무 작았어.’
말린스의 첫 타자는 7번 타자 라반이었다.
라반의 포지션은 포수.
그는 몇 년 동안 AK. 블루의 공을 받아왔기 때문에 빠른 공에 이력이 나 있었다.
하지만 김민의 공은 단순히 빠른 것이 아니었다.
파앙!
패스트볼이 바깥쪽 코너를 절묘하게 찔렀다.
“스트라이크!”
라반은 배트를 든 채 고개를 주심에게 돌렸다.
“빠진 거 아닙니까?”
“들어왔어. 그것도 코너로 말이야.”
“확실합니까?”
“확실해.”
김민의 뛰어난 제구력은 TV 중계 화면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느린 화면으로 재생된 김민의 패스트볼은 포수가 원한 곳으로 정확히 향했다.
“초구는 코너를 정확히 찌르는 공이었습니다.”
“구속이 93마일(150km)이라고 해도 저렇게 코너를 찌른다면 타자 입장에서는 95마일(153km) 이상으로 느껴집니다.”
김민은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각이 큰 커브로 헛스윙을 유도해냈다.
“스윙 스트라이크!”
블루는 라반의 헛스윙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체인지 오브 페이스…… 라반을 가지고 노는군.”
그는 김민의 커브가 타이밍만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떨어지는 각이 아주 좋아. 내가 저런 커브를 던질 수 있었다면 랜디 못지않은 투구가 가능했을 거야.’
데니스 감독은 라반이 2구만에 코너에 몰린 것을 보곤 혀를 찼다.
“라반까지 잡히면 일곱 타자 연속 삼진이라고.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타자들의 스윙이 너무 크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 장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반이 안쪽 패스트볼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킴! 삼구삼진입니다! 게다가 이번 삼진은 일곱 타자 연속 삼진입니다!”
“킴, 믿겨지지 않는 제구입니다. 타자의 허를 완벽하게 찔렀습니다.”
블루는 라반의 삼진을 보고 난 뒤, 김민의 삼진 능력을 인정했다.
‘킴, 대단하군. 강속구가 아닌 제구력과 무브먼트만으로 삼진을 잡아내고 있어. 게다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능력이 탁월해.’
말린스 주장 듀크는 7번 타자 라반의 삼진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8번 쿤 다음은 투수인 블루야. 두 명 모두 삼진으로 물러나면 아홉 타자 연속 삼진이라고.”
페코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도 메이저리그 신기록은 아니지?”
그의 물음에 다니엘이 끼어들었다.
“신기록은 아니라도 타이는 될걸?”
듀크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곤 목소리를 높였다.
“타이나 신기록이 문제가 아니야. 플로리다 라이벌에게 9연속 삼진을 당하게 되는 거라고. 다들 정신 차려! 이건 자존심 문제야!”
메이저리그 연속 타자 삼진 기록은 톰 시버의 10연속 타자 삼진.
김민이 이번 회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워도 그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9연속 타자 삼진기록만으로도 아메리칸 리그 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다음 타자는 8번 타자 쿤입니다.”
“쿤은 아마 배트를 짧게 잡을 겁니다.”
“연속 삼진 기록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쿤이 삼진을 당하게 되면 킴에게 아메리칸 리그 연속 타자 삼진 타이기록을 내주게 됩니다.”
김민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시기 아메리칸 리그 연속타자 삼진 기록은 8에 머물고 있었다.
“킴이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슉!
빠른 공이 바깥쪽이 아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쿤은 예상과 전혀 다른 코스에 미간을 좁혔다.
‘큭…… 이건 칠 수 없어.’
“스윙 스트라이크!”
주심의 제스처와 함께 카운트가 올라갔다.
“킴,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타이기록까지는 앞으로 2개의 카운트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김민의 목표는 삼진을 많이 잡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상대를 막아 내는 것이었다.
그는 연속 타자 삼진 타이기록이 눈앞에 있었지만,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로케이션으로 가자.’
2구는 바깥쪽 코너를 찌르는 패스트볼.
쿤은 이 공을 커트해냈다.
“파울!”
헛스윙은 아니었지만, 파울도 카운트가 올라가긴 마찬가지였다.
“킴,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습니다.”
“다음 공이 기대가 되는군요. 삼진을 노린다면 스플리터보다는 각이 큰 커브가 좋을 것 같습니다.”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쿤이 미간을 좁혔다.
‘킴은 하나 빼는 투수가 아니야. 다음 공으로 삼진을 잡으러 들어올 게 분명해.’
삼진을 노리는 공이라면 헛스윙을 유도하는 브레이킹볼이 가장 좋았다.
‘녀석의 커브는 상당한 수준이야. 이번에도 아마 커브를 선택할 거야.’
그는 오픈 스탠스로 자세를 바꾸면서 커브에 대비했다.
그러나 김민의 선택은 패스트볼이었다.
‘쿤은 투 스트라이크에 몰렸을 때 높은 코스로 들어오는 하이 패스트볼에 낮은 타율을 기록했어.’
그는 데이터에 따라 볼 배합을 가져갔을 뿐이었다.
슉!
높은 코스로 날아간 공은 타자의 배트를 스친 뒤, 그대로 미트에 꽂혔다.
파앙!
“삼구삼진! 킴! 아메리칸 리그 연속 타자 삼진 타이기록을 작성합니다!”
