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92화 (92/296)

92화 구단주와 만나다 02

“어쩌자고 킴의 요청을 다 들어주신 겁니까?”

홀먼 단장은 빈스의 결정에 불만이 많았다.

“킴은 우리 팀 최고의 선수가 아닌가?”

“선수와 프런트는 하는 일이 다릅니다.”

메이저리그는 단장 야구라 할 만큼 단장의 권한이 막강했다.

그러나 빈스는 홀먼 단장보다는 김민의 손을 들어 주었다.

홀먼이 아닌 다른 이가 단장이었다면 당장 사표를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고 좋은 계약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닐 거야.”

“결국 돈입니까?”

홀먼의 물음에 빈스가 얼굴을 굳혔다.

“결국 돈이 아니라. 돈이 되기 때문에 프로라고 하는 걸세.”

빈스는 나름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킴, 자네의 입맛에 맞는 팀을 꾸려주지. 그렇게 몇 년 지나면 자네는 이 팀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게 될 거야.’

우승을 위해 또는 왕조를 위해 달리는 슈퍼스타들은 페이컷이라 부르는 디스카운트를 감수하곤 했다.

빈스가 김민에게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 페이컷이었다.

사실 이 페이컷은 선수에게도 큰 손해가 아니었다.

리그를 쥐고 흔드는 슈퍼스타는 연봉보다 더 큰 스폰서 수입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스폰서 수입을 좌우하는 것은 개인성적보다는 NBA 파이널, 슈퍼볼, 스탠리컵, 월드시리즈 우승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쉽게 말해 빈스는 김민을 위한 팀을 만들어주면서 페이컷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 겨울 FA 영입 비용 하한선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팀을 구성하는 것은 단장의 몫이었지만, 예산을 정하는 것은 구단주의 권한이었다.

“1천만 달러(124억 원)로 하세.”

팀 총연봉이 3천만 달러(372억 원)에 불과한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게 1천만 달러는 파격적인 투자금액이었다.

그러나 1천만 달러의 투자금액으로는 올스타급 선수 영입이 불가능했다.

“선수 한 명에 1천만 달러입니까?”

“선수 숫자와 계약 기간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그 정도 권한은 있어야 단장이지.”

홀먼 단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 1천만 달러로 3, 4년 장기 계약을 한다면 준척급 선수를 데려오는 것조차 힘들 거야.’

그는 빈스가 여전히 짜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금액으로는 킴이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만족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킴은 팀을 플레이오프로 보낼 수 있는 슈퍼스타를 원하고 있을 겁니다.”

빈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킴은 내가 시카고 불스 같은 팀을 만들겠다고 했어.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나?”

“역사에 남을 만한 팀을 만들겠다는 뜻 아닙니까?”

“아니, 큰돈을 쓰지 않고 왕조를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야.”

빈스는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김민의 말을 해석하고 있었다.

홀먼 단장은 속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미스터 빈스, 킴을 제외하고라도, 1천만 달러는 실망스러운 금액입니다.”

“총연봉 3천만 달러 팀에 1천만 달러가 더해지는데 실망스럽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팀 총연봉이 4천만 달러로 올라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빈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얼마를 원하는 건가?”

“팀 페이롤을 4천만 달러(496억 원), FA영입 금액은 2천만 달러(248억 원)까지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팀 페이롤을 4천만 달러까지 올릴 경우 올스타급 1명 또는 준척급 선수 2, 3명을 영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빈스가 그것을 허락해 줄 리 없었다.

“3천5백만 달러(434억 원)로 하지. FA 영입 금액은 1천5백만 달러(186억 원)로 하고.”

준척급 선수 1명 또는 유틸리티 플레이어 2명.

홀먼은 여기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3천5백만 달러로 예산을 짜 보겠습니다.”

빈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홀먼 단장은 지난해보다 많은 예산을 타 낼 수 있었다.

* * *

11월 3일.

월드시리즈가 끝난 직후.

김민은 플로리다에 돌아왔다.

“킴, 휴가는 잘 보내셨습니까?”

구단 스탭의 물음에 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부모님 얼굴만 보고 바로 왔습니다.”

일주일 전 김민은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하자 김민이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따라붙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평균자책점 1위 타이틀을 따낸 슈퍼스타.

기자들이 따라붙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김민은 기자들이 따라붙을 때마다 짧은 인터뷰로 타협을 보았다.

몇몇 기자들은 그의 짧은 인터뷰에 불만을 가졌지만, 인터뷰를 아예 응하지 않는 선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태도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김민은 언론과 거리를 두면서도 그들에게 원한을 사지 않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숙소로 가시는 겁니까?”

“일단은 그럴 예정입니다.”

10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

아무리 김민이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김민은 트로피카나 필드로 향했다.

구단 스탭 한 명이 정문에서 그를 보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킴, 벌써 출근하는 겁니까?”

