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루키 대 외계인 02
“카운트 투 스트라이크 노 볼. 킴이 유리한 카운트를 잡았습니다.”
“클리어가 코너에 몰렸군요. 브레이킹볼이 다양한 투수를 상대로 불리한 카운트는 곤란하죠.”
보통 투수라면…….
아니 김민이라도 중요한 시점에서는 공을 하나 빼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3구째 바로 승부에 들어갔다.
슉!
빠른 공이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스플리터! 삼진을 노리는 거냐?’
클리어가 배트를 아래로 내리면서 어퍼 스윙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민이 던진 공은 스플리터가 아니었다.
‘쳇, 패스트볼이잖아.’
앞으로 뻗는 공.
이대로라면 삼구삼진이었다.
‘애송이 날 얕보지 말라고!’
클리어는 놀라운 배트 컨트롤을 발휘해 공을 밀어냈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바운드를 일으키며 크게 튀어 올랐다.
김민이 던진 승부구는 존 한가운데 들어가는 94마일(151km)짜리 패스트볼이었다.
이번 공은 떠오르진 않았지만, 상대의 허를 찌르는데 성공했다.
클리어는 어떻게든 공을 앞으로 쳐 내는데 성공했지만, 좋은 타구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2루는 늦었어!”
포수의 사인에 2루수 칼튼이 1루로 송구 방향을 바꾸었다.
“아웃!”
타자 주자는 아웃, 1루 주자는 2루까지 진루.
김민은 첫 아웃 카운트를 잡았다.
“원 아웃 주자 2루.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들어갔습니다.”
“킴으로서는 아웃 카운트를 하나 잡았지만, 아쉬움이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다음 타자가 라파엘이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라파엘은 정말 조심해야 하는 타자죠. 그의 앞에 주자가 나가면 정말 위험합니다.”
2루 주자 노라는 라파엘을 믿는 듯 리드 폭을 넓히지 않았다.
‘라파엘이 있는데 굳이 뛸 필요는 없겠지.’
김민은 이번 승부가 경기 초반 분위기를 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파엘을 상대로는 클리어에게 던진 높은 공을 쉽게 던질 수 없어.’
라파엘의 히팅존은 높은 코스에 특히 집중되어 있었다.
그를 잡으려면 아래쪽에서 제구되는 브레이킹볼과 패스트볼이 필수였다.
“라파엘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긴장되는 순간이군요.”
게일은 이번만큼은 킴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로케이션을 가지고 있지만, 라파엘은 로케이션으로 잡을 수 있는 타자가 아니야. 게다가 오늘 경기가 열리고 있는 곳은 펜웨이 파크, 라파엘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지.’
라파엘은 이적 첫 해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장타를 양산하면서 타점의 탑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록튼은 라파엘에게 이전보다 큰 위압감을 느꼈다.
‘언제 봐도 괴물 같은 친구야.’
김민은 라파엘을 앞에 두고 모자를 고쳐 썼다.
‘배터 박스에 바짝 붙었군. 흠…… 그렇다면 클리어와 같은 전략인가?’
노골적으로 바깥쪽을 노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 노리는 공은 안쪽 공.
김민은 볼 배합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인지 모르겠지만, 꾀가 얕아.’
사실 배터 박스에 바짝 붙은 다음 안쪽 공을 공략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부자연스러운 일을 가능하게 하려면 스윙을 빠르게 시도해 히팅 포인트를 조금이라도 앞에 놓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배트 손잡이 부분에 공이 맞아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았다.
- 바깥쪽 패스트볼.
록튼은 김민의 사인에 크게 놀랐다.
‘킴!’
배터 박스에 바짝 붙은 타자를 상대로 바깥쪽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은 배팅볼을 던져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록튼은 재빨리 사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사인을 냈다.
그러나 김민은 사인을 수정하지 않은 채 몸을 세웠다.
‘킴! 고집이야.’
투수가 고집을 부리면 포수는 그것을 받아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록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미트를 내밀었다.
‘정말 못 말려.’
김민은 그립을 고쳐 잡곤 바깥쪽으로 패스트볼을 던졌다.
93마일(150km) 패스트볼이 바깥쪽 낮은 코너를 노렸다.
슉!
라파엘의 배트는 타구가 도착하기 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김민의 예상대로였다.
‘역시군.’
라파엘의 배트는 공이 도착하기 전 히팅 포인트를 지나쳤다.
이래서는 아무리 뛰어난 타자도 공을 외야로 밀어 낼 수 없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호이스 감독은 김민의 바깥쪽 승부에 혀를 찼다.
“허, 강심장이야. 강심장.”
배터 박스에 바짝 붙은 강타자를 상대로 바깥쪽 스트라이크를 던진다는 것은 강철로 된 심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타격 코치의 물음에 호이스 감독이 미간을 좁혔다.
“글쎄.”
