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4번 타자의 자존심 02
띠리리릭.
신호음이 몇 차례 울린 뒤 상대편이 전화를 받았다.
“크리빈, 무슨 일인가?”
그가 전화를 건 상대는 바로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단장 홀먼이었다.
“승리 축하라도 전하고 싶지만, 전화를 건 이유는 그게 아니야.”
텍사스의 크리빈 부단장과 탬파베이의 홀먼 단장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우리 플레이에 뭔가 문제라도 있었나?”
홀먼의 물음에 크리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플레이 문제는 아니야. 그런 것이라면 코칭 스탭을 통해 항의했겠지.”
“그럼 어째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한 건가?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어.”
“오늘 경기를 지켜보면서 자네 팀과 우리 팀의 약점을 알았거든.”
홀먼 입술 끝을 올렸다.
“두 팀의 부족함을 모르는 야구 전문가도 있던가? 빙 돌려 말하지 말게.”
“홀먼, 그래서 하는 말이야. 모두가 다 아는 그것을 어째서 아직도 메우지 못하고 있는 건가?”
탬파베이의 약점은 타력.
텍사스의 약점은 투수진이었다.
두 팀은 서로 다른 약점과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트레이드라도 하자는 소리 같군.”
“빙고.”
홀먼은 시큰둥했다.
“우린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창단이래 줄곧 꼴찌였지만, 이번 시즌은 볼티모어를 앞서고 있었다.
그는 이렇다 할 전력 보강 없이 이 정도 성적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탈꼴찌로 만족하는 건가? 홀먼,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한번 들어나 보긴 하지. 대체 누굴 데려가고 싶어서 그러나.”
크리빈이 짧게 말했다.
“킴.”
다음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뚝.
크리빈은 홀먼의 태도에 혀를 찼다.
“이 친구…… 대체…….”
그는 다시 홀먼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이윽고 홀먼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크리빈, 내 대답을 들었을 텐데?”
“우리 쪽 카드를 들어 보지도 않고 전화를 끊는 사람이 어디 있어.”
“킴은 트레이드 불가야.”
“그래도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좀 들어 보게.”
홀먼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좋아. 들어는 주지. 어디 한번 말해 보게. 그 트레이드인가 뭔가 하는 것을.”
“라이프, 어떤가?”
“라이프를?”
라이프는 텍사스의 5번 타자로 30홈런은 기본으로 해 주는 강타자였다.
크리빈이 빠르게 조건을 하나 더 내걸었다.
“덤으로 그렉스까지 처리해 주지.”
“그렉스와 킴을 라이프로 데려가겠다고?”
“물론 유망주 패키지도 있다네.”
홀먼은 이미 포텐이 터진 유망주와 언제 포텐이 터질지 모르는 복권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들어 볼 것도 없군.”
“홀먼!”
“크리빈 잘 듣게. 킴은 데뷔 시즌 올스타에 뽑힌 투수야. 그런 투수를 트레이드하는 멍청한 단장은 메이저리그에 존재하지 않아. 난 무능하긴 해도 멍청한 단장은 아닐세.”
크리빈은 이대로 그냥 판을 깰 수 없다고 생각했다.
“킴이 뛰어난 투수인 것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그는 아직 1시즌도 제대로 뛰지 않았어. 2년 차 징크스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에 비해 라이프는 5년 이상 검증된 강타자란 말일세. 탬파베이에서 라이프보다 뛰어난 타자가 있다면 한 번 이야기해 보게.”
그의 말대로 탬파베이에는 라이프보다 뛰어난 타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홀먼은 라이프로 김민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잘 듣게 크리빈, 킴은 우리 팀의 에이로드 같은 선수야. 라이프와 유망주 패키지로 내줄 수 있는 것은 부르스 정도일세.”
부르스는 지난 시즌부터 2시즌 연속 1선발로 활약하고 있는 투수였다.
그가 텍사스에 간다면 텍사스 투수진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크리빈이 원하는 것은 30세가 넘은 에이스가 아닌 20대 초반의 라이징 스타였다.
“부르스는 곤란하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킴은 트레이드 불가야.”
크리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홀먼, 생각이 바뀌면 연락 부탁하네.”
“킴으로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걸세.”
뚝.
전화를 먼저 끊은 쪽은 홀먼이었다.
크리빈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젊은 에이스의 비상, 홀먼……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진 말게.”
그는 김민이 비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팀으로 팀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텍사스전 승리로 김민은 시즌 9승을 달성했다.
데뷔 시즌 10승까지는 앞으로 단 1승.
그러나 그 1승이 쉽지 않았다.
토론토전은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음에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고, 보스턴과의 경기는 3회 초 쏟아진 비로 취소되고 말았다.