“휴식은 하루로 충분합니다.”

탬파베이에서 김민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선수였다.

구장 안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스탭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킴, 불펜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홀랜드, 고마워.”

김민은 큰 걸음으로 클럽 하우스를 향했다.

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찍 왔네.”

“볼튼, 휴가는 다녀온 거야?”

“나도 어제 도착했어.”

“그래?”

볼튼이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훈련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김민 덕분이었다.

김민은 볼튼을 비롯한 4:0인 로스터 선수들이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프런트에 요청했다.

운영팀장 코너는 이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선수들을 서포트하는 것이 운영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라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설리반은 이미 불펜에 있어.”

“불펜? 러닝이 아니라?”

“며칠 전 설치된 초고속카메라가 마음에 들었나 봐.”

설리반은 일주일의 휴가도 반납하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선발 로테이션 진입이었다.

“카메라가 벌써 도착했어?”

“설리반의 말에 따르면 대단하다고 해.”

김민은 유니폼을 갈아입자마자 볼튼과 함께 불펜으로 향했다.

팡! 팡!

미트에 꽂힌 공이 좋은 소리를 냈다.

“나이스 피칭!”

설리반의 공을 받아 주고 있는 것은 록튼이었다.

“록튼도 휴가를 반납한 건가?”

볼튼이 록튼을 대신해 대답했다.

“록튼은 사흘 정도 다녀왔어.”

“흠, 다들 열심이네.”

김민은 자신이 너무 길게 휴가를 다녀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민은 다른 선수들보다 길게 휴가를 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고가는 데만 이틀을 써야 했기 때문에 볼튼보다 휴가를 짧게 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펜 한쪽에는 클락이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클락도 있군.”

“이번 훈련에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어.”

오프 시즌 휴가를 즐기지 않고 마무리 훈련에 참가한 선수는 다음과 같았다.

김민, 클락, 록튼, 볼튼, 설리반, 그렉스.

김민을 제외한 다섯 명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민과 친분이 있었다.

“여! 꼬맹이들 다들 잘 있었나?”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팀의 최고참 그렉스였다.

김민은 그렉스를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렉스는 아이들과 쉬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마누라가 다 데리고 여행을 가버렸어.”

“그렉스만 두고 말입니까?”

“여자들만 참가하는 여행이라고 하더군.”

그렉스는 아들 없이 딸만 둘을 두고 있었다.

클락이 그렉스의 말을 받았다.

“집에서 혼자 있기 싫어서 나왔다는 말이군요.”

“뭐,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

파앙!

20개의 불펜 피칭을 마무리한 설리반이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제 영상을 확인하도록 하죠.”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다 함께 보도록 하자.”

불펜 뒤에는 초고속카메라와 스피드건이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에릭, 재생해 보죠.”

“알겠습니다.”

전력분석팀 소속 에릭이 초고속카메라가 담은 영상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초고속카메라는 설리반의 피칭 과정을 아주 느린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깨가 살짝 먼저 열리는데?”

“이건 공에 더 큰 힘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 같군.”

김민과 선수들이 주목한 것은 투구 동작보다 공의 궤적이었다.

“흐흠, 나쁘지 않은데?”

“공이 뻗는 느낌이 바로 이런 무브먼트를 말하는 거였나?”

“이번 공 몇 마일이었지?”

“96마일(154km)이야.”

설리반의 패스트볼은 김민의 패스트볼만큼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패스트볼에 비해 낙차가 작았다.

그렉스는 작은 낙차는 큰 이점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낙차가 작은 공은 타자 입장에서 마치 뻗는 것처럼 보인다고.”

“킴은요? 아예 뜨던데요?”

록튼의 물음에 그렉스가 말했다.

“킴의 경우는 아마 더 낙차가 작을 거야.”

록튼이 고개를 김민에게 돌리며 말했다.

“킴의 패스트볼도 보고 싶은데 안 될까?”

록튼의 요구에 김민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10분은 기다려야 할 거야.”

클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킴, 전력투구라면 5분 더 몸을 풀고 던지도록 해.”

“오케이.”

15분 뒤.

김민이 마운드에 올라가 투구를 시작했다.

팡! 팡!

초반 5개는 90마일(145km)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6구부터 90마일이 넘는 공이 찍히기 시작했다.

파앙!

“91마일(146km)!”

파앙!

“93마일(150km)!”

김민은 11구째 최고 구속을 기록했다.

파앙!

“94마일(151km)!”

김민은 94마일을 던진 이후 글러브를 벗었다. 그러자 볼튼이 물었다.

“킴, 지난 최종전에는 95마일(153km)까지 던졌잖아. 왜 94마일에서 멈춘 거야?”

김민은 그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95마일은 정상적인 구속이 아니라 오버 페이스라고. 불펜 피칭에서 오버 페이스하면 어깨가 남아나지 않을 거야.”

