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62화 (62/296)

62화 시애틀 매리너스 02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이치로는 통역을 향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완전히 속았어.”

통역은 그 말을 코칭 스탭에게만 짧게 전달했다. 그러자 폴만 감독이 통역에게 무엇을 속았는지 물었다.

“무엇을 속았는지 말해 달라고 하는데요?”

통역의 물음에 이치로가 대답했다.

“저 투수 말이야. 3루수의 실책성 플레이에 크게 화를 내는 것 같았거든. 투구 전에도 내가 아닌 3루수를 잇달아 주시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 한판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단 말이지. 한데 녀석은 날 속이기 위해서 연극을 한 것뿐이었어.”

통역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 말을 폴만 감독에게 그대로 전했다.

폴만 감독은 이치로의 말을 알아듣곤 수석 코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치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친구군.”

수석 코치는 이치로가 자기 꾀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연기하는 투수가 있을까요? 이치로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야. 나도 저 친구가 1루 주자에게 시선을 두는 걸 보지 못했어. 확실히 3루수의 플레이에 연연하는 느낌이었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이크가 유격수 땅볼로 아웃되고 말았다.

“마이크가 이렇게 쉽게?”

수석 코치가 눈을 크게 뜨자 폴만 감독이 혀를 찼다.

“동부지구에서 3점대 평균자책점은 장식이 아니군.”

김민이 마이크를 잡는데 사용한 투구수는 단 2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치로는 김민의 운영과 볼 배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피치아웃을 해서 공을 하나 뺐다면…… 카운트가 불리해졌을 텐데. 다음 공으로 바로 아웃 카운트를 잡았단 말인가?’

김민이 마이크를 공략하는데 실제로 사용한 공은 단 하나였다.

“다음 타자는 3번 타자 덴입니다.”

“덴은 언제든 30홈런을 넘길 수 있는 타자죠. 트로피카나 필드가 넓긴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겁니다.”

이치로는 타석에 들어선 덴과 마운드의 김민을 번갈아 보곤 미간을 좁혔다.

‘설마 덴까지 쉽게 당하진 않겠지?’

그는 시즌 100승 이상의 페이스로 질주하고 있는 팀의 클린업이 무기력하게 물러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장타는 힘들어도 1루는 밟을 수 있어.’

그러나 다음 순간 배트 끝에 맞은 공이 내야에 떠올랐다.

“유격수!”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

이치로는 수건을 내던지고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된 거지?”

자기도 모르게 일본말이 나왔다.

팡.

글러브에 들어간 공이 짧은 소리를 냈다.

“유칼리스! 내야 플라이를 처리합니다.”

“킴, 효율적인 투구로 1회 초를 마쳤습니다. 소모한 투구수는 단 5개에 불과합니다.”

수비를 마친 김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더그아웃을 향했다.

이치로는 김민이 더 이상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의미로 괴물이군.’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김민.

그는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한 뒤 바로 수첩을 꺼냈다.

‘다음은 4, 5, 6번인가? 어느 한 명 쉬운 타자가 없군.’

김민이 보고 있는 수첩에는 시애틀 타자들의 특성과 선호 코스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반 감독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킴이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군.”

블렛소 투수 코치가 감독의 말을 받았다.

“확실히 연구를 많이 한 것이 느껴집니다. 평소라면 바깥쪽 위주로 투구를 하다가 안쪽으로 로케이션을 가져갔을 텐데…… 오늘은 공격적으로 타자를 맞춰 잡고 있습니다. 상대 타자를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패턴이죠.”

“킴이 맞춰 잡는 게 언제까지 통할까?”

블렛소 투수 코치가 냉정하게 말했다.

“한 타순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위험하겠군.”

“킴이라면 그 뒤 패턴도 생각해 놨을 겁니다.”

사실 김민은 맞춰 잡는 투구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맞춰 잡는 투구를 선택한 것은 시애틀 타선이 로케이션에 강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시애틀 타선은 물이 올라 있어. 이런 타선을 상대로 정상적인 로케이션은 통하지 않아.’

그는 장타의 위험을 무릎 쓰고 맞춰 잡는 쪽을 선택했다.

1회 말.

시애틀의 에이스 후드가 마운드에 올랐다.

팡!

“스트라이크!”

후드의 96마일(154km) 패스트볼은 초반부터 강하게 탬파베이 타자들을 압박했다.

이반 감독은 후드의 컨디션과 휘날리는 타자들의 배트를 보곤 턱을 쓰다듬었다.

“오늘도 투수전이군.”

코스타 타격 코치는 터지지 않는 방망이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날이 많았다.

그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늘 경기는 어떻게든 선취점을 내보겠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아닙니다. 오늘 경기마저 지면 연패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타석에 들어선 타자들에게 잇달아 사인을 냈다.

하지만 코스타 타격 코치의 사인은 타자들의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연속 삼진.

