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지구 라이벌 03
처음부터 완봉을 노렸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경기에서 보여 줬던 무력한 모습을 만회하기 위해 강하게 던졌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9회 초.
김민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그가 마운드에 서자 팬들이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킴! 킴! 킴!”
루키의 시즌 첫 완봉 도전.
팬들이 환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팡! 팡!
김민은 연습 투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끓었다.
‘노히트 게임이나 퍼펙트 게임도 아니고, 완봉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팡!
미트에 꽂힌 공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기립박수를 끝낸 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킴! 완봉이다!”
“완봉 부탁한다!”
월드시리즈와 맞먹는 분위기.
트로피카나 필드에서는 흔히 접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게일은 김민의 9회 등판에 부정적이었다.
“킴이 완봉을 노리고 마운드에 올라왔군. 이건 좋지 않은데.”
그는 블렛소 투수 코치와 다소 비슷한 입장이었다.
‘구위가 떨어진 투수는 교체하는 게 옳아.’
호이스트가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게일, 뭐가 좋지 않다는 건가?”
게일은 호이스트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반응이었다.
“볼끝이 무뎌진 상황에 9회 등판이야. 자칫 잘못하면 동점 내지 역전이라고. 구위가 떨어진 루키를 9회에 내는 것은 코칭 스탭의 욕심이야.”
호이스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식이니까 보스턴이 우승 못하는 거야. 지를 때는 제대로 질러 줘야 된다고.”
그가 아픈 곳을 찌르자 게일이 발끈했다.
“뭐라고?”
“미안, 말이 그렇다는 거야.”
호이스트는 터질 때 터지더라도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기계처럼 딱 정해진 투구수만 던지고 내려가는 건 멋이 없다고. 타오를 때는 뜨겁게 타올라 줘야 스타가 되는 거야.”
그는 김민이 오늘 경기에서 뜨겁게 타오를 수 있다면,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슈퍼스타는 단순히 잘하는 선수가 아니야. 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수, 그게 바로 슈퍼스타야.’
김민이 연습 투구를 마치자 선두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볼티모어의 선두 타자는 1번 타자 스터키.
1번부터 시작하는 타순은 나쁘지 않았다.
“설마 완봉 당하는 건 아니겠지?”
5번 타자 릴리아노의 한마디에 6번 고든이 미간을 좁혔다.
“릴리아노,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루키에게 완봉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킴의 투구수는 78개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우리에게까지 기회가 올 거야.”
릴리아노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킴이 주자를 내보내지 않고, 세 타자를 깔끔하게 처리한다면 내 타석이 돌아오지 않아.’
적어도 두 명.
그 정도는 주자가 나가야 릴리아노가 타석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응원의 한마디를 내뱉었다.
“스터키, 힘내라!”
스터키는 배터 박스에서 오늘의 마지막 승부를 준비했다.
‘네 번째 타석. 킴의 공은 이미 익을 만큼 익었어.’
그는 어떤 공이 날아온다고 해도 자신이 있었다.
‘보나마나지. 패스트볼과 커터, 그리고 스플리터, 셋 중 하나가 바깥쪽으로 올 거야.’
스터키는 빠른 공에 타이밍을 맞췄다.
이윽고 김민이 오른손을 왼쪽 어깨에 가져갔다.
- 바깥쪽 패스트볼.
록튼은 김민의 사인에 미트를 가볍게 쳤다.
‘킴 마지막 세 명이야. 반드시 잡아내자.’
와인드업과 함께 초구가 김민의 손을 떠났다.
슉!
스터키는 바깥쪽으로 날아오는 패스트볼을 보고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 바깥쪽 빠른 공!’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타구가 1루 더그아웃 쪽을 향했다.
“파울!”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94마일(151km).
스터키는 혀를 찼다.
‘무뎌졌던 볼끝이 9회에 살아났어.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중계진 역시 스터키와 생각이 같았다.
“킴! 9회에 94마일을 던졌습니다.”
“8회보다 2마일이나 구속이 올랐군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호이스트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킴이 힘을 아껴 두고 있었군.”
블렛소 코치와 게일은 94마일이라는 숫자에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힘을 빼고 8회를 던졌다고? 아무리 하위 타선이라고 해도…….’
‘킴이 완급조절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적어도 6회부터는 9회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루키가 완봉을 노리고 경기를 운영했단 말인가?’
김민은 완급조절을 하며 체력을 아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늘 단 한 이닝도 완급조절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투구.
그답지 않은 운영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김민은 구속을 확인하곤 스피드건에 오류가 났다고 생각했다.
‘타자의 배트에 맞은 공은 때때로 구속이 더 높게 나오기도 하지. 94마일은 진짜가 아닐 거야.’
