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악의 제국 01
베이비 루스가 지은 집.
(The House That Ruth Built).
양키스 팬들은 이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베이비 루스가 없었다면 지금의 양키스도 없었어.”
“이곳은 그가 지은 집이지만 그를 위한 집이기도 하지.”
“당시를 보진 못했지만, 정말 대단했을 거야.”
김민은 양키 스타디움의 규모와 건축 기술에 새삼 놀랐다.
‘1930년대에 이런 스타디움을 지을 수 있었다니, 대단해.’
양키 스타디움의 개장은 1920년대였지만, 대대적인 개장을 한 것은 1930년대였다.
그래서 김민은 1930년대에 양키 스타디움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킴, 양키 스타디움에 대한 소감은 어때?”
에두아르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좀 낡았네요.”
“겨우 그것뿐이야?”
“조금 더 둘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라커룸을 빠져나가 관중석으로 향했다.
잠시 뒤, 양키스 스탭이 그를 막아섰다.
“여긴 관중석입니다.”
“탬파베이의 킴입니다. 조금 둘러보고 싶습니다. 안 될까요?”
스탭은 김민의 위아래를 살펴보곤 질문을 던졌다.
“킴이라면…… 그 이달의 루키 맞으시죠?”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2위를 차지했을 뿐입니다.”
그는 7월에도 호세에 막혀 2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싸움은 이치로와 호세, 2파전이었다.
하나 김민은 이 싸움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리그 MVP가 신인왕 싸움에서 질 리가 없지.’
2001년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과 MVP는 이치로의 몫이었다.
그는 무리해서 두 사람을 뒤쫓지 않으려 했다.
“혹시 사인 부탁할 수 있을까요?”
김민은 스탭에게 이름을 물어본 뒤, 오늘의 날짜와 이름을 같이 적어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스탭은 사인을 받은 뒤, 뒤로 물러섰다.
김민은 2층 관중석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전망이 좋아.”
그가 2층에 올라온 이유는 그라운드 위쪽에 불고 있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정도라면 플라이볼은 위험하겠어.’
트로피카나 필드는 폐쇄하여 돔구장이었기 때문에 바람의 세기나 방향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양키 스타디움은 달랐다.
허드슨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은 물론 멀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까지 계산해야 했다.
김민은 우측 펜스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양키 스타디움은 좌타자였던 루스를 위해서 우측 펜스를 짧게 설계했다. 이곳에 서 보니까 더 확실히 알겠어. 양키스의 우측 펜스는 위험해.’
양키스는 그 누구보다 양키 스타디움의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이점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라인업에 대거 좌타자를 기용했다.
베스트 라인업일 때, 9명의 타자 중 5명이 좌타석에 설 수 있었다.
반면 탬파베이에서 좌타 라인에 세울 수 있는 타자는 3명에 지나지 않았다.
“킴.”
그를 부른 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김민이 고개를 돌리자 훤칠한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시죠?”
“내 소개를 먼저 했어야 했는데, 늦었군. 케이먼이라고 하네.”
김민은 중년인의 대답에 멈칫했다.
“케이먼이라면…….”
“놀랄 필요는 없네. 양키 스타디움에 내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케이먼.
그는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단장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제게 무슨 일이시죠?”
“2층 관중석을 혼자 전세 낸 사람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지.”
“스탭에게 연락을 받은 겁니까?”
“아닐세. 내 사무실에서 여기가 아주 잘 보이거든.”
케이먼은 미소를 지으며 김민 옆에 앉았다.
“양키 스타디움에 대한 소감은 어떤가?”
“좋은 구장입니다. 다만…….”
케이먼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만?”
“우완 투수에게는 매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케이먼이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짧은 우측 펜스 때문인가?”
“파울 지역도 상당히 좁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패스할 수 있다면 패스하고 싶은 곳입니다.”
김민의 대답은 솔직하면서도 담백했다.
“월드시리즈에 가고 싶다면 패스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지.”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어느 팀이든 월드시리즈에 오르기 위해서는 플레이오프에서 양키스를 눌러야 했다.
“저곳은 앞으로 몇 시간 뒤 자네가 공을 던져야 할 곳일세.”
“그래서 걱정입니다.”
김민은 여전히 케이먼 옆에 서 있었다.
“언젠가 우리 팀에서 자네를 볼 수 있을까?”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하지만 몇 년 안으로는 힘들 겁니다.”
“빈스 때문이군.”
“그는 최저연봉으로 뛰는 투수를 트레이드할 사람이 아닙니다.”
케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자넬 데려오고 싶어도 빈스가 허락하지 않겠지. 텍사스는 벌써 퇴짜를 맞았다고 하더군.”
텍사스와 탬파베이의 트레이드 논의.
케이먼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자네를 노리는 팀이 생각보다 많아.”
케이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인연이 이어진다면 이 그라운드가 자네의 홈그라운드가 될 걸세.”
그는 통로로 향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젊은 친구, 행운을 비네.”