완벽한 역효과였다.

이반 감독은 혀를 차며 코스타 타격 코치를 불렀다.

“타자들에게 맡겨 두게.”

코스타 타격 코치는 사인을 멈췄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후드, 마지막 타자를 1루수 플라이로 잡아내고 이닝을 마칩니다.”

“후드도 킴 못지않게 좋은 피칭입니다.”

탬파베이 홈팬들은 터지지 않는 타선을 두고 불발탄이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이번 시즌 타선은 최악이군.”

“지난 시즌보다 심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

“타선도 문제고 투수진도 문제야. 킴이 아니었다면 벌써 40패를 찍었을 테지.”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시즌 성적은 24승 35패.

시즌 성적보다 좋지 않은 것은 모든 지표가 다 하락세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시즌 100패를 넘어 110패까지 찍을 기세.

탬파베이 팬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오직 슈퍼 루키의 승리뿐이었다.

“킴, 부탁한다!”

“너 때문에 경기장에 왔다!”

2회 초.

팬들의 응원과 함께 김민이 마운드에 섰다.

‘후…… 이번 회도 잘 돼야 할 텐데.’

그는 심호흡한 뒤 사인을 냈다.

“배터리 사인 교환을 마쳤습니다.”

캐스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슉!

초구는 바깥쪽 높은 코스.

이 코스는 시애틀 4번 타자 브렛이 아주 좋아하는 코스였다.

브렛은 자신이 좋아하는 코스로 패스트볼이 날아오자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오늘은 운이 좋군. 초구부터 패스트볼이라니.’

그는 힘차게 배트를 돌렸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떠올랐다.

“큽니다!”

“설마 천장에 맞는 걸까요?”

캣워크(돔구장 시설물)에 닿을 정도로 높이 뜬 타구.

4번 타자 브렛은 배트를 쥔 채 자신의 타구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대로 넘어가라고.’

그러나 공은 펜스를 넘지 못한 채 워닝 트랙 앞에서 중견수에게 잡히고 말았다.

“머레이가 안전하게 타구를 처리합니다.”

“타구가 너무 높이 떠서 비거리가 줄었군요. 브렛,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김민은 브렛의 타구가 잡히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번 공은 정말 위험했어.’

그가 브렛에게 던진 공은 단순한 패스트볼이 아니라 커터였다.

평범한 타자였다면 배트 헤드에 맞는 빗맞은 타구였다.

그러나 브렛의 파워와 스피드는 엄청났다. 그는 휘어져 나가는 공을 그대로 당겨 센터로 뛰어 올렸다.

김민에게는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히팅 포인트가 조금만 더 안쪽이었다면 펜스를 넘어갔을 거야.’

그는 맞춰 잡는 투구는 장인이 세공품을 다루듯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회 초 두 번째 타자는 마르틴입니다.”

“마르틴은 이번 시즌 성적이 아주 좋습니다. 타율 0.332에 홈런 12개. 이 기세라면 MVP를 노려볼 만합니다.”

김민은 마르틴에게 첫 안타를 허용했다. 그것도 펜스에 직격하는 큼지막한 2루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르틴의 발이 빠르지 않아 3루에 가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는 시애틀 타선이 확실히 강하다고 느꼈다.

“타임!”

2루타 이후 록튼이 타임을 걸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왔다.

“다음 타자는 클락슨이야. 맞춰 잡는 건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김민이 글러브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시애틀을 상대로 이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물론.”

록튼은 김민이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은 그의 손을 들어 주기로 했다.

“알겠어. 그럼 네게 맡길게.”

1사 2루.

클락슨에게는 타점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회는 운 좋게 넘어갔지만, 2회는 힘들어 보이는군.’

그는 앞서 나온 두 개의 대형 타구가 김민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슉!

초구가 낮은 코스로 날아왔다.

‘이런 높이로 내 배트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클락슨은 어퍼 스윙의 대가였기 때문에 낮은 공에 자신이 있었다.

‘그대로 적시타다!’

그의 배트가 공을 밀어내려는 순간이었다.

스윽!

공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배트 하단에 맞았다.

‘스플리터?’

팍!

큰 바운드와 함께 공이 투수 정면으로 날아갔다.

“킴!”

김민은 록튼의 콜에 재빨리 글러브를 뻗어 타구를 잡았다. 그리곤 망설이지 않고 3루에 공을 던졌다.

“아웃!”

선행 주자의 아웃에 이반 감독이 박수를 보냈다.

“좋은 판단이군.”

이치로 역시 김민의 판단이 좋다고 생각했다.

‘마르틴의 느린 발을 노렸군. 저 녀석…… 머리가 보통이 아니야.’

폴만 감독은 오늘 경기가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사 2루가 2사 1루로 바뀐 건가? 이런 식이라면 빠른 선취점은 힘들 것 같군.”

