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88화 (88/296)

88화 소시민은 도전자를 비웃는다 02

‘바깥쪽으로 던진 초구는 라파엘의 밸런스를 깨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던진 커브는 타이밍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다. 타이밍과 밸런스가 차례로 무너진 라파엘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겠지. 하지만 킴은 철저했어. 수비 시프트까지 걸어서 만에 하나 일어날 일까지 대비했단 말이지.’

호이스 감독은 그 와중에 총알 같은 직선타를 쏘아 올린 라파엘이 대단해 보였다.

‘라파엘은 수비 시프트가 아니었다면 킴이 설치한 함정을 뚫었을 거야.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는 아직 라파엘이 약물을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스카이 박스에 선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킴이 1회 말을 깔끔하게 넘겼군.”

“구속을 보니, 전력투구인 것 같습니다. 킴도 평균자책점 타이틀에는 욕심이 날 겁니다.”

스카이 박스에서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탬파베이의 빈스 구단주와 홀먼 단장이었다.

“구단 창단 이후 첫 개인 타이틀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또 하나의 희소식이군.”

빈스는 김민의 좋은 스타트에 미소를 지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진주를 얻었어.’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김민.

그가 구단 스탭을 향해 짧게 말했다.

“물.”

구단 스탭이 몸을 돌린 순간, 클락이 기다렸다는 듯 김민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킴, 수고했어.”

“고마워.”

김민은 클락에게 물병을 받고는 단숨에 그것을 비웠다.

꿀꺽. 꿀꺽. 꿀꺽.

클락은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점심을 짜게 먹은 건가?”

김민이 빈 물병을 클락에게 넘기며 대답했다.

“그건 아닌데 땀이 좀 많이 나서 말이야.”

그는 물로 수분을 보충한 뒤, 바로 불펜으로 향했다.

클락은 김민이 서둘러 불펜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흐흠, 킴이 경기 초반부터 불펜으로 향하다니 별 일이군.”

선발 투수들이 불펜에서 몸을 푸는 것은 어깨가 식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김민은 체력 안배를 위해 경기 초반에는 불펜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는 다른 때와 달리 몸의 열기를 유지하고자 했다.

‘더 좋은 느낌으로 패스트볼을 뿌리고 싶어.’

팡! 팡!

볼펜 포수 라몬이 김민의 공을 받으며 말했다.

“킴, 너무 세게 던지지 마. 온기를 유지하는 정도면 족하다고.”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할게.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말았어.”

포터 불펜 코치는 김민의 옆에서 그의 몸 상태를 관찰했다.

“킴, 오늘 경기,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 좋겠어.”

코치의 말에 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는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말은 적당히는 하겠다는 말인가?”

“시즌 최종전이니까요.”

“킴, 시즌 최종전이라고 해도 부상을 당하면 곤란해. 평소보다 팔이 더 높게 올라가 있다고.”

김민은 포터 코치의 말에 흠칫했다.

‘팔의 높이가 올라가 있다고?’

포터 코치의 말이 사실이라면, 1년 동안 유지했던 폼이 단 1이닝 만에 바뀐 것이었다.

‘구위를 높이고자 한 결과인가?’

김민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 * *

투수 코치 1년 차.

김민은 마이너리그에서 7년을 보냈지만, 투구 이론만큼은 국내 투수 코치들과 다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투구폼이야. 부드러운 투구폼을 만들어야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단 말이지. 내가 시험을 보일 테니까. 잘 보라고.”

그는 투구폼과 제구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투구폼을 부드럽게 바꿨는데 제구가 잡히지 않고 구속만 떨어졌어. 대체 뭐가 문제일까?”

김민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KBO를 강타한 이론이 있었으니, 바로 구위론이었다.

구위론은 던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으로 타자를 압도한다는 이론이었다.

김민은 구위론을 접하곤 미간을 좁혔다.

“볼넷을 두려워하지 말고,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강하게 공을 던져라? 이건 딱 마이너리그 매뉴얼이잖아. 이런 매뉴얼로는 좋은 투수를 만들 수 없어.”

하지만 K구단은 구위론을 바탕으로 한국 시리즈를 제패했다.

“투구수와 상관없이 구위가 떨어진 투수는 바로 교체한다. 볼넷을 내주더라도 피안타를 억제해서 WHIP를 유지한다. 이건 대체…….”

투수 코치들은 흔히 볼넷이 안타보다 나쁘다며, 볼넷을 최대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이는 메이저리그 투수 코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볼넷이 수비수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며, 선발 투수의 투구수를 증가시켜 이른 강판을 가져온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구위론은 그 반대였다.

볼넷이 나오더라도 강하게 공을 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제구를 위해 구위와 구속에서 손해를 본다면 그 공은 죽은 공이나 다름이 없다.