“3번 등판에 1승, 7월도 잘해야 2승인가?”
“중간에 올스타 브레이크가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김민과 록튼은 오늘 선발 로스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로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코스타 타격 코치는 두 사람이 몸을 푸는 것을 보곤 블렛소 투수 코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 혹시 그 이야기 들었나?”
“어떤 이야기?”
“킴이 그렉스의 홈런을 만들어 냈다는 것 말이야.”
블렛소 투수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텍사스전에서 상대 투수를 티핑(습관을 읽는 것)한 거 말인가?”
“신인 투수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블렛소 코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매덕스 같은 투수는 티핑을 넘어 주자, 심지어 플레이에 참여하지 않는 주루 코치의 행동에 관한 것까지 예측한다고. 킴도 매덕스와 같은 두뇌파 투수니까. 그 비슷한 것을 할 수 있겠지.”
“흠, 그렇다면 더그아웃에 전력분석팀이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건가?”
코스타 타격 코치는 기회가 된다면 김민의 능력을 활용해 보고 싶었다.
레이먼드 수비 코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김민에게 다가갔다.
두 코치가 멀리서 보고 있는 사이 그는 김민에게 직접 접근했다.
“킴, 오늘은 여유가 있어 보이는군.”
“비번이니까요.”
“그럼 날 좀 도와주겠나?”
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레이먼드 코치, 타자들한테 배팅 볼을 던져 주는 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레이먼드 코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킴, 선발 투수에게 어떤 코치가 배팅 볼을 주문을 하겠어. 내가 원하는 도움은 다른 거야.”
“그럼 시간을 내 보죠.”
레이먼드 코치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킴은 우리 팀 수비를 믿고 던지는 건가?”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전 수비를 믿고 던집니다.”
“흠, 언제부터 그랬지?”
“처음부터라고 대답하면 아마 거짓말이겠죠. 제가 수비를 완전히 믿기 시작한 것은 올스타전 이후였습니다.”
레이먼드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올스타전 이후 그라운드 볼이 증가했군.”
올스타전 이전 김민의 그라운드 볼과 플라이 볼 비율은 5:5였다. 그러나 올스타전 이후 그 비율은 6:4로 바뀌었다.
인조 잔디인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그라운드 볼 비율이 높다는 것은 수비를 믿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나 더 묻지. 킴은 우리 팀 내야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레이먼드 코치가 살짝 질문을 바꿨다.
“문제가 너무 많아서 지적하기 힘든 건가?”
“그건 아닙니다.”
“난 투수들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네.”
김민이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죽였다.
“시프트가 너무 적은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프트라고?”
“그렇습니다.”
레이먼드 코치는 김민이 선수가 아닌 자신을 지적하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흠, 내가 문제인가?”
“우리 팀 내야 수비수들은 리그 평균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데르센도?”
3루수 안데르센은 지역 신문에서 나쁜 수비로 몇 차례 평가절하를 당한 선수였다.
“안데르센은 그라운드 볼 처리가 나쁘긴 하지만 어깨가 좋습니다. 그래서 리그 평균 정도의 수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프트 문제는 투수와 내야의 협동 플레이입니다.”
레이먼드 코치는 김민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프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야. 킴은 확실히 다른 선수들과 달라.’
김민이 계속해서 말했다.
“투수가 오른손 타자에게 커터를 던지면 타자의 타구는 대부분 1, 2루 사이에 형성됩니다. 하지만 우리 팀 수비수들은 정 위치에 서 있을 뿐입니다. 이래서는 좋은 수비를 하기 힘들죠.”
그는 조금 더 능동적으로 수비 시프트를 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수비 시프트는 볼 배합과 연동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대 중반 메이저리그는 시프트의 전성기라 불릴 정도로 수비 시프트 비율이 증가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수비 시프트 사용 비율은 그리 크지 않았다.
“볼 배합과 연동된 수비 시프트라.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벤치에서 볼 배합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레이먼드 코치의 물음에 김민이 답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투수가 볼 배합을 할 경우 포수가 수비 시프트를 조정할 수 있으니까요.”
포수의 수비 시프트 조정.
메이저리그에서 이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텍사스의 주전 포수 이반 로드리게스는 코치의 사인 없이도 스스로 내야수들에게 수비 시프트를 지시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 막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록튼에게 그 권한을 위임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레이먼드 코치가 김민에게 물었다.
“킴은 록튼에게 시프트 권한을 주고 싶은 건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선발 경기에서만이라도 그렇게 했으면 합니다.”
레이먼드 코치는 김민과 이야기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 배합과 연동된 수비 시프트,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시험해 볼 필요는 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김민에게 말했다.
“오늘 자네가 말한 것, 내가 감독님께 건의해 보도록 하지.”
