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2002 시즌 프리뷰 02
“감독님.”
“시범 경기 아닌가? 상대도 이의를 제기하진 않을 거야.”
김민은 2번 타자를 3루 땅볼로 처리하곤 베이커와 마주 섰다.
그는 베이커가 지난 시즌 뉴욕 메츠에서 4번을 쳤던 것을 알고 있었다.
‘연습 경기, 게다가 명단에도 없던 교체라.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군.’
베이커는 배트를 바짝 잡곤 호흡을 조절했다.
‘수준이 높다는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그 동부지구에서 평균자책점 1위를 달성한 투수. 최고의 상태에서 맞붙고 싶지만, 리그가 다르니 어쩔 수 없군.’
정규 시즌이 아닌 시범 경기.
두 사람의 컨디션은 100%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베이커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부지구의 에이스, 어떤 공을 던지는지 똑똑히 봐두겠어.’
김민은 사인 교환을 끝낸 뒤 바깥쪽으로 초구를 던졌다.
슉!
빠른 공이 낮은 코너를 노렸다.
‘좋은 제구다.’
베이커는 공을 하나 지켜보기로 했다.
파앙!
“스트라이크!”
제구는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은 떠오르지 않았다.
‘라이징 패스트볼이 아니야.’
베이커는 고개를 돌려 전광판의 구속을 확인했다.
‘93마일(150km)? 그렇다면 최고 구속은 아니라는 말이군.’
김민은 배터 박스와 베이커의 손의 위치를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손의 위치를 보면 빠른 공을 짧게 끊어치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초구를 그냥 흘려보냈어. 설마 브레이킹볼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오늘 경기에서 단 하나의 브레이킹볼도 던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브레이킹볼을 노린다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노림수였다.
‘브레이킹볼은 아니야. 노리는 것이 있다면 아마 구종보다는 코스일 테지.’
김민은 베이커가 높은 코스를 노리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하이 패스트볼은 사양하겠어. 시범 경기라도 홈런을 맞으면 기분이 좋지 않단 말이지.’
그는 안쪽으로 두 번째 사인을 냈다.
스미스는 김민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으로 로케이션 승부, 킴다운 사인이야.’
슉!
빠른 공이 안쪽을 향해 날았다.
이번에는 베이커도 움직였다.
‘킴, 정확한 제구만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
배트가 공을 부술 듯 사납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배트는 공을 만나지 못한 채 허공을 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베이커는 마지막 순간 공이 떠오른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나왔군. 라이징 패스트볼.’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94마일(151km).
스미스가 미트에서 공을 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이스 볼!”
그는 김민의 이번 공에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마이너리그 때보다 무브먼트와 스피드가 훨씬 좋아졌어. 이런 공을 타석에서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메츠 더그아웃은 베이커가 두 번째 공에 헛스윙한 것을 보곤 미간을 좁혔다.
“베이커도 헛스윙이군.”
“아직 몸 상태가 100%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닙니다. 킴은 이미 100% 컨디션이 올라온 것 같습니다.”
타격 코치의 대답에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즌 개막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팀의 에이스가 컨디션을 100%까지 끌어 올렸단 말인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민의 페이스는 오버 페이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실 이반 감독은 첫 타자와 승부할 때부터 김민의 오버 페이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킴의 구속이 너무 많이 나오는데…….”
“오늘 컨디션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아직 개막이 한 달이나 남았어. 이대로라면 남들보다 시즌을 한 달 일찍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고.”
김민은 랜디 존슨이나 로켓맨처럼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투수가 아니었다.
이반 감독은 김민을 섬세하게 관리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투구 이닝을 예상보다 짧게 가져가는 것이 좋겠어.”
“3이닝이 아니라 2이닝으로 말입니까?”
이반 감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은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바로 승부에 들어갔다.
슉!
바깥쪽 빠른 공.
베이커는 몸을 살짝 낮추면서 어퍼 스윙으로 응수했다.
‘흔히 떠오르는 공을 때리기 위해 레벨 스윙을 하는데.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떠오르는 공이라고 해도 진짜로 떠오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그는 자신의 공략법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휙!
파공성과 함께 배트가 허공을 쳤다.
이는 베이커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그가 혀를 찬 순간 주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김민이 베이커에게 던진 승부구는 라이징 패스트볼이 아니라 스플리터였다.
‘베이커, 그 큰 스윙은 대체 뭐야. 홈런이라도 노린 건가?’
그는 승부구로 패스트볼을 던졌다면 펜스를 그대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이커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미간을 좁혔다.
‘라이징 패스트볼을 미끼로 쓸 만큼 다양한 승부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리그에서 저 친구와 붙어 볼 수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군.’