그의 예상대로였다.

다음 타자 마크가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나면서 시애틀의 2회 초 공격이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공수교대. 킴, 2회 초도 깔끔하게 마무리합니다.”

“시애틀 매리너스, 좋은 타구가 여럿 나왔지만 득점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투수의 투구수도 많이 늘리지 못했습니다.”

2회 초가 끝난 지금 김민의 투구수는 겨우 18개에 불과했다.

* * *

2회부터 6회까지.

두 팀은 0의 행진을 그렸다.

시애틀 타자들은 안타를 6개나 치고도 한 점도 뽑지 못한 채 끌려가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거야?”

마이크의 물음에 이치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잘못된 게 아니라. 녀석의 운영에 끌려들고 만 거야.’

그는 오늘 안타를 두 개나 쳤지만 단 한 번도 2루를 밟지 못했다.

김민은 교묘한 볼배합과 완벽한 운영으로 시애틀 타자들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었다.

블렛소 투수 코치는 김민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킴의 투구는 외줄 타기를 하는 광대와 같다. 한마디로 너무 위험해.”

그는 타선이 이대로 터지지 않는다면 김민이 먼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7회 초.

김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이번 회부터는 네 번째 타순인가?’

그는 네 번째 타순부터는 맞춰 잡는 투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볼 배합을 바꾼다.’

바깥쪽과 안쪽 로케이션.

시애틀 타자들은 바뀐 볼 배합에 순간 당황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룩킹 삼진은 오늘 경기 처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삼진을 당한 세일이 심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안쪽으로 깊었어! 눈을 똑바로 뜨고 보란 말이야!”

심판은 세일의 격렬한 항의에 바로 퇴장명령을 내렸다.

“퇴장! 퇴장이 나왔습니다!”

“세일의 퇴장은 크군요.”

주전 포수의 퇴장에 시애틀 벤치가 술렁거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할 수 없지.”

폴만 감독이 황급히 그라운드로 향했다.

이치로는 김민의 운영이 팀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고 생각했다.

‘매덕스가 저렇게 던졌다면 팀이 이렇게까지 흔들리지 않았을 거야.’

그는 팀이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가 김민을 얕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뒤, 폴만 감독이 나와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심은 오히려 폴만 감독에게 같이 퇴장당하고 싶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폴만 당신도 퇴장이야.”

“뭐라고?”

두 사람 사이가 격해지자 1루심이 다가와 중재에 나섰다.

“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기를 재개합시다.”

폴만 감독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형편없는 판정이야.”

탬파베이 에이스 부르스는 그 모습을 보고 낮게 중얼 걸렸다.

“이걸로 경기의 흐름이 바뀌었군.”

그의 말대로였다.

주전 포수의 퇴장에 흥분한 시애틀 타자들은 큰 스윙으로 일관했고, 김민은 손쉽게 삼진을 잡을 수 있었다.

“킴, 오늘 경기 4번째 삼진입니다!”

“시애틀 타자들…… 스윙이 너무 큽니다.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습니다.”

폴만 감독은 김민을 노려볼 뿐 바뀐 볼 배합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7회 말.

지난 퇴장으로 포수가 바뀌었다.

“교체! 리노!”

리노는 이번 시즌이 두 번째인 포수 유망주였다.

“리노는 어떤 선수죠?”

캐스터의 물음에 해설자가 자료를 빠르게 읽었다.

“리노는 마이너리그에서는 괜찮은 배트로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메이저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공격이 강하고 수비에 다소 약점이 있는 그런 포수입니다만 스프링 캠프에서 수비에 어느 정도 보강이…….”

시애틀의 에이스 후드는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건재를 과시했다.

“후드! 오늘 경기 7번째 삼진입니다.”

하지만 다음 타자에게 첫 장타를 내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레이의 2루타가 나왔습니다. 탬파베이로서는 첫 장타입니다.”

“여기서 선취점을 뽑을 수 있다면 킴의 어깨가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다음 순간 머레이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3루 도루를 시도했다.

팍팍팍!

스파이크가 흙을 뒤로 밀어내면서 먼지를 일으켰다.

그의 허를 찌르는 도루는 경험이 많지 않은 리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뭐야! 3루 도루라고!’

리노는 급히 미트에서 공을 뺐지만, 그립을 놓쳐 3루에 던져 보지도 못했다.

“리노! 3루에 들어갑니다!”

1아웃 주자 3루.

실점 위기를 맞이한 후드는 크게 흔들렸다.

“안타!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

연속 3안타.

탬파베이가 순식간에 2점을 뽑아냈다.

시애틀 코칭 스탭은 에이스의 상처가 더 커지기 전에 교체를 선택했다.

“후드, 결국 마운드를 내려오는군요.”

이치로는 외야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평범해 보이는 킴이 화려한 후드를 이겼군. 야구는 이래서 재미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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