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머니 볼 03
뉴욕 양키스의 호이스트와 올드라인은 김민의 군더더기 없는 운영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저렇게 던질 수 있는 투수도 있군.”
“경기를 보니 알겠습니다. 킴은 단순히 운이 좋은 친구가 아니군요.”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
이 간단한 명제를 김민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투수는 드물었다.
“난 파출리아 감독이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하군.”
경기가 이대로 흘러간다면 오클랜드의 연승은 4에서 끝이었다.
“용병술이 뛰어난 파출리아 감독이라고 해도 쓸 카드가 마땅치 않을 겁니다. 굳이 쓴다면 대타 카드 정도인데…… 오클랜드에는 대타 요원이 많지 않습니다.”
오클랜드는 머니 볼을 지향하는 만큼 선수층이 두텁지 못했다.
호이스트는 그래도 파출리아 감독이면 뭔가를 보여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음 회 기습 번트 같은 변칙 작전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6회 말.
오클랜드의 에이스 지뉴는 다시 한번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어 승부를 7회로 끌고 갔다.
“한 점 차이군.”
올드라인은 스탑 워치를 꺼내 김민의 투구수를 체크했다.
“64개입니다. 이거 완봉 페이스군요.”
이반 감독과 블렛소 투수 코치도 김민의 투구수를 매회 체크하고 있었다.
“오늘은 길게 갈 수 있을 것 같군.”
“킴이 적어도 8회까지는 맡아 줄 겁니다.”
블렛소 투수 코치는 김민이 8회까지 막은 다음 마무리 투수인 로버트를 9회 초에 투입하고자 했다.
‘킴과 로버트의 조합이라면 오클랜드를 1점으로 막아 낼 수 있다.’
오늘 이긴다면 최소한 스윕은 막을 수 있었다.
‘상대를 스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윕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한심하지만, 어쨌든 스윕만은 막아야 해.’
김민이 마운드로 향하자 홈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킴! 킴! 킴!”
이윽고 중계 카메라가 그의 저지를 휘두르는 팬을 클로즈업했다.
“등 번호 30번이군요!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킴의 인기는 절대적입니다.”
“이대로라면 킴이 트로피카나 필드의 첫 번째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존의 선발 삼총사는 탬파베이에서 데뷔한 것이 아니라 다른 메이저리그 팀에서 활약한 뒤 팀에 합류한 것이었다.
탬파베이 마이너리그팀을 거쳐 메이저리그 선발로 합류한 것은 김민을 제외하면 카이번과 다닐로프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카이번과 다닐로프는 스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남기지 못했다.
한마디로 팀의 주축 선수로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것은 김민뿐이었다.
“킴이 록튼과 초구 사인을 주고받습니다.”
“초구는 아마 바깥쪽이겠죠.”
“시청자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킴의 바깥쪽은 유명합니다.”
배터 박스에 들어선 것은 6번 타자 영.
그는 처음부터 김민의 바깥쪽 스플리터를 노리고 들어갔다.
‘초구나 2구 중 하나는 분명 바깥쪽에서 떨어진다.’
슉!
바깥쪽 빠른 공.
‘살짝 떨어지면 아주 좋을 텐데 말이야.’
영은 좋은 타이밍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큰 바운드를 일으켰다.
배트가 나간 타이밍은 좋았지만, 히팅 포인트가 좋지 않았다.
‘스플리터가 아니라 패스트볼이었군.’
록튼은 크게 튀어 오른 볼을 보고 2루수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2루!”
2루수 칼튼은 콜이 나오기 전부터 자신이 공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바운드가 너무 크잖아! 어떤 타이밍으로 잡지? 투 바운드? 아니면 쓰리 바운드?’
타자인 영이 빠른 선수였다면 무조건 투 바운드였다.
그러나 영은 빠르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타자가 영이니, 쓰리 바운드로 가자.’
칼튼은 안정감 있게 공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수비 코치도 칼튼의 판단을 지지했다.
‘이런 타구는 정확히 잡아 송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두르면 곤란해.’
칼튼은 몸을 낮추고 공의 바운드를 읽었다. 그리곤 마지막 세 번째 바운드에 글러브를 내밀었다.
‘이대로 잡는다.’
불규칙 바운드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툭.
글러브 옆에 맞은 공이 2루 베이스 쪽으로 흘렀다.
“공이 글러브를 맞고 굴절됩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칼튼의 실책.
칼튼은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공은 이미 그의 수비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
“유격수 유칼리스가 커버합니다. 하지만 타자 주자가 그사이 1루 베이스를 밟습니다.”
노 아웃 주자 1루.
오클랜드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킴에게는 6회에 이어 또 한 번의 위기이군요.”