바깥쪽 공 하나에 놀라 안쪽 공을 노렸던 전략을 갑작스럽게 수정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렇다고 간파당한 전략을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도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호이스 감독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나 더 지켜보도록 하지.”
감독의 말에 타격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인을 내지 않겠습니다.”
사인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의 전략을 그대로 가져간다는 뜻이었다.
라파엘은 벤치의 의도에 미간을 좁혔다.
‘바깥쪽으로 하나 더 오면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이라고. 그래도 좋은 건가?’
코너에 몰리면 아무리 좋은 타자라도 정확한 타격을 하기 힘들었다.
라파엘은 지금이라도 전략을 수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벤치는 하나 더 지켜보고자 했다.
잠시 뒤, 두 번째 공이 날아왔다.
슉!
이번 공은 기다리고 있던 안쪽 공이었다.
‘왔다!’
라파엘은 자신 있게 배트를 휘둘렀다. 그러나 배트가 공에 닿으려는 순간 공이 낮게 떨어졌다.
“스윙 스트라이크!”
연속 헛스윙.
이번 공은 패스트볼이나 스플리터가 아니라 크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다.
라파엘은 헛스윙 뒤 혀를 찼다.
“애송이가 게일의 전략을 간파했어.”
록튼은 김민의 볼 배합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라파엘을 상대로 두 번이나 헛스윙을 유도했어. 난 생각하지도 못한 볼 배합이야.’
“킴, 라파엘을 상대로 연속 헛스윙을 끌어냅니다!”
“라파엘이 이상하군요. 안쪽과 바깥쪽 모두 헛스윙이 나왔습니다. 대체 어떤 공을 노리고 있는 걸까요?”
호이스 감독은 1회 말부터 껌을 씹기 시작했다.
‘노라가 안타를 치고 나간 것까지는 좋은데. 그 이후가 안 풀리는군.’
라파엘은 두 번 연속 헛스윙을 하곤 배터 박스의 위치를 바꾸었다.
이는 더 이상 게일의 전략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머리를 써서 이득을 보는 건 내 타입이 아니야.’
그는 김민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은 게일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스플리터와 패스트볼. 그리고 코너워크인가? 집중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라파엘은 배트를 세웠다.
김민은 라파엘이 배터 박스 위치를 바꾼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략은 포기한 것 같군.’
그는 심호흡을 한 뒤 록튼에게 사인을 냈다.
록튼은 김민의 사인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또 다시 안쪽 공이라고? 라파엘에게 괜찮겠어?’
그는 안쪽보다는 로케이션을 이용한 바깥쪽 승부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민은 사인을 바꾸지 않았다.
‘킴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옳겠지.’
미트를 내밀자 김민이 투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2루 주자 노라가 스타트를 끊었다.
록튼은 예상하지 못했던 2루 주자의 도루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서 도루라고!’
그가 놀란 사이 공이 홈플레이트로 파고들었다.
공을 노리는 배트와 뛰고 있는 주자.
그리고 낮게 떨어지는 공.
록튼은 세 가지 상황을 일시에 정리하지 못했다.
툭.
미트에 맞고 튕긴 공이 뒤로 빠져나갔다.
“뒤쪽이야!”
김민은 뒤를 외치면서 홈플레이트로 돌진했다.
“큰일이군!”
이반 감독은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루키 배터리에게 힘든 상황이군.’
노라는 상대의 빈틈을 확인하곤 홈까지 내달렸다.
‘뒤로 빠진 공과 1루로 달려가는 주자. 당황하면 실수가 잇달아 나오는 법이지.’
팍! 팍!
노라의 스파이크가 흙을 뒤로 밀어냈다.
록튼은 허겁지겁 달려가 뒤로 빠진 공을 잡았다.
‘어, 어떻게 해야지.’
주자만 아니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1루 송구였다.
하지만 빠르게 3루를 돌은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홈으로 들어오는 주자를 막으려다가 1루 주자마저 놓친다면…….’
그 순간 김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홈!”
록튼은 그 외침에 결심을 굳혔다.
‘그래, 홈이야.’
송구가 홈을 향해 날아갔다.
팡!
김민은 공을 잡은 뒤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곤 홈으로 들어오고 있는 노라를 향해 글러브를 내밀었다.
‘노라! 홈까지는 욕심이야.’
차분하면서도 빈틈이 없는 움직임.
그의 수비 자세를 본 게일은 주먹을 꾹 쥐었다.
‘제길…… 킴, 수비마저 좋잖아.’
노라는 김민의 글러브를 보곤 몸을 옆으로 틀면서 홈플레이트를 노렸다.
‘좋은 자세다. 하지만 날 막을 수는 없다!’
글러브와 손.
홈플레이트를 두고 노라와 김민의 치열한 승부가 펼쳐졌다.
촤악!
먼지와 함께 노라의 손이 홈플레이트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이프인가?