그는 록튼에게 공을 받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구속 같은 것에 신경 쓰지 말자. 지금 중요한 것은 남은 세 타자를 깔끔하게 잡아내는 거야.’
김민은 사인 교환 후 빠르게 2구를 던졌다.
슉!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커브.
스터키는 끝까지 따라갔지만 끝내 공을 걷어내지 못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카운트 투 스트라이크 노 볼.
스터키가 마른침을 삼켰다.
‘커브도 좋잖아! 9회에 볼끝이 살아나는 건 대체 무슨 조화야.’
트로피카나 필드 관중들은 김민이 투 스트라이크를 잡자 목소리를 높였다.
“K! K! K!”
삼구삼진을 원하는 목소리.
1루 더그아웃도 팬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K! K! K!”
그러나 김민은 분위기에 휩싸이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차분하게 가자. 스터키는 지금 필사적이야. 삼구삼진을 노리려고 하다가는 내가 당할 수도 있어.’
그는 스스로를 가라앉히기 위해 바깥쪽으로 공을 하나 뺐다.
슉!
필사적이었던 스터키는 그 빠지는 공을 쫓아오려 했다.
팡!
록튼은 공을 받자마자 미트를 들어 3루심을 가리켰다.
스터키의 배트가 움직인 것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3루심은 록튼의 제스처에 두 팔을 활짝 폈다.
“세이프!”
노 스윙.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스윙! 스윙!”
아쉬움이 짙게 배인 목소리.
트로피카나 필드에 모인 팬들은 극적인 장면을 원하고 있었다.
홀먼 단장은 스카이 박스에서 운영팀장 코너와 함께 경기를 관전했다.
“코너, 이 얼마 만에 듣는 함성인가? 킴은 단순한 에이스가 아니야. 이미 슈퍼스타라고.”
코너 역시 이런 함성은 오랜만이었다.
‘만년 꼴찌에 노인들이 많이 사는 휴양 도시. 트로피카나 필드의 분위기는 언제나 차분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팬들이 들 떠 있어. 플로리다에 온 이후 이런 열기를 느낀 것이 몇 번이나 될까?’
그는 김민이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닌 투수라고 생각했다.
“킴이 슈퍼스타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팬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 그게 바로 슈퍼스타일세.”
김민은 승부구를 앞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터키도 이번 공이 승부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 투수에게 어떤 조언을 했는지 떠올렸다.
- 자신의 공을 믿고 승부하라.
기술적인 조언은 아니었다.
‘흔하디흔한…… 그런 조언을 했던 모양이군.’
김민은 그립을 평소보다 강하게 잡았다. 그리곤 호흡을 조절하면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대로 떨어져라.’
그가 선택한 승부구는 가운데서 떨어지는 스플리터.
슉!
스터키는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패스트볼?’
한가운데 패스트볼이라면 실투였다.
‘패스트볼은 아니야!’
그는 커터와 스플리터, 둘 중 스플리터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스플리터가 더 공략하기 편하니까.
슉!
스터키는 횡보다는 종으로 떨어지는 공에 강했다.
‘걷어 올린다.’
공이 떨어지는 순간 배트도 함께 떨어졌다.
그러나 스터키의 배트는 공과 만나지 못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스터키는 헛스윙한 뒤, 배터 박스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럴 수가…….”
게일은 김민의 승부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호이스트, 방금 그거 말이야. 포크지?”
호이스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 물음에 답했다.
“아니야. 스플리터야.”
“정말?”
“그래, 믿기지 않겠지만, 분명 스플리터였어.”
호이스트가 김민의 승부구를 스플리터로 판단한 것은 전광판에 찍힌 구속 때문이었다.
‘88마일(142km)짜리 스플리터가 마치 포크볼처럼 떨어졌다. 저렇게 낙차가 큰 스플리터는 오랜만이군.’
게일은 뒤늦게 전광판을 확인하곤 고개를 내저었다.
“88마일이라고? 스피드건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저 공은 스플리터가 맞군. 하지만 낙차가…….”
“스플리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컸지.”
김민의 스플리터를 보고 놀란 사람은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포수인 록튼과 주심인 브라운도 그 공에 크게 놀랐다.
‘이 정도 낙차라면 스플리터가 아닌 포크야.’
‘이번 공은 뭐였지? 분명 포크로 보였는데 구속이 엄청나잖아.’
물론 가장 놀란 것은 삼진을 당한 스터키였다. 그는 대낮에 유령을 본 사람처럼 김민을 훑어보았다.
‘저 친구 지금 뭘 던진 거야.’
김민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모자를 눌러썼을 뿐이었다.
“킴! 킴! 킴!”
관중들은 그토록 원하던 삼진이 나오자 김민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대단하군요. 단지 아웃 카운트 하나 잡은 것뿐인데.”