칼튼은 실책 직후 김민에게 미안하다는 사인을 냈다.
김민은 그 사인에 오른손을 들었다.
“괜찮아.”
- 수비가 실책을 저지르는 것은 세금과 같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민은 투수들에게 야수들의 실책을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하루에 실책을 두 개나 당하니, 어깨가 무거워졌다.
‘피할 수 없는 세금이지만, 너무 무거울 때가 있어.’
그는 1루 주자를 확인하곤 공을 글러브에 넣었다.
영은 아마 도루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침착하게 타자의 타구를 확인하고 움직일 테지.’
다음 타자는 7번 타자 테일러.
테일러는 오클랜드에서 7번을 치고 있었지만, 탬파베이에 오면 클린업을 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타자였다.
‘벤치 뎁스는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만 주전 라인업은 경쟁력이 있어.’
김민은 그가 배트를 세우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거 느낌이 좋지 않은데.’
투수들의 육감.
이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투수들은 이 육감이 높은 확률로 맞아떨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김민도 마찬가지였다.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을 때는 어김없이 안타를 맞곤 했다.
‘볼넷을…….’
평소라면 미련 없이 테일러를 걸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주자가 1루에 있었다.
‘후유…… 무사 주자 1루에서 다음 타자를 거를 수는 없지. 여기서는 무조건 승부야.’
김민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후흡…….”
그는 4번 타자 제레미를 앞에 뒀을 때보다 더 큰 부담을 느꼈다.
“후…….”
긴 숨을 내뱉은 뒤, 세트 피치에 들어갔다.
슉!
빠른 공이 타자 안쪽을 향해 날아갔다.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인가?’
테일러는 그 안쪽을 절묘한 배트 컨트롤로 때려 냈다.
딱!
잘 맞은 타구는 소리부터 달랐다.
‘역시!’
김민이 혀를 찬 순간이었다.
2루수 칼튼이 번쩍 뛰어오르면서 그 잘 맞은 타구를 훔쳐 냈다.
“2루수 칼튼! 묘기를 보여 줍니다!”
“마치 원숭이처럼 뛰어올랐군요. 칼튼, 조금 전 실책을 만회하는 좋은 수비입니다!”
김민은 눈을 크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저걸 잡았어.’
1루 주자 영은 칼튼의 호수비에 황급히 1루로 귀루했다.
“세이프!”
‘젠장…… 저걸 잡다니, 사람인 거야?’
칼튼은 글러브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킴, 이걸로 빚은 갚았어.”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이자까지 듬뿍이군.”
올드라인은 칼튼의 호수비를 보곤 푸념하듯 말했다.
“아까 말한 운이 좋은 투수가 아니라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킴은 그 누구보다 운이 좋은 투수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군. 빠졌다면 무사 1, 3루였을 텐데 말이야.”
칼튼의 호수비로 위기를 넘긴 김민.
그는 8번과 9번을 잇달아 플라이로 잡아내곤 7회 초 수비를 마쳤다.
“킴, 오늘 경기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뉴가 역으로 부담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오클랜드의 후크 선장 지뉴는 6이닝 2실점으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록튼은 지뉴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저 커브는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김민이 그에게 물병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커브를 안치면 되잖아.”
록튼은 그의 말에 혀를 찼다.
“어떻게 안 칠 수가 있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온다고.”
“3개 모두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지는 않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타이밍을 패스트볼에 맞춰.”
김민이 타자에게 조언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록튼이 다시 묻자 김민이 대답했다.
“칠 수 없다면 버리는 게 당연하잖아.”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
이것은 사실 타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선두 타자가 아웃되자 록튼이 대기 타석에 들어섰다.
“타순이 좋지 않아. 지뉴는 실점 없이 이번 회를 마무리할 수 있겠어.”
올드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이스트의 말을 받았다.
“지뉴에게 탬파베이 하위 타선은 손쉬운 상대일 겁니다.”
그는 손에 쥔 펜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뭘 적고 있나?”
“적는 게 아니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린다고?”
“지뉴의 커브 말입니다. 단순히 점을 찍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서 말입니다.”
12시 방향에서 6시 방향으로 떨어지는 지뉴의 커브는 단순히 한 줄로 그릴 수 없는 것이었다.
올드라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지뉴의 커브는 위에서 아래로 크게 떨어지지만, 떨어지는 과정에서 미묘하게 각도가 변합니다.”
호이스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각도가 변한다고? 이상한 일이군. 다른 구장이라면 바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곳은 폐쇄형 돔구장이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순간 8번 타자 유칼리스가 기습 번트를 시도했다.
“칠 수 없으니 댄 번트군.”
“그래도 이건 타이밍이 좋습니다. 유칼리스의 재치 있는 플레이입니다.”
