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소시민은 도전자를 비웃는다 03
“5회 말에도 나오는 건가?”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겠지.”
“평균자책점 타이틀 획득에 시즌 17승까지 덤으로 가져가는 모양새인가? 킴을 위한 마지막 경기가 되어 가는 느낌이군.”
보스턴 선수들은 김민에게 모든 것을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호이스 감독의 생각도 같았다.
“5, 6, 7로 이어지는 하위 타순. 킴이 5회 등판을 포기할 리가 없지. 하지만 이것으로 승리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해.”
두 팀의 점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화력을 감안한다면 단 1이닝만으로도 충분히 역전이 가능한 점수 차이였다.
“물론입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탬파베이에게 패한다면 홈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시즌 마지막 승리를 탬파베이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탁!
빗맞은 타구가 3루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안데르센!”
록튼의 콜에 안데르센이 두 팔을 양쪽으로 길게 펼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잡겠어!”
주변 선수들은 안데르센의 콜에 거리를 벌렸다.
이는 그가 공을 쉽게 잡게 하기 위한 플레이였다.
잠시 뒤, 안데르센의 글러브에 하얀 공이 들어왔다.
팡!
“킴, 시작이 좋습니다. 까다로운 5번 타자 닉을 3루 파울 플라이로 잡아냅니다.”
“안쪽으로 바짝 붙인 공이 손잡이 위쪽에 맞은 것 같습니다. 닉으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은 타구일 겁니다.”
닉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제구에 날카로운 맛이 없단 말이야. 오늘 녀석의 투구…… 뭔가 달라.”
보스턴 선수들은 김민의 투구나 볼 배합이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전력분석팀의 경우는 조금 심각했다. 그들은 김민의 오늘 투구가 평소와 다른 부분이 너무 많아 당황할 지경이었다.
“지금 던지고 있는 투수가 킴이 맞는 건가?”
“패스트볼 구속이 95마일(153km)에서 92마일(148km)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매 이닝 전력투구라니, 킴답지 않군.”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경쟁하는 입장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일은 김민의 볼 배합이 달라진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92마일 이상의 패스트볼 구속을 유지하기 위해 스플리터를 배제한 볼 배합을 짰단 말인가? 아니, 이건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1마일의 구속을 늘리기 위해 주무기를 봉인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신입 팀원인 슈르츠가 게일을 향해 말했다.
“킴은 스플리터를 봉인한 게 아니라. 그냥 안 던지는 것 아닐까요?”
그는 이번 시즌 중반 전력분석팀에 합류한 새내기였다.
“안 던진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게일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슈르츠는 눈치가 없는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
“바보 같은 소리! 킴이 스플리터를 던지지 않는 것은 뭔가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게일은 슈르츠의 말을 끊고는 미간을 좁혔다.
‘킴, 다음 시즌을 위한 연막을 피우는 건가?’
소포모어 징크스(2년 차 징크스).
이것은 루키 시즌에 뛰어난 성적을 올린 선수들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징크스였다.
전문가들은 이 소포모어 징크스가 일어나는 원인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첫 번째는 선수 본인의 자만 또는 자기 관리 실패였다. 이는 몬스터 시즌을 보낸 선수들이 평범한 선수로 되돌아가는 이유와 같았다.
두 번째는 상대 팀들의 상세한 전력분석이었다.
오프 시즌 동안 상대 팀들에게 플레이가 철저히 분석된다면, 그 선수는 다음 시즌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게일은 김민이 각 팀의 전력분석원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새로운 투구 패턴을 들고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킴은 다음 시즌까지 자신의 활약을 이어가기 위한 디딤돌을 놓고 있는 거야.’
그는 김민이 운영의 마술사가 아니라 운영의 신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이닝, 다음 경기를 넘어 다음 시즌까지 바라보고 경기를 운영하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그러나 게일의 생각은 혼자만의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김민은 그렇게까지 길게 보고 오늘 경기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1루 주자 넬슨! 2루에서 아웃 됩니다.”
“킴, 볼넷을 하나 내주긴 했지만, 유격수 땅볼로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하는군요.”
5이닝 1피안타 2사사구 무실점.
김민은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공고하게 하는 한편 시즌 17승 요건을 갖췄다.
“수고했어.”
“나이스 피칭.”
“이번 시즌 킴은 최고야.”
더그아웃으로 들어간 김민은 동료들은 물론 코칭 스탭과도 하이 파이브를 나누었다.
땀을 닦은 김민은 설리반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설리반, 오늘 내 피칭, 뭐가 달랐지?”
김민의 물음에 설리반이 대답했다.
“으음, 뭐랄까? 평소의 킴이 아니었어.”
“그것뿐이야?”
“구속도 높고, 킥도 좀 높이 하고, 어깨도…….”