바이슨 코치의 말에 이반 감독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킴의 이번 공은 뭔가 달랐어.”
이반 감독은 확신하진 못했지만, 이전에 던진 공과는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했다.
“플레이!”
주심의 사인과 함께 김민이 두 번째 타자와 승부에 들어갔다.
2번 타자 잠스.
그는 스터키와 마찬가지로 빠른 발을 가지고 있는 타자였다.
‘정면 승부는 힘들다.’
지난 경기에서 김민을 상대로 5할의 타율을 기록한 잠스였지만, 오늘은 그 반도 해내지 못했다.
그는 공이 날아오자 몸을 숙이고는 번트 자세를 취했다.
‘기습 번트!’
록튼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내가 막아야 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공이 배트에 맞고 튀어 올랐다.
툭!
잠스의 번트는 상대의 허를 제대로 찌른 기습 번트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번트였기에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었다.
히팅 포인트가 좋지 못해 공이 뜨고 말았던 것이었다.
‘잡을 수 있어!’
록튼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곤 미트에 들어온 공을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잡았어!”
잠스는 번트를 댄 뒤, 1루로 뛰어가다가 팬들의 함성에 고개를 돌렸다.
‘다이빙 캐치까지 하다니…….’
록튼의 호수비.
그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록튼! 번트 타구를 노 바운드로 처리했습니다!”
“중요한 상황에서 포수가 투수를 도와주는군요. 이제 완봉까지 아웃 카운트 단 한 개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토미 감독은 다시 껌을 씹기 시작했다.
“에릭, 어떻게 좀 해 보라고.”
3번 타자 에릭.
그는 지난 시즌 15개의 홈런과 0.277의 타율을 기록한 준수한 타자였다.
그러나 오늘은 중심 타선에 걸맞은 활약을 전혀 보여 주지 못했다.
‘9회 2사. 좋지 않은 타이밍이군.’
그는 배터 박스 바닥을 가볍게 두드린 뒤 한가운데 섰다.
‘담장을 넘겨도 2-1, 역전은 힘들겠지.’
2사였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이 덜했다.
슉!
초구가 날아왔다.
바깥쪽 빠른 공.
‘마지막 타자라고 너무 쉽게 가려는 것 아니야?’
그러나 공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크게 떨어졌다.
“스윙 스트라이크!”
김민의 초구는 스플리터였다.
“킴, 스플리터를 멋지게 떨어뜨렸습니다.”
“마치 포크볼 같군요.”
중계진이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관중들이 환호했다.
“킴! 킴! 킴!”
김민은 완봉이라는 기록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음을 비우고 투구에 전념하자.’
그는 로진백을 만지곤 록튼과 사인을 교환했다.
그리곤 전력투구.
슉!
94마일(151km) 패스트볼이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
딱!
배트에 걸린 공이 내야를 넘어 외야로 날아갔다.
그러나 김민은 동요하지 않았다.
‘잡았어.’
에릭은 오늘 경기에서 가장 좋은 타구를 쏘아 올렸지만, 트로피카나 필드의 넓은 외야를 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우익수 홈스가 공을 잡아냅니다! 킴! 데뷔 이후 첫 완봉승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관중들은 홈스가 글러브를 들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나이스 킴!”
“최고의 피칭이었다!”
김민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모자를 벗어 팬들의 환호에 답했다.
동료들 역시 더그아웃 앞에 나와 그와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김민을 비췄다.
“킴의 완봉승은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첫 완봉승이기도 합니다.”
“데블 레이스, 킴의 호투로 연패를 끊었습니다. 반면 볼티모어는 연패의 숫자를 하나 더 늘렸군요.”
완봉승을 내준 볼티모어 선수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 * *
4월이 끝났을 때 김민의 성적은 다음과 같았다.
5경기 3승 2패.
평균자책점 2.64
34이닝 21K(삼진), 6사사구
루키로서 팀 승리의 40%를 책임졌으며, 소화 이닝은 팀에서 2번째로 많았다.
“오늘의 루키를 소개합니다. 킴민!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신성입니다.”
“킴은 이치로, 호세와 함께 이달의 루키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오늘은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할까요?”
록튼은 TV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킴을 ESPN에서 볼 줄은 몰랐어.”
김민은 TV에 나오는 선수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느껴졌다.
“잘 던지는데?”
“킴, 자네라고.”
“알아.”
야구 전문 기자는 김민의 평균자책점이 리그 4위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루키가 2점대 평균자책점이라고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기세라면 페드로에 도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외계인에 도전할 수 있는 건가요?”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여전히 외계인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부상 전에 한 번 만났으면 싶은데…….’
그의 바람은 5월 두 번째 주 성사되었다.
5월 11일.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시즌 5차전.
김민은 외계인이라 불리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