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구단주와 만나다 01
“최고의 피칭이었네.”
홀먼 단장이 직접 김민에게 트로피를 수여했다.
트로피에 적힌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 2001년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MVP
2001년 팀에서 최고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
김민은 트로피를 받은 다음 활짝 웃었다.
다음 순간 십여 대의 카메라가 그를 향해 플래시를 터트렸다.
파파팍! 파파파팍!
카메라를 든 기자들은 대부분 플로리다 지역 언론이었다.
“수상 소감 발표가 있겠습니다.”
김민은 동료들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다소 건조한 내용의 수상 소감을 남겼다.
짧은 수상식이 끝난 뒤, 홀먼 단장이 김민에게 말했다.
“킴, 자네는 나와 함께 가세.”
김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수상식 말고, 행사가 더 남은 겁니까?”
“팀 MVP 수상자는 구단주에게 한 가지 건의를 할 수가 있네.”
“빈스 구단주가 펜웨이 파크에 와 있는 건가요?”
“스카이 박스에 계신다네. 원래 자네에게 직접 상을 수여할 예정이었지만, 급한 전화가 와서 내가 대신하게 되었네.”
홀먼이 앞장 서 걸으며 말했다.
“지난해 수상자였던 그렉스는 빈스에게 이렇게 말했지. ‘데블 레이스 선수들에게 고급 슈트를 선물해 주십시오.’ 빈스는 흔쾌히 그 청을 받아들였지.”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원정 이동시 슈트를 입는 것이 보통이었다. 때문에 선수들에게 슈트는 유니폼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빈스가 지난해 선수들의 슈트를 구매하기 위해 쓴 돈은 대략 10만 달러(1억 2천만 원)였다.
“클럽 하우스에서 사용할 물품에 관해 건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고급 소파라던가? 아이스크림 기계, 커피 머신 같은 것들도 괜찮지.”
홀먼은 스카이 박스로 가며 김민에게 여러 가지 예를 제시했다.
하지만 김민은 그의 예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도착했네. 구단주와 만남은 처음이니 긴장이 될 걸세.”
그의 말대로 메이저리그 구단주와 만남은 처음이었다.
‘구두쇠 구단주라. 어디까지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김민은 홀먼과 함께 스카이 박스 안으로 들어섰다.
“킴, 환영하네!”
빈스가 밝은 표정과 함께 그를 맞이했다.
스카이 박스 안에는 고급 와인과 약간의 안주가 놓여 있었다.
“데블 레이스의 영웅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 영광일세.”
“과찬이십니다.”
김민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여기 앉게.”
빈스 옆에는 금발 미녀 두 명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빈스와 홀먼의 비서로 웨이트리스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은 자네 때문에 볼 만했어.”
“감사합니다.”
김민의 말은 대부분 단답형이었다.
빈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킴,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많이 접한 모양이군. 뭐, 인정하지. 나는 직원들이 돈을 허투루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서 잔소리가 조금 많은 편이야. 하지만 선수들에게 인색하진 않아. 지난해만 해도 그렉스의 부탁을 그 자리에서 들어주었다네.”
탁!
짧은 소리와 함께 펜웨이 파크 조명이 꺼졌다.
이는 그라운드 정리가 모두 마무리되었다는 뜻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만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군. 그래, 킴 2001 시즌 MVP로서 내게 건의할 것이 있나?”
김민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초고속카메라와 선수들의 훈련을 여러 방향에서 촬영할 수 있는 촬영 세트 5대가 필요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홀먼 단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훈련을 위한 촬영 세트와 초고속카메라라니, 이건 코칭 스탭들이 건의할 만한 내용인데…….’
빈스의 생각도 같았다.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루키가 초고속카메라와 촬영 세트를 사 달라고 하다니…….’
그는 김민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묻기로 했다.
“필요한 물건이 초고속카메라라니, 이유가 뭔가?”
김민이 대답했다.
“시카고 불스 같은 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빈스의 눈이 동전처럼 커졌다.
“시카고 불스? 시카고 불스는 NBA팀이 아닌가?”
김민은 차분하면서도 힘이 있는 어조로 말했다.
“시카고 불스는 NBA 최고 인기 구단 중 한 팀입니다. 그러나 20년 전만 해도 시카고 불스는 하위권을 전전하던 팀이었죠. 빅 마켓임에도 말입니다.”
“흐흠, 자네는 마이클 조던이 되고 싶은 건가?”
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우승을 많이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왕조를 만들어 팀을 최고로 만들고 싶습니다. 초고속 카메라와 훈련 세트는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빈스는 김민과 말을 섞기 전까지는 그를 아시아에서 온 야구 모범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민은 야구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가슴에 큰 꿈을 품은 히어로였다.
빈스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우리 팀이 시카고 불스처럼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 하지만 우리 팀이 과연 시카고처럼 될 수 있을까?’