그는 아메리칸 리그로 이적한다고 해도 나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르스와 렉터는 김민의 빼어난 피칭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지난 시즌보다 킴은 더 무서워졌군.”
“부르스,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 시즌 홈 개막전은 킴에게 양보해야할 것 같아.”
부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런 공을 던지는데 어떻게 양보하지 않을 수 있겠어.”
두 사람은 선발 삼총사의 시대가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1회 말.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새로운 얼굴들이 힘을 냈다.
따악!
“멀리 가는 타구! 타구는 그대로 담장을 넘어갑니다!”
선두 타자 케니히의 선제 솔로 홈런.
이반 감독은 케니히의 홈런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 친구, 밸런스가 괜찮군.”
“케니히는 카를로스보다 손목 힘이 좋습니다. 어설픈 패스트볼은 바로 담장을 넘겨 버리죠.”
지난해까지 탬파베이의 테이블 세터로 활약했던 카를로스는 시카고 컵스에서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케니히는 그를 대체하기 위한 선수였다.
딱!
2번 타자 마리오의 타구도 좋았다.
“타자들의 컨디션이 전반적으로 좋아 보이는군. 코스타가 많이 신경을 쓴 것 같아.”
“다음 타자도 눈여겨 봐주십시오.”
“다음 타자라면…….”
“브라이튼입니다.”
탬파베이의 3번 타자는 지난 시즌 백업 유격수를 봤던 브라이튼이었다.
‘언제까지 벤치에 있을 수는 없다고.’
그는 야망이 큰 선수였다.
‘이번 시즌 반드시 기회를 잡는다.’
수비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지난 시즌 하반기 이미 증명을 해 보였다.
남은 것은 타격능력이었다.
타격으로 유칼리스를 앞설 수 있다면 주전 자리를 꿰차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딱!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1, 2루 사이를 갈랐다.
“브라이튼의 적시타입니다!”
브라이튼은 순식간에 1루 베이스를 지나 2루를 노렸다.
“브라이튼 깊은 타구에 2루를 노립니다.”
“외야에서 2루로 공이 중계되는군요. 이거 타이밍이 애매합니다.”
우익수가 던진 공이 유격수 글러브에 들어온 순간 브라이튼의 손이 베이스를 터치했다.
“세이프!”
발로 만들어 낸 2루타.
이반 감독은 다소 위험한 플레이였다고 평가했다.
“파이팅을 보여 주는 것은 좋지만, 2루에서 죽었다면 찬스가 끊기고 말았을 거야.”
반면 바이슨 수석 코치는 그의 파이팅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젊은 선수에게는 저런 파이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노련한 플레이는 그렉스 같은 노장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은 팀이 순식간에 2점을 뽑는 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알고 있는 탬파베이가 맞는 건가?”
록튼의 미트를 손질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킴, 안심하라고, 시범 경기일 뿐이니까.”
그는 오늘 출전 명단에서 이름이 빠져 있었다.
탬파베이는 1회 말 안타 5개와 볼넷 하나를 묶어 4점을 뽑아냈다.
김민이 글러브를 들며 말했다.
“1회에 4점이나 뽑아 주다니, 이게 진짜 개막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킴, 좋게 생각하라고. 시범 경기라고 해도 승리는 기분 좋은 일이니까.”
김민은 록튼이 아닌 스미스와 함께 그라운드로 향했다.
“킴, 다시 한번 마운드에 오릅니다.”
“첫 번째 상대할 타자는 트리플A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준…….”
2회 초.
김민은 마이너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첫 타자는 룩킹 삼진.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두 번째 타자는 헛스윙 삼구삼진.
세 번째 타자는 떨어지는 커브에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킴! 세 타자 연속 삼진입니다.”
“지난 1회 베이커의 삼진까지 더하면 네 타자 연속 삼진입니다.”
바이슨 수석 코치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킴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군요.”
이반 감독은 에이스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밝지 못했다.
“너무 좋다는 것이 걱정이야.”
“감독님, 킴을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에이스가 개막 한 달 전에 최고 구속을 찍었는데 걱정이 안 된단 말인가?”
바이슨 수속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반 감독이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바이슨! 자네…….”
바이슨 수석 코치가 차가운 목소리로 이반 감독의 말을 끊었다.
“감독님, 킴은 지난 시즌에도 3월에 최고 구속을 찍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지난 시즌이라고?”
“지난 시즌 킴은 25인 로스터에 들기 위해 시범 경기는 물론 2월에 펼쳐진 연습 경기부터 전력으로 투구했습니다. 그걸 감안한다면 지금 페이스, 빠르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이반 감독은 바이슨 수석 코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김민의 빠른 페이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킴의 빠른 페이스는 아직 마이너리그 물이 다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인가?’