김민이 글러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마디로 정리했으면 좋겠군.”
“한마디라면…… 그래 야생마처럼 던졌어.”
김민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야생마라 마음에 드는군. 오늘 내 피칭은 설리반, 네 피칭을 따라 한 거야.”
설리반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김민이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오늘 킴의 피칭은 내 피칭이 아니야. 난 킴처럼 몸 쪽에 바짝 공을 붙일 수 없어. 우리 두 사람의 투구는 완전히 다르다고.”
김민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포심 패스트볼, 커브, 슬라이더. 오늘 내가 던진 구종들이야.”
설리반은 김민의 말에 멈칫했다.
“스플리터와 커터는 하나도 던지지 않은 건가?”
“그 두 가지는 설리반이 던질 수 없으니까. 설리반, 오늘 내 투구가 설리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그게 무슨 말이야?”
“앞으로 내가 던진 것처럼 던지면 좋겠다는 뜻이야.”
“오늘의 킴처럼…….”
오늘 김민의 투구는 설리반의 잠재력이 모두 발휘되었을 때를 가정한 것이었다.
‘내 가르침은 여기까지야. 오늘 투구를 보고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설리반의 재능은 딱 여기까지인 것이겠지.’
그는 글러브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록튼에게 말했다.
“록튼, 불펜에 다녀올게.”
“킴, 또 불펜에 가는 건가?”
“다음 이닝도 준비해야 하니까.”
불펜을 향하는 김민을 블렛소 투수 코치가 막아섰다.
“킴, 오늘은 여기까지 던지는 게 좋겠어.”
“코치님, 아직 5이닝밖에 던지지 않았습니다.”
“5이닝만으로도 타이틀은 충분해.”
“타이틀이라니요?”
“평균자책점 타이틀 말이야. 195이닝이면 던질 만큼 던진 거잖아. 완봉을 한다고 해도 200이닝은 채워지지 않아.”
김민은 블렛소 투수 코치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코치님, 전 타이틀이나 기록을 위해 공을 던지지 않습니다.”
“킴!”
“제가 공을 던지는 이유는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6회 말에도 마운드에 오를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블렛소 투수 코치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킴의 평균자책점 타이틀은 우리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가 획득한 첫 개인 타이틀이야. 그걸 쉽게 내어줄 수는 없어.”
“쉽게 내어주지 않을 겁니다.”
블렛소 코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주자를 내보내면 자넬 교체하겠어.”
“5이닝 동안 3명이나 주자가 나갔습니다. 그 말은 절 보고 다음 이닝을 던지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블렛소 코치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킴, 내 입장도 생각해 주게.”
“킴, 블렛소의 말을 들어주도록 해.”
“타이틀은 지켜야지.”
김민은 다른 코치들까지 가세하려 하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나가면 교체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건을 바꾸자 블렛소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스코어링 포지션이야. 그 이상은 안 돼.”
김민은 이쯤에서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나가면, 마운드를 다음 투수에게 넘기겠습니다.”
그는 조건을 확실히 하고 불펜으로 향했다.
불펜에 도착한 김민.
그를 맞이한 것은 에두와르드를 비롯한 선수들의 축하였다.
“킴, 평균자책점 타이틀 축하해.”
“탬파베이에서 개인 타이틀이라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킴, 오늘 한턱 크게 쏴야지.”
김민은 선수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무리야. 이번 시즌 내 연봉은 최저연봉이라고.”
“킴, 그러기야?”
불펜 투수들이 농담을 던지려는 순간 김민이 불펜 포수인 라몬을 호출했다.
“라몬, 공을 받아줄 수 있겠어?”
동료들이 김민의 한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킴, 그게 무슨 말이야?”
“다음 회에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뜻인가?”
“무리야!”
김민이 마운드에 오르며 말했다.
“아직 5이닝밖에 던지지 않았다고.”
포터 불펜 코치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킴, 블렛소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어, 어떻게 허락을 받은 거야?”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나가면 교체하기로 했습니다.”
포터 코치와 불펜 투수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스코어링 포지션까지만 허락한다는 말은…….”
“던질 수 있는 한계까지 던지겠다는 뜻이군.”
“하지만 1루에 주자를 내보낸 뒤에 홈런을 맞게 된다면…….”
에두아르드가 라이언의 말을 빠르게 잘랐다.
“라이언,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다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민은 라몬을 상대로 연습 투구를 시작했다.
팡! 팡!
“나이스 볼!”
라몬이 미트에서 공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나쁘지 않아.”
“얼마나 던질 수 있을 것 같아?”
“2, 3이닝?”
김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4이닝이면 더욱 좋았을 텐데 아쉽군.”
4이닝을 더 막는다는 것.