공에 혼을 불어넣으라는 말이나, 마운드에 올라 전사처럼 타자와 싸우라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김민은 그 부분을 읽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만화책에서 나온 말 아니야?’

그러나 다음 시즌 그가 가르친 투수들은 1군의 높은 벽에 가로 막혀 모두 2군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반면 K구단은 승승장구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김민은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 투구이론은 잘못된 것이었나?’

구위론이 정답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볼넷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만큼은 인정할 수 없어. 볼넷은 투수의 적이야.’

김민의 고민은 몇 달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마치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불펜 마운드 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투수의 유형에 따라 투구이론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투수를 부드러운 투구폼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더 나은 투수도 분명 존재한다. 구위론도 마찬가지다. 운영으로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에게 구위론을 강요한다면 그 투수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투수 코치는 투수를 상세히 관찰하고 그 결과에 따라 투수에게 맞는 이론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 코치 김민의 케이스 바이 케이스 이론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 * *

“킴! 다시 한번 삼지범퇴 이닝을 만들어 냅니다!”

“보스턴 타선이 킴의 구위에 밀리고 있습니다. 이건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보스턴 타자들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와서 혀를 찼다.

“저 녀석 말이야. 무슨 일인지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고.”

“무슨 일이긴, 평균자책점 타이틀이 눈앞에 있잖아. 나라도 달아오를걸?”

“그래서 그런가? 슬라이더가 88마일(142km)까지 나오더라.”

“쳇, 라이징 패스트볼에 고속 슬라이더인가?”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노라가 페드로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페드로, 오늘 킴은 공략 불가라고.”

페드로는 아직 경기를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킴은 저렇게 구위로 밀어붙이는 투수가 아니야. 저렇게 던지면 5이닝도 던지기 전에 체력이 바닥나고 말걸?”

“그렇다고 하기에는 투구수가 적어. 3이닝 동안 겨우 24개를 던졌을 뿐이라고.”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김민은 72개로 9이닝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야구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적었다.

페드로는 4회나 5회에 한 차례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투수의 투구도 마찬가지. 완봉을 해낸 경기도 반드시 한 번쯤은 위기가 오기 마련이다.’

4회 초.

탬파베이가 먼저 선취점을 뽑아냈다.

“안데르센! 그린 몬스터를 직격하는 2루타입니다!”

“좋은 타구입니다. 안데르센, 다음 시즌 연봉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겠는데요?”

안데르센은 리그 3년 차로 다음 시즌부터 구단과 연봉 협상을 할 수 있었다.

“나이스, 안데르센!”

“잘했다.”

평소라면 김민도 더그아웃의 다른 선수들처럼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펜에서 연습 투구를 하고 있었다.

팡!

“나이스 피칭.”

라몬이 공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 연습 투구가 너무 많은 것 아니야?”

“9회까지 던질 게 아니라서요.”

김민의 대답에 라몬이 미소를 지었다.

“하긴 오늘 같은 날 끝까지 던지는 건 오히려 손해지.”

포터 코치도 같은 생각이었다.

‘5이닝 1실점 정도면 충분해. 그 정도면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낼 수 있어.’

그는 다른 때보다 일찍 불펜을 가동시키고자 했다.

‘4회 말부터는 불펜을 가동하는 게 좋겠지.’

탬파베이는 4회 초 공격에서 2점을 뽑아내며 2-0으로 달아났다.

4회 말.

보스턴 레드삭스의 공격.

“4회 초 수비에서 두 점을 빼앗긴 레드삭스, 첫 번째 타자 클리어는 유격수 땅볼로 아웃되고 말았습니다.”

클리어 다음 타자는 보스턴이 자랑하는 슈퍼스타 라파엘이이었다.

“1사 후, 타석에 들어선 것은 3번 타자 라파엘입니다.”

“라파엘 앞에 주자가 없다는 것은 보스턴으로서 기분 좋은 일이 아니군요.”

라파엘은 1회 총알 같은 타구를 날린 바 있었다.

‘이번 회는 1회와 다를 거다.’

그는 조금 더 안쪽으로 공을 받쳐놓고 때리겠다고 생각했다.

슉!

초구부터 빠른 공이 들어왔다.

‘바깥쪽 빠른 공? 이건 유인구다.’

그는 배트를 멈췄다.

파앙!

미트에 공이 들어왔으나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라파엘의 생각대로 김민이 던진 첫 번째 공은 유인구였다.

“카운트 1-0, 라파엘, 초구를 잘 골랐습니다.”

“라파엘, 오늘 컨디션이 좋아보이는군요. 스트라이크존에서 하나 정도 빠지는 공이었는데 그걸 골라냈습니다.”

호이스 감독은 구종보다 구속을 더 먼저 확인했다.

“94마일(151km)이라. 아직 힘이 남아 있군.”

