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악의 제국 04
양키스 코칭 스탭은 대타를 쓰지 않고 9번 타자 알렌을 그대로 기용했다.
“9번 타순인데 대타를 쓰지 않는군요.”
바이슨 코치의 말에 이반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교체 카드가 마땅하지 않은 건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양키스에는 루인이라는 좋은 대타 자원이 있으니까요.”
호이스트는 토린 감독이 대타 카드를 꺼내지 않은 것은 점점 떨어지는 김민의 구위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킴의 공이 맞아 나가기 시작했어. 지금 시점에 필요한 것은 패기 넘치는 젊은 타자가 아니라 투수의 공에 익숙해진 눈이야.”
김민은 초구 사인을 낸 뒤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바깥쪽으로 낮게.’
그의 손을 떠난 공이 미트를 향해 날았다.
슉!
알렌은 김민의 공을 보곤 나가던 배트를 멈췄다.
이것은 알렌의 눈에 김민의 공이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팡!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초구는 볼입니다. 알렌, 초구를 잘 참아냈습니다.”
“바깥쪽으로 타자를 유인하는 낮은 공이었군요. 이런 공을 공략하면 범타가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토린 감독은 전광판의 구속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91마일(146km). 힘이 떨어졌군. 힘이 남아 있었다면 이번 공은 코너를 정확히 찔렀을 거야.”
“힘이 떨어져서 킴의 제구가 엇나갔다는 말씀입니까?”
토린 감독이 타격 코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호이스트의 판단도 같았다.
“킴의 오늘 투구는 훌륭했어.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리일 것 같군. 힘이 확실히 떨어졌어.”
그는 교체 타이밍을 잡는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탬파베이 코칭 스탭은 김민을 교체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흐흠, 안타를 하나 맞은 다음에 바꿀 생각인가?”
호이스트가 턱을 쓰다듬은 순간 주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알렌의 헛스윙.
이는 호이스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커브에 알렌의 배트가 크게 헛돌았습니다!”
“타이밍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알렌은 패스트볼을 노렸던 것 같습니다.”
김민은 체력이 떨어진 투수의 선택지를 잘 알고 있었다.
‘체력이 떨어지면 구위로 타자를 누를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투수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한 가지뿐이다.’
단 한 가지 경우의 수.
그것은 바로 볼 배합을 바꾸는 것이었다.
- 구위가 떨어진 패스트볼을 줄이고, 브레이킹볼과 체인지업을 위주로 볼 배합을 구성한다.
투수들의 후반 볼 배합은 타자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알렌은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알렌은 자신의 타석에서 볼 배합이 바뀔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 같군.”
토린 감독의 말에 수석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잘 던지고 있던 에이스였으니까요. 적어도 이번 회까지는 강하게 던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양키스 코칭 스탭은 어쩔 수 없이 바꾼 볼 배합으로는 양키 타선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민은 쉽게 무너질 생각이 없었다.
‘단순히 볼 배합만 바꿨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해. 선발 투수라면 누구나 후반을 생각해 무기 하나쯤은 남겨 두는 법이니까.’
그가 남긴 무기는 바로 커브였다.
알렌은 김민의 커브에 크게 헛스윙하곤 배트를 짧게 잡았다.
‘커브의 각이 생각보다 좋아. 이런 커브를 왜 지금까지 아꼈던 것일까?’
세 번째 공도 커브.
이번 커브는 코스가 반대였다.
탁!
배트 끝에 걸린 공이 관중석에 떨어졌다.
“파울!”
토린 감독은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공이 두 번이나 들어왔는데도 치질 못하는군.”
타격 코치가 알렌을 대신해 변명하듯 말했다.
“구종은 같았지만, 코스가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김민은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결정구를 선택했다.
‘이번 공으로 잡는다.’
슉!
안쪽을 파고드는 패스트볼.
‘오프 스피드 피치냐?’
알렌은 배트를 짧게 잡았기 때문에 스윙 스피드에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통하지 않아.’
딱!
배트에 맞은 공이 큰 바운드를 일으켰다.
“유격수!”
록튼의 콜에 유격수 유칼리스가 빠르게 움직였다.
‘바운드가 커. 자칫 잘못하면 타자를 1루에서 살려 주게 될 거야.’
그는 앞으로 달려들며 공을 잡았다. 그리곤 몸을 틀어 1루에 강하게 뿌렸다.
캐칭과 송구.
양쪽 모두 난이도가 높았다.
유칼리스는 좋은 수비수답게 그 두 가지를 모두 해냈다.
“아웃!”
토린 감독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저 친구 수비가 제법이군.”
“유칼리스는 공격은 부족해도 수비가 상당히 좋은 친구입니다.”
알렌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며 자신이 때린 공이 단순한 패스트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순간 아주 약간 떨어졌어. 아마 그건 스플리터였을 거야.’
김민은 유칼리스의 수비를 칭찬한 뒤, 마른 침을 삼켰다.