아니면 아웃인가?
펜웨이 파크에 모인 3만 관중의 시선이 주심에게 모였다.
다음 순간 주심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아웃!”
주심의 판정에 노라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큭…… 홈은 무리였군.’
“아웃! 아웃입니다! 노라가 홈에서 아웃!”
“킴의 수비가 아주 좋았습니다. 투수답지 않게 침착하고 빠른 동작입니다.”
펜웨이 파크 홈팬들은 야유로서 주심의 판정에 답했다.
“우우우우우!”
“세이프야. 세이프라고!”
김민은 노라를 잡아낸 뒤 록튼에게 다가갔다.
“나이스 플레이.”
브레이킹볼을 빠뜨렸는데도 불구하고 김민은 록튼을 칭찬했다.
록튼은 그의 칭찬에 머쓱해졌다.
“미안해, 내가 집중력을 잃었어.”
“경기를 하다보면 빠지는 공이 나올 수도 있는 거야.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수습과정이라고. 홈으로 던진 송구, 나쁘지 않았어.”
김민이 칭찬했던 것은 록튼의 정확한 홈송구였다. 그는 록튼이 당황해 송구를 잘못했다면 일이 커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투 아웃 주자 1루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원 아웃 2루였던 조금 전 상황과 비교하면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보스턴 코칭 스탭은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할까요? 게일의 전략이 상대에게 읽힌 것 같습니다.”
호이스 감독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래 연구했는데 안타 하나가 끝인가?”
반헬 투수 코치가 말했다.
“감독님 역으로 한 번 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역으로?”
“바깥쪽 코너를 노리는 척하면서 안쪽 공을 노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바깥쪽 코너를 노리는 겁니다.”
호이스 감독이 낮게 신음했다.
“으음…… 좋아. 한번 해 보도록 하지.”
반헬 투수 코치의 의견에 따라 보스턴의 작전이 수정되었다.
4번 타자 그란델.
그는 앞선 타자들처럼 배터 박스에 바짝 붙었다. 그러나 그가 노리는 것은 안쪽이 아닌 바깥쪽 공이었다.
‘애송이, 그 라이징 패스트볼인가 뭔가 하는 걸 바깥쪽으로 하나 던져 보라고.’
김민은 그란델의 위치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또 안쪽 공을 노리는 전략인가?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다시 쓰는 건가?’
그는 상대의 고집스러운 전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있어.’
김민은 바깥쪽 패스트볼 사인을 내곤 그립을 꾹 쥐었다.
‘노리고 있는 게 뭔지는 이 공이 알려 주겠지.’
슉!
바깥쪽으로 날아오는 패스트볼.
그란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려들었군.’
그는 두 손에 힘을 주며 배트를 휘둘렀다.
딱!
배트에 강하게 맞은 공.
그러나 공은 정면이 아닌 1루 쪽 관중석을 향했다.
“파울!”
보스턴 코칭 스탭은 대형 파울 타구에 일제히 탄성을 터트렸다.
“아…….”
“이런…….”
타구가 폴대 안쪽으로 들어갔다면…….
그랬다면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투런 홈런이 되었을 것이다.
“큰 파울 타구가 나왔습니다!”
“타이밍은 완벽했는데 코스가 좋지 않았습니다. 느린 화면으로 보시면 아시겠지만, 볼을 공략했군요.”
김민이 초구로 던진 공은 스트라이크존에서 하나 정도 빠지는 공이었다.
덕분에 그는 홈런을 면할 수 있었다.
‘안쪽을 노리는 척하면서 바깥쪽이라. 허허실실이군.’
김민은 보스턴 코칭 스탭이 제법 머리를 쓴다고 생각했다.
‘1회부터 고생이야.’
두 번째 공은 안쪽 패스트볼.
그란델은 이 공을 그냥 흘려보냈다.
팡!
패스트볼은 볼이 되었고, 카운트는 1-1로 나빠졌다.
록튼은 미트에서 공을 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안쪽 존이 짜군.’
김민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안쪽이 짜.’
타자 친화적인 구장에 좁은 스트라이크존.
김민에게는 다소 불리한 상황이었다.
“킴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요?”
바이슨 수석 코치의 물음에 이반 감독이 반문했다.
“자네는 킴을 믿지 못하는 건가?”
“킴은 좋은 투수입니다. 하지만 아직 루키에 불과하고 여긴 펜웨이 파크입니다.”
그는 김민이 난타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높은 타구! 중견수가 달려갑니다! 아! 공이 글러브에 빨려 들어갑니다.”
“머레이의 타구 판단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란델은 안타를 하나 도둑맞은 기분이겠군요.”
김민은 높은 코스의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해 그란델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안쪽이 좁으면 다른 쪽 스트라이크존을 이용하면 그만이야.’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도넛을 그릴 줄 아는 친구군.”
그는 2회 초 수비를 위해 마운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