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4번 타자의 자존심 01
1회 말.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바로 선취점을 뽑아냈다.
“탬파베이, 어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듯 초반부터 힘을 냅니다.”
“롤러코스터 타선이군요. 하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두 경기 중 한 경기는 확실히 잡을 수 있다는 말이 되니까요.”
텍사스 부단장 크리빈은 흔들리는 선발 투수를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탬파베이가 힘을 내고 있는 게 아니야. 선발 투수가 알아서 무너지는 거지.”
올스타 브레이크 동안 휴식이 독이 된 것일까?
텍사스 레인저스 3선발 오닉은 제대로 스트라이크를 꽂지 못했다.
‘지난 오프 시즌, 알렉스를 데려온 건 좋았어. 하지만 투수진을 보강하지 못했다는 것이 뼈아프군.’
크리빈은 단순한 단장 보좌에 머무르지 않고 단장과 함께 팀을 꾸리는 적극적인 부단장이었다.
‘이번 겨울 어떻게든 투수진을 보강해야 해.’
그는 투수진을 보강하지 않고는 절대 플레이오프권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탁!
빗맞은 타구가 중견수 머리 위에 떴다.
“3루 주자 스타트를 끊습니다.”
“공이 홈으로 오지만 넉넉합니다.”
탬파베이의 리드는 순식간에 3점으로 불어났다.
탬파베이 3:0 텍사스
이반 감독은 초반 리드에 여유를 되찾았다.
“어제와는 다들 다르군.”
코스타 타격 코치도 오늘만큼은 표정이 밝았다.
“어제는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반면 오늘은 제대로 공을 보고 때리는군요.”
그러나 모두가 밝은 얼굴인 것은 아니었다.
더그아웃 한쪽에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선수가 있었다.
그는 바로 탬파베이의 4번 타자 그렉스였다.
‘시작부터 땅볼. 오늘도 안타를 치지 못한다면 타율은 0.250이하로 내려가게 되겠지.’
그렉스는 후반기 첫 경기에서 시즌 11호 홈런을 때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후 7타석 연속 침묵.
어제 경기는 한 번의 출루도 없이 4타수 무안타.
마이너리그에서 갓 올라온 신인이라면 몰라도 그는 팀 내 최고 연봉인 연봉 820만 달러(104억 원)를 받는 스타였다.
‘약을 버린 게 실수였나?’
스테로이드로 쌓아 올린 시즌 40홈런.
하지만 스테로이드는 영원할 수 없었다.
몸 곳곳에서 나타난 부작용 징후.
그렉스는 약물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35세 타자가 30홈런을 넘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약물을 버린 그렉스는 어느새 평범한 타자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건가? 아니, 그럴 수는 없어!’
그는 그라운드를 주시하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4번 타자로서의 자존심.
그렉스는 아직 그것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2회 초.
텍사스의 선두 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다.
김민은 안타를 맞은 다음 로진백을 만졌다.
‘바깥쪽에 잘 제구된 스플리터를 그렇게 걷어 낼 줄이야.’
안타를 친 알렉스 로드리게스, 그는 1루 베이스를 밟은 뒤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위험했어. 초구부터 그런 스플리터를 던지다니, 하마터면 초구에 땅볼 아웃될 뻔했잖아.”
그는 배트 컨트롤이 조금만 나빴더라도 공을 걷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속은 별로 빠르지 않은데 무브먼트가 좋아. 타석에 서 보니 확실히 알겠어.’
1루수 그렉스가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말했다.
“알렉스, 그걸 어떻게 때린 거야? 분명 아웃되는 코스였는데 말이야.”
“신이 도와주신 것 같아.”
“신? 혹시 그거 아니고?”
그렉스가 말한 그것은 약물이었다.
그러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난 아직 그걸 쓸 나이가 아니야.”
탁!
빗맞은 공이 3루수 안데르센에게 향했다.
안데르센은 빠르거나 불규칙한 타구에 약했지만, 이런 평범한 타구까지 놓치는 한심한 수비수는 아니었다.
그는 침착하게 공을 잡아 1루수 그렉스에게 송구했다.
팡!
“아웃!”
라이프가 아웃되는 사이 1루 주자가 2루에 들어갔다.
“원 아웃 주자 2루입니다.”
“공격하는 쪽과 수비하는 쪽, 양쪽 모두 이득을 가져갔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은 5번 타자 라이프를 3루 땅볼로 잡아내곤 모자를 고쳐 썼다.
‘1아웃 2루. 아웃 카운트를 하나 잡았지만, 아직은 공격하는 쪽이 더 유리해.’
그는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빠른 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투수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알렉스의 빠른 발은 짧은 안타로도 득점을 가능하게 만들지. 하위 타순이라고 얕보지 말고 집중해야 해.’