“시원시원한 투구입니다. 삼진에 연연하는 투구 아니라 더욱 좋은 것 같습니다.”
김민이 삼진을 잡은 직후 탬파베이 더그아웃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8타자 연속 삼진이야!”
“킴! 신기록이라고!”
김민은 동료들이 왜 흥분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잠시 뒤, 장내 아나운서가 김민의 신기록 달성을 알렸다.
“킴민 선수가 아메리칸 리그 연속 타자 삼진 타이기록을 작성했습니다.”
말린스 선수들과 홈팬에게는 그리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결국 당했군.”
“홈에서 기록을 내주고 말았어.”
“듀크는 뭐 하고 있는 거야? 탬파베이 투수는 겨우 2년 차에 불과하다고.”
주장인 듀크의 표정은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어두웠다.
“블루, 미안하지만…… 번트를 대 줘.”
블루는 대기 타석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곤 고개를 내저었다.
“난 투수라고, 내가 상대 투수의 기록을 저지하기 위해 번트를 대면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는 듀크의 번트 요구를 거절하고 타석으로 향했다.
“타임!”
록튼은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방송 직후 타임을 요청했다.
주심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킴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경기에 관한 것입니다.”
“알겠네. 가능하면 빨리 끝내게.”
록튼은 고개를 끄덕이곤 마운드로 올라갔다.
“킴, 기록 축하해.”
김민이 글러브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타임을 거는 건 아니잖아.”
“축하를 하기 위해 올라온 게 아니야. 다음 타자 때문에 그래.”
“다음 타자라면…….”
록튼이 미트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다음 타자는 블루야. 그는 기록을 깨기 위해 번트를 대거나 하진 않을 거야. 킴이 전력으로 투구한다면 충분히 삼진을 잡을 수 있을 거야.”
김민이 록튼의 말을 받았다.
“난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 볼 배합을 바꾸지 않아.”
“킴, 이건 좋은 기회라고.”
“삼진을 노리고 볼 배합을 바꾸면 오히려 역으로 당하게 될 거야.”
그는 글러브를 내리며 록튼에게 홈플레이트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록튼은 홈플레이트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킴은 기록에 욕심이 없는 건가? 상대 타자는 투수라고, 집중하면 충분히 삼진을 잡을 수 있는데…….’
그가 돌아오자 블루가 말했다.
“축하 인사를 전한 것 치고는 길었군. 삼진을 잡기 위한 비장의 볼 배합이라도 전수하고 온 건가?”
록튼이 자세를 잡으며 말을 받았다.
“킴은 중세 기사야.”
“킴이 기사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마운드에서 기사도를 지킨다고.”
그가 미트를 내밀자 김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슉!
초구는 빠른 공이었다.
‘정면승부인가?’
탁!
배트 끝에 맞은 공이 1루 더그아웃 쪽으로 향했다.
탕!
더그아웃 펜스에 맞은 공이 크게 튀어 올랐다.
“파울!”
블루는 파울을 친 뒤 배트를 내려놓았다.
‘제구가 좋아. 이번 공도 코너를 찌르는 공이었어.’
초구 구속은 93마일(150km).
김민이 흔히 빠른 공이라 부르는 공이었다.
블루는 김민을 상대한 경험이 적었기 때문에 구속이 줄어든 이유가 여유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투수를 상대할 때는 킴도 힘을 조금 빼는 모양이군.’
그는 같은 구속으로 하나 더 들어오면 충분히 쳐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민이 던진 두 번째 공은 더 빠른 공이었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블루는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크게 스윙했지만, 공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했다.
“킴!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연속 타자 삼진 신기록까지 카운트 하나가 남았을 뿐입니다.”
투 스트라이크.
김민도 기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진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은 원바운드 커브다. 하지만 상대가 치지 않는다면 공을 하나 버린 것에 지나지 않아.’
그는 순간적으로 삼진을 잡기 위한 볼 배합을 생각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삼진을 의식하다니, 나답지 않아.’
김민은 로진백을 만지면서 머릿속을 비웠다.
‘이렇게 기록을 의식하다가는 기록이 깨진 순간 큰 데미지를 입고 말 거야.’
그는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바깥쪽 패스트볼.
록튼은 김민의 사인을 받곤 바로 시프트 사인을 냈다.
‘이 공을 밀면 1루 라인 쪽으로 갈 거야.’
그의 사인에 따라 내야수들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블루는 내야수들의 움직임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공은 브레이킹볼이 아닌 건가? 그래, 이 움직임은 바로 그거야!’
그는 내야수들이 움직이는 이유가 슬라이더를 던지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커브가 아닌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으려는 모양이군.’
“킴!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캐스터의 외침과 함께 김민이 승부구를 던졌다.
슈욱!
빠른 공이 바깥쪽을 향했다.
블루는 바깥쪽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배트를 멈췄다.
‘이건 슬라이더다.’
그러나 김민의 패스트볼은 끝까지 꺾이지 않았다.
파앙!
코너에 꽉 차게 들어온 패스트볼.
주심이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외쳤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블루는 김민의 과감한 승부에 감탄할 뿐이었다.
‘슬라이더가 아니라 패스트볼 승부였어. 믿기지 않는군. 그 상황에서 정면 승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