야구는 농구와 달리 선수 한 명이 팀에 끼치는 영향이 크지 않았다.
이는 세이버 관점에서 봐도 마찬가지였다.
MVP 레벨의 선수라고 해도 시즌 7, 8승 정도를 더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민이 생각에 잠긴 빈스에게 말했다.
“제 말을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그의 말에 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하지 않을 수 없지. 자네는 분명 뛰어난 선수일세. 하지만 마이클 조던처럼 팀을 바꿀 수는 없어.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혼자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모두가 강해질 때,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최고의 구단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홀먼은 빈스보다는 현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김민이 여러 선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킴이 동료들에게 조언해 주는 것은 동료애나 친근감 때문이 아니었군. 그는 탬파베이를 강팀으로 만들기 위해서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었던 거야.’
그는 김민이 무섭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 자리까지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빈스는 김민의 호방함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자네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 주지. 다른 건의 사항이 또 있나?”
하나가 아닌 둘.
빈스는 팀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몇 개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타자들을 위해 최신의 피칭 머신이 필요합니다.”
“피칭 머신은 이미 충분하지 않나?”
“아뇨. 저희 팀이 보유하고 있는 피칭 머신은 다양한 브레이킹볼 구사가 불가능한 기종입니다.”
김민은 단순히 빠른 패스볼을 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양한 브레이킹볼을 구사할 수 있는 신형 피칭머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빈스 구단주는 그 말에 잠시 망설였다.
“자네 말대로라면 매년 새로운 피칭 머신을 구입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건 낭비가 너무 크지 않은가?”
“피칭 머신을 구입하는데 얼마나 들죠? 한 대에 5만 달러(6천만 원)도 안 할 겁니다. 10대를 구입한다고 해도 50만 달러(6억 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뛰어난 타자 한 명을 영입하는 데는 수백만 달러가 듭니다. 어느 쪽이 더 뛰어난 가성비를 지니고 있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싼 몸값을 가진 타자를 영입하기보다는 키워서 써야 한다.
김민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알겠네. 신형 피칭 머신도 구입하도록 하지. 또 필요한 것이 있나?”
“스카우트와 신인 드래프트에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선수 스카우트와 신인 드래프트는 단장인 홀먼의 영역이었다.
이는 피칭 머신이나 카메라와는 다른 영역의 이야기였다.
홀먼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킴,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순간 빈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홀먼, 킴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싶네.”
김민이 말했다.
“NBA 이야기를 계속해서 죄송합니다만, NBA의 슈퍼스타는 팀 구성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팀을 꾸리고 싶단 말인가?”
“제가 원하는 쪽으로 팀이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빈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되면 이반 감독이나 홀먼 단장의 영역을 침범하게 될 텐데?”
“그래서 요구가 아니라 조언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흠, 재미있군.”
빈스는 오랜만에 상대를 만난 느낌이었다.
‘탬파베이가 꼴찌를 탈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군. 이런 선수가 더그아웃에 있다면 다들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그는 김민이 팀을 바꿀 수 있는 선수라고 믿게 되었다.
“좋아. 중요한 스카우트 회의와 드래프트 회의에 자네가 참석할 수 있게 해 주지.”
홀먼 단장은 빈스가 김민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비명을 내질렀다.
“미스터 빈스! 그것은…….”
빈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홀먼, 나는 지금 2001 시즌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MVP와 대화를 나누고 있네.”
“하지만…… 킴의 방금 말들은…….”
“팀이 강해질 수 있다면, 난 킴을 단장 자리에 앉힐 걸세.”
홀먼은 김민에게 한 방 크게 맞은 느낌이었다.
‘루키 투수가 단장의 영역을 침범하려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빈스는 김민을 마치 보물처럼 대하고 있었다.
“더 필요한 것은 없나?”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절제를 아는군.”
빈스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김민이 마음에 들었다.
* * *
메이저리그의 10월은 가을 야구로 달아올랐다.
“가자! 양키스!”
“최강 매리너스!”
그러나 이는 플레이오프에 오른 팀 팬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가을 야구에 초대받지 못한 팀 팬들은 개인 타이틀에 주목했다.
“이번 시즌 사이영상은 두 사람 중 한 명이군.”
“두 명이 누구지?”
“당연히 로켓과 마린이지.”
로켓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로저 클레멘스는 2001년 시즌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20승 3패 평균자책점 3.51, 213삼진
그는 20승과 3점대 평균자책점 그리고 200개 삼진을 동시에 달성했다.
이닝 소화 능력도 준수해서 220이닝을 넘겼으며, 승률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로켓맨에 맞서는 오클랜드의 에이스 마린도 만만치 않았다.
21승 8패 평균자책점 3.45, 153삼진
21승으로 다승 1위를 기록했으며, 평균자책점과 이닝 소화에서도 근소하게 클레멘스를 앞섰다.