‘스플리터가 무뎌졌어. 지금부터는 한 명 한 명이 고비군.’
8회 말, 양키스의 마지막 타자로 등장한 것은 데릭 지터였다.
“지터! 지터!”
“미스터! 뉴욕! 해내라!”
“지터 믿는다!”
양키스 팬들은 지터를 향해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지터는 체력과 구위가 떨어진 김민에게는 벅찬 상대였다.
‘하필 지금 지터인가?’
지터가 날카로운 눈으로 김민을 노려보았다.
‘킴, 내가 마지막 타자라 생각하고 던지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전력투구가 아니라면 자신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민은 지터의 시선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눈빛이군. 지터가 왜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클러치 히터인지 알겠어.’
무뎌진 구위로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클러치 히터를 상대한다는 것.
그것은 살얼음판으로 덮인 호수를 건너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김민은 조심스럽게 초구 사인을 냈다.
- 안쪽 체인지업.
록튼은 김민의 사인을 받곤 고개를 갸웃했다.
‘킴, 체인지업을 초구로 선택하다니 무슨 생각인 거야?’
체인지업은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는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한 느린 공이었다.
이 공은 패스트볼을 하나 보여 준 다음 던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김민은 패스트볼을 생략한 채 초구로 체인지업을 던지고자 했다.
‘지터는 평범한 타자가 아니야. 대기 타석에서 패스트볼을 본 것만으로도 타이밍을 완벽하게 잡았을 거야.’
그는 지터의 타이밍이 패스트볼에 완벽히 맞춰져 있기 때문에 패스트볼을 생략해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슉!
손끝을 떠난 공이 안쪽을 파고들었다.
‘밋밋한 공.’
지터는 망설이지 않고 배트를 내밀었다.
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빠른 타구가 라인을 향해 날아갔다.
“좋은 타구야!”
팍!
공은 3루 라인 선상에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갔다면 2루타가 될 수 있는 타구.
그러나 3루심의 판정은 양키 팬들의 바람과 반대였다.
“파울!”
지터는 타구 결과를 확인하곤 배터 박스로 돌아왔다.
‘밋밋했던 공은 패스트볼이 아니라 체인지업이었군. 킴,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아.’
김민은 라인 근처에 떨어진 타구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떨어지는 공을 빠르게 잡아 돌렸어. 패스트볼이었다면 아마 장타가 왔을 거야.’
호이스트는 방금 타구를 보고는 지터가 김민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초구에 체인지업은 패스트볼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나온 선택이야.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킴의 방패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어.”
올드라인도 그이 생각을 지지했다.
“패스트볼 구속이 떨어진 게 결정적인 것 같습니다. 킴은 이제 스트라이크존에 패스트볼을 던지지 못할 겁니다.”
김민은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곤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슉!
지터는 안쪽으로 들어오는 빠른 볼을 보곤 미간을 좁혔다.
‘패스트볼? 아니야. 지금 상황에서는 패스트볼을 던질 수가 없어.’
그는 구위가 떨어진 김민이 패스트볼을 던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스플리터라면 히팅 포인트를 조금 낮추는 게 좋겠지.’
지터는 스플리터에 히팅 포인트를 맞춰 타격했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큰 바운드를 일으키며 3루 쪽으로 향했다.
지터는 1루로 달려 나가며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스플리터가 아니었어!’
김민이 던진 공은 92마일(148km) 패스트볼이었다.
마지막 순간 히팅 포인트를 바꾸지 않았다면 펜스를 넘길 수도 있는 공이었다.
“파울!”
이번에는 간발의 차이로 지터가 목숨을 구했다.
“3루수 안데르센이 공을 잡았지만, 공은 이미 라인을 벗어났습니다.”
“서로 하나씩 주고받는군요. 두 사람 모두 아쉬운 장면이 나옵니다.”
김민은 아웃 카운트를 잡지 못했지만,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뺄까? 아니야. 여기서 밖으로 빼는 공은 체력 낭비에 지나지 않아.’
그는 바로 승부를 선택했다.
‘승부구를 던져야 해.’
지터는 투 스트라이크에 몰렸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구종이 많다는 것이 까다롭군.’
포사다는 지터가 모든 공에 타이밍을 맞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터, 패스트볼 계열은 버려야 해. 내가 킴이라면 브레이킹볼을 던질 거야.’
그는 커브나 체인지업 같은 느린 공에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느 한 공에 타이밍을 맞춰서는 김민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하나를 노리기에는 킴의 구종이 너무 많아. 노려야 할 것은 구종이 아니라 코스야.’
그는 바깥쪽 공에 포커스를 맞췄다.
‘빠른 공은 밀고, 느린 공은 당겨 주겠어.’
지터는 빠른 공과 느린 공 사이에 히팅 타이밍을 두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이윽고 김민의 결정구가 날아왔다.
슉!
‘이건…….’
지터가 말을 잊지 못한 것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코스의 공이었기 때문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느린 커브.