* * *
불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킴, 오늘은 늦었군.”
김민이 손을 들며 말했다.
“들러 볼 곳이 있어서 말이야.”
“기념품 상점은 아니겠지?”
“물론이지.”
탬파베이 불펜 리더는 여전히 에두아르드였다.
에두아르드는 이번 시즌 셋업과 미들맨을 오가면서 불펜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로버트가 보였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불펜 투수 중 독서를 가장 많이 하는 선수가 바로 로버트였다.
“로버트, 오늘도 부탁해.”
로버트가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킴, 오늘은 완봉하라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양키가 그걸 허락하겠어?”
김민은 로버트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마운드에 올라섰다.
“워밍업은?”
록튼의 물음에 김민이 대답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끝냈지.”
“킴, 좋은 곳은 함께 가야지.”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어.”
김민은 말을 마치곤 글러브를 착용했다.
“토스부터 시작할게.”
“오케이.”
팡! 팡!
공이 미트에 들어갈 때마다 좋은 소리가 났다.
포터 코치는 그 소리를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토스 캐치인데도 정확히 볼집에 공이 들어가게 하고 있어. 록튼의 캐칭 능력은 티노 이상이야.’
그는 록튼이 티노 이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포터, 뭘 보고 있는 건가?”
포터 코치에게 질문을 던진 이는 바이슨 수석 코치였다.
“배터리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선발은 킴이지?”
“그렇습니다.”
바이슨 수석 코치는 김민 덕분에 밤잠을 줄여 가며 시프트 전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저 친구는 천재야.”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재에 성격도 좋고, 부상만 없다면 롱런하겠어.”
“블렛소 투수 코치의 말을 들어 보면, 부상이 없는 폼이라고 합니다.”
바이슨 코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부상이 없는 폼은 없지.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부상 위험이 크지 않은 폼일 거야. 그건 그렇고, 오늘 경기 쉽지 않을 거야.”
“상대가 양키스니까요.”
악의 제국 양키스.
그들은 이 시기 과장을 조금 더해 밥 먹듯 월드시리즈를 우승하고 있었다.
“킴이 첫 경기를 잡아 준다면 스윕만은 면할 수 있겠는데…….”
“킴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탬파베이 코칭 스탭이 김민에게 거는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반면 뉴욕 양키스 타자들은 김민을 높이 보지 않았다.
“오늘 상대는 동양인 꼬마군.”
“몇 이닝이나 버틸까?”
“그래도 올스타잖아. 6이닝은 던져 주겠지.”
“그럼 6이닝 4실점으로 하지.”
타자들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데릭 지터가 라커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들 내기라도 하는 건가?”
“지터도 할 거야?”
“뭔데?”
“상대 선발이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이닝 맞추기.”
지터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오늘 탬파베이 선발은 킴이야. 얕보면 곤란해.”
“나도 알아. 킴, 동양인 루키잖아.”
“올스타라고.”
지터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자 1루수 터너가 끼어들었다.
“지터,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 없어. 탬파베이 올스타는 얼굴마담 같은 거니까.”
지터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터너, 킴은 생각보다 좋은 공을 던지는 투수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올스타에 뽑혔겠지. 하지만 이곳은 양키 스타디움이고, 그는 여기서 우리를 상대해야 해.”
지터가 한숨을 내쉰 순간 포사다가 불펜에서 돌아왔다.
“지터, 왜 표정이 좋지 않아?”
“다들 오늘 경기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고.”
포사다가 지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한 타순 돌면 다들 정신 차릴 거야.”
“그랬으면 좋겠지만…….”
“지터, 양키를 믿으라고.”
포사다는 경기 초반 김민에게 고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리 잘 던져도 오늘만큼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오늘 우리 선발 투수는 무시나니까.’
마이크 무시나.
통산 270승을 거뒀으며 5번 올스타에 뽑힌 레전드.
2001년 무시나는 부상으로 주춤한 클레멘스를 대신해 실질적인 에이스를 맡고 있었다.
“시간이야! 다들 글러브 챙기라고!”
포사다가 동료들에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라운드로 향했다.
1회 초.
무시나는 탬파베이를 상대로 양키 에이스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 주었다.
“세 타자 중 두 타자가 삼진이군.”
“정타는커녕 커트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
“저 커브가 문제야. 평범한 커브하고 완전히 다르다고.”
TV 앞에 모인 탬파베이 팬들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들은 곧 좁혔던 미간을 폈다.
탬파베이의 독심술사 김민이 마운드에 등판했기 때문이었다.
“킴이야.”
“킴이군.”
“킴, 양키스에게 탬파베이 에이스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 주라고.”
팡! 팡!
미트에 꽂힌 공이 좋은 소리를 냈다.
양키스 토린 감독이 김민을 주시하며 말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군.”
레토 수식 코치가 라인업을 다시 한번 검토하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루키가 이 시기까지 컨디션이 좋다는 것은 시즌 준비가 잘 되었다는 뜻이겠죠.”