지뉴가 급히 뛰어나와 공을 잡았지만, 유칼리스의 발이 조금 더 빨랐다.
“세이프!”
유칼리스는 세이프 판정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칼리스! 번트 안타를 성공시킵니다.”
“빠른 발을 이용한 안타군요. 이건 유킬리스의 재치도 있지만, 오클랜드의 내야수들이 방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뉴는 1루에 나간 주자를 보곤 소매로 땀을 닦았다.
‘내야수들이 방심한 게 아니야. 번트의 방향이 좋았다고.’
그는 유칼리스도 메이저리그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타자는 록튼인가? 이 친구는 유칼리스하고 달라. 킴이 아니었다면 메이저리그에 있을 수 없었을 거야.’
지뉴는 록튼에게 메이저리그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오클랜드의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킴의 전담 포수인가? 그렇다면 자동 아웃이군.’
록튼은 김민의 선발 경기를 제외하면 출전 빈도가 극히 낮았다.
‘루키 투수에게 전담 포수라니, 탬파베이가 사치를 부리고 있어.’
탬파베이 선수들은 록튼을 잡아낸 다음 1번 타자 칼튼을 잡아 이닝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슉!
지뉴가 자신 있게 초구를 던졌다.
‘일단 카운트를 하나.’
초구에 던진 커브는 그대로 아래쪽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했다.
“스트라이크!”
지뉴는 역시라고 생각했다.
‘꼼짝도 못 하는군. 록튼은 그저 공 받는 기계에 지나지 않아.’
록튼은 김민의 조언대로 커브를 버리고 패스트볼을 기다렸다.
‘패스트볼…… 패스트볼만 생각하자.’
그는 머릿속으로 패스트볼 타이밍을 그리고 또 그렸다.
슉!
두 번째 공도 커브.
이번에는 바깥쪽에 걸치는 스트라이크였다.
“스트라이크!”
카운트는 순식간에 0-2로 나빠졌다.
“록튼, 빠르게 코너에 몰렸습니다.”
“록튼은 좋은 포수이긴 하지만 좋은 타자는 아니죠. 여기서는 진루타 정도밖에는 바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록튼의 안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김민만은 달랐다.
‘커브의 잔상을 지울 수 있다면, 패스트볼을 쳐 낼 수 있을 거야.’
지뉴는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다음 그립을 고쳐 잡았다.
‘패스트볼 타이밍이군. 두 개의 커브를 보여줬으니, 이번 공은 마치 100마일(161km) 광속구처럼 느껴질 테지.’
그는 망설임 없이 패스트볼을 던졌다.
슉!
다음 순간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따악!
“큽니다! 이것은!”
캐스터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뉴는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뭐야? 왜 공이 저렇게 높이 떠오른 거야?’
중견수 자일스는 공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이건…… 어쩔 수 없군.’
오클랜드 더그아웃은 높이 날아가는 공을 그냥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 시합은 틀렸어.’
탁!
관중석 상단에 떨어진 공이 크게 튀어 올랐다.
“투런 홈런! 록튼의 투런 홈런입니다! 이 홈런은 큽니다!”
캐스터의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정지되어 있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지뉴, 7회 말에 치명타를 맞았습니다. 록튼의 투런 홈런이 승부에 쐐기를 박습니다.”
김민은 더그아웃 밖으로 나와 박수를 쳤다.
“록튼! 나이스 배팅!”
록튼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손에 감각이 없었어.’
완벽한 타이밍으로 때린 공은 묵직한 감각 대신 가벼운 느낌만을 남겼다.
록튼이 감각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록튼! 록튼!”
팬들의 환호와 함께 록튼이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탬파베이 4:1 오클랜드
빌리 빈은 경기를 포기했다는 듯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탬파베이 루키 배터리에게 완전히 당했군. 어디 가서 하소연도 할 수 없겠어.”
호이스트는 지뉴와 오클랜드가 록튼을 너무 얕봤다고 생각했다.
“커브 2개, 그리고 패스트볼.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지만, 코스가 아주 나빴어.”
“한가운데였죠?”
“맞아.”
그는 바깥쪽으로 던졌다면 안타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홈런은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해설자의 말대로 록튼의 홈런은 승부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오클랜드는 9회 말 1점을 더 따라갔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로버트가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탬파베이가 킴민의 호투와 록튼의 투런 홈런에 힘입어 강적을 제압했습니다.”
탬파베이 4:2 오클랜드
팬들은 오늘만큼은 김민이 아닌 록튼의 이름을 연호했다.
“록튼! 록튼!”
경기가 끝난 뒤, 록튼은 생에 처음으로 데일리 MVP 인터뷰를 가지게 되었다.
김민은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록튼을 허수아비로 생각한다면 큰코다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