‘스트라이크존에서 떨어지는 유인구도 아니고, 머리 높이로 날아오는 커브라니, 이걸 때려야 하나?’
망설임이 든 순간 공이 중간 지점을 통과했다.
이제 남은 것은 커트를 시도하거나 포수 미트에 들어간 공이 볼이 되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존으로 떨어지고 있어.’
지터의 머릿속에 스트라이크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점점 커졌다.
‘안 되겠어.’
결국 그는 커트를 시도했다.
탁!
배트 위쪽에 맞은 공이 홈플레이트 위에 떠올랐다.
- 커트 실패.
김민은 바로 손을 들었다.
“포수!”
“맡겨 줘!”
록튼이 마스크를 쓴 채 떨어지는 공을 주시했다.
‘잡을 수 있어.’
그는 이 공을 놓쳐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킴이 어렵게 만들어 낸 파울 타구야.’
중요한 공이라고 생각하자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이런…….’
공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호흡이 빨라졌다.
‘놓치면 안 돼. 놓치면 안 돼.’
록튼은 평생 잡아 본 타구 중 이번 타구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다.
김민은 록튼이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고는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록튼! 침착해!”
찰나의 순간.
그의 한마디가 록튼의 집중력을 깨웠다.
‘그래, 침착하자. 침착하면 잡을 수 있는 공이야.’
록튼은 미트를 세웠고, 공은 그대로 그의 미트에 들어왔다.
팡!
“아웃!”
지터는 헬멧을 벗었다. 그리곤 김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킴, 오늘은 네 승리다. 하지만 다음은 쉽지 않을 거야.’
양키스 팬들은 지터가 파울 플라이로 물러나자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지터마저 당했어.”
“이걸로 8이닝 무실점이군.”
“루키에게 완봉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양키스가 아니야.”
토린 감독은 아직 좌절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9회 말은 2, 3, 4번의 호타순이야. 힘이 떨어진 킴으로는 막을 수 없지.”
“아마 로버트가 등판할 겁니다.”
“로버트라…… 그는 뛰어난 클로저가 아니지.”
양키스 코칭 스탭은 탬파베이의 마무리 로버트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노렸다.
하지만 9회 말 등판한 것은 김민이었다.
“킴이 또 나왔잖아.”
“탬파베이가 무모한 선택을 했습니다.”
* * *
3분 전 탬파베이 더그아웃.
“훌륭한 투구였네. 이제 로버트에게 배턴을 넘기는 것이 어떻겠나?”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라커룸에서 아이싱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민의 대답은 ‘노’였다.
“한 번 더 마운드에 오르고 싶습니다.”
“완봉을 노리는 건가?”
김민이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아닙니다. 오늘 경기에서 이기고 싶습니다.”
블렛소 투수 코치는 에이스의 결단을 지지했다.
“때로는 무리해 보는 것도 좋을 걸세. 킴은 그동안 너무 FM(Field Manual)이었으니까.”
그는 김민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 * *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낮게 떨어지는 커브에 삼진.
“또 커브에 당한 건가?”
“고비 때마다 킴이 커브를 던지고 있어.”
“대체 왜 커브에 당하는 거야? 킴의 커브는 그렇게 대단한 공이 아니라고.”
김민의 커브는 B클래스로 A클래스인 무시나나 S클래스인 지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타자들은 그의 커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는 커브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던지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치로도 이렇게 당했어.”
호이스트는 시애틀과 탬파베이의 경기를 떠올리곤 미간을 좁혔다.
‘커브를 노려야 해.’
4번 타자 오스번은 처음부터 커브를 노리고 들어갔다.
‘단 한 개의 공이면 충분하다.’
그는 2-2 카운트가 될 때까지 배트를 휘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2-2, 도망칠 수 없는 카운트다. 이번에는 반드시 커브가 온다!’
오스번의 말대로 2-2라면 투수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카운트.
김민은 그립을 강하게 쥐고는 승부구를 던졌다.
‘마지막 공이 되길!’
슉!
빠른 공이 바깥쪽으로 향했다.
‘커브가 아니야.’
오스번의 눈가에 실망한 빛이 서렸다.
노렸던 공이 아니라고 룩킹 삼진을 당할 수도 없는 노릇.
그는 배트를 움직였다.
‘널 쓰러뜨리는 건 윌리엄에게 맡기겠다.’
오스번은 가볍게 공을 밀어 1, 2루 라인을 뚫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공이 크게 휘어졌다.
‘스, 슬라이더!’
파앙!
미트에 공이 꽂힌 순간 주심이 경쾌한 제스처를 취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9이닝 무실점 7K.
“삼진! 삼진 아웃입니다! 킴! 양키스를 쓰러뜨렸습니다!”
“오늘 양키 스타디움에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루키의 패기가 디펜딩 챔피언을 무너뜨렸습니다!”
김민은 마운드에서 내려와 록튼에게 손을 뻗었다.
“최고의 게임이었어.”
록튼이 그와 주먹을 마주하며 말했다.
“킴, 오늘 경기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