“지터를 상대로 얼마나 할 수 있는지 한번 보도록 하지.”
주심의 경기 재개 사인과 함께 김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양키스의 캡틴이 첫 상대로군.’
2001년 데릭지터는 아직 양키스의 캡틴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민에게 양키스의 캡틴은 지터였다.
‘바깥쪽으로 하나.’
슉!
잘 제구된 공이 바깥쪽 코너로 향했다.
지터는 수비 시프트가 왼쪽으로 쏠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쪽 공을 정확히 노렸다.
‘호이스트의 말대로군. 시프트는 상관이 없어.’
딱!
날카로운 타구가 그대로 1루 라인 근처에 떨어졌다.
“파울!”
양키 팬들은 지터의 첫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파울이 되자 함성을 터트렸다.
“아아아!”
“정말 아까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갔다면 2루타인데 말이야.”
“시프트를 생각하면 3루타까지 노려볼 수 있는 타구였어.”
지터 역시 이번 타구는 아깝다고 생각했다.
‘너무 밀었어. 조금은 당겼어야 했는데.’
김민은 코너로 정확히 제구된 공을 밀어내는 지터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터의 컨택 능력은 역시 최상이군.’
록튼은 이치로에서 배트 컨트롤을 조금 빼고, 장타력을 높이면 딱 지터라고 생각했다.
‘킴, 어렵게 가야해. 지터는 쉽게 잡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니라고.’
2구 사인은 안쪽 패스트볼이었다.
시프트는 초구와 동일.
‘이번 시프트는 페이크가 아니라 진짜군.’
록튼은 고개를 끄덕이곤 미트를 내밀었다.
슉!
두 번째 공이 안쪽을 파고들었다.
‘원하는 코스가 아니야.’
지터는 이 공을 공략하지 않고 흘려보냈다.
팡!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 노 볼.
그러나 지터는 코너에 몰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번 타자를 상대로 로케이션을 가져간다는 건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이겠지.’
경기 전 브리핑에 따르면 김민은 여유가 있을 경우 바깥쪽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클린업이나 실점 위기에서는 좌우 로케이션을 철저히 지켰다.
“킴, 두 번째 스트라이크를 잡습니다!”
“지터를 상대로 유리하게 볼 카운트를 가져가는군요. 탬파베이의 젊은 에이스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호이스트는 김민이 안쪽으로 스트라이크를 넣는 것을 보곤 미간을 좁혔다.
‘유인구 없이 패스트볼만 2개, 그렇다면 다음 공은 스플리터인가?’
그는 김민의 다음 공으로 스플리터를 생각했다.
하지만 김민의 선택은 이번에도 패스트볼이었다.
‘오늘은 패스트볼이 괜찮아.’
슉!
높은 코스의 빠른 공.
지터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킴,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세 개 연속 패스트볼은 곤란해.’
그는 몸을 살짝 눕히면서 배트 각도를 조절했다.
이 각도에서 정확한 컨택이 이뤄진다면 공은 펜스를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대로 넘어가라!’
그러나 공은 배트에 닿지 않은 채 그대로 미트에 꽂혔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지터의 헛스윙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지터가 삼진이야.”
“94마일(151km)에 삼진이라고? 믿기지 않는군.”
지터는 헛스윙 이후 눈을 크게 떴다.
‘떠올랐어.’
그는 배터 박스에서 나오며 전광판을 확인했다.
‘94마일이라고? 94마일 패스트볼이 떠오를 수도 있는 건가?’
지터가 떠오르는 공을 상대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상대한 떠오르는 공은 대부분 97마일 (156km)이상이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포사다가 다가와 물었다.
“그 공이지?”
지터가 멈칫하면서 되물었다.
“알고 있었어?”
“올스타전에서 킴의 공을 받아 봤으니까.”
보스턴 레드삭스 전력분석팀은 경기 전 브리핑에서 김민의 떠오르는 공을 강조했다.
그러나 뉴욕 양키스 전력분석팀은 수비 시프트에 포커스를 맞췄기 때문에 그 부분을 소홀히 다루고 말았다.
물론 호이스트에게도 변명은 있었다.
“라이징 패스트볼인가? 하지만 그 공은 전체 패스트볼 중 10%도 되지 않아.”
그가 라이징 패스트볼을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은 라이징 패스트볼이 들어오는 비율이 9%로 매우 낮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김민은 1회 말 양키스의 세 타자를 상대로 30%라는 높은 라이징 패스트볼 비율을 보여 주었다.
“킴! 양키스의 1, 2, 3번을 삼지범퇴로 돌려세웁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도 독심술은 살아 있군요. 킴, 멋진 투구입니다.”
양키스 타자들은 1회 말이 끝나자마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녀석 평범한 루키가 아니야.”
“오늘 긴장해야겠군. 잘못하면 무시나의 승을 날릴 수도 있겠어.”
포사다가 장비를 챙기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한 타순이 아니라 한 이닝이면 충분했군. 킴, 확실히 대단한 투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