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63화 (63/296)

63화 시애틀 매리너스 03

이반 감독은 대타까지 기용하면서 시애틀을 밀어붙이고자 했다.

‘빅이닝으로 한 번에 경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시애틀 불펜진은 그의 예상보다 강했고, 대타의 능력 또한 그의 예상보다 부족했다.

탁!

빗맞은 공이 포수 미트에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대타 고든! 포수 파울 플라이로 물러납니다.”

이반 감독은 믿었던 고든이 희생타조차 치지 못하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러면 곤란한데.”

그가 곤란하다고 말한 이유는 고든이 유격수 유칼리스의 대타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폴만 감독은 이반 감독의 욕심으로 경기 흐름이 다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이건 이반 감독이 무리했군. 아무리 점수를 내고 싶어도 그렇지. 내야 수비의 핵인 유칼리스를 빼다니…….”

김민 역시 이반 감독의 이번 판단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 수비 이닝은 2이닝이나 남아 있다. 여기서 유칼리스를 빼는 건 조금 무모했어.’

현재 김민의 투구수는 79개.

이변이 없는 한 다음 이닝도 그가 등판할 터였다.

김민은 구위로 압도하거나 삼진을 대량으로 뽑아내는 투수가 아니었기에 뛰어난 수비수와 궁합이 좋았다.

탁!

“3루 땅볼입니다!”

“3연속 안타 이후 더는 안타가 나오지 않는군요. 탬파베이로서는 살짝 아쉬운 순간입니다.”

탬파베이의 공격은 추가점을 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해설자는 마지막 타자로 나선 록튼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말을 빨리했다.

“수비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록튼이지만, 공격은 평범, 아니 그 이하입니다. 주전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공격에 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민은 기가 죽은 표정으로 돌아오는 록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록튼은 자신의 타석에서 찬스가 끝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미안,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그가 안타를 하나만 더 쳤더라면 김민은 다소 편한 마음으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록튼, 3할 타자도 10번 타석에 들어서 3번밖에 안타를 때리지 못해. 찬스를 매번 살리는 건 배리 본즈도 못하는 일이라고.”

김민이 록튼을 위로했지만 그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포수의 기분이 처진 것은 유칼리스가 빠진 것 못지않게 좋지 않아.’

김민은 어떻게든 록튼의 기분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거 알아?”

“뭔데?”

“안타는 매 이닝 때릴 수 없지만, 좋은 수비는 매 이닝 할 수 있어. 록튼, 네 최고의 장점은 바로 좋은 수비야.”

“킴…….”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록튼이 니가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킴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좋은 수비는 매 이닝 할 수 있지.”

“다음 회도 부탁해.”

록튼이 손에 든 니가드를 착용하며 말했다.

“오케이.”

8회 초.

시애틀 매리너스의 공격.

“선두 타자 이치로가 타석에 등장합니다.”

“이치로는 오늘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타수 2안타로 두 번이나 출루에 성공했습니다.”

이치로는 아무리 안타를 많이 때려도 홈에 들어오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어떻게든 장타를 만들어야 해.’

그는 땅볼 안타가 아닌 정확한 타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코어링 포지션(2루 이상)에 나가야 해.’

내야 안타 덕분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빠른 발은 장타를 만드는데도 유리했다.

폴만 감독이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서 3루타가 하나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는 이치로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스코어링 포지션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치로라고 해도 3루타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데뷔 시즌 그가 기록한 3루타는 딱 8개였다.

김민은 이치로의 히팅존이 스트라이크존보다 넓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상대해 보니 머리로 아는 것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볼을 던져도 안타를 만들어 내는 능력자라니, 거의 사기 아니야?’

이치로가 특유의 타격 자세를 취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김민은 어깨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초구 사인을 냈다.

- 바깥쪽 스플리터.

사인을 교환한 뒤 바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슉!

손끝을 떠난 공이 바깥쪽 코너를 노렸다.

이치로는 초구를 노려보며 배트를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배트를 멈췄다.

‘바깥쪽 패스트볼? 아니다. 녀석이 이렇게 쉽게 승부할 리 없어.’

팡!

공은 이치로의 예상대로 아래로 떨어지면서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났다.

‘스플리터였군.’

김민은 이치로가 초구를 참아내자 모자를 고쳐 썼다.

‘히팅존이 넓은 타자가 배트를 멈췄어. 이건 뭔가 노리는 게 있다는 뜻이군.’

김민은 심호흡하곤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슉!

이번 공은 안쪽.