록튼 역시 무리해서 최고 구속을 찍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공이 떠오르는 걸 확인했으니까. 더 던질 필요는 없을 거야.”

김민의 투구가 끝난 뒤 에릭이 모두에게 그의 투구를 보여 주었다.

“킴의 손끝을 떠난 공을 보라고. 다른 패스트볼과 궤적이 달라.”

“내가 보기에는 회전수가 훨씬 많은 것 같은데?”

느린 화면 맹렬하게 돌고 있는 공의 회전이 표시되었다.

“킴의 패스트볼이 구속에 비해 떨어지는 각도가 작은 것은 이 회전 때문일 거야.”

그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클락의 말을 받았다.

“회전이 많이 걸린 공은 공기를 뚫고 앞으로 나가는 힘이 더 크단 말이지. 킴의 공이 떨어지는 각도가 작은 것은 당연한 일이야.”

클락이 고개를 김민에게 돌리며 물었다.

“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공에 이렇게 많은 회전이 걸린 거야?”

“공을 챌 때 회전을 강하게 거는 것 아니야?”

“그럼 손목 힘이 강한 건가?”

김민은 자신의 패스트볼이 고회전을 가지게 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여러 선수들의 물음에 김민이 대답했다.

“그건 아마 지난겨울 내가 했던 훈련 때문일 거야.”

“지난겨울 훈련이라고?”

김민이 고개를 볼튼에게 돌렸다.

“볼튼, 지난겨울 훈련 기억해?”

“물론 기억하지. 그때 킴이 내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잖아.”

김민이 짧게 물었다.

“밴드 핑거는?”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스플리터를 던질 수 있게 된 것도 그 훈련 덕분이잖아.”

클락과 그렉스는 밴드 핑거를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밴드 핑거? 그게 뭐야?”

“그런 훈련도 있었나?”

김민이 두 사람의 물음에 대답했다.

“쉽게 설명하면 악력 강화훈련이야.”

“악력 강화훈련?”

“밴드로 손가락의 힘을 키우는 것이지. 내 패스트볼이 많은 회전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거야.”

김민이 악력을 키운 것은 패스트볼 때문이 아니었다.

‘커터의 위력을 키우려 한 훈련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어.’

볼튼이 고개를 갸웃하며 김민에게 물었다.

“나도 같은 훈련을 했는데 내 패스트볼은 왜 떠오르지 않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김민이 아닌 록튼이 했다.

“그건 아마 볼튼의 악력이 아직 킴에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거야. 볼튼이 킴과 같은 악력을 가지게 된다면 볼튼의 패스트볼도 킴의 그것처럼 떠오르게 되겠지.”

훈련에 참가한 투수들은 악력 강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력 강화 훈련도 중요한데?”

“하지만 무리하다가는 손가락에 부상을 입게 될 거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면 괜찮겠지?”

“물론.”

김민이 선수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자, 영상을 보는 건 여기까지 하고, 그라운드로 나가자.”

“그라운드?”

“체력 훈련은 불펜에서 하는 게 아니까.”

김민의 말에 클락이 물었다.

“킴, 체력훈련이라니, 따로 훈련 매뉴얼은 있는 거야?”

“물론이지.”

코치 경력 10년의 김민이었다. 그에게 훈련 매뉴얼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킴, 선수 노조에서 연락이 왔어.”

김민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엘린이었다.

“음, 선수 노조에서 무슨 일이지? 에이전트들에게 경고라도 할 만한 일이 있는 건가?”

“에이전트 쪽은 아니고 신인 선수들에게 새로운 프로그램이 도입되었다고 하는군.”

“새로운 프로그램?”

김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범죄 예방 프로그램 같은 건가?”

메이저리그 선수 노조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범죄 예방 프로그램은 그중 하나였다.

“범죄와 관련된 건 아니고, 메이저리그에 처음 콜업된 선수들을 위해 투자 설명회를 연다고 해.”

“투자 설명회? 그런 것도 하는 건가?”

김민은 선수 노조의 투자 설명회에 부정적이었다.

‘자산을 굴리는 건 선수 노조보다는 월가의 투자 전문가들이 훨씬 나을 거야.’

그러나 엘린의 다음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바꾸었다.

“11월 27일에 그 투자 설명회가 열리는데 장소가 캘리포니아라고 해.”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라고 하던가? 아마 그쪽 기업들에 관한 투자 설명회일 거야.”

김민은 실리콘밸리의 투자 설명회라면 참가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11월 27일?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이메일로 보내줄게. 참석할 생각이 있어?”

“물론.”

엘린은 김민이 훈련마저 중단하고 설명회에 참석하려 하자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킴, 실리콘밸리에는 사기꾼이 많아. IT버블을 조심하라고.”

2000년대 초반.

크게 부풀어 오른 IT버블은 터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조심할 거야. 하지만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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