록튼은 알렉스의 빠른 발이 도루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40-40을 해낸 준족이야. 언제든 뛸 수 있어. 절대 방심해선 안 돼.’
긴장한 배터리와 달리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주루에 큰 욕심이 없었다.
‘오른손 투수를 상대로 3루 도루를 하는 것은 좌투수를 상대로 2루 도루를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야. 게다가 이 경기는 1, 2점으로 어떻게 되는 경기가 아니잖아. 안타가 나오면 뛰고, 그렇지 않으면 베이스를 지키는 게 나아.’
TV 중계진은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주루보다는 방금 아웃된 라이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반기 20홈런의 주인공 라이프가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3루 땅볼로 물러났습니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커터를 따라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저런 코스라면 그냥 버려도 되는 것인데 말이죠.”
“라이프가 성급했다. 이 말씀이신가요?”
“1회 말 빼앗긴 3점을 너무 생각한 것 같습니다. 빨리 따라가는 점수를 뽑아야 한다. 그런 초조함이 좋지 않은 공에 배트를 내게 만든 것 같습니다.”
블렛소 투수 코치는 단순히 초조함 때문에 타자가 배트를 낸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올스타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 킴의 무브먼트가 더 좋아졌어.’
바이슨 수석 코치는 김민의 구위가 좋아진 것이 일주일의 휴식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20대 초반 투수들은 체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30대 투수들의 절반이다. 킴도 마찬가지. 일주일을 쉬면서 충분히 체력을 회복했을 거야.’
김민은 집중력 있는 투구로 6번 타자를 삼진, 7번 타자를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하곤 이닝을 마쳤다.
“킴, 텍사스의 폭발적인 타선을 잘 막아 냈습니다.”
“텍사스로서는 아쉬운 2회 초입니다. 선두 타자를 스코어링 포지션까지 보냈지만, 후속타가 터지질 않았습니다.”
텍사스의 크리빈 부단장은 김민이 텍사스에서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다.
‘후…… 그랬다면 지금 9승이 아니라 15승쯤을 노리고 있을 테지.’
그는 머릿속으로 탬파베이와 트레이드 카드를 맞춰 보았다.
‘탬파베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아마 돈.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NBA와 달리 현금을 바로 줄 수는 없지. 가능한 것은 먹튀라 불리는 선수를 처리해 주는 정도.’
탬파베이에 먹튀가 있다면 4번 타자 그렉스 정도였다.
‘그렉스와 함께 킴을 받는 대신 유망주 2, 3명과 우리 팀 5번 타자 라이프를 내준다면…….’
그는 탐욕스러운 구단주 빈스라면 혹시 모른다고 생각했다.
‘딜이 성립한다면 알렉스와 킴을 내세워 다음 시즌은 플레이오프를 노릴 수 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시나리오였다.
딱!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주자가 2루에 들어갔다.
“탬파베이! 2회 말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듭니다.”
1사 후 2루타를 때려낸 것은 후반기 처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록튼이었다.
“록튼이 타석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준다면 탬파베이에 새로운 활력이 될 겁니다.”
그렉스는 록튼이 대기 타석에 들어가기 전 김민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보통 투수와 포수의 이야기라면 다음 이닝이나 이전 이닝의 볼 배합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민과 록튼은 조금 달랐다.
두 사람은 경기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번에 록튼이 적시타를 때렸을 때도 킴이 뭔가를 이야기해 준 것 같았어.’
그렉스는 김민과 록튼의 대화가 안타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킴, 다음은 어떨 것 같아?”
김민이 그렉스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다음이라니요?”
“칼튼 말이야. 안타를 칠 수 있을 것 같아?”
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렉스가 김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사람들이 자네를 독심술사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 그 별명이 진짜라면 다음 상황을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미래를 예측하는 건 독심술사가 아니라 예언가라고 합니다만.”
김민은 어깨를 으쓱하곤 시선을 그라운드로 돌렸다.
딱!
날카로운 타구가 유격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갔다.
“아! 아쉬운 타구입니다!”
“이건 에이로드(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별명)가 안타를 하나 훔쳤군요.”
김민은 역시 에이로드라고 생각했다.
‘배트가 공을 때리기 직전 스타트를 끊었어. 저건 타구가 어느 방향으로 올 것인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야.’
“록튼의 안타를 만들어 준 건 킴이지?”
그렉스의 계속된 질문에 김민이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까?”
“난 자네가 상대 투수의 볼 배합을 읽고 그것을 록튼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해.”
“설마요.”
“그게 아니라면 록튼의 배트가 살아난 게 설명이 안 돼.”
김민이 시선을 다시 그라운드로 돌리며 말했다.
“전 볼 배합을 말해 준 적이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사실이었다.