그러나 중요한 클래식 스탯 중 하나인 삼진에서는 153개를 기록하며 클레멘스에 뒤지고 말았다.
2000년대 초반 삼진은 투수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마린도 잘했지만, 아무래도 로켓맨에게 기우는걸?”
“나도 같은 생각이야. 마린은 삼진이 너무 적다고 200K 근처도 가지 못했어.”
“삼진이 뭐가 중요해. 마린은 평균자책점과 다승 그리고 이닝에서 클레멘스를 앞섰다고.”
탬파베이 팬들은 김민도 사이영상 레이스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린과 클레멘스만 있는 게 아니야.”
“맞아, 킴은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냈다고.”
“게다가 킴은 루키라고.”
김민의 2001시즌 성적은 다음과 같았다.
17승 6패 평균자책점 2.95, 133삼진
김민은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소화 이닝도 200이닝에서 2이닝 부족한 198이닝으로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다승과 삼진 두 분야에서 김민은 경쟁자들보다 떨어졌다.
“킴의 승수가 적은 것은 탬파베이가 약팀이기 때문이야.”
“맞아, 마린과 로켓은 팀의 도움을 받아서 좋은 성적이 나온 것이라고.”
마린이 이끄는 오클랜드는 시즌 100승을 넘겼으며, 로켓의 양키스도 동부지구 1위를 달성했다.
반면 김민의 탬파베이는 이제 막 꼴찌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
록튼이 카페에서 신문을 보며 물었다.
“킴은 어떻게 생각해?”
“뭘?”
“사이영상.”
김민이 커피가 아닌 주스를 마시며 대답했다.
“로켓.”
“자기 자신은 지명하지 않는 건가?”
“20승과 200이닝, 200삼진,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했어.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록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도 평균자책점 타이틀은 차지했잖아.”
“남들보다 더 적게 던져서 가능했던 타이틀이야.”
록튼은 김민의 한마디가 자기비판처럼 들렸다.
‘킴이 자기 자신에게 엄한 것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거야.’
그는 살짝 주제를 바꿨다.
“MVP는 어때?”
“이치로.”
“뭐?”
“센세이션했잖아.”
“그는 홈런이 8개밖에 안 되는 타자야.”
“하지만 타이틀 3개를 따냈지.”
2001시즌 아메리칸 리그의 유력한 MVP 후보는 여섯 명이었다.
첫 번째 후보는 오클랜드의 제레미였다.
타율 0.342, 홈런 38개, 타점 120점 OPS 1.137
오클랜드의 100승 돌파는 제레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 후보는 이치로였다.
타율 0.350, 홈런 8개, 안타 242, 도루 56개.
그는 타율과 안타 그리고 도루에서 1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이치로는 소속 팀이 메이저리그 최다승을 기록했다는 플러스 요인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후보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
타율 0.318, 홈런 52개, 타점 135점.
그의 포지션이 유격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무시무시한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네 번째 후보와 다섯 번째 후보는 시애틀의 2루수 브렛과 클리블랜드의 강타자 듀크였다.
“마지막 후보는 로저 클레멘스인가?”
“투수 중에 후보로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사이영상이란 뜻이야.”
록튼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마린은 왜 끼지 못한 걸까?”
“투수니까.”
투수가 시즌 MVP를 수상하는 것은 타자보다 난이도가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최고의 투수, 그 이상을 보여 줘야만 시즌 MVP를 수상할 수 있었다.
“아참, 그건 그렇고. 구단주에게 뭘 건의한 거야? 다들 새로운 커피머신 같은 걸 기대하고 있던데.”
“커피는 운동선수에게 좋지 않아.”
“으음, 그래서 주스를 마시는 거야?”
김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커피머신은 물 건너갔군. 커피머신이 아니라면 뭐야?”
“스피드건.”
“킴, 농담하지 마.”
김민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스피드건은 농담이고, 초고속카메라와 다수의 카메라 세트가 들어올 거야.”
“빈스에게 그런 걸 건의한 거야?”
“초고속카메라는 타자의 히팅 포인트와 투수의 구위 향상에 도움이 될 거야.”
록튼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건 코칭 스탭에서 건의해야 할 내용이잖아.”
“빈스가 그런 부분에 돈을 쓰지 않으니까 내가 건의한 거야.”
“다른 건 없어?”
“최신형 피칭 머신.”
“엥? 전부 훈련에 관한 것들뿐이잖아.”
김민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젊은 선수들에게 훈련보다 더 좋은 건 없어.”
록튼은 김민이 마치 코치처럼 말한다고 생각했다.
“피칭 머신에 초고속카메라라니, 트레이너하고 코칭도 더 고용하지.”
“그러고 싶었지만, 빈스가 거기까지는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어.”
“킴.”
“농담이 아니야.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어.”
김민은 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할 시간이야.”
시즌이 끝났지만 김민의 야구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