‘로케이션인가?’

이치로는 이번에도 스윙하지 않고 배트를 멈췄다.

잠시 뒤, 주심이 오른손을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온 공은 평범한 패스트볼이 아니었다.

이치로는 포수 미트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존에 아슬아슬 걸치는 커터. 이런 건 때려도 좋은 타구가 나오기 힘들지.’

김민은 좋은 공을 주지 않으려고 했고, 이치로는 좋은 공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덕분에 두 사람의 승부는 풀 카운트까지 이어졌다.

“3-2 풀카운트입니다!”

“전광판의 불이 꽉 들어찼군요. 풀 카운트는 어느 쪽이 더 유리하다고 말씀드리기 곤란하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릅니다. 타자에게 유리한 카운트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캐스터가 재빨리 그 이유를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타자의 발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빠른 주자가 1루에 나가면 투수는 괴로운 법이죠. 킴은 아마 주자를 내보내지 않고 막으려 할 겁니다. 쉽게 말해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치로는 해설과 생각이 반대였다.

‘제구력이 좋은 친구가 유인구를 던지며 풀 카운트까지 왔다는 것은 볼넷을 각오했다는 뜻이야.’

그는 출루 후 도루를 생각했다.

‘이번에는 피치아웃에 당하지 않겠어.’

이치로는 1루에 나간다면 자신의 빠른 발과 뛰어난 판단력을 똑똑히 알려 줄 생각이었다.

이윽고 김민이 마지막 공을 던졌다.

슉!

오른손을 떠난 공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크게 포물선을 그렸다.

이 공은 이치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이었다.

‘커브라고?’

춤을 추면서 내려오는 커브.

풀 카운트가 아니라면 그냥 흘려보냈을 공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커브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설마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갑작스럽게 던진 느린 커브가 존에 들어올 리 없어.’

찰나의 순간.

이치로의 본능이 위험을 알렸다.

‘하지만…… 이 궤적은…….’

그의 본능은 이번 커브가 스트라이크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치로는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쳐야 해.’

배트가 공을 향해 움직였다.

탁!

이치로는 빗맞은 타구가 유격수 쪽을 향하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큭, 히팅 포인트가 흔들렸어.’

“유격수!”

록튼의 콜에 교체로 들어온 브라이튼이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맡겨 달라고!’

김민은 브라이튼의 다소 위험한 동작을 보곤 미간을 좁혔다.

‘공을 향해 앞으로 대시, 능숙한 수비수라면, 빠른 주자를 생각한 좋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루키 내야수에게 버거운 동작이 아닐까?’

내야의 핵인 유칼리스와 달리 브라이튼의 수비는 검증이 되질 않았다.

그의 수비에 의문을 가진 사람은 김민만이 아니었다.

이반 감독과 바이슨 수석 코치도 그의 과감한 판단에 불안함을 느꼈다.

팍!

글러브에 들어간 공.

일단 캐치는 성공이었다.

이반 감독은 브라이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다음은 얼마나 빨리 글러브에서 공을 빼느냐다.’

브라인튼은 글러브에 들어간 공을 믿기지 않는 속도로 빼냈다.

그리곤 그대로 1루에 송구했다.

파앙!

1루수 미트에 들어간 공이 마치 투수가 던진 것처럼 좋은 소리를 냈다.

김민은 그 소리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완벽한 수비야. 브라이튼이 이렇게 뛰어난 수비수였나?’

다음 순간 1루심이 빠르게 손을 뻗었다.

“아웃!”

이치로는 아웃 사인에 발을 멈추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완전히 당했어. 그 커브는 때리는 게 아니었어.’

그는 오늘 때려낸 2개의 안타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킴, 선두 타자 이치로를 유격수 땅볼로 처리했습니다.”

“풀 카운트까지 가는 승부였지만, 잘 이겨냈습니다. 킴은 확실히 좋은 투수입니다.”

김민은 다음 타자 마이크도 내야 땅볼로 처리하며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킴, 두 번째 아웃 카운트를 2루 땅볼로 처리합니다.”

“경기 초반은 플라이볼이 많았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그라운드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볼 배합이 바뀐 게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김민은 배터 박스에 들어선 3번 타자 덴을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지막 고비인가?’

그는 강하게 공을 잡았다.

‘전력으로 가자.’

슉!

94마일(151km) 패스트볼이 타자 바깥쪽을 향해 날았다.

덴은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공을 보고는 바로 배트를 휘둘렀다.