그는 그렇다고 해도 페이스를 조금 다운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반 감독이 김민을 불러 말했다.
“킴, 시범 경기에서 100%로 던지는 것은 자제해 주게.”
김민이 그 말을 받았다.
“100%가 아닙니다.”
“뭐?”
“80% 정도의 느낌으로 던진 것뿐입니다.”
이반 감독은 김민의 대답에 멈칫했다.
‘80%라면…… 힘을 빼고 던진 덕분에 구속이 더 잘 나왔다는 말인가?’
그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보다 힘을 빼고 던지는 편이 더 밸런스가 좋은 경우가 있지. 시범 경기에서 94마일(151km)이 나온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군.’
이반 감독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흐흠,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어 주겠네. 하지만 시범 경기는 어디까지나 시범 경기일 뿐이야. 팀의 에이스로서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김민은 2이닝만을 던지고 아이싱을 시작했다.
“킴, 겨우 2이닝인데도 아이싱을 하는 건가?”
록튼의 물음에 김민이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저리니 해도 90마일(145km) 이상을 던졌으니까.”
그는 셋업이나 클로저 같은 불펜 투수도 투구수에 상관없이 아이싱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까 감독님하고 이야기하던데 무슨 말을 주고받은 거야?”
“감독님께서는 내가 오버 페이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흠, 그럴 만도 하지 3월 초 시범 경기에서 94마일(151km)까지 나왔으니까.”
따악!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스미스가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다.
“저 친구도 제법인데?”
“스미스?”
“킴과 마이너리그에서 배터리를 이뤘다면서?”
“맞아.”
“그렇다면 나하고는 라이벌이군.”
록튼은 스미스가 자신보다 더 나은 공격력을 보여 준다면 주전 자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티노가 나갔다고 해서 내 주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야. 메이저리그 선발 로스터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하면 다시 벤치로 물러날 수밖에 없어.’
김민이 록튼을 보며 말했다.
“록튼,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넌 지난겨울 누구보다 노력했으니까.”
김민이 도입한 최신형 피칭 머신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선수가 바로 록튼이었다.
그는 지난겨울 내내 최신형 피칭 머신 앞에서 5만 개가 넘는 공을 때려냈다.
그렉스의 말을 빌리면 시즌이 시작되기 전 쓰러져버릴 정도로 혹독한 훈련이었다.
“스미스도 같은 정도로 노력했을지도 몰라.”
록튼은 방심은 금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록튼은 설리반과 짝을 이뤄 경기에 출전했다. 그리고 4타수 3안타로 맹타를 휘둘렀다.
경기 결과는 탬파베이의 114 승리.
“시범 경기라고 해도 탬파베이의 페이스가 대단하군요.”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온 젊은 선수들이 패기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패기가 언제까지 갈지는 미지수입니다.”
메이저리그 페널들은 시범경기는 시범경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보스턴과 양키스 전력분석팀은 새로운 선수들에 대한 정보 수집으로 여념이 없었다.
“탬파베이는 이제 얕볼 수 있는 팀이 아니야.”
“게일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투는 뭔가?”
양키스 전력분석팀 소속 호이스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중하게 말하는 쪽이 더 나은 것 같아서 말이야.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바꾸도록 하지.”
게일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승진해 수석 팀장을 맡게 되었다.
“호이스트, 각자 일이나 하자고.”
호이스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게일, 내기 하나 할까?”
게일이 시선을 그라운드에서 떼지 않고 말을 받았다.
“무슨 내기?”
“탬파베이가 80승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말이야.”
메이저리그는 1년에 162경기를 소화했다.
시즌 80승이라면 5할 승률을 뜻했다.
“지금 전력이라면 가능할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면 곤란해. 나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거든.”
두 사람은 탬파베이의 전력이 지난 시즌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했다.
“부르스가 복귀해서 10승만 해줄 수 있다면 투수진은 문제가 없을 거야.”
“타선도 지난 시즌보다는 괜찮아 보여. 케니히와 아울의 영입은 베스트야.”
탬파베이의 전력이 좋아졌다는 것은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구 우승은 우리 팀이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 시즌이야말로 우리 팀이 지구 우승을 손에 넣을 거라고.”
게일은 호이스트에게 노라와 페드로가 돌아온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이들이 호이스트와 게일처럼 탬파베이의 업그레이드된 전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탬파베이가 지구 우승이나 플레이오프 티켓을 차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002년 4월 2일.
메이저리그가 기나긴 잠을 깨고 개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