김민은 상대 투수의 볼 배합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가 록튼에게 가르쳐 준 것은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 취하는 자세와 습관, 흔히 팁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럼 대체 뭘 가르쳐 준 거야?”
“팁을 좀 가르쳐 준 것뿐입니다.”
“팁?”
“저 투수, 사인이 길어지면 대부분 패스트볼이더라고요.”
그렉스는 피칭 팁을 알아내는 것은 볼 배합을 꿰뚫어 보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정말인가?”
“아닐 수도 있죠.”
그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 타석에서 시험해 보면 알겠지.”
2번 타자 카를로스가 아웃되자 그렉스가 배트를 들고 대기 타석으로 향했다.
‘킴이 말한 팁이 사실이라면 이번 타석에서 타점을 올릴 수 있을 거야.’
그는 찬스가 자신의 타석까지 돌아오길 빌었다.
딱!
초구를 공략한 안데르센의 적시타.
“록튼, 짧은 안타에 홈으로 파고듭니다! 공도 홈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촤아아악!
슬라이딩과 함께 록튼이 먼저 홈플레이트를 터치했다.
“세이프!”
이반 로드리게스는 미트를 들며 터치가 빨랐다고 항변했지만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록튼이 홈에서 세이프! 이것으로 탬파베이가 4점을 앞서 갑니다.”
“오늘 경기 양상은 어제 경기와 정반대이군요. 탬파베이의 압도적 리드입니다.”
4번 타자 그렉스는 주자를 1루에 두고 타석에 들어섰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쉰 그렉스.
이반 로드리게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한숨을 내쉬어.”
그렉스가 고개를 이반 로드리게스에게 돌렸다.
“퍼지, 다 자네 때문이야.”
“내가 뭘?”
“자네의 교묘한 볼 배합 때문에 7연 타석 무안타라고.”
이반 로드리게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차전에 홈런을 쳤잖아. 그걸로 참아 달라고.”
“안 돼.”
그렉스는 굳은 표정으로 배트를 들었다.
이반 로드리게스는 그렉스까지 내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경기를 포기하기에는 일러, 여기서 그렉스를 잡고 이닝을 마친다.’
그는 신중하게 투수와 사인을 교환했다.
그렉스는 배터리의 사인이 길어지는 것을 깨닫곤 배트를 세게 쥐었다.
‘킴의 말대로라면 이번 공은 패스트볼이다.’
어느 쪽 코스로 날아올지는 몰랐지만, 일단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췄다.
‘온다!’
슉!
빠른 공이 바깥쪽 코스로 날아왔다.
그렉스는 그 공을 마음먹고 때렸다.
따악!
이반 로드리게스는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장타를 직감했다.
‘이건 크다.’
잠시 뒤, 캐스터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정말 큽니다!”
트로피카나 필드를 채운 팬들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멀리 날아가는 공에 시선을 집중했다.
탁!
전광판 바로 옆 떨어진 타구.
“홈런! 투런 홈런입니다! 그렉스! 이번 시리즈 두 번째 홈런을 팀에 선사합니다!”
“그렉스, 타율은 낮지만 아직 한방이 건재하군요.”
그렉스는 다이아몬드를 돌며 생각했다.
‘킴, 정말로 무서운 친구군.’
이반 로드리게스는 그렉스가 정확히 패스트볼을 걷어 올린 것을 보곤 혀를 찼다.
‘타이밍이 완벽했어. 처음부터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온 모양이군.’
그렉스는 더그아웃에 들어간 뒤 김민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친구, 자네 말 대로였어.”
김민이 그와 주먹을 마주하며 말했다.
“아마 다음 경기에는 팁을 고치겠죠.”
“오늘 홈런 정말 고마워. 경기가 끝나면 내가 한 턱 크게 쏘지.”
“록튼과 함께 연구한 거니까…….”
그렉스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케이. 록튼도 초대하지.”
오닉은 그렉스의 홈런에 완전히 폼이 무너져 버렸다.
그는 다음 타자를 볼넷으로 내주곤 마운드를 내려갔다.
“오닉이 2이닝을 채우지 못하다니…….”
“텍사스 투수진은 재앙 수준이야.”
크리빈 부단장은 오닉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는 더욱 간절히 김민을 원하게 되었다.
‘킴이 올 수만 있다면 알렉스와 이반을 뺀 모두를 내줄 수 있어.’
김민은 크리빈이 보고 있는 앞에서 위력투를 선보였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8회 초 마지막 타자를 잡은 김민.
그의 오늘 피칭은 다음과 같았다.
8이닝 1실점 무사사구.
“킴, 텍사스 타선을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2루타 하나 빼고는 제대로 된 장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퍼지조차도 오늘은 안타를 때리지 못했습니다.”
크리빈이 마운드를 내려가고 있는 김민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89개로 8이닝이라. 정말 가지고 싶은 투수야.”
그는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휴대폰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