“저렇게 던지면 길게 던지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오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평균자책점 타이틀이라고.”

그는 김민이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노린다고 확신했다.

“킴, 두 번째 공도 볼이 됩니다.”

김민의 볼 배합은 1회와 같았다.

바깥쪽 빠른 공, 그다음은 가운데에서 떨어지는 커브.

라파엘은 볼 배합을 확인하곤 미소를 지었다.

‘다음 공은 안쪽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인가? 무슨 공식처럼 볼 배합을 하는군.’

그는 배트를 세우곤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안쪽 빠른 공이겠지.’

슉!

예상대로 빠른 공이었다.

하지만 코스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바깥쪽?’

패스트볼을 예상했기 때문에 타이밍은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히팅 포인트가 문제였다.

배트를 멈추지 않고 계속 낸다면 분명 헤드 끝에 공이 맞게 될 터였다.

‘이대로 칠까? 아니야. 참아야 해.’

라파엘은 나쁜 히팅 포인트로는 좋은 타구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파앙!

미트에 꽂힌 공이 좋은 소리를 냈다.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이번에도 94마일(151km).

라파엘은 스트라이크를 하나 허용했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 떠오르는 공이었어. 저건 쳤다고 해도 좌익수 플라이였을 거야.’

그는 타임을 건 뒤 배터 박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손잡이 부분에 왁스를 칠했다.

호이스 감독은 그 사이 타격 코치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호이스 감독이 타격 코치에게 물었다.

“오늘 킴이 스플리터를 거의 던지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맞게 본 건가?”

“맞습니다. 오늘 킴은 스플리터를 하나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호이스 감독이 낮게 신음을 흘렀다.

“으음…… 그렇다면 위험한데.”

“그건 다음 공으로 킴이 스플리터를 던진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커.”

라파엘의 머릿속에 스플리터는 이미 지워진지 오래였다.

그는 지금 패스트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가서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타격 코치가 호이스 감독의 말을 전하려는 순간 라파엘이 타석에 들어서고 말았다.

“이런…….”

타임을 걸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호이스 감독이 입맛을 다시며 타격 코치를 불러들였다.

“아직 카운트에 여유가 있으니, 지켜보도록 하지.”

그는 김민이 스플리터를 던진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록튼의 생각도 같았다. 그는 지금이 바로 스플리터를 사용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민의 사인은 스플리터가 아니었다.

‘킴, 이런 투구로 설리반이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거야?’

그가 미트를 내밀자 김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슉!

김민이 던진 공은 빠른 공이었다.

라파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킴, 인정하지. 넌 사나이다.’

그의 배트가 공을 향해 움직였다.

‘그대로 넘어가라!’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라파엘이 괴력으로 만들어 낸 대형 타구는 낙하점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정말 높이 떴어!”

“그대로 넘어가는 거 아니야?”

“그러기에는 바람이 역풍이라고.”

라파엘은 배트를 든 채 1루로 걸어가며 미간을 좁혔다.

‘넘어가! 그대로 넘어가란 말이야!’

잠시 뒤, 중견수 머레이가 워닝 트랙 앞에서 자리를 잡았다.

머레이가 자리를 잡았다는 뜻은 공이 펜스를 넘어가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타격 코치는 높이 뜬 공이 역풍을 맞아 비거리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바람도 따라주지 않는군.’

팡!

글러브에 들어온 하얀 공.

라파엘은 배트를 내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길! 마지막 순간에 손목을 더 썼어야 했어.”

그는 라이징 패스트볼을 힘만으로 넘기려 한 것이 실수라고 생각했다.

호이스 감독은 김민의 과감한 정면 승부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 스플리터가 아니라 패스트볼이었군.”

“타구가 크게 뜬 것을 보면, 라이징 패스트볼이라 불리는 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한 심장을 지닌 친구야. 그 상황에서 높은 코스에 패스트볼을 던지다니.”

“어쩌면 바람의 방향을 읽고 공을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타격 코치의 말은 사실이었다.

김민은 경기 전 펜웨이 파크 관중석 상단에서 바람의 방향을 읽었다.

‘그린 몬스터 쪽에서 그라운드 쪽으로 강하게 바람이 불고 있어. 오른쪽이라면 모를까? 오늘 그린 몬스터를 넘어갈 만한 타구는 나오지 않을 거야.’

원정 구장의 바람까지 읽는 꼼꼼함.

록튼은 김민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패스트볼로 라파엘을 잡아내다니, 킴은 역시 킴이야.’

김민은 다음 타자 그란델을 삼진으로 돌려세우고는 이닝을 마쳤다.

4이닝 1피안타 1사사구 무실점.

여기서 투구를 마친다면, 2001 시즌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 타이틀은 김민의 것이었다.

그러나 김민은 5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