‘2사 주자 없음. 그렇다면 풀 스윙이다!’

배트가 바람을 가르며 공을 향해 날아갔다.

“스윙 스트라이크!”

주심의 목소리와 제스처가 경쾌했다.

반면 덴은 귀신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공이 떠오르잖아.’

오늘 경기 처음으로 들어온 라이징 패스트볼.

록튼은 그 공을 받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공이야. 8회인데도 힘이 있어.’

김민의 다음 공도 라이징 패스트볼이었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떠오르는 공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만난 라이징 패스트볼은 그 위력이 배가 된 느낌이었다.

‘검은 머리 꼬마가 로켓맨이나 페드로와 같은 공을 던진다고? 믿을 수가 없군.’

덴은 혀를 차며 배트를 짧게 잡았다.

‘여기서 삼진은 체면 문제야.’

폴만 감독은 그 모습을 보곤 상황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덴이 배트를 짧게 잡을 정도의 상대인가?”

“8회까지 무실점입니다. 보통 투수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죠.”

김민은 3구에 바로 승부를 들어갔다.

슉!

빠른 공이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바로 승부냐!’

덴은 레벨 스윙으로 떠오르는 공을 깎아내려고 했다.

한데 이번 공은 라이징 패스트볼이 아니었다.

‘떨어진다?’

공은 그대로 배트를 지나쳐 미트에 꽂혔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폴만 감독은 덴의 삼진을 보고는 팔짱을 꼈다.

“스플리터에 당했군.”

“패스트볼을 노렸던 것 같은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관중들은 김민의 삼진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K! K! K!”

김민은 더그아웃에 들어가기 직전 모자를 살짝 벗음으로서 관중들의 환호에 답했다.

관중들은 에이스의 퍼포먼스에 만족했다.

“오늘 경기장을 찾길 잘했어.”

“차가 막혀도 오늘만큼은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야구를 봐야지.”

트로피카나 필드의 교통 체증도 오늘만큼은 팬들의 발길을 막을 수 없었다.

“훌륭한 피칭이었네.”

블렛소 투수 코치는 김민의 호투를 칭찬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피칭은 여기까지였다.

“다음 이닝은 로버트가 마무리할 걸세.”

김민은 완봉에 욕심을 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트에게 잘 부탁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

2000년대 초반.

완봉과 완투는 에이스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매 시즌 200이닝이 훌쩍 넘는 투구는 어깨에 큰 부담을 주었다.

김민은 에이스라고 해도 200이닝 전후로 끊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루키 시즌에 무리한 투수들은 대부분 일찍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말았다. 투구수와 이닝은 서서히 늘려가는 게 좋아.’

그는 라커룸으로 이동해 아이싱을 받기 시작했다.

9회 초.

마무리 투수 로버트는 선두 타자 브렛에게 안타를 맞으면서 흔들렸다.

“로버트, 선두 타자를 출루시킵니다.”

“시애틀이 마지막 반격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타자 마르틴이 병살타를 치면서 시애틀의 꿈이 산산 조각났다.

“클락슨이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오늘 경기가 끝납니다!”

“동부지구 꼴찌 탬파베이가 서부지구 선두 시애틀을 침몰시키는군요. 시애틀 입장에서는 더욱 아픈 패배입니다.”

오늘 경기 MVP는 8이닝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된 김민이었다.

“킴, 수고했어.”

“오늘도 팀을 구했군.”

김민이 동료들과 하이파이브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안타를 7개나 맞았다고, 무실점은 운이 좋아서 가능했던 거야.”

몇몇 전문가들은 김민의 말대로 운이 크게 작용한 투구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반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안타를 맞고도 점수를 내주지 않는 게 아니야. 킴은 장타를 피하기 위해 단타를 내준 것뿐이야. 그의 운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그는 김민의 모든 능력 중에서 운영 능력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이치로는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다.

“오늘 안타 2개를 추가했습니다. 만족할 만한 경기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치로는 리포터의 물음에 얼굴을 굳혔다.

“타석에서 안타를 몇 개 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경기에 이기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팀의 승리입니다.”

그는 오늘 안타를 2개 때리긴 했지만, 주루사가 있어 팀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킴의 투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 기자는 4타수 2안타를 때렸으니,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는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치로의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킴은 뛰어난 투수입니다. 우리 타선을 0점으로 막아 낼 수 있는 투수는 리그에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리그 탑 클래스입니다.”

리그 탑 클래스.

이치로는 김민이 이미 최고 레벨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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