“꼭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습니다.”
이틀 뒤.
김민의 선발 등판 경기.
레이먼드 코치는 록튼을 불러 시프트 사인을 직접 내도 괜찮다는 지시를 내렸다.
“제가 시프트 사인을 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록튼, 킴이 최고의 공을 던질 수 있도록 자네가 도와주게.”
록튼은 올스타전 브레이크 이전부터 김민과 수비 시프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제 킴이 시프트 이야기를 하더라니, 이것 때문인 것 같군.’
그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코치,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1회 초.
디트로이트 타자들은 탬파베이의 새로운 수비 시프트에 크게 놀랐다.
“저 시프트는 뭐야? 좌타자도 아닌데 시프트를 냈어.”
“오른쪽으로 치우친 수비는 바깥쪽으로 공을 던지겠다는 뜻인가?”
“이상한 일이야. 저렇게 시프트를 취해 버리면 구종을 미리 타자에게 알려 주는 게 되잖아.”
타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뭐야? 이 이상한 시프트는…… 바깥쪽 공이라고 광고라도 하는 건가?’
그는 높은 확률로 바깥쪽으로 공이 온다고 생각했다.
슉!
김민이 던진 초구는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이었다.
‘오른쪽으로 시프트를 해 놓고 안쪽 공이라고? 시프트는 페이크인가?’
탁!
배트 안쪽에 빗맞은 공이 3루수 정면으로 흘러갔다.
“3루!”
“오케이!”
디트로이트 타격 코치는 형편없는 타구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시프트를 펼쳐 타자의 무게 중심을 바깥쪽으로 이동시킨 뒤, 안쪽으로 승부한다. 이건 시프트를 함정 대신 사용한 건가?’
3루수 안데르센은 타구를 잡은 뒤 1루에 빠르게 송구했다.
팡!
“아웃!”
블렛소 투수 코치는 새로운 시프트를 보곤 레이먼드 수비 코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이먼드, 저건 뭐지?”
“나도 잘 몰라. 시프트에 관한 것은 록튼에게 일임했거든.”
“록튼에게?”
“루키 포수에게 시프트를 맡기는 게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킴이 강하게 원했어.”
블렛소 투수 코치는 김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흠, 시프트를 이용한 페이크인가? 킴의 볼 배합이 한 단계 더 진화했군.’
양팀 코칭 스탭은 김민이 수비 시프트를 이용해 타자를 속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민과 록튼 배터리는 타자를 속이기 위해 수비 시프트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3루수 안데르센의 수비 위치를 조정하기 위해서 수비 시프트를 펼친 것뿐이었다.
‘안데르센은 좌우 수비 범위가 넓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타구가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야 해.’
2번 타자 로만.
김민과 록튼 배터리는 이번에도 시프트를 사용했다.
로만은 오른쪽으로 치우친 수비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또 시프트잖아.’
그는 절대 속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번이나 같은 페이크를 쓰다니, 날 바보로 아는 모양이군.’
로만은 안쪽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췄다.
그러나 김민이 던진 공은 안쪽이 아닌 바깥쪽이었다.
슉!
빠른 공이 포수 미트에 꽂혔다.
“스윙 스트라이크!”
로만은 헛스윙 이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큭, 완전히 당했어.’
디트로이트 코칭 스탭은 탬파베이의 새로운 무기에 당황했다.
“탬파베이가 시프트를 무기로 꺼냈군.”
“저런 시프트는 정타가 나오면 깨지겠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타자는 정확한 타구를 날리기 힘들겠지. 이거 쉽지 않은 경기가 되겠어.”
수비 시프트의 적극적인 사용은 김민과 록튼이 생각하지 못한 강한 효과를 발휘했다.
탁!
배트 끝에 맞은 공이 2루수 정면으로 흘러갔다.
“또 땅볼입니다.”
“완전히 당했어. 타자가 히팅 포인트를 전혀 잡지 못하고 있어.”
탬파베이 수비수들은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땅볼 타구를 처리했다.
“탬파베이! 좋은 수비입니다.”
“탬파베이가 1회 초부터 적극적으로 수비 시프트를 사용해 상대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반 감독, 탁월한 용병술입니다.”
중계진은 새로운 시프트 전술이 이반 감독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이반 감독은 김민과 록튼 배터리가 들고나온 전술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두 친구는 루키답지 않은 노련함이 있어.”
김민은 마지막 타자를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하곤 이닝을 마쳤다.
“삼진은 하나도 잡지 못했지만, 겨우 공 5개로 1이닝을 처리했어.”
“대단히 효율적인 투구입니다. 저런 식이라면 오늘 경기 완투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김민의 완투는 디트로이트에게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