이는 완봉승을 뜻했다.
6회 말.
김민이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레드삭스 코칭 스탭이 미간을 좁혔다.
“킴이 우릴 얕보는 모양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5이닝 무실점으로도 부족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보스턴 타자들 역시 주먹에 힘을 주었다.
“저 애송이가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완봉이라도 노리는 건가? 건방지긴.”
“이렇게 된 이상 탈탈 털어 주자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6회 말 타순은 9, 1, 2으로 이어졌다.
“보스턴 레드삭스! 이번 6회 말 타순은 나쁘지 않습니다.”
“9번 타자부터 시작하긴 하지만, 1, 2번으로 이어지는 타순입니다. 한 명이라도 주자가 출루한다면 라파엘에게 기회가 돌아갑니다.”
“보스턴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를 꼭 살려야겠는데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삼자범퇴라도 나오면 다음 7회 말 첫 타자가 라파엘이 되고 맙니다.”
보스턴의 올스타 유격수 노라는 김민이 6회 말 마운드에 오른 것을 보곤 혀를 찼다.
“내가 킴을 높이 평가하긴 하지만 이건 아니야. 타이틀을 확보하고 다시 마운드에 오르다니, 이건 상대를 너무 얕보는 행동 아니야?”
페드로는 김민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5이닝 무실점으로 경기를 끝내는 건 너무 속이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게다가 킴은 탬파베이의 에이스야. 딱 5이닝만 소화하는 에이스는 없다고. 난 킴이 에이스의 자존심 때문에 마운드에 올랐다고 생각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민이 초구를 던졌다.
슉!
빠른 공이 바깥쪽에서 낮게 떨어졌다.
“스윙 스트라이크!”
보스턴 전력분석팀은 김민의 초구에 크게 놀랐다.
“스, 스플리터가 들어왔어!”
호이스 감독과 코칭 스탭 역시 9번 타자 그렉텐의 헛스윙에 신음을 흘렸다.
“공이 떨어졌군.”
“킴이 볼 배합을 완전히 바꾼 것 같습니다.”
그들은 김민이 6회 말 등판한 것이 만용이 아님을 깨달았다.
“6회 말 마운드에 오른 이유가 있었군.”
“초반 단순한 볼 배합은 이것을 위한 밑그림인 것 같습니다.”
9번 타자 그렉텐은 두 번째 공에도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또 스플리터야!’
그는 연속으로 들어온 스플리터에 당황했다.
‘이 녀석…… 오늘은 패스트볼 위주 아니었나?’
6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김민은 단 하나의 스플리터도 던지지 않았다.
그러나 6회가 시작되자마자 그의 투구 패턴은 완전히 바뀌었다.
연속해서 스플리터.
그렉텐이 당황하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타임!”
타격 코치가 타임을 걸고 배터 박스로 향했다.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투 스트라이크에 몰렸으니, 존을 좁게 보고 치라는 말 아닐까?”
타격 코치의 조언은 기자들의 예상과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렉텐, 조금 낮은 패스트볼을 때린다고 생각하고 히팅 포인트를 잡는 것이 좋겠어.”
“패스트볼 타이밍으로 스플리터를 공략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코치, 스플리터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 그건…… 자네가 해결해야지.”
그렉텐은 정답을 원했지만, 김민의 투구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끝났습니까?”
주심의 물음에 타격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습니다.”
타격 코치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자 경기가 재개되었다.
“플레이!”
슉!
‘이번 공도 빨라. 스플리터 아니면 패스트볼이야.’
그렉텐은 타격 코치가 말한 것처럼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두고 아래쪽 코스를 노렸다.
‘그대로 퍼 올린다!’
하지만 공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졌다.
‘커터?’
탁!
배트 헤드 끝에 맞은 공이 1루 베이스로 향했다.
“그렉텐, 평범한 1루 땅볼 아웃입니다!”
“아! 이건 정말 아쉬운 타구이군요.”
호이스 감독은 그렉텐의 아웃을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스플리터에 이어 커터까지 다시 등장했군.”
김민은 록튼에게 공을 건네받곤 낮게 중얼거렸다.
“설리반을 위한 수업은 끝났어. 이젠 나를 위해서 공을 던지는 거야.”
그는 6회 말 와일드라는 옷을 버리고 완벽함이란 옷으로 갈아입었다.
1번 타자 벨라지오.
그는 준수한 타자였지만, 완벽함으로 무장한 김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한가운데에서 떨어지는 커브에 헛스윙.
벨라지오는 고개를 숙였다.
‘좌우 로케이션도 모자라 커터 다음 커브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군.’
호이스 감독은 입이 바짝 말랐다.
‘킴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던 건 바로 내 오만이었어.’
그는 이제 